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梨大 사위들이 누비고 있다
2. 女박사 女교수의 30%가 梨大 출신
3. 편견에 시달리는 梨花 / 사회의 편견이 梨大를 단결시켜
4. 세계 최대의 여자 종합대
5. 가장 깨끗한 大學
6.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대
7. 쏟아지는 연구기금
8. 기독교 정신으로 투명한 경영…非理도 파벌도 분쟁도 없다
9. 全재산을 헌납하는 교수들
10. 학연이 아닌 혈연으로 맺어져 / 넘치는 자긍심
11. 전국 대학 중 취업률 최고
12. 한국의 梨花에서 세계의 梨花로
13. 부스러기 선교회 姜命順 총무
14. 비서학과… 200% 취업률
1. 梨大 사위들이 누비고 있다
우리나라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특정 대학 졸업자가
많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의 안방은 과연 어느 대학 출신이
점령하고 있을까. 십중팔구는 梨花여대를 꼽을 것이다. 대통령의 부
인 중에 세 사람이 梨花여대와 연관이 있으니 그런 짐작이 나올 만도
하다. 全斗煥(전두 환) 전 대통령의 부인 李順子(이순자·의대) 여사,
金泳三(김영삼) 전 대통령 부인 孫明順(손명순·약학과) 여사, 金大中
(김대중) 대통령 부인 李姬鎬(이희호·문과) 여사 가 梨大 출신이다.
李順子 여사는 결혼으로 중도하차를 했고, 孫明順 여사는 재학중 결
혼한 사실을 숨기고 무사히 졸업했으며, 李姬鎬 여사는 日帝(일제)가
梨大의 문을 강제로 닫을 때 수료증을 받고 여성계에서 다양한 활동
을 했다.
1995년에 梨花여대 기획처에서 대통령과 장 관 부인들의 출신학교를
조사해 봤더니 80 %가 梨花여대 출신이었다. 현대그룹의 며느 리
70%가 梨花여대를 졸업했으며 당시 50대 재벌그룹 가족 중 39개 그
룹가족에 1명에 서 15명까지 梨花여대 출신이 있었다. 삼성 가 이인
희(한솔그룹 고문) 이명희(신세계백 화점 회장)씨도 梨大 출신이며 두
산그룹 박 용성 회장의 딸과 며느리 7명이 모두 梨大 출신이다. 현 정
부의 각료 가운데 文龍鱗 (문용린, 교육) 李憲宰(이헌재, 재정경제) 李
廷彬(이정빈, 외교통상) 崔仁基(최인기 , 행정자치) 金泳鎬(김영호, 산
업자원) 金允起(김윤기, 건설교통) 李恒圭(이항규, 해 양수산) 崔在旭
(최재욱, 국무총리 조정실장 ) 李容根(이용근, 금융감독위원장)씨의
아 내가 梨大 출신이다.
역대 총리의 부인들도 梨大 출신이 많은데 확인된 것만 살펴보면 신
성모, 장도영, 송 요찬, 이현재, 이영덕, 고건, 이수성, 이홍 구 前 총리
의 부인이 梨大 출신이다. 조선 동아 중앙 경향신문 사장의 부인도 梨
大 출신이며 한국일보는 사장(장명수)이 梨大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
다. 梨花여대 李御寧 석좌교수(새천년준비위원 회 위원장)는 1990년
도에 문화부 장관으로 재직할 때 국무위원들의 아내가 대부분 梨大
출신이었다는 얘기를 하면서 『우리 사 회 요직에 梨花의 사위들이
많다』고 말했다. 梨花여대 출신이 고위공직자 집안과 재벌가 에 포
진하고 있다는 것은 梨大 출신들이 단 순히 시집 잘 갔다는 의미를 넘
어선다. 올 5월로 개교 114년을 맞는 梨花의 거대한 인맥은 막강한 영
향력을 보유하고 있다. 실 제로 梨大는 많은 학교 발전기금을 축적했
는데 그것이 실력 있는 남편과 무관하지 않 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
다. 梨大는 공식 적으로 발전기금의 액수를 밝히지 않았는데 일간지
에서 2000억~3000억원이 모금되었을 것이라는 추정기사가 나온 바
있다. 학교 관계자에게 확인을 부탁했을 때 굳이 부인 하지는 않았다.
2. 女박사 女교수의 30%가 梨大 출신
梨大 출신들이 도입부에서 자신들을 누군가 의 아내로 먼저 거론한
것에 대해 화를 낼 지도 모르겠다. 13만명의 동창을 배출한 梨花여대
출신들이 우리 사회 곳곳을 발로 누 비고 있기 때문이다. 梨花人들의
활약은 웬 만한 남녀공학 대학보다 더 활발하다. 정부 수립 이후 여성
장관 21명 가운데 8명(38 %), 여성 국회의원 42명 가운데 13명(31%)
이 梨大 출신이다. 판·검사 변호사 등 법 조인 61명을 비롯해 여의사
5108명 가운데 2232명, 간호사 1886명, 약사 4357명, 문 인과 방송
작가 150여명, 언론계 300여 명 등 다양한 분야에 수많은 인력을 배
출했다. KBS가 1999년 7월5일 「20세기 한국 톱10」 이라는 프로그
램에서 한국 사회를 바꾼 여 성인물 10명을 선정했는데 그 가운데 5
명이 梨花人이었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 터(김점동), 한국 여
성박사 1호 金活蘭(김 활란) 전 梨大 총장, 20세기 최고의 독립운 동
가 유관순 열사, 최초의 가족법 개정을 실현한 李兌榮(이태영) 변호
사, 일본 위안 부 문제를 세상에 알린 윤정옥 한국정신대 대책협의회
공동 대표가 그들이다. 한국일보가 1998년에 건국 50주년을 맞아 「
한국의 차세대 50인」을 선정했는데 그 가운데 여자는 단 3명이었으
며, 그중 2명이 梨花여대 출신(제일기획 최인아 이사, 梨大 여성학과
장필화 교수)이었다. 전국의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梨大 출신 교수
는 2500여 명에 이른다. 이는 전국 여 자대학교수의 30%에 이르는
수치이다. 교수 를 특히 많이 배출한 학과로는 현대무용, 비서학과,
유아교육과, 가정대학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현대무용 교수
들의 대다수가 전 梨花여대 육완순 교수의 제자 들이다. 미국의 권위
있는 출판사가 발행한 「세계현대춤사전」에 우리나라를 대표하 는
현대무용가 7명이 수록되었는데 이 가운 데 6명이 梨大 출신일 정도.
7년 전 서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과를 창 설할 당시 미국에서 스카
우트한 이인영 교 수도 梨花여대 출신. 李교수는 梨大 영문과
를 졸업한 뒤 스탠포드에서 노문학을 전공 한 여성 최초의 노문학자
이다. 요즘 필명을 날리고 있는 수원대 철학과 이주향 교수와 고려대
영문과 서지문 교수도 梨大 출신이 다. 梨花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
은 사람은 총 998명인데 한국의 여성 박사 가운데 3 0%가 梨大 출신
이다.
