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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6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제1독서 : 묵시 14,14-19
복 음 : 루카 21,5-11
그때에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루카 21,8)
성전 파괴가 일어나고 혼란스러운 틈에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성전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표지라면,
성전의 파괴는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신 것과 같은 혼란을 겪게 됨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삶의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주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며
굳건하고 영원할 것 같은 신앙이 뿌리째 흔들리고 무너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사이비와 이단 종교와 같은 거짓 예언자들은
이런 혼란한 시기에 상처받고 약해져 있는 우리를 찾아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이용하여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오류의 길로 끌어들입니다.
그들은 특히 임박한 종말론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부추기며 우리를 속입니다.
그리스도교든 사이비 종교든 다가올 종말을 말하며 회개와 새로운 삶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오늘을 어떻게 살게 하는지에 있습니다.
올바른 종말론은 희망을 주고 그 희망으로 ‘오늘’에 발붙이고 성실히 살게 하지만,
그릇된 종말론은 사람들을 불안하고 두렵게 하여 ‘오늘’을 떠나게 하고
존재하지 않을 ‘내일’ 속에서 헤매게 하면서 삶 자체를 무너뜨립니다.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평소에 주님과 깊은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삶의 고통이 올 때만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주님과 친밀하고 돈독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신뢰는
고통과 혼란의 시기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스라엘의 한 화물 수송기가 아파트와 충돌해서
주민 39명, 승무원 4명이 사망하는 큰 사고가 있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워낙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연일 이 사건에 대해 보도했지요.
이제 그로부터 10개월 후 무작위로 선택된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심리검사가 있었습니다.
이때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대학생 중 65%가 이 사건과 관련한 유도 질문에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사고의 영상을 직접 본 것처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은 우리의 기억이 유도 질문이나 타인의 반응을 통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일어난 것처럼 만들어낸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즉,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 기억은 조작될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겪었는데도 나와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입니다.
특히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유리한 기억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억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그 기억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을 통해 다른 이를 잘못된 길로
이끌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기억해야 할 과거가 있었습니다.
바로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 받은 율법이었습니다.
문제는 시대가 흐르면서 이 율법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그 해석대로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아닌 잘못된 길로 이끌었고,
심지어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들만 선택된 민족임을 강조합니다.
율법과 함께 중요한 또 한 가지는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이 자기들 안에 있기에 절대로 멸망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끝은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은 하느님께 맡겨진 시간이기 때문에,
헛된 소문에 빠져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만 율법과 성전을 가지고 있기에 선택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커다란 착각이고, 지금 당장 요구되는 자기의 변화를 무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기준으로 하느님을 재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철저히 지금 당장 주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여기서 진정한 구원이 가까워지게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에서 하신 긴 담화의 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과
세상 종말이 오기 전의 표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옛 솔로몬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고,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에 의해
기원전 515년에 즈루빠벨의 치하에서 재건된 제2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헤로데왕에 의해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지면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사실, 성전 파괴에 대해서는 이미 예언자 미카, 예레미아, 에제키엘 등에 의해 예고된 바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때와 표징을 묻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루카 21,8)
이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이비 메시아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사이비 구세주로 따르고,
속아 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소.”
“치유해 주고 행복하게 해주겠소.”하고 외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결국, 우상을 따르고 섬기도록 부추기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고 있는 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입으로는 주님을 구원자라 고백하지만,
정작 무엇에 목매달고 쫓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재물’이나 ‘능력’ 혹은 ‘세속 정신’을 사이비 메시아로 따르고
섬기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또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고약한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녀석입니다.
우리는 곧잘 자신의 욕망과 생각, 자신의 주장과 뜻을 섬기고 추종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말합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살피시오.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1티모 4,16)
그렇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8)
주님!
속이지도 속지도 말게 하소서.
재물에 속지 않고, 세속에 속지 않게 하소서
또한 나의 생각과 견해와 편견, 허영과 탐욕에 속지 말게 하소서.
무엇보다도 내 자신과 내 자신의 뜻에 속지 않게 하소서. 아멘.
속임수에 휘둘리지 않는 삶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살이하였습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경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로마의 헤로데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합니다.
이 성전이 다시 폐허가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하셨는데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 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셨는데도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하느님을 외면하고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런 재앙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이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의 길을 걸었더라면 멸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고 남도 추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혼란이 올 때 조심, 또 조심할 것은 혼란을 틈타서 극성을 피우는 속임수입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문의 사실과 진실을 살핍니다.
