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다음 날,
비틀대며 방을 나오던 가희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시간에 절대 마주치지 않을 거라 여겼던 호연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 비치는 원망이, 증오가, 상처가 그녀에게 절망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에게서 시작된 그 절망은 그녀의 여린 가슴을
할퀴고...........또 할퀴고.........그래서 치유할 수 없는 상흔을 남기고 있었다.
어젯밤의 그 애달픈 음성의 주인공은 더 이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또 다른 꿈을 꾼 것은 아닌지 착각하게 할 만큼
차갑고 소름끼치는 그의 눈빛만이
그녀의 심장에 시뻘건 상처를 만들어 피가 흐르도록 만들고 있었다.
엄습해오는 현기증보다 먼저 가희의 눈가가 흐려졌지만
절대........절대 그녀는 울 수 없었다.
아니, 울어서는 안 되었다.
그렇기에 가희는 어떻게든 울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를 사랑하는 게 죄가 되듯 그의 앞에서 흘리는 눈물 또한
죄가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까닭이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세게 문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도 버텼다.
그것이 가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에............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그런 가희를 바라보고 있는 호연의 심장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음을..........
절대 치유되지 않을 상처가 벌어져
서럽도록 붉은 피가 철철 넘치고 있음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것은 정작 당사자인 호연조차도
깨닫지 못한 상처였지만 하나만은 분명했다.
호연도.........가희도..........지금 이 순간의 달갑지 않은 마주침이,
째깍거리는 시계초침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침묵이,
적막이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괴롭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가희는 물론이거니와 호연조차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래서 호연이 택한 것은 무시였다.
호연은 가희를 향했던 눈길조차 거둔 채 아무런 말없이 등을 돌렸다.
평소 같았으면 아픔이 될 만한 말이라도 내뱉었을 그가
무시를 택한 이면에는
어쩌면 가희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더 큰 아픔이 되었음을 호연은 알지 못했다.
싸늘한 그의 뒷모습이 처절하리만치 잔인한 두려움이 되었음을.......
그의 상처를 가희가 모르듯 그 또한
곪아버린 상처는 짜내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차라리 이 순간 가희를 향해 독설이라도 내뱉었다면
아픔은 느꼈겠지만 오히려 가희는 후련했을 것이다.
“괜찮아..........괜찮아...........”
힘없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린 가희는 그렇게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엄마.........지수야..........내가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힘을 주세요.........
나 무서워........너무 겁이 나.........
어떻게 해야 해.........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너무 아픈데.........죽을 만큼 두렵고 힘이 드는데..........
엄마........제발 부탁이야..........
나보다 더 아픈 그 사람 두고 도망치지 않게...........
그 사람 옆에서 조금만 더 버틸 수 있게..........’
***
-삐익
“사장님, 회장님 호출이십니다.”
인터폰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호연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지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한 사람이 강 회장이었다.
어쩌면 이리도 타이밍을 잘 맞추는지.........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평소에도 찬바람이 이는 부자지간인데..........
오늘은 아마도 회오리가 몰아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승하는 불쾌지수와 함께 끔찍하리만큼 저조한 컨디션은
강 회장 앞에서 감정을 절제할 수 없을 거라 경고하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호연은
할 수만 있다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은 간절한 욕구를 함께 눌러야 했다.
뒤를 따르려는 선우를 말리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호연은
무심코 바라본 거울에 비치는 모습에서 절망을 느꼈다.
거울 속에는 차가운 남자 강 호연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스러져 버릴 듯 위태로운 가희의 창백한 얼굴이 있었다.
차마 울지도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그를 피하는 상처 입은 눈빛이 있었다.
미쳐버릴 것만 같은 답답함에 숨이 막혔다.
그가 있는 사각의 공간 안에 가희의 흐느낌이 들리는 듯 했다.
그 절망스러움이 사슬로 변해 그의 목을 옭죄었다.
“빌어먹을...........사라져.........사라지란 말이야!”
욕설을 내뱉으며 애꿎은 벽을 치던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사라질 줄 알았던 가희의 영상은
더욱 선명하게 그를 괴롭혔다.
“손은 왜 그러는 게냐.”
강 회장과 마주하고도 자신만의 상념에 빠져있던 호연은
걱정스럽게 들리는 음성에 그제야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살갗이 까져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호연은 피식 웃었다.
이젠 정말 인간이 아닌 것 같군.........
그 정도면 쓰라림 때문에라도 통증을 느낄 법도 하건만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미 인간이길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씁쓸한 무언가가 전신을 훑고 지나가자 허탈했다.
