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1월 27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제1독서 : 묵시 15,1-4
복 음 : 루카 21,12-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나중에 실제로 행하게 될 일을 예언하십니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2-13)라는 주님의 말씀은
사도행전에서 글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5,32; 26,22 참조).
사도들은 임금이나 총독 앞에 잡혀가지만,
그것을 기회 삼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며 복음을 선포합니다.
박해는 복음 선포의 위기 상황이지만,
오히려 그 위기를 통하여 복음은 더 분명하고 더 멀리 선포됩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은 위기를 ‘통하여’ 실현되는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위기에 ‘그럼에도’ 주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위기가 기회가 되어 주님의 말씀이 실현됩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위협하는 박해가 있습니다.
낙태, 안락사, 배아 복제 등 생명권에 대한 교회 입장에 대한
경멸과 정결, 순명, 포기와 같은 그리스도교적 가치에 대한 냉소,
그리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물신주의적 비웃음 등
교회가 부딪치게 되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위기는 진리를 증언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루카의 신학대로라면, 이러한 위기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위기를 통해서 주님의 말씀이 퍼져 나갑니다.
이러한 박해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체험하고, 믿음을 증명하며,
세상에 복음을 증언할 기회가 됩니다.
세상의 반대에 낙담하고 좌절하기보다
이 반대가 복음을 선포할 기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초등학교 6학년 때입니다.
한 친구가 쉬는 시간에 지우개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칼로 지우개를 깎아내면서 도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든 지우개 도장에 사인펜으로 까맣게 칠한 뒤,
자기 공책에 힘껏 누르니 자기 이름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친구들 모두 감탄했습니다.
사실 초등학생인 우리 중에 자기 도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도장이 있으면 마치 어른이 될 것 같았습니다.
친구에게 도장 만드는 법을 배운 뒤,
반 친구 거의 모두가 지우개 도장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이름이 새겨진 도장이 생겼지만 처음 만들어 보는 것이라 아주 허접했습니다.
더군다나 실패를 반복해서, 큼지막했던 지우개는 조그마한 지우개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엄청나게 혼났습니다. 쓸데없는 행동을 했다고 말이지요.
도장 파는 곳에 가면 더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비용이야 지우개 도장이 훨씬 싸겠지만, 질적인 면에서 비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나의 도장을 직접 만들었다는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과 제가 하는 일을 비교해 보았으면 합니다.
일의 결과는 당연히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 뛰어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직접 하길 원하십니다.
일의 결과보다는 그 과정 안에서의 기쁨과
그 부족한 결과도 큰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우리의 적극적인 삶임을 깨닫습니다.
미루는 삶, 포기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박해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임금들과 총독들을 포함한 적대자들뿐이 아닙니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박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분명히 좋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스스로 당신의 일을 하시면 어떨까요?
적대자들도 그 힘에 눌려서 꼼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역할을 강조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일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바라보는 바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사랑만을 바라보고 있고, 세상의 일은 욕심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지만,
그 세상을 우리가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어떤가요?
세상의 일과 충돌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하느님의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신 담화,
곧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으켜줍니다.
먼저, 박해와 박해 가운데에 있게 될 증언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 그러나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21,12-15)
박해가 오히려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깨우치십니다.
곧 박해를 당하게 되면,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보호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눌변인 모세의 입과 함께 계셨듯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탈출 4,11-12.15-16).
그러니 박해를 통하여 오히려 우리는 신앙이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기의 순간은 가장 좋은 기회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8)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보호해주고 지켜주실 것이니,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미움 받거나 배척받게 되면 힘들어 합니다.
고난과 시련, 어려움이나 귀에 거슬리는 말이나 힘든 것은 피하고,
편하고 좋고 즐거운 것, 듣기 좋은 말에 더 맛 들이고 쉽게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19)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성 베네딕도 역시 ‘인내’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통로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수도규칙 머리말 50)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입니다.”(필립 3,10; 로마 8,17)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루카 21,17)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도 배척도 당신과 함께 받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의 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야 말로 그 사람의 크기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처리하는 과정 안에서 진실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 선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인 저도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로 지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 제 속을 알면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기회이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12-15).