외국에서 활약하는 梨大 출신들도 많은데 로이터, 월스트리트, 워싱
턴 포스트 등 외 국 언론사 기자를 비롯해 美 연방정보통신 위 정책변
호사 김원, 미국국립보건원 분자 미생물 연구실장 권경주 박사, 유색
인종과 여성 가운데서 최초로 세계곡물화학회장에 오른 김옥경 박사
등 도처에 梨大 출신들 이 포진해 있다. 주변에 梨大 출신이 워낙 많
아 함께 일하다가 뒤늦게 알고 『너도 梨大 출신이니?』라고 물어볼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대방의 신상에 관심이 많은데
그 가운데서도 고향이 어디인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를 유난히 따
진다. 그 리고 출신 대학에 따라 사람의 등급을 매기 려는 경향이 있
으며 他대학에 대해 좋은 얘 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내 세울 만한 대학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출신 학교를 잘 밝히려 들지
않는 경향이 있다.
3. 편견에 시달리는 梨花 / 사회의 편견이 梨大를 단결시켜
梨花여대라면 어떨까? 梨大 출신들은 어디 서든 당당히 출신학교를
밝히고 梨大가 최 상위 등급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他대학 출
신들은 梨大 출신들의 생 각에 선뜻 동의하려 들지 않는다. 취재를 하
는 동안 他대학 출신들에게 梨花여대를 평가해 달라고 당부했을 때
가혹할 만큼 나 쁘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성들은 대 개 梨花여
대가 남녀 대결 구도를 만든 본산 이라고 여기는 발언을 했으며, 여성
들은 梨大가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져 있을 뿐 실력 있는 학교가 아니
라는 類의 얘기들을 했다 . 즉 대학입시철에 서울대 연대 고대 梨大
순으로 거론되는 것은 성적순이 아니라 梨大가 女大 중 가장 크기 때
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어쨌거나 梨花여대에 대해 호의적 인 발언
을 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梨花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에 재
학중인 학 생 두 명을 만났을 때 『梨花여대는 남녀 모두에게 공격받
는다』면서 우리 사회에 梨花여대에 관한 편견이 심하다고 얘기했다.
梨大 출신들은 누구나 여러 가지 편견에 시달렸다는 말을 했는데 『
梨大생들은 사치 가 심하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 시 집 잘 가
려고 梨大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주종을 이루었다. 『독선적이고 오
만하다 . 드세다. 여성의 권리를 지나치게 주장한 다』는 등의 얘기들
도 있었다. 梨大생들을 얘기할 때 「시집」에 관계되는 얘기가 빠지
지 않는데 실제로 결혼정보회 사에서도 梨大 출신은 명문대 출신으로
분 류된다. (주)선우 이웅진 사장은 梨大 나오 고 집안이 좋은 여성은
최고의 신부감으로 대접받는다고 말했다. 하긴 『시집 잘 가 려고 梨
大 다닌다』는 말은 역으로 해석하 면 『梨大 나오면 시집을 잘 간다
』는 뜻이 된다.
사회의 편견이 梨大를 단결시켜
1996년 수능시험에서 여자 수석을 차지한 뒤 서울대가 아닌 梨花여
대를 선택해 화제 가 되었던 구효정(23·梨大 대학원) 씨는 PC통신상
에서 채팅을 하다가 「梨花여대 다 닌다」고 밝히자 갑자기 욕설을
퍼붓는 경 우를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대개의 梨大생들은 저학년
때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여러 가지 말 때문에 상처를 입지 만, 3학년
쯤 되면 그런 공격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梨大생이라는 것을 인식하
게 된다 . 성적 때문에 梨大를 선택했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梨大에
진학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각계에서 활동하는 선배들의 뒤 를
이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는 것이 다. 3학년쯤 되면 공격에 대항
해 논리정연 하게 대처하거나 무시하게 된다. 사회의 편 견이 오히려
梨大生을 뭉치게 하고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하
게 된다는 얘기도 있었다.
인터넷 시대인 만큼 梨花여대에 대한 질타 도 요즘은 주로 사이버상
에서 이루어진다. 여러 대학 출신들이 함께 뭉쳐 軍 가산점 위헌 소송
을 냈지만 남성들은 유독 梨花여 대에 화살을 쏘았다. 지난해 12월 하
이텔 토론실에 軍 가산점 문제와 관련해 「梨花 여대를 梨花大로 만
들어 평등사회 구현」이 라는 제목의 토론방이 개설되었는데 읽기가
곤혹스러울 정도로 심한 글들이 많았다. 황세연씨가 올린 글을 소개
하면 이렇다.
『한 대학을 놓고 이런 토론방이 열리다니 梨大나 서울대나 마찬가지
인 것 같은데 인 심을 잃었던지, 대표성이 있기 때문이 아닌 가 싶습
니다. 서울대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대한민국 대학의 대표
성을 가지 고 있다면 梨花여대는 女大의 대표성을 가 지고 있겠죠. 그
래서 이번 군대 문제와 맞 물려 남성들의 타깃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
다』 1996년에 서울대생과 梨大生들이 PC통신을 통해 상호 비방전
을 벌여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다. 천리안의 서울대 통신동호회 게 시
판에 「성형수술은 기본이고 주말에는 선 이나 보러 다니는 梨大生
100명을 줘도 서 울대 여대생 1명과 안 바꾼다」는 내용이 실리면서
舌戰이 시작되었는데 梨大 동호회 는 즉각 「잘난 체하고, 거만하기
이를 데 없고, 고액 과외로 돈벌어 차를 사서 예쁜 여자나 따라다닌다
」며 서울대生을 공격했 다. 점점 수위가 높아지면서 말이 거칠어졌
는데 서울대생이 「화장에만 신경쓰고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할 생각만
하는 속물」이 라고 공격했고 梨大생은 「고등학교 때 공 부 좀 잘한
것 갖고 뻐기는 왕자병 환자」 라고 맞받았다.
지난해에는 나우누리의 모 대학 동호회 게 시판에 「고급 콜걸」 운
운하며 「梨大生들 이 서울대생과 어울린다」는 비난의 글을 올렸다.
梨花여대에 항의 대자보가 붙고 공 식적인 폐쇄를 요구했지만 그 대
학 동호회 는 찬반투표를 해서 글을 삭제하지 않았다 고 한다.
4. 세계 최대의 여자 종합대
1886년에 개교하여 13만명의 졸업생을 배출 하고 2만명의 재학생을
보유한 한국 최고의 여자 종합대학인 이화여자대학교는 일반적 世論
과 달리 여러 가지 지표에서 좋은 평 가를 받고 있다. 일단 梨花여대
는 방대하다 . 14개 단과대학, 일반대학원, 8개 특수대 학원, 30개 연
구소, 23개 부설기관을 일일 이 기억하기 힘들다. 건물까지 비슷비슷
하 게 생긴 梨大에서 기억하기 쉬운 것이란 딱 다섯 명뿐인 역대 한국
인 총장 이름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우리나라 여자대학 가운데 규모가 큰 남녀공학 대학과 비교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춘 여자대학은 梨花여대가 유일하다. 梨花여대에
없는 단과대학은 농과대학 하나뿐 이다. 梨花여대는 대한민국에서 가
장 큰 여 자대학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여 자 종합대학이
다. 유럽에는 여자대학이 없 으며 미국의 유명 여자대학들도 대개 단
과 대학이다. 미국에서 가장 큰 여자대학도 전 교생이 6000명에 불과
하다.