한동안 무심한 눈빛으로 상처를 바라보고 있는 호연을 향해
강 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치료 먼저 해야 할 것 같구나.”
“하하하.”
갑작스레 터진 호연의 웃음.........
전혀 즐겁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는 즐거운 듯,
참을 수 없을 만큼 즐겁다는 듯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강 회장의 어투에 배어있는 염려스러움이
호연의 비틀린 마음을 더욱 비틀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강 회장은 위선과 가식으로 똘똘 뭉친 에고이스트일 뿐이었다.
그런 그가 나를 걱정한다...........?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훗, 아직도 제가 어린애로 보이십니까?”
아직도 내가 당신의 애정을 갈구하던 철부지로 보이느냔 말입니다.
“무슨 말이더냐.”
강 회장은 설핏 티 나지 않게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히 싸늘하게 웃고 있는 호연이 못마땅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무리 골이 패인 부자지간이라 해도 그는 아버지였다.
어찌 아들의 웃음 뒤에 숨어있는 눈물을 모르겠는가.
차가운 얼굴 뒤에 도사린 절망을 왜 모르겠는가.
아픔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고통스런 속내를 그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이 순간은 살아온 연륜은, 언제나 빛을 발하던 사업적 수단은
아들과의 골을 메우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후우, 헛살았음이야.........
아비라는 나부터가 비틀린 채 세상을 살아왔는데.........
어찌 아들 앞에 떳떳할 수 있을까..........
그런 강 회장의 한숨이, 염려가 호연을 더욱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면 이깟 상처 하나에 갑자기 없던 부성애라도 생기셨습니까?”
“...........”
“어줍지 않은 아버지 흉내 내지 마시고 절 부르신 용건이나 말씀하시지요.”
소름끼칠 듯 차가운 호연의 말에 강 회장은
잠시 숨을 고르듯 가슴을 들썩거렸다.
아니라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14년 전에 네가 들었던 말은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변해가는 아들을 보면서.........
뻔히 눈에 보이는 상처를 보면서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호연에게만은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30년도 더 지난 그들 가족의 해묵은 비밀을 끄집어내기에는
지금 호연의 상태는 너무나도 최악이었다.
호연은 지금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벅찰 터였다.
그런 아들에게 강 회장의 서글픈 사랑과,
비틀린 자존심과, 해묵은 원한이 만들어 놓은 결과가
엉뚱하게도 너와 가희에게 향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우선은 어떻게든 호연과 가희의 문제를 호연 스스로 풀어나가도록
조언을 해주는 정도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이 결혼 말이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아들에게만큼은 그가 겪었던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겨우 생각을 정리한 끝에 어렵게 말을 꺼냈건만,
“왜 그러십니까? 진영 그룹보다 더한 곳에서 혼사라도 들어왔습니까?
이번엔 뭐 대통령 딸이라도 된답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약혼식을 고작 며칠 남겨놓고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군요.
뭡니까? 도대체........어떤 조건이 진영 그룹조차 마다하시도록 만든 겁니까?”
진심이란 것도 들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는 법이었다.
온 몸으로 강 회장과의 대화를 거부하는 호연에게
너의 행복을 위해서다........라는 상투적인 말은
아예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임을 강 회장도 알고 있었다.
“진영 그룹 여식을 맘에 두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어차피 그룹간의 결합일 뿐입니다.
어떤 여자라 해도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
“설마.........회장님께서 지금 사랑이니, 어쩌니 하는 소릴 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 설마 다른 누구도 아닌 회장님께서 그럴 리가 없지요.”
마지막 말은 거의 중얼거림에 다름없었다.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호연을 보는 강 회장의 가슴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내 탓이다.........
모두 내 탓이다..........
아이를 바꿔버린 내 탓이다.........
복수를 위해서였고,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후회를 하지는 않으면서도
저토록 망가져만 가는 아들의 모습이 못 견디게 아픈 것이 사실이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게냐?”
대답을 알면서도 강 회장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엉키고 꼬여버린 타래는 호연 자신의 의지가 아닌 한
옆에서 누가 뭐라 한다고 해도 풀 수가 없었다.
호연과 가희의 일이 마무리가 되지 않는 한은
강 회장과 호연의 일 또한 풀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기에
강 회장은 자신의 고통을 애써 누른 채 질문을 던졌다.
“후회라 하셨습니까?”
호연은 강 회장을 차갑게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 떠오르는 원망이, 절망이, 상처가 너무 고스란히 보여서
강 회장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태어난 것을 후회합니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을 후회합니다.
아직까지도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을 후회합니다.