이렇게, 저렇게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느냐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내 삶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종말은 오늘 여기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왕국도 역시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오늘을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시대를 이미 살고 있고,
아직 그 완성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면서
오늘을 최선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기회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어릴 적에 시력이 좋았는데, 20년 전부터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당시에 캐나다 토론토에 살았는데, 도로 표시판이 잘 안 보여서 시력 검사했더니
안경을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2007년부터는 다초점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안경을 쓰면 멀리 있는 건 잘 보이는데, 가까이 있는 것이 잘 안 보였습니다.
시력 검사했더니 난시와 근시가 같이 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조금 어지럽지만, 다초점 안경을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안경을 보내왔습니다. 지금 안경이 오래되었고, 탈색되어서 맞추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새 안경을 사용하는데 멀리 있는 건 잘 보이는데 가까이 있는 것이 잘 안 보였습니다.
알아보니 렌즈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시 안경을 한국에 보냈고, 새로 와서 지금은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안경테가 좋아도, 렌즈가 좋아도 시력에 맞아야 합니다.
초점이 틀리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글을 읽을 때도, 어떤 상황을 만날 때도 맥락을 잘 알면 이해가 쉽습니다.
군대에서 이런 맥락을 잘 모르는 병사를 ‘고문관’이라고 불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이 쌓이면서 고문관 소리 듣던 병사도
후임병을 가르치는 똑소리 나는 병사가 됩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은 ‘요한 묵시록’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으로,
초대 교회의 박해 상황 속에서 고난받는 신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자 기록되었습니다.
이 책은 상징적 언어와 비유, 환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을 통해 하느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새로운 미래를 드러내는 성경이 아닙니다.
요한 묵시록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며
지금 현실을 두려워하라는 성경도 아닙니다.
요한 묵시록은 다가올 하느님의 심판을 기다리라는 성경이 아닙니다.
요한 묵시록은 교회의 현실과 동떨어진 세상을 말하는 성경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한 묵시록의 맥락은 무엇일까요?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승리와 악의 종말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비록 세상에는 부정과 악이 존재하고 때로는 그 힘이 강해 보이지만,
결국 하느님의 뜻이 승리한다는 약속을 믿고 살아가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확신은 신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듭니다.
요한 묵시록은 또한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순결한 삶을 유지할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각 교회의 문제점과 장점을 지적하며
신자들에게 회개와 경각심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이 내용을 통해 삶의 모습을 돌아보고,
더 나은 신앙의 길을 걸어가려는 결심을 새롭게 다질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세상과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는 영적 전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신앙인들은 말씀과 기도로 무장해야 하며,
자기의 삶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묵시록이 말하는 신앙인들의 기도와 찬미는 하느님 나라의 힘이 되며,
이러한 영적 훈련을 통해 신자들은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지닐 수 있게 됩니다.
요한 묵시록은 이처럼 신앙의 여정에서 겪는 도전과 고난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교훈서입니다.
신자들은 묵시록을 통해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새롭게 다지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확실한 암호’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암호’를 알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한 책입니다.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께서 자신들이 하느님을 체험한 걸 꾸밈없이 이야기합니다.
그럼에도 감동이 있는 글들입니다.
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저마다 하느님께서 숨겨 놓으신 ‘암호’를 이웃 안에서, 내면의 부르심 안에서,
때로는 시련과 고통 중에서,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찾아내었습니다.
암호를 발견하기 전의 삶은 무의미하고 허망하였지만,
암호를 발현한 후의 삶은 희망과 기쁨이 계속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확실한 암호를 알고 계시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차를 운전하기 전에 성호를 긋고, 기도한다면 그분은 암호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손에 스마트 폰 대신, 묵주를 들고 버스를 타는 분도 암호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받기보다는 먼저 사랑하려고 하고, 이해받으려 하기보다는
먼저 이해하려는 분도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불평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떨어지는 낙엽에서도, 하늘을 날아가는 구름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다면
또한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암호를 참 많은 곳에, 그리고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남겨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만나야 할,
마지막 순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그 끝에서 하느님과 대면할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암호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 예고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감탄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 성전이 돌 위에 돌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전이 언제 무너질 것이며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냐는 질문에,
주님께서는 그 표징들에 대해 일러 주시며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오류에 빠져 참된 믿음을 버리고 떠나갈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주님의 날이 올 것이다.
주님께서 첫 번째 오심은 속죄를 위해서였고
두 번째 오심은 더 많은 이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시며 그들에게 경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8절).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비밀리에 오시지 않고 무시무시하고 화려하게 오실 것이다.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기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오실 것이다.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모든 말씀을 읽고 들었다.
우리는 언제 종말이 오는지 우리 모두 들었다.
그때에는 전쟁과 지진과 환난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마르 13,7-8).