그러다 보니 梨花여대는 세계 각국 대학들 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독일의 하 노버 엑스포 2000 세계 박람회의 실험 대학 으로 설
립되는 국제여자대학교(Internatio nal Women’s University)는 梨花
여대에 자 문을 부탁했으며 梨花여대 張裳(장상) 총장 은 세계 여성지
도자 9명과 함께 이 대학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99년 4월 영
국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우리나라 를 방문했을 때 여성 교육
의 발전에 이바지 했다는 이유로 梨花여대를 찾았다. 1998년 홍콩에
서 발행하는 「아시아위크」誌가 선정한 아시아 대학 가운데 梨花여
대 는 랭킹 21위에 올랐다. 梨花여대는 아시아 대학 가운데 여자대학
으로는 유일하게 50위 권 안에 선정되었다. 국내 대학으로는 서울 대
연대 고대 등 4개 대학이 50위권에 선정 되었으며 포항공대는 과학기
술대학 랭킹 1 위에 선정되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차이퉁紙 는 지난해 6월1일자에 「
2만명의 재학생을 거느린 세계 최대의 여자대학이 1200만의 대도시
서울의 중심부에 있다」고 소개하 면서 「한국에 아이비리그가 있다
면 梨花여 대는 수월하게 1위를 차지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
문은 梨花여대를 「여성을 위한 특수학업 과정을 내용으로 한 고전학
과로부터 공학 및 정보학에 이르는 현대사 회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갖춘 대학」이라 고 평가했다.
이화여자대학교는 한국대학교육협의회(大敎協)가 주관한 1995년 주
요 사립대 종합평가 에서 최우수 대학으로 선정되었다. 그후 大敎協
의 학과 평가에서 경영학과 의학과는 최우수, 화학과 물리학과 생물
학과 약학부 간호학과는 우수 판정을 받은 바 있다. 1 998년에 실시된
사범대학 평가에서도 최우 수 평가를 받았다.
교육부가 매년 교육개혁 실현 정도를 따져 예산을 지원하고 있는데
梨花여대는 1996 년부터 3년 연속 우수대학으로 선정되어 1 998년에
9억5000만원 1999년에 8억1200만원 의 국고를 지원받았다. 교육부
평가에서 국 제전문인력 양성 특성화 사업 최우수 대학 , 정보통신인
력 양성 우수대학으로 선정된 바 있는데, 올 1월 교육부의 국고 지원
을 받고 있는 9개 대학의 국제대학원을 평가 한 결과 梨花여대가 1위
를 차지했다. 한국과학재단으로부터 1997년과 1998년에 대학연구 관
리 실태조사에서 A등급 판정을 받아 총 연구비의 10%를 연구관리 지
원비 로 받는 등 여러 지표를 통해 우수대학으로 인정받고 있다.
5. 가장 깨끗한 大學
교육부 고등교육지원국 金永植(김영식) 국 장은 梨花여대를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도 여자대학이 남녀공학 대학으로 전환
하는 추세입니다. 우수학생을 유치하기 힘들고 대학발전기금 을 모으
기 어렵고 또 여자가 사회진출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판단 때문이
죠. 梨花 여대만큼은 共學으로 전환하지 않아도 어려 움이 없을 거라
고 봅니다. 독보적인 여자대 학으로 위상을 굳혔죠. 梨花여대는 입학
시 험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치르기 위해 남다 른 관심을 쏟고 있습니
다. 도덕성에 있어서 가장 깨끗한 그룹에 속하는 대학이죠』金국장은
梨花여대는 재단비리, 교수채용 비리라는 말이 한번도 나온 적이 없
는 깨끗 한 대학이라고 평가했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설립자의 영향 력이 큰 대학이 재단 비리
가 일어날 개연성 이 많죠. 梨花여대는 설립자라는 개념이 없 이 구성
원 전체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학교라고 생각됩니다. 梨花
여대는 특 히 매사에 대단히 열심입니다』金국장은 이화인들이 자부
심과 긍지가 대단 히 높은 집단이라고 분석하면서 梨花여대 출신 남
편들의 상당 부분이 사회적 위치를 갖고 있다는 것이 梨花여대의 영
향력의 한 부분이 된다고 평가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李鉉淸(이현정) 사무총 장은 이런 평을 했다.
『여자대학으로서의 독자성을 갖고 있고 여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통
일성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强點(강점)이 있지요. 교수들도 강 한 응집
력을 갖고 있고 애교심이 대단합니 다. 기독교 사상에서 출발해서 서
구형 육영 의지를 가진, 좋은 대학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대학입니다
』
그는 梨花여대 출신들이 여성 지도자와 사 회지도급 인사의 부인이라
는 것도 무시못할 힘이라고 평했다.
『반드시 발전기금과 연결되지 않는다 하더 라도 물질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힘이 형성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요』李사무총장은 梨花여
대의 强點 중의 하나로 他대학에 비해 총장 임기가 길다는 점을 들었
다.
『유능한 총장에 의해 장기 발전 전략을 수 립하고 추구해 나갔더라
면 지금보다 훨씬 발전된 학교들이 많았을 겁니다. 설립자가 총장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임기가 4 년이어서 대학들이 장기 계획을 수
립하기가 현실적으로 힘들죠. 梨花여대는 비교적 총 장들이 장수했고
그로 인해 장기 계획을 강 력하게 끌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李사무
총장은 梨花여대 사람들은 개개인이 홍보위원이라며 『梨大人은 극
성스럽다』 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여자들이 똘똘 뭉치 면 무섭지 않
느냐고 했다.
『1995년에 주요 사립대 평가가 있었는데 梨花여대를 살펴보면서 「
梨花맨」이 되었 어요. 밖에서 보았던 이화와 달리 내부를 들여다보
니 생각보다 좋은 대학이더군요 梨花여대는 대단히 응집력이 강합니
다. 그러 나 배타적이거나 우월주의에 빠지면 위험합 니다. 응집력에
다 열린 체체를 갖추는 것이 숙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李사무총장은
梨花여대가 특성화된 대학원 중심 대학으로 나아가면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6.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대
114년의 역사를 가진 이화여자대학교는 18 86년에 미국 기독교 북감
리회의 여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현재 북감리교 여성선 교국에
서 세운 대학 가운데 가장 성공한 모 델로 꼽히고 있다.
1886년에 설립된 梨花학당에 대학과가 설치 된 것은 1910년의 일.
1925년에 梨花전문학 교가 발족했다. 日帝 말기 일본에 의해 갖 은 수
난을 겪은 梨花전문학교는 校名(교명)을 경성여자전문학교로 바꾸어
야 했으나 해방을 계기로 이름을 되찾고 새롭게 도약 한다.