박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라고 했지만 어디 그것이 말 같이 쉬운 일입니까?
일상 안에서도 변명과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데…
감옥에 갇혀서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믿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 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 12, 11-12).
이제 믿음을 지닌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재주와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1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의회 의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10절에도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고 의회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행전6,15)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을 간직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를 체험하려면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서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혹 지금 힘들더라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21,16)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 하시기 바랍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이런저런 소리와 압력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사랑합니다.
@@
작은 용기는 시련 앞에서 쉽게 사라지지만, 큰 용기는 시련 앞에서 더 강해진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불은 바람 앞에서 더 활활 탄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아마존에 수건을 주문했습니다. 꼼꼼히 따지지 않고, 덜컥 주문했습니다.
3장이 왔는데 꺼내 보니 너무 컸습니다. 수건이 제 키만 했습니다.
반품할 수 있지만, 잘 모르고 귀찮기도 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다 수건을 반으로 잘랐습니다.
제가 원하지 않았던 수건 3장이 제가 원하던 수건 6장이 되었습니다.
수건에 골이 있어서 잘라도 별 표시가 나지 않았습니다.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지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나누어 주셨는데
5,000명이 먹고도 남았다고 했습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2024년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지나온 자리가 나눔과 사랑의 실천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나온 자리가 욕심과 원망으로 채워졌다면
남은 시간이라도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며 보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비를 청하던 죄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싸움의 기술’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왕따를 당하는 학생이 싸움의 고수에게 싸움의 기술을 배워서
괴롭히는 나쁜 친구에게 더 이상 괴롭힘당하지 않고 싸움에서 이기게 됩니다.
싸움의 고수는 학생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많이 맞아봐서 눈썰미가 좋다.”
권투든, 격투기든 한 번도 맞지 않고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맞는 요령도 있어야 하고, 맞고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맷집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에는 나쁜 세균과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이길 수 있는 면역체계가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면역체계가 잘 작동하기에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이겨냅니다.
약한 사람은 면역체계가 잘 작동하지 않아서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쉽게 병에 걸리게 됩니다.
건강한 사람은 감기에 걸렸어도 금세 회복되는데
약한 사람은 감기에 걸리면 오래가고, 합병증으로 고생하기도 합니다.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적당한 운동이 필요합니다.
균형 잡힌 식사가 중요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이 좋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면역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악의 세력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싸움의 기술’을 알려 주셨습니다.
첫 번째 기술은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교만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질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도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이야기하였습니다.
물은 유연하기에 그릇의 상태에 담기지, 그릇을 거스르는 경우가 없습니다.
물은 반드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물은 내면에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이 급류를 만나면 큰 바위도 밀쳐낼 수 있습니다.
물의 유연함, 물의 겸허함, 물의 강인함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기술은 ‘겸손’입니다.
두 번째 기술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하혈하던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은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우리가 미사 때 고백하는 ‘신경’은 믿어야 할 교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킨 원동력도 ‘믿음’입니다.
현대사회의 시스템은 ‘믿음’이라는 토대 위에서 세워졌습니다.
세 번째 기술은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보는 율법 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마음과 오 힘과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같은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우리가 겸손, 믿음, 사랑으로 면역체계를 구축한다면
악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12절)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이 모든 일에 앞서 박해를 겪는다고 하신다.
제자들은 박해를 당했고, 감옥에 갇히고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겪었다.
사람들은 제자들을 재판관에게 넘기고 임금들에게로 끌고 갔다.
교회사 안에서 교회는, 계속 박해를 당해 왔다.
박해는 지금도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박해는 단순히 육체적으로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대에 만연되어 있는 죽음의 문화 또한 박해의 일종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온전하게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고 하셨다.