마지막 날에 민족과 민족이 맞서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다.
너희가 전쟁과 지진과 기근을 보게 되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일어날 표징들을 알려주신다.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신다.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셨고 당신 백성들과 만나신 유서 깊은 곳이다.
그런데 그토록 파멸했다.
예루살렘처럼 회개하지 아니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하느님을 따른다고 할 때,
이러한 파멸을 우리 자신도 당하게 될 것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신다.
벌주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뜻을 거부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그 길을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언제나 주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 그분 안에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 될 것이다.
불멸의 성전을 건립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연중 시기 마지막을 향해 가는 즈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 우리 눈 앞에 펼쳐질 광경에 대해 가르치고 계십니다.
언뜻 보기에 공포스러운 분위기입니다.
사방에서 전쟁과 환난이 일어나고, 대재앙과 함께
그간 인간이 쌓아 올린 높은 탑들이 산산이 허물어질 것을 예고 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무척이나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가르침 앞에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자지러지겠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그간 쌓아온 신앙의 내공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해석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불멸의 성전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낡고 빈약한 성전을 허물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지상 성전의 덧없음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아름다움, 청춘의 푸르름, 인생의 화려함은
절대 영원하지 않음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보다 영속적이고 가치 있는 대상, 불멸의 성전,
영적인 성전을 건설할 것을 요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전 파괴와 관련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벌써 우리 한국 교회에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수십 수백억을 들여 정성껏 건립한 대성전, 신자들로 가득했던
아름다운 성전들이 인구 절벽 시대에 진입하는 동시에
가톨릭교회에 대한 호감도 급하락으로 인해 텅텅 비어가고 있습니다.
불과 십 년 뒤면, 유럽 교회의 전철을 밟을 것이 자명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성전에 오지 않습니다.
그나마 서구 교회는 문화재에 등록되어 볼거리라도 있어 관광객들이 찾아오지만,
우리 본당들은 그런 요소도 없습니다.
무용지물의 성전들은 애물단지처럼 방치되다가 서구의 수 많은 성전들처럼
매각되어 허물어지고, 다른 용도의 건물로 탈바꿈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눈에 보이는 성전보다는 불멸의 성전을 건립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충만한 한 영혼이 곧 새로운 성전입니다.
지극정성으로 성체를 영한 한 그리스도인이 불멸의 성전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을 주님의 성전을 건립합시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21.6)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성전 파괴를 들으면서, 예전 ‘남인수’ 선생이 불렀던 「황성 옛터」란
노래 가사의 일부분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어 있노라.』
참으로 인생과 역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노랫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언급한 예루살렘 성전은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장식된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이었으나 무너질 운명에 놓여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과 견고함에 도취 되어
안으로부터의 허물어짐을 감지하지 못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내려다보시며
예수님은 눈물 흘리셨던 것입니다.(19,41~44참조)
예수님의 눈에는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폐망이 훤히 보였으며,
그래서 그날을 준비하도록 알렸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예언한 대로, 70년경에 로마의 황제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무참히 파괴해 버렸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전의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21,6) 말았던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린 것은 로마 제국이지만,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백성들 내부로부터 이미 다 허물어진 예루살렘을
로마 제국이 발로 찼을 뿐이라고 봅니다.
예루살렘 함락은 외부 세력의 힘에 의해서 무너진 것일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내부에서부터 이미 붕괴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붕괴는 바로 그곳에 살고 있던 이들의 거짓과 욕심
그리고 독선과 오만으로 하느님의 회개를 향한 초대의 소리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욕망과 아집이
예루살렘을 함락당하고 붕괴시켰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분명 역사적인 비극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사건이 곧 세상 종말의 표징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군가 자칭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21,8)라고 하더라도 속지 말라고 경고하셨으며,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21,9)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겉모습을 보고 감탄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누구보다 먼저 그것, 단지 예루살렘 성전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의 허무한 끝, 폐허를 보셨습니다.
이 세상에 아름답고 웅장하게 만들어진 모든 것,
그것들이 영원히 지속할 것 같았지만, 세상 모든 것에는 다 끝이 있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언젠가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끝 날이 언제 올지는 아버지와 예수님만이 아시고,
우리가 ‘폐허를 보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오늘(!)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인 우리는 막연히 미래를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그
날이 언제 어떻게 올지는 모르지만, 그때와 그날을 깨어 의식하면서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지난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배우고 깨달은 점은
사실 가장 무서운 적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그 삶의 기초를 물질적인 것 위에
또는 자기 자신 위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20,17)라고 말씀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놓으려는 사람들입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 (묵2,10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