외국인 선교사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총장에 부임한 7대 金活
蘭 총장(재직기간 1939~1961)은 인문대학, 예술대학, 의과대 학을 편
성하여 1945년에 국내 최초로 종합 대학교 설립 신청을 냈다. 여자대
학을 먼저 인가해 줄 수 없다는 문교부의 반대에 부 딪쳤으나 결국 梨
花여대는 1946년 8월에 한 국 최초의 종합대학교 인가를 받는다. 194
7년 통계에 女학사가 0.1%도 안되었는데도 미래를 보고 종합대학교
신청을 한 것이다. 세계의 여자대학들이 놀라는 것이 바로 梨花여대
에 의과대학이 있고 부설 병원이 있 다는 사실이다. 남성의 영역으로
생각해 온 의과대학을 이미 몇십 년 전에 개설했다는 것이 외국 대학
관계자들에게 경이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1961년에 8대 총장으로 부임한 金玉吉 총장 (1961~1979) 시절은 梨
花여대가 기반을 탄 탄히 다지는 시기였다. 5000명 안팎이었던 학생
규모를 8000명으로 확대하였고 10년 발전계획을 세워 戰後(전후) 피
해를 딛고 안정 기반을 굳혔다.
1979년에 金玉吉 총장은 총장직을 스스로 사임하고 9대 鄭義淑 총장
(1979~1990)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鄭義淑 총장은 평생교 육원을
신설하고 과학교육을 증진하기 위해 인문대학과 자연대학을 분리했
다. 또 재정 자립 기반 구축과 중앙도서관 건립 등 교 육과 연구의 내
실을 통해 창립 2세기를 준 비하게 되었다.
10대 尹厚淨 총장(1990~1996) 취임 당시를 梨花여대 宋熙俊(송희준)
기획처장은 이렇 게 설명했다.
『1960년대와 70년대는 사회적 명성으로 유 지하면서 여성 리더들을
길러냈죠. 1981년 에 졸업정원제로 인해 정원의 두 배나 되는 학생을
받아들여서 질적으로 저하된 것이 사실입니다.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우수 여 학생이 남녀공학 대학으로 진출했지요. 트 렌드가 바뀌기 시
작한 거지요. 우리 대학뿐 만 아니라 다른 대학들도 변화보다는 전통
적인 방법으로 대학을 유지시키고 있을 때 였죠. 수요자는 달라지고
있는데 대학은 변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죠. 1990년대부터 더 욱 수요
자의 요구가 강해졌지요. 여학생들 이 女大를 선호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 더 욱 위기 상황이 되었죠. 이런 일이 1993년 까지 계속되었습
니다』
梨花여대뿐만 아니라 모든 대학들이 변화에 대처해야 한다는 自覺(자
각)이 일기 시작 했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梨花여대도 새 로운 변화
를 모색해야 했다. 학교와 교수, 직원들 사이에 자성운동이 일기 시작
하면 서 1993년에 梨花여대는 尹厚淨 총장을 중 심으로 뭉쳤다. 21세
기 발전계획을 세우고 세계화, 정보화, 과학화, 복지화라는 모토 아래
종합발전계획 100개항을 선정해 추진 해 나갔다. 梨花여대는 1993년
부터 지금까 지 400여 명의 젊은 교수를 영입했는데 19 94년에 대학
최초로 외국 일간지에 외국인 교수 채용광고를 내기도 했다. 1994년
에 여성과학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공과대학 설립을 결정하고 1996
년에 梨花여 대는 세계 최초의 여성 공과대학을 발족했 다. 컴퓨터학,
전자공학, 건축학, 환경공학 분야에서 1000여 명의 학부생과 100여
명 의 대학원생이 21세기 여성엔지니어의 꿈을 키우고 있다.
7. 쏟아지는 연구기금
1992년에 전국 187개 대학 총장들의 모임인 한국대학교육협의회(大
敎協)가 교육부 지 원 공식기관으로 출발했다. 大敎協은 학교 시설,
교수 숫자와 업적, 수준, 취업률, 행정 효율화 등 다각적인 방법으로
학교 평 가를 실시했는데 1994년에 1차로 주요 국립 대 일곱 군데를
평가했고 1995년에 23개 주 요 사립대를 심사했다. 梨花여대는 1995
년 에 大敎協 평가에서 1위를 했다. 宋熙俊 기 획처장은 당시 평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점수산정 방법에 따라 순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최우수라는
것을 크게 생각하 지 않습니다. 다만 梨花여대가 1993년도부 터 개혁
을 단행해서 얻은 결과였기 때문에 상당히 의미가 있죠』
신임교수 초빙, 교수 평가제 실시, 시스템 변화, 대대적인 공간투자,
교육내용과 환 경 변화, 연구활동 활성화, 정보화 추진 등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인 덕분이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재정이 확보되
었기 때 문이다. 개혁 이전에 梨花여대는 재정을 아 껴서 쓰는 데 주
력했지만 전략을 수정해 대 대적인 모금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기업
발 전기금과 동창기금 조성을 위해 총장 이하 모두가 발로 뛰었다. 梨
花여대보다 1년 먼 저 개교한 연세대학교는 1990년부터 송자 총장을
중심으로 발전기금을 모금해 큰 성 과를 거두고 있었는데 많은 대학
들이 이에 고무되었다.
1996년에 부임한 11대 張裳 총장은 21세기 발전계획을 진행하면서
더욱 역동적으로 梨花 발전 프로젝트를 수행중이다. 張裳 총장 부임
이후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梨花여대가 産學협동 체체로 마인드를
바꾸었 다는 것이다. 기업이나 동창들로부터 모금 하는 것이 장기적
으로는 한계에 부딪칠 수 밖에 없다는 판단 아래 정부 프로젝트 참여
와 기업과 협동하는 체제로 변화한 것이다 . 실제로 1996년 이후 많은
외부자금을 유 치했다. 첫번째 성공을 거둔 것은 국제대학 원이 최우
수 등급을 받으면서 5년간 100억 원을 지원받은 일이다.
1997년 말에는 세포신호전달연구센터가 과 학기술부로부터 매년 9억
원씩 9년간 81억원 을 지원받게 되었다. 1998년부터 정부의 두 뇌한
국(BK21) 사업 선정에 끼려고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총 22개 사
업단이 선정 되어 올해부터 7년간 정부로부터 330여억원 을 지원받
게 되었다. 宋熙俊 기획처장은 공 과대학이 뒤늦게 출발했다는 걸 감
안하면 결코 적은 규모가 아니라고 말한다. 전체 교수의 20%, 일반대
학원생의 20%가 BK 사업 에 참여하게 된다.
梨花여대가 짧은 시간 내에 이러한 성과를 거둔 것은 세계적인 석학
들을 초청해 기업 들에 신뢰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1998년에 세포신
호전달 연구의 1인자인 세계적 생화 학자 李瑞九(이서구) 박사를 자연
과학대학 석좌교수에, 1999년에 세계컴퓨터학회 데 이터베이스연구
회 회장을 8년간 지낸 金元 (김원) 박사를 공과대학 석좌교수로 초빙
했다. 두 사람을 영입하면서 당장 달라진 것은 외 부에서 梨大를 보는
눈이다. 金元 박사가 이화에서 후학 양성에 나섰다는 소식에 미 국의
웨어하우스와 OLAP 등 업체가 40만 달 러어치의 소프트웨어를, 일
본의 미쓰비시가 5만 달러 상당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기증했
다. 金元 박사가 부임한 이후 梨花 여대는 과학 인용지표가 되는 국제
수준의 SCI 논문을 세계에 내놓았다. 李瑞九 박사 가 梨大의 세포신
호전달체계 연구센터 연구 를 진두지휘하자 한국의 과학재단들로부
터 우수연구센터로 지정을 받고 국고 지원이 이어졌다.