그래도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갖게 마련이다.
주님께서는 순교자들을 안심시키신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고 보장해 주셨으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신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18절).
우리의 육신이 세상 끝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 가톨릭의 신앙이요 사도들의 신앙이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가벼이 보시지 않는 주님께서 우리를 가벼이 보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그리고 돌아가심으로써 그 육신을 잠깐 내려놓으셨다가 다시 일으켜 세우신 분이시다.
이렇게 우리가 그분에게서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따르는 이들의 머리카락 수효가 얼마인지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할까 까지도 일러주신다.
그러한 믿음은 시련과 갈등 없이 가질 수 없고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굳은 신앙을 주시기를 청하면서 매일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굳게 해 주시도록 청하여야 할 것이다.
강력한 경고의 배경에는 우리를 향한 간절한 사랑이 깔려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같은 연배의 형제들이 모여 앉을 때마다 참 재미있습니다.
순식간에 세월이 흐르고, 너무도 많이 변해버린 서로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세월의 폭탄을 제대로 맞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낄낄대며 웃기도 합니다.
한번은 탈모가 급격히 진행된 한 형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을 안 지키셨다고.
왜? 무슨 일인데?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안 지키셨다고.
그러나 시편 한 구절을 묵상하면서 위로를 받았다고.
또 무슨 일인데?
“제 죄악 머리카락보다 많사오며...”
나는 머리숱이 많이 사라졌으니, 죄도 별로 없는 게 아니냐고?
주님의 날, 종말, 재림 때의 최후의 심판...
이런 단어들을 떠올릴 때마다 다가오는 느낌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공포, 두려움, 걱정, 안절부절...
자비의 하느님, 사랑의 예수님께서 지니신 두드러지게 우세한 특징
편안함, 따뜻함, 친절함, 포근함과는 전혀 거리가 머니 어찌 된 일입니까?
그래서 종말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보다 긍정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어찌 됐던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가 잘 되기만 바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멸망하기보다 구원되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인내의 주님이십니다.
진정으로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아버지,
자녀를 극진히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자녀에게 어떻게 대합니까?
물론 자녀가 지닌 장점, 성공, 성취에 대해 크게 칭찬도 할 것입니다.
자녀의 부족함을 큰마음으로 감싸안으며 격려와 위로도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로 나아갈 때,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바보 같이 처신 할 때,
몹쓸 짓을 할 때는 당연히 강하게 혼도 내고, 불같이 화도 내고,
빨리 돌아오라는 마음에서 경고도 하고 질책도 할 것입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때로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 안으시기도 하고 우리를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시기도,
때로 우리가 좀 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라고, 좀 더 크게 성장하라고,
그래서 더 확실하게 미래를 준비하라고 경고도 하시고 채찍질도 하시는 것입니다.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여러 가지 경고성 발언 앞에 두려워하기보다
그분 말씀 뒤에 감추어진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의 등 뒤에 서셔서 우리가 잘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뒤에서 든든한 지지가 되어주시며, 따뜻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건네시는 분이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8)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루카 21,12)
오늘 복음 대목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복음서 전체 맥락에서는 이 표현이 나옵니다.
어제까지 들은 무시무시한 종말의 재앙들에 앞서,
먼저 일어날 일을 예수님께서 나중에 말씀하신 것이지요.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루카 21,12)
천재지변이나 전쟁, 전염병, 혹세무민의 이단 출현 등
집단적인 재앙이 들이닥치기 전에,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공격을 당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게다가 그 상대가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루카 21,16)라고 하시니 갈수록 태산이지요.
그러니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음을 잘 간수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3)
박해받고 넘겨지고 끌려가는 혹독한 과정 끝에 사람들은 제자들에게 말할 기회를 줄 겁니다.
이때 제자들은 자기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루카 21,14)
"말씀"과 "지혜"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공포와 두려움 중에도 말씀이고 지혜이신 분께서
친히 활동하시도록 온전히 내맡겨야 합니다.