그럼에도 버리지 못한 저를 후회합니다.”
“헉.”
숨이 턱하니 막혀버린 강 회장은 짧게 침음을 삼켰다.
상처가 많은 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업보를 애꿎은 호연이 지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호연의 음성은 낮았지만 그것은 절규였다.
피눈물을 억지로 삼킨 소리 없는 절규였다.
“훗, 우습군요. 도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호연은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 회장을 향해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상처로 얼룩진 그의 십대 시절을 감추는 마지막 자존심이었기에
호연은 비록 비웃음이었지만 웃었다.
그런 그의 귓가로 강 회장의 힘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아비로서 아들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하하하.”
잠시 멍하니 있던 호연은 갑자기 미친 듯이 웃었다.
울음소리보다 더 서럽게 들리는 웃음소리에 강 회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요즘 혹시 건강이 안 좋으십니까? 더 늦기 전에 건강 챙기십시오.”
끝내는 정신병자 취급까지 하는 호연이었지만 강 회장은 원망조차 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자신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듯이 오늘의 이 모든 사태까지 오도록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 자신일진대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럼에도 강 회장은 나중에........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
그 아픔을 고스란히 받게 될 호연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 호연아. 복수니 뭐니 그만두고
이제는 진심으로 곁을 내줄 사람을 찾도록 하 거라.”
“아들조차 부정하신 회장님께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
“내게 자식은 민희에게서 나온 아이 하나 뿐이야........
14년 전 회장님께서 하신 말씀을 토씨하나 안 틀리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게 자식은 민희에게서 나온 아이 하나 뿐이야.]
물론 강 회장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했던 그 말 뿐 아니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호연의 얼굴을........
두 눈 가득 눈물을 머금고 떨리는 음성으로
자신은 아빠 아들이 아닌 거냐고 묻던 어린 아이에게
자신은 뭐라고 했던가.........
단 한 번도 보듬어 주지 못한 아들.........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어쩌면 안심을 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커서 진실을 밝히면 이해해 줄 것이라 여겼던가..........
그런데 아니었다.
어렸기에 더 큰 상처가 되었음을.........
14년을 방치해둔 그 상처가 너무 심하게 곪아버려
이제는 돌이킬 수조차 없음을 강 회장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때부터 제게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습니다.”
“............”
“복수를 그만두라 하셨습니까?
회장님께서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분의 아들이
하찮은 여자 하나 때문에 죽었습니다.
회장님의 유일한 자식의 복수를 제가 대신 하겠다는데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약혼식은 그대로 진행합니다.
그리고 다음부터 업무에 관련된 일 외에는 부르지 마십시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호연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는 내가 버립니다.
더 이상 찢기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이미 인간이길 포기해 버린 내가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손잡이를 돌리는 그의 등 뒤로 강 회장의 중얼거림이 얼핏 들려왔지만
호연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너만큼은.........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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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다가 책상에 내 머리 박는 소리에
퍼뜩 놀라서
엄습하는 쪽팔림에
벌개진 이마는 무시해 버린.....
바보 설화.....ㅜㅡ
오늘 하루가 무지 길었다는....쿨럭.......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2.
[ 장편 ]
비눗방울 2부-[7화]
은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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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5.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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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바보설화님...ㅜㅜㅜ...이마 아파겠다...조심 또 조심 하시오!~~~
아프다기 보다는....무지 창피하더라구요...ㅜㅡ.....살다살다...이게 무신 망신인지...우엉엉.....
설화님 그냥 호연이 아빠가 가희에 대해 다 말하게 해주시지......왜?? 삥삥 돌려요!! 정말 답답해서 제가 소설속에 들어가서 다말해주고 싶어요!!!!
다른 모든 사람이 다 진실을 말할 수 있어도....강 회장만큼은...호연에게 지금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는 입장이예요....물론 호연이가 가희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하겠지만....강 회장이 가진 비밀은 호연의 인생을...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통째로 바꿀 수도 있을만큼 중대한 비밀이라....
강 회장 입장에선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어요.. 그 비밀에 대한 복선은 오늘 연재분에서 충분히 깔았다고 생각하는뎅....나중에....마지막 반전쯤으로 생각하고 있어요...가희에 대한 것은....또다른 인물 하나 등장 시켜서 진실을 밝힐 계획이구요...몇 회 안에 밝혀질 테니까 속상해 하지 마세요..^^*
또 한가지 이유는...무조건 반발하는 호연이가 강 회장 입에서 나온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구요...음...이 정도면....강 회장이 밝힐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한...변명이 조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