梨花여대는 지속적으로 석좌교수를 영입하 고 있다. 의과대학에 미국
코넬대학교 의과 대학 신경과학연구소장으로 뇌졸중, 알츠하 이머 등
뇌질환 연구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 자인 조동협 교수, 영상예술 장르
의 1인자 白南準 교수,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노의 거장 라자 베르
만 교수, 한국사의 대표적 석학으로 「韓國史新論」을 저술한 李基百
교수가 그들이다.
기업체의 梨花여대에 대한 지원도 잇따랐는 데 SK그룹이 103억원을
들여 SK텔레콤관을 , 現代는 100억원을 들여 아산공학관을 지 어 梨
大에 기증했다. 삼성이 이화-삼성 교 육문화관 건설에 70억원을, LG
가 학생문화 관과 국제교육관 건설에 80억원을 지원했다.
8. 기독교 정신으로 투명한 경영…非理도 파벌도 분쟁도 없다
교육부나 大敎協 관계자를 인터뷰했을 때 그들은 여러 대학들이 제때
개혁하지 못해 예전의 명성에 빛이 바랜 학교들이 많다고 말했다. 반
면 예전에 눈길을 끌지 못하던 대학들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바
람에 목하 대학의 순위가 바뀌고 있다. 梨花여 대는 1990년대 중반부
터 개혁을 단행해 다 시금 예전의 명성을 회복한 대표적인 학교 에 속
한다. 눈에 나타나는 지표가 바로 입 학 성적의 향상이다. 1980년대
정원 미달학 과에 지원한 성적 낮은 학생을 불합격 처리 해 소송을 당
한 적이 있는 梨花여대는 최근 6년간 매년 입학 성적이 향상되고 있
다. 2000학년도 신입생 전형 결과 특차·정시모 집에서 3.5대 1의 경
쟁률을 보였으며 인문 계열의 경우 특차모집 합격자의 99%, 정시 모
집 합격자의 96%가 수능 상위 5% 이내의 학생들이다. 인문·자연 계
열 수능상위 0.5~1% 이내의 고득점자 수도 지난해에 비해 증가하였
다. 梨花여대에서 전통적으로 강 세를 보이는 학과는 영문과와 신방
과, 미대 와 약대, 의대, 사범대, 유아교육과를 꼽을 수 있다.
개혁을 제때 못해 대학의 순위가 바뀌는 가 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교수간의 파벌다 툼이 있거나, 재단이 학교 발전보다는 개인 의 이익
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화여자대 학교는 재단과 관련한 비리, 교수
간의 파벌 다툼이 전혀 없어 개혁이 순조롭게 이루어 진 것이다.
18만 평의 캠퍼스에 2만명이 공부하는 이화 여자대학교는 매년 3500
명 이상의 여성 학 사, 1000명 이상의 여성 석사, 100여 명 이 상의 여
성 박사를 배출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고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여자 가 많은 대학에서
는 114년 동안 학내 비리 로 인한 잡음이 전혀 없었다. 재단 이사장
이 돈을 빼돌렸다거나, 총장 선거로 교수들 이 분열되었다거나, 교수
로 임용되기 위해 돈을 얼마나 썼다는 말이 梨花여대에서 흘 러나온
적이 없다.
비결은 도도히 흐르는 기독교 정신이 梨花 여대를 관통하고 있기 때
문이다. 서양 선교 사가 설립한 이 학교의 歷代 총장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그들은 『네 이 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 르침을 실천했다.
9. 全재산을 헌납하는 교수들
자기가 졸업한 대학의 총장 이름을 기억하 지 못하는 사람도 梨大 金
活蘭, 金玉吉 총 장의 이름쯤은 알고 있을 정도로 이 학교 총장의 이
름은 브랜드화되었다. 이들이 일 반에까지 널리 알려진 것은 여성 유
명인이 많지 않은 시절의 獨身 여성 총장인데다 政界 진출까지 했기
때문이겠지만, 청렴하 게 살았다는 것과 全재산을 학교에 기증했 던
희생정신 등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金活蘭 총장의 재산은 개인 주택
한 채와 약간의 현금이 전부였는데 세상을 떠날 때 집과 세간살이, 생
전에 모은 그림과 골동 품을 모두 학교에 기증하고 현금은 평생 자 신
을 도와준 운전기사와 가정부에게 나눠주 었다.
金玉吉 총장은 충북 수안보의 집을 학교에 기증했으며 死後에 동생
金東吉(김동길) 교수가 梨花여대에 3억원을 기부했다. 金玉吉 金東吉
남매가 살던 梨大 후문의 집은 金玉吉 기념관으로 꾸며져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梨花여대는 두 총장 외에도 평생을 헌신하 고 세상을 떠나면서 全재
산을 학교에 헌납 한 교수들이 적지 않다. 생전에 사범대 학 장을 지
낸 김애마 교수는 평생 獨身으로 살 면서 청렴한 생활을 했는데 아파
트와 갖고 있던 현금 3억원을 학교에 모두 기증했다 . 동양철학과 김
흥호 교수는 남자 교수이면 서도 헌신적인 여자 교수들 못지않게 귀
감 이 되었다. 하루에 한 끼밖에 안 먹고 모은 돈으로 학생들에게 장
학금을 지급했다. 지난 2월10일 타계한 梨花여대 장원(85·기 독교학
과) 교수 역시 獨身이었는데 재직 시 절 자신의 월급을 많은 제자들에
게 장학금 으로 지급해 정년 퇴임 후에는 가진 돈이 하나도 없었다.
은혜를 입은 제자들이 梨大 기숙사에 모시고 돌아가면서 돌봐 드렸다
. 장원 교수는 옷 몇 벌과 장례비용 400만 원을 유품으로 남겼는데 제
자들이 부조금을 받지 말라는 유언을 어기고 4000만원을 모 아 장교
수의 이름을 딴 장학금을 만들 계획 을 세우고 있다.
梨花여대 기획처 李鍾善(이종선) 홍보차장 은 평생을 헌신하고 모든
것을 학교에 기증 하는 문화는 梨花의 오랜 전통이라고 말한다.
