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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9:13
눈 먼 사람의 치유 사건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눈뜬 사람만 아니라 그 부모까지 소환하여 심문합니다. 물음표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아니, 빛을 거부하는 어둠처럼 예수의 치유를 부정하고 싶은 것입니다. 공주야! 신앙은 전적으로 개인적이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정확하게 갖고 있다고 해도 그 진리가 개인적으로 경험 되지 않으면 무익하다. 그러나 개인적인 경험은 진리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Opinions were divided over the case of healing for the blind. Pharisees summon and interrogate not only the blind but also their parents. The continued question mark means that something incredible has happened. No, I want to deny Jesus' healing like the darkness that rejects light. Princess! Faith is entirely personal. No matter how knowledgeable and accurate you have, it will be useless if the truth is not experienced personally. However, personal experience brings the truth to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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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의해 눈을 뜬 맹인의 변화에 주목하여 보라. 그를 38년 된 병자(5장)와 비교해 보라. 맹인이던 자가 눈을 떴는데도 바리새인들은 이 기적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떠올리기보다 이 일이 안식일에 이루어졌고,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은 안식일 위반이라는 사실에만 관심을 둔다. 바리새인들 중에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자들도 있고, 죄인이면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야 행할 수 있는 기적을 행하느냐며 반발하는 이들도 있다.
Notice the change of the blind man opened his eyes by Jesus. Compare him with the 38-year old sick man (Chapter 5). Even though the blind man woke up, the Pharisees focused only on the fact that it was done on the Sabbath, and that healing on the Sabbath was a violation of the Sabbath, rather than recalling the history of God. Some Pharisees focus on not observing the Sabbath, while others protest, saying, "How can a sinner perform a miracle that can only be done with the history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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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어떤 표적으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예수를 바로 알 수 없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예수의 정체에 대해 의견을 내지 못하자, 눈뜬 맹인에게 예수를 평가하도록 떠넘긴다.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타인의 의견을 평가하기만 좋아하는 자들이다. 모든 결정에는 위험이 따른다. 중요한 결정일수록 자기 자신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위태로워지더라도 진리의 편에 서려고 하기 보다는 안전하게 판단하는 자리에만 머물려고 한다.
If the eyes of the mind are not open, you cannot meet God with any target and do not immediately know Jesus. When the Pharisees are unable to express their opinion on Jesus' identity, they pass him on to the blind to evaluate him. They only like to evaluate the opinions of others without making their own conclusions. Every decision comes with a risk. The more important decisions you make, the more you have to put yourself on the line. However, even if they are in jeopardy, the Pharisees only want to remain in the position of safe judgment rather than on the side of the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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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놀랍게도 맹인은 예수를 선지자로 고백한다. 예수를 증거하고 심문을 받는 중에 점점 예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점점 어두워져 가는데, 맹인의 영적 눈은 점점 밝아지고 있다. 맹인의 부모는 출교당할 것이 두려워 이 아들이 친자인 것만 확인해주고
아들에게 벌어진 믿기지 않는 일에 대한 언급이나 예수에 대한 평가는 아들에게서 직접 듣도록 떠넘긴다.
However, surprisingly, the blind confesses that Jesus is a prophet. His understanding of Jesus is getting deeper and deeper as he is being questioned and proved. The Pharisees are getting darker, and the blind's spiritual eyes are getting brighter. Because they are afraid of being preached, blind parents only confirm that this son is their biological child, and they pass on comments about the incredible events that happened to their son or evaluations of Jesus to be heard directly from his 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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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 안위가 걱정이 된 나머지 예수를 증거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예수께 감사하는 마음이 없지 않겠지만, 예수께 자기 전부를 걸 만큼 잘 알거나 경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앙에서 경험은 어떻게 영적인 유익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나에게 두려움의 이유와 당당함의 이유 중 무엇이 더 큰가?
It is not much different from the attitude of the Pharisees. Worried about his safety, he missed a golden opportunity to prove Jesus. He may not be ungrateful for Jesus, but he did not know or admire him enough to know all of himself. How can experience lead to spiritual benefits in faith? Which is greater, the reason for fear or the reason for dignity to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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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이었던 사람을 심문 함(13-17)
a.맹인이었던 사람을 심문하는 바리새인들:13-16
b.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함:17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를 심문함(18-21)
a.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를 심문하는 바리새인들:18-19
b.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가 대답함:20-21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가 두려워함(22-23)
a.맹이이었던 사람의 부모가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함:22
b.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가 대답함: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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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13a)
전에 소경 되었던(13b)
사람을 데리고(13c)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1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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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14a)
진흙을 이겨(14b)
눈을 뜨게 하신 날은(14c)
안식일이라(1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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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15a)
그 어떻게(15b)
보게 된 것을 물으니(15c)
가로되 그 사람이(15d)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15e)
내가 씻고(15f)
보나이다. 하니(15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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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 중에(16a)
혹은 말하되(16b)
이 사람이 안식일을 (16c)
지키지 아니하니(16d)
하나님께 로서 온 자가(16e)
아니라 하며(16f)
혹은 말하되(16g)
죄인으로서 어떻게(16h)
이러한 표적을(16i)
행하겠느냐 하여(16j)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16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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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소경 되었던(17a)
자에게 다시 묻되(17b)
그 사람이 네 눈을(17c)
뜨게 하였으니(17d)
너는 그를 어떠한(17e)
사람이라 하느냐(17f)
대답하되(17g)
선지자니이다 한 대(17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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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18a)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18b)
보게 된 것을(18c)
믿지 아니하고(18d)
그 부모를 불러 묻되(1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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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너희 말에(19a)
소경으로 났다 하는(19b)
너희 아들이냐(19c)
그러면 지금은(19d)
어떻게 되어 보느냐(19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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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모가(20a)
대답하여 가로되(20b)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20c)
소경으로 난 것을(20d)
아나이다(20e)
그러나 지금(20f)
어떻게 되어 보는지(21g)
또는 누가 그 눈을(21h)
뜨게 하였는지(21i)
우리는(21j)
알지 못하나이다(21k)
저에게 물어 보시오(21l)
저가 장성하였으니(21m)
자기 일을 말하리다(21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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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모가(22a)
이렇게 말한 것은(22b)
이미 유대인들이(22c)
누구든지 예수를(22d)
그리스도로(22e)
시인하는 자는(22f)
출교하기로(22g)
결의하였으므로(22h)
저희를 무서워함 이러라(22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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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23a)
그 부모가 말하기를(23b)
저가 장성하였으니(23c)
저에게 물어 보시오(23d)
하였더라(23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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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성이 가져온 비극_the tragedy brought about by blindness_
불신이 가져온 오판_a misjudgment brought about by distrust_
두려움이 가져온 침묵_the silence brought by fea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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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소경에게 안식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랑 없는 신학도, 신학 없는 기적도, 모두 의미가 없음을 배웠사오니 담대하게 자신의 핸디캡을 보이고 처음들은 말씀을 붙잡은 소경처럼 그 사람의 아들을 나도 붙잡고 나의 예주를 증거 하게 하옵소서.