성령께서 박해받는 영혼 안에 머무르시며 그를 대신해 증언해 주십니다.
인간적 꾀와 말재주, 처세술은 진리를 전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됩니다.
주님께서 적절하고 합당한 말을 떠올려 주시고 선포하게 해 주실 때까지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제자들과, 그 제자의 제자의 제자인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그 너머에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수난과 십자가와 죽음 없이는 주님의 길을 설명할 수 없으니,
그때까지 믿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지요.
제1독서에서는 이 희망을 쟁취한 "승리한 이들"(묵시 15,2)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수금을 들고,
하느님의 종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묵시 15,2-3)
우상과 쾌락과 탐욕에 무릎꿇지 않은
"승리한 이들"이 주님께 찬양 노래를 올려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세상 삶이 꽃길만은 아니었음을 우리는 이미 복음에서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바로 온갖 박해 속에서 인내로써 생명을 얻은 이들입니다.
"주님의 길은 의롭고 참되십니다."(묵시 15,3)
"승리한 이들"은 지상에서 호되게 겪은 환난과 박해와 멸시, 죽음까지도
의롭고 참된 주님 섭리의 일부라고 고백합니다.
비록 그 과정속에서 육신은 괴롭고 마음은 상처받았어도
주님 향한 믿음과 신뢰를 거두지 않습니다.
그들의 시야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복음 환호송)
신앙의 길에서 "주님 향한 충실함"은 죽기까지 부여잡아야 할 생명줄입니다.
박해와 재난 속에서도 그래야 합니다.
"충실함"은 이 단련의 시간을 거쳐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잡이입니다.
"승리한 이들"이 노래하듯, 주님의 날은
"주님의 의로운 처사가 드러나는"(묵시 15,4) 날입니다.
마냥 두렵고 혼란스러운 재앙의 순간만이 아니지요.
의로우신 그분께 충실했던 우리 각자의 여정에 비추어,
우리의 의로움도 빛 한가운데에 드러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간을 보내며
매일의 말씀은 종말과 삶의 의미를 숙고하도록 도와줍니다.
말씀의 안내에 따라 저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생명으로 건너감이고 새로운 시작이지요.
고된 세상살이 속에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며 기다리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영적 승리의 삶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내 마음은 주님 안에서 기뻐 춤추며,
나의 힘은 하느님 안에서 높혀지는도다."(사무상2,1)
만추가 아니라 초겨울입니다.
11월7일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이 지났고, 11월22일 소설도 지났는데
여전한 단풍이라 만추인 줄 알았는데 지난밤 소리 없이 첫눈이 내렸습니다.
지금도 펑펑 내리고 있는 눈으로 온 누리가 흰 눈꽃들 만발합니다.
바야흐로 온 누리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하늘 은총이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전쟁으로 점철된 세상에 평화로운 세상 살라고 온 누리에 첫눈이 내립니다.
오래전 첫눈 내릴 때 쓴 “님의 편지”란 시가 생각납니다.
“계속 쏟아지는
흰 눈발들
님 보내시는
천상 편지
하얀 그리움
가득 담겨 있는
님의 편지
잔잔히 물결치는 마음
글씨
보이지 않아도
다 알아 보겠네.”<2001.1.28.>
누구나 꿈꾸고 희구하는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흰 눈 덮인 온 세상, 모두가 원래의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여
평화로운 세상을 살라는 교훈을 줍니다.
이렇게 눈이 온 날은 모든 안팎의 전쟁도 멈추고
하느님의 사랑을 관상하며 순수한 마음으로 지내면 좋겠습니다.
여전히 치열히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세계나 국내 상황이나 별 차이 없습니다.