『미국 선교사들이 어려운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 가르쳤던 학
교 개설 처음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선교사들 이 한국의
여성 人材를 발굴해 지도자로 키 우기 위해 私財를 털어 학생들을 돌
봐주었 고 미국유학을 알선했죠. 그런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다시 제
자들에게 베풀면서 전통 이 된 거지요』
梨大 출신 중에 師表(사표)로 삼을 만한 교 수님이 많다는 점이 자랑
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梨大 교수들의 또 하나의 전통은
학생들이 시위대에 휩쓸리지 않고 공부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과 시위
대에 쫓 기는 학생을 끝까지 돌보는 일이다. 1919년 만세운동이 있을
때 梨花학당 학생들이 달 려나갈 때 미국 선교사들이 기숙사 문을 막
고 나가지 못하게 해서 학생들을 보호했다 . 6·3 사태가 발생했을 때
학생들이 교문 을 나서려고 하자 金玉吉 총장이 『나가려 면 나를 밟
고 나가라』고 외쳤던 것은 梨大生 사이에 유명한 일화이다. 李鍾善
홍보 차장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라가 위급한데 만세를 부르러 나가는 걸 막거나 독재 타도를 외
치는 것을 막는 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학생 의 본분인
공부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 전통은 鄭義淑, 尹厚淨 총장으로 그대 로 이어져 시위에 쫓기는
학생들을 숨겨주 고 쓸 만한 재목을 찾아 도와주는 일이 되 풀이되었
다.
우리 사회에서는 부패로 인해 질책받은 사 람들을 시간이 지나면 슬
그머니 복귀시키는 경우가 많지만 梨花여대는 학생들로부터 금품을
수수하거나 개인지도를 해 물의를 일으킨 일부 예능계 교수들을 가차
없이 학 교에서 내보낸다. 또한 梨花여대를 들어가 기 위해 돈 보따리
를 준비한 교수가 없다는 것을 梨花여대는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
10. 학연이 아닌 혈연으로 맺어져 / 넘치는 자긍심
서울대 출신으로 梨花여대에서 12년간 일하 고 있는 宋熙俊 기획처장
에게 그동안 느낀 梨花여대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다.
『자기 몫 챙기기 위해 싸우는 문화가 없습 니다. 모든 일을 합리적으
로 처리하고, 합 리적이라고 생각하면 양보하고 돕고 베풀고 나눕니
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는 행동의 식이 강합니다. 학교 출발 이념이
소외집단 보호 차원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헌신봉사 하려는 마음이 강
하죠. 그러다 보니 보직자 들이 일이 많아 힘들죠. 기준은 있지만 불
필요한 규제가 없어 일하기는 편합니다』 기획처 李鍾善 홍보차장은
梨大의 정신과 결속력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梨大는 梨大에서 평생을 바친 총장들이 이사장 자리를 물려받아 재
단을 운영합니다 . 학교를 잘 알고 학교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는 분
이 맡아서 책임감을 갖고 일하지요 . 지금까지의 명성이 훼손되지 않
도록 열심 히 일하는 것이 다른 학교와 다른 점일 겁 니다』
梨花여대를 취재하면서 생소하게 다가온 말 이 바로 「梨花의 딸들」
이라는 것이었다. 총장부터 교직원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습관처럼 梨花의 딸들, 이화의 동 생들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張裳 총
장은 「 공동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남녀공 학 대학을 졸업한
필자에게 그 말은 생경스 럽게 다가왔다.
梨大의 670명 교수의 남녀 비율은 47대 54 인데 54%의 여자 교수 가
운데 46%가 梨花여 대 출신이다. 670명 가운데 170여 명이 梨大 출
신으로 생각보다 적은 숫자이다. 남자 교수 가운데 200여 명이 서울
대 출신이다 . 일반직 교직원 150명 가운데 여자는 123 명인데 그 가
운데 102명이 梨花여대 출신이다. 취재를 하면서 학교의 여러 부서의
직원들 과 교수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자신이 몸담 고 있는 학교와 학
생들에 대해 한결같이 입 에 침이 마를 정도로 자랑했다. 또한 역대
총장을 비롯한 현직 총장에 대한 존경을 넘어선 흠모의 情을 갖고 있
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간의 취재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런
경우는 해병대와 종교단체 이 외에서는 찾기 힘든 현상이다.
넘치는 자긍심
梨花여대 사람들을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내가 梨花에
들어온 것이 인생 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것 이었다.
그들이 하는 얘기는 대개 비슷비슷 했는데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梨大에 입학했다는 사 실이 다행스러웠다. 졸업
후 梨大를 나왔다 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학교 다닐 때 사치한
다, 공부 안 한다, 시집 잘 가려고 梨大 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건 梨大를 잘 모르고 하는 얘기이다. 우리 사회 는 여성에 대한 차
별이 심하고 梨大에서 그 런 차별을 넘어서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사회에서 梨大 출신들이 활약을 하고 있다 , 梨大生들은 학교 다닐 때
단체의 장을 맡 아 주체적으로 일하기 때문에 자립심과 추 진력이 생
기고 그것이 사회에 나가서 큰 도 움이 되었다. 우리는 학교 다닐 때
무거운 짐을 우리가 직접 날랐으며 플래카드도 우 리가 달았다. 그래
서 梨大生들은 팔 힘이 세다.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다』 이런 자부심
이 梨大를 발전시킨 하나의 동 력이 되었을 것이다. 또 여성들이 모여
있 는 梨大로 남성들의 관심과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다 보니 남녀공
학 졸업생보다 여성 차별에 관한 생각을 훨씬 많이, 심각하게 한 것
같았다.
입시생들이 梨大를 선호하는 이유 중의 하 나는 취업이 잘 된다는 점
이다. 지난 2월2 8일자 교수신문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199 6년부터
1999년까지 梨花여대 졸업생들의 취업률이 매년 전국 대학졸업생 평
균을 훨 씬 웃돌았다. 1999년 전국 평균이 51.3%인 데 반해 梨花여대
생의 취업률은 81.4%였다 . 여대생은 취업이 안된다는 사회 인식과
는 전혀 상반된 결과이다. IMF 경제위기로 대 학 졸업자들의 취업이
힘든 가운데서도 梨大 졸업생들의 취업률이 줄곧 80%선을 넘어 선
이유를 교수신문은 「대학의 교육과정과 졸업생들이 쌓아온 사회적
평판 때문」이 라고 분석했다. 梨大 출신들이 법조계, 국 제변호사,
국가공무원, 공인회계사, 언론기 관 등 전문성이 강한 분야로의 진출
이 두드 러진다고 부연했다.
11. 전국 대학 중 취업률 최고
梨大生들이 가장 많이 진출한 분야는 기업 체(34.3%)였으며 교직
(11.7%) 의·약사(11 .6%) 전문비서직(7.2%) 디자인(6.3%) 순이었
다. 1998년에 발행된 입학특보 제10호에 보면 「梨花 커넥션으로 전
문직 진출 활짝」 이 라는 제호의 기사가 게재되어 있는데 현직 언론
과 방송사에서 일하는 梨花동창 300명 으로 구성된 梨花언론인 클럽
이 후배들을 위해 직능별 자체 강사진을 구성하여 실무 교육을 실시
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었다. 취 업상담센터는 「梨花 커넥션」을 활
용하기 위해 梨花 출신의 취업자 자료가 전산화되 어 있으며 여성에
관한 모든 취업정보가 체 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梨花여대는 졸업
생들의 취업을 위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 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梨花여대는 19 62년에 취업정보센터를 설립했는데 서울대 에 이어
두 번째였다. 1970년도까지는 주로 아르바이트 연결에 그치다가
1970년도 들 어서면서 공격적으로 졸업생 취업작전에 돌 입했다.