I commend the Lord for giving So kyung a rest on the Sabbath. Since you have learned that neither theology without love nor miracles without theology is meaningless, show your handicap boldly, and at first, like a small police officer who held on to the Word, let me hold that person's son and testify of my worship.
2026.3.2.mon.Clay
신학 비평//
1) 심문으로 시작되는 기적 — 신앙의 역설
요한복음 9장 13절 이후는 매우 역설적인 장면입니다. 한 사람이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축하가 아니라 조사로 시작됩니다. a. 기적 → 심문 b. 치유 → 법정 c. 빛 → 논쟁 요한은 의도적으로 이 구조를 만듭니다. 왜일까요?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는 언제나 이것입니다. > 예수의 오심은 세상을 둘로 나눈다. 빛은 단순히 밝히지 않습니다. 빛은 드러냅니다.
2) 육체의 치유 vs 영적 실명
이 본문에는 두 종류의 눈이 등장합니다. a. 바리새인-육체의 눈; 열림/ 영적인 눈 닫힘 b. 맹인-육체의 눈 닫힘 → 열림/영적인 눈 어둠 → 빛 의 역전 구조를 만듭니다. 그리하여 > 보지 못하던 자는 보게 되고 > 본다고 믿던 자는 보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심판 개념입니다. 심판은 미래 사건이 아니라 <빛을 만나는 순간>발생합니다.
3) 왜 안식일이 문제인가 — 율법의 역설
핵심 갈등은 “안식일”입니다. 바리새인의 논리: 안식일 노동 금지/진흙을 만드는 행위 = 노동/그러므로 예수는 죄인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안식일은 무엇을 위한 날인가? a. 바리새인: 규칙 보호 b. 예수: 인간 회복 예수는 안식일을 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안식일을 완성했습니다. 안식일의 본래 의미는 쉼/회복/해방이기 때문입니다. 맹인이 눈을 뜬 사건은 안식일의 <가장 완전한 성취>입니다. 그러나 종교는 종종 목적보다 규칙을 사랑합니다.
4) 신앙과 안전 — 부모의 침묵
본문의 가장 현실적인 장면은 부모입니다. 그들은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 출교의 두려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등장합니다. 믿음 vs 소속입니다. 믿음은 예수를 선택하는 것이고 소속은 공동체를 잃지 않는 것으로, 부모는 믿음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안전을 선택합니다. 요한복음은 반복해서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5) 점진적 계시 — 맹인의 신앙 성장
이 본문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맹인의 신앙 발전 과정입니다. 초기: “그 사람”→ “선지자”→ (이후 본문) “주님” 믿음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놀라운 것은 심문이 믿음을 성장시킨다는 것입니다. 박해는 믿음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신앙을 명확하게 만듭니다.
6) 바리새인의 비극 — 판단은 있지만 결단은 없다
바리새인의 핵심 특징? 질문 많음/토론 많음/판단 많음/결단 없음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인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결론은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늘 선택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연구하지만 진리 편에 서지는 않습니다.
7) 신학적 핵심 — 개인적 경험의 자리
당신이 강조한 문장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신앙은 개인적 경험이 없으면 무익하다. 요한복음의 믿음은 정보가 아니라 <만남>입니다. 맹인은 신학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압니다. “내가 맹인이었는데 지금 본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증언 신학입니다. 복잡한 교리가 아니라
변화된 삶이 증거입니다.
8) 세 가지 비극
본문의 세 가지 인간 유형은 1. 바리새인 → 불신의 비극 2. 부모 → 두려움의 비극 3. 맹인 → 증언의 용기 이 세 유형은 오늘의 교회에도 존재합니다. 지식은 있지만 '결단 없는 신앙/', 믿음은 있지만 '침묵하는 신앙', 경험 때문에 '증언하는 신앙'에 요한은 묻습니다. 우리는 어느 자리에 서 있는가? 이 본문은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빛을 만난 인간들의 반응 이야기입니다. 빛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은 반드시 선택을 요구합니다. 나에게 더 큰 것은 무엇인가 두려움인가, 증언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