흡사 치열한 내전상태를 방불케하는 국내 현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좌우의 대결이기보다는
상식과 비상식, 정의와 불의, 빛과 어둠, 선과 악, 참과 거짓,
생명과 죽음의 대결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이는 영적 전쟁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평화를 추구하나 역설적으로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인간 무지의 적나라한 표현이 전쟁이 아닌가 싶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 모토가 되는 성구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전사로 궁극의 승리를 상징하는 분입니다.
오늘 말씀 역시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God,s final victory)가 그 핵심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운동회 시절, 청군-백군이 치열히 싸울 때
“브이아시티오알와’(VICTORY) 응원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전쟁의 현실을 피할 수 없습니다. 평화를 희구하나 엄연한 전쟁의 현실입니다.
참으로 불멸의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영적전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늘 강조해 온, 죽는 그날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강조해야 할 영적 전쟁입니다.
수도자는 물론이고 믿는 모든 이가 죽어야 끝나는, 살아 있는 그날까지 끝까지 싸워야 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인 우리들입니다.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
바로 평생 주님의 전사는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오늘 복음의 박해 상황은 그대로 영적전투 치열한 현실을 상징한다 싶습니다.
복음과 같은 박해 상황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 맞게 이해하여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떤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주겠다.”
영적전투 중 최고의 힘이, 배경이 되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모든 기회를 깨어 지혜롭게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증언할 기회로 삼을 수도 있고, 겸손과 비움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대로 당하면 치명적 상처로 남을 수 있지만
이런 증언이나 겸손, 비움의 계기로 삼는다면 영적성장으로 이어져
노련한 주님의 전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초연한 자유를 주기도 할 것입니다.
옛 어른의 지혜입니다.
“인생 또한 음악이 그러하듯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가 어우러지는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라.”<다산>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투에서 패배해도 궁극의 전쟁에서 이기면 됩니다.
일승일패 병가상사(一勝一敗 兵家常事)라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는 것은 병가에서 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함으로 영적전투에 임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좋은 영적 탄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대죄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오니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오니 즐거움은 괴로움의 씨앗이다.”<다산의 여유당전서>
새삼 즐거움과 괴로움은 하나의 실재이자 삶의 리듬임을 깨닫습니다.
역시 전쟁과 평화 역시 하나의 실재이자 삶의 리듬이요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며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제 지론 중 하나는 유혹에 빠져
“미풍을 태풍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며, 태풍은 즉시 미풍으로 전환시키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은총이자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그 누구도 삶의 중심인 주님께 깊이 뿌리내린 영혼은 추호도 다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에서 순교의 죽음까지 가능했음을 봅니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인내입니다.
영적전쟁에서 인내하는 자가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인내의 믿음, 인내의 정주요 유불리의 모든 상황을
겸손과 비움의 계기로 삼는 자가 인내할 수 있습니다.
또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에 희망을 둔 자가 인내할 수 있습니다.
인내의 믿음은 하느님의 승리에 대한 희망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고는 인내의 믿음도 얼마 못 가 무너져 내립니다.
희망도, 인내의 믿음 역시 훈련입니다.
부단한 훈련을 통한 습관화로 알게 모르게 희망을, 인내의 믿음을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단한 노력의 훈련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바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은 제1독서 묵시록이 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갈대 바다를 건넌 뒤에
모세가 이집트인들에게서 구원된 백성을 대신하여 감사노래를 부르는 것처럼(탈출15),
짐승을 눌러 이긴 신도들도 ‘유리바다’에 서서 하느님께 대한 감사를 노래합니다.
이는 바로 ‘어린양의 노래’이니
우리의 승리가 어린양이 거둔 승리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묵시록 15장 3-4절, ‘하느님의 종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는
우리 가톨릭교회가 매주 금요일 저녁 성무일도시 바치는 찬미감사가입니다.
어린양이신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의 훈련과 습관이
우리의 희망과 인내의 믿음을 키우면서 영적승리를 담보하는 최상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의 영적 승리에 대한 희망과 인내의 믿음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솟아오르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솟나이다."(시편97,11).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