현재 梨大 취업정보센터는 表慶姬(표경희) 실장을 포함한 4명의 직원
과 3명의 조교, 근로학생 7명이 근무하고 있다. 1972년부 터 취업정
보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表慶姬 실장은 기업에서 梨大生을 많이 찾는
이유 를 이렇게 말한다.
『우수하고 일을 열심히 잘하니까요. 직업 관이 뚜렷하고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1970년대 초반부터 국제 화를 부
르짖어 영어에 능통한데다 일을 잘 하니까 한번 梨大生을 취업시킨
회사는 계 속 추천을 의뢰합니다. 특히 외국기업에서 계속 의뢰를 하
는 경우가 많습니다』 1998년 취업자 가운데 17%가 외국기업에 취
업했는데 대부분 공채가 아닌 추천된 경우 이다. 張裳 총장이 외국 관
계자에게 梨大生 을 많이 뽑는 이유를 물었을 때 첫째 어학 실력이 뛰
어나고, 둘째 세련되고, 셋째 한 국의 중산층을 알려면 梨花여대생을
아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고, 넷째 공채할 필요 가 없을 정도로 적절
한 사람을 잘 추천해 주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梨大 출신들은
졸업하고 나서도 이런 저런 소문에 휩쓸리는 경우가 많다. 강남의 主
소비층이 梨大 출신이다, 梨大 나온 것을 대단하게 여긴다, 어디 가서
든 티를 낸다, 이런 類의 얘기들인데 학교 다닐 때부터 소문에 시달려
온 梨大 출신들은 이런 말을 별로 개의치 않는다.
梨大 출신의 母校(모교) 사랑은 유난하다. 梨大 동창회 崔明淑(최명
숙) 회장은 현재 연회비를 납부하는 졸업생은 2만여 명이며 중앙동창
회 아래 단과대학 동창회, 과별 동창회가 있고 세계 15개국 48개 도시
에 梨花동창 지부가 결성되어 있다고 소개했다. 1997년 1월에 한국투
자신탁이 모교사랑 공 사채를 판매했는데 판매를 시작한 지 35일 되
는 시점에서 수탁고를 발표했는데 梨大 가 108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梨大 취재를 마치면서 대표성을 띠는 학생 에게 「현재의 梨花」를
어떻게 느끼는지 알아보려고 했으나 총학생회에서는 취재에 응하지
않았고, 梨大학보사 편집국장은 몸 이 아파 취재에 응할 수 없다는 답
변이었다 . 대신 梨大학보사 교육부장 윤지영(중문과 3)씨를 추천해
주었다. 2년간 학보사에서 일한 윤씨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임
을 밝혔다. 그는 먼저 梨大에는 놀랄 정도의 능력을 갖춘 학생이 많다
고 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여자대학이어서 지원했 다는 친구들은 별로 못 봤
어요. 부모의 권 유로 지원한 학생들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성적에 맞
추어서 梨大에 왔다는 친구들이 많아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일단 들어온 다음에 무서울 정도로 공부합니다 . 우리 학교 올 정도면
고등학교 때 상당히 착실히 공부한 학생들입니다. 그런 아이들 이 모
여 있으니 공부를 안하고는 배길 수가 없죠. 평소 수업에 빠지는 학생
은 거의 없 고 시험 때는 긴장이 감돌죠. 전공이 무엇 이든 영어와 컴
퓨터는 필수적으로 공부하죠』 윤지영씨는 학교 당국과 학생들 사이
에는 어쩔 수 없는 갈등이 있다고 말하면서 학생 들의 불만은 장학금
이 너무 적다는 점이라 고 말했다. 많은 학생들이 『학점도 짠데 장학
금도 짠 것에 불만을 느끼고 있다』고 답했다
12. 한국의 梨花에서 세계의 梨花로
梨花여대는 『한국의 梨花에서 세계의 梨花』로 나아간다는 방침 아
래 21세기 비전을 실천중이다. 전체교수회의를 참관했을 때 梨花여대
가 비교하는 대학은 대개 미국 아 이비 리그에 속한 대학들이었다. 梨
花여대 는 세계·지역화, 정보·과학화, 복지·인 간화라는 기치를
세우고 대학원 중심의 연 구대학으로 나아간다는 방침을 세웠다. 특
히 세계무대에서 활동할 전문인력을 양성하 는 국제대학원, 정보통신
과학, 생명 및 여 성과학 분야를 특성화해서 발전시킨다는 계 획이다.
현재 학부 1만5000명, 대학원 5000명의 비 율을 학부 1만2000명, 대
학원 8000명 수준 으로 바꿔나가기 위해 1998년부터 대학 입 학 정원
을 줄이고 있다. 현재 교수 670명을 1000명으로 늘려 교수 對 학생 숫
자를 1대 12로 맞추겠다는 계산이다. 미국 하버드와 예일대는 교수
對 학생 비율이 1대 10 정 도이다. 세계 최고의 여자종합대학인 梨花
여대의 목표는 2020년에 세계 100大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의 여자 대학들도 남녀공학 대학으로 변하
는 추세이다. 197 8년에 한성여대가 남녀공학인 한성대로 전 환하면
서 무너지기 시작한 禁男의 벽은 19 79년 수도여사대가 세종대로 이
어졌고 199 5년 성심여대가 가톨릭대와, 대구효성여대 가 대구가톨
릭대와 통합했다. 상명여대도 상명대로 바꾸었다.
남녀공학 대학으로 전환하는 이유는 사회전 반의 여성관의 변화, 학
생들의 남녀공학 선 호, 대학 지원자수 감소와 입학정원 증가, 외국
대학의 국내 진출 등으로 女大의 학 생 유치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또 女大 졸업생의 저조한 취업률, 동문회의 모교지 원 부진 등을 이유
로 들고 있다. 하지만 梨花여대의 마스터플랜에는 남녀공 학 대학으
로의 전환 계획은 들어 있지 않다 . 대신 남녀공학과의 교류를 늘려간
다는 방 침이다. 오래 전부터 대학원은 연세대 서강 대 등과 학점 교
환제를 실시하고 있고 학부 도 포항공대 한국과학기술원과의 학술자
매 결연을 통해 강의를 교환하고 있다. 또한 세계 16개국 101개 대학
과 교류 협정을 맺 어 외국대학에서 이수한 학점을 인정하고 있다. 梨
花여대는 세계 최고의 여자 종합대 학의 위상을 확고히 해서 한국이
세계에 자 랑할 만한 대학이 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취재를 마
치면서 충분한 재원과 넘치는 자 긍심, 학교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애
정과 성실성을 갖춘 그들은 분명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3. 부스러기 선교회 姜命順 총무
梨花人은 남을 돕는 데도 앞장선다』
梨大 출신은 사치가 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시민운동과
사회사 업운동에 유난히 많은 인원이 진출했다. 梨大 70학번인 부스
러기 선교회 姜命順 총무는 대표적인 사회사업가. 姜총무는 대학 재
학시절 새천년민주당 이미경 의원, 여성의 전화 신혜수 대표, 내일신
문 최영희 사장, 조영래 변 호사 부인 이옥경씨와 함께 언더서클인 「
새얼」에서 함께 활동했다. 姜총무는 유신이 선포된 1972년 사범대
학생회장을 지냈는데 10월28일 梨大生 4천명 구국 철야기도회를 주
동한 인물이다. 10월28일 金玉吉 총장이 선 두에 서서 梨大 학생들과
현재의 梨大 지하철역 까지 진출했는데 당시 도로 에 가로수 공사를
하느라 구덩이가 푹푹 패여 있었다. 학생들이 구덩이에 빠지면 경찰
이 거기다 대고 최루탄을 쏠 정도로 살벌했었다. 낮 12시부터 시작해
오후 5시까지 이어진 이 데모의 구호는 「유신 철폐와 서울대 구속 학
우 석방」이었다. 경찰에 쫓긴 학생들이 다시 교문 안으로 들어와 강
당으로 모였는데 당시 이례적으로 각 방송국에서 梨大생들은 학 교로
돌아가 철야기도회에 참여하라는 방송을 해주었다. 교수들은 커피를
끓여오고 이불을 가져와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강당에서 밤새 선언문을 읽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 金玉吉 총장은 강
당 정 중앙에 앉아 새벽 5시까지 학생들과 함께 했다. 새벽에 교수들
은 학교 버스 로 학생들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인도했다.
『그런 총장님의 모습을 보고 많은 학생들이 감동을 받았죠. 새벽에
경찰들 이 주동 학생들을 잡아가려고 왔을 때 총장님께서 우리를 총
장 공관에 15일 동안 숨겨주셨어요. 총장님께서 서대문 경찰서에 가
서 각서 쓰고 책임지겠 다고 해서 우리는 구속되지 않았지요. 그때 총
장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라 사랑하겠다는 너희
들을 평생 지켜보겠다고요』姜命順 총무는 金玉吉 총장의 그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1974년 졸업과 동시에 도시빈민지역과 산동네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金玉吉 총장의 비서였 던 함선영 교수가 수시로 姜
총무에게 연락을 해왔다. 초기에 일을 시작할 때 梨大 교수들과 梨大
동창생들이 조금씩 모아주는 돈으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초창
기에 기금이 필요할 때마다 姜총무가 교수들에게 전화해서 한 말은
이런 거였다.
『교수님 천당 보내드릴게요. 돈 좀 보내주세요』 1975년 서울 사당
3동 판자촌이 철거된 뒤에도 姜총무는 공단 빈민선교를 계속했다.
1984년 어느 날 金玉吉 총장이 姜총무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 었다.
『열심히 살라고 하시면서 10만원을 주셨어요. 세뱃돈을 주시듯 빳빳
한 새 돈을 주셨죠. 그때까지 총장님께서 죽 지켜보시다가 저를 찾아
오신 것이었 어요. 감격했지요』
姜命順 총무는 1986년 12월9일 부스러기 선교회를 창립했다. 현재
부스러기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신나는 집」에서 1500명, 35개 공
부방과 어린이집 에서 700명 등 하루 2200명에게 급식을 실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장학금 을 지급하고 공부도 시키고 있다. 연간 6억
원의 기금이 필요한데 여러 단체 와 개인의 지원으로 해결하고 있다.
그는 梨花여대 출신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런 것
은 편 견이라고 말한다. 부스러기 선교회를 실질적으로 돕는 사람 중
에 梨大 졸업 생이 많고 매달 후원금을 보내는 사람 중의 10%가 梨大
출신이라고 한다.
14. 비서학과… 200% 취업률
梨花여대의 독특한 학과를 들라면 비서학과를 빼놓을 수 없다. 4년제
대학 중에 가야대학과 나사렛대학에 비서학과가 개설되어 있으며 2
년제 대학은 40여 개가 개설되어 있다. 비서라고 하면 으레 젊고 예쁜
여자가 커피쟁반 을 들고 가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梨大 비서학
과 관계자들에게 그런 얘 기를 하는 것을 큰 실례이다.
외국 영화에 나오는 비서들이 대개 할머니들인데 梨大 출신 비서들
중에도 50대와 40대가 많다.
梨大 비서학과는 취업률이 200%라고 말할 정도로 각광받는 학과이
다. 외부 에서 추천의뢰를 하면서 『회사 수준이 이 정도인데 보내줄
수 있느냐』고 정중하게 물을 정도. 졸업생들이 취업요청이 들어온
회사를 꼼꼼히 살펴보 고 선택할 정도이다.
梨大 비서학과 학생들이 100% 취업되는 것은 그만큼 실력을 쌓고 꼼
꼼하게 일하기 때문이다. 비서학과 조계숙 교수는 학생들을 혹독하게
공부시킨다 고 말한다.
『단순히 서류만 들고 왔다갔다하는 것은 비서가 아니다, 부서장이
눈감고 사인할 수 있게 만들자고 가르칩니다. 비서학과 학생들은 토
익(TOEIC) 85 0점 이하는 거의 없습니다. 다그쳐서 가르치죠. 학교
다닐 때는 섭섭해 하 지만 졸업할 때는 고맙다고 하면서 후배들에게
도 그렇게 가르쳐달라고 말합니다』梨大 비서학과 학생들은 경영학
과 과목 13과목을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고 비즈니스 영어를 익히고
전산처리를 능숙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경영학, 영어, 전산 세 파트
를 다 익히게 하는 것은 비서에게 종합적인 능력을 원하기 때문이다.
『비서학과 학생들은 대학생활이 지겹겠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열심
히 공부 합니다. 그렇게 공부하고 나가기 때문에 한번 梨大 비서학과
학생들을 入社 시킨 회사는 반드시 다시 요청합니다. 한 기업에 梨大
비서학과 출신이 16 ~20명씩 있는 회사들도 있습니다. IMF 때 비서
학과 출신은 한 명도 쫓겨나 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조계숙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비서에 대한 인식이 낮다고 말
한다.
『외국에는 사무직에서 10년 정도 일하지 않으면 비서가 될 수 없습
니다. 55세가 넘어야 비서협회에 가입할 수 있을 정도죠. 우리나라의
경우 남자 비서실장들은 요직에 기용되는데 여성들은 비서를 지낸 다
음 다른 자리에 기용되는 경우가 드물죠』
인기가 높은데도 다른 대학에서 비서학과를 선뜻 開設(개설)하지 못
하는 이 유는 실습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이용해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한 개 학과를 위해 많은 투자를 하기가 쉽지 않다. 梨花
여대는 전문직업개발 원에 전문 비서코스를 開設해 수익사업을 벌이
고 있다. 1년 과정인 비서코 스에 경쟁률이 높아 서너 번 시험 쳐서 들
어오는 학생들이 있는데 비서코스 수료자들도 취업률이 매우 높다.
梨大 비서학과 출신 가운데 50여 명이 2년제 대학의 교수로 진출했
다.
첫댓글 이 자료 요번꺼예요??
뻥이 좀 심하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