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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8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제1독서 : 묵시 18,1-2.21-23; 19,1-3.9ㄱㄴ
복 음 : 루카 21,20-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21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22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23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24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25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묵시 문학은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해도 바꿀 수 없으며 어떻게 벗어날 도리가 없는
억압의 굴레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신다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거슬렀던 이들에게 이 상황은 두려움이며,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따랐던 이들에게는 위로와 희망입니다.
믿음 안에서 마지막 날을 잘 준비한 이들은
이 마지막 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하며 기다립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날을 전혀 다른 두 가지 말로 표현하십니다.
‘징벌의 날’과 ‘속량의 날’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이들은 심판과 벌을 받을 것이고,
주님을 믿고 회개한 이들은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의 요한 묵시록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다다랐을 때, 악을 상징하는 바빌론은 파괴될 것이고,
하늘에 있는 무리들은 승리에 기뻐하며 하느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마지막 날은 주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삶의 완성과 구원의 날,
그러지 않았던 이들에게는 파괴와 징벌의 날이 됩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본다면, 개인 역사의 끝은 죽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존재입니다.
죽음이 누구에게는 조금 이르게 올 수도, 누구에게는 조금 늦게 올 수도 있지만,
모든 이가 받아들여야 할 순간입니다.
죽음으로 맞는 마지막 날이
나에게 두려움이 아닌 희망이 되도록 잘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산다면 그날은 기쁨과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많은 사람이 메밀을 좋아합니다.
메밀에는 다양한 영양소와 생리활성 물질이 들어 있어 건강에 이로운 음식이라고 하지요.
고혈압 예방, 성인병 예방, 혈관 건강, 혈당 조절, 변비 해소, 이뇨작용 등
장점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메밀국수, 막국수, 메밀묵, 메밀전병, 메밀전 등의 음식이 유명합니다.
또 예쁜 메밀꽃도 좋아합니다.
구전에 따르면 메밀은 고려 말 중국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 제주도에 들어왔습니다.
당시만 해도 메밀은 소화도 안 되고 독성이 있는 작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실제로 살리실아민이라는 독성 물질이 있습니다.
원나라는 제주도 남자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제주 전역에 메밀을 심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의 지혜는 이를 오히려 약으로 바꾸었습니다.
무와 함께 먹으면 간단히 중화된다는 것을 알고,
무를 메밀밭 옆에 심었고 또 메밀을 무와 함께 먹었습니다.
독을 이 나라에 뿌렸지만, 반대로 고마운 약이 된 것입니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또 독성이 있는 메밀이 산천에 심었을 때,
가장 안 좋은 상황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이때 만약에 그냥 좌절해서 포기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이겨내려는 마음에서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상황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삶 안에서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라면서 그냥 절망하면서 포기해야 할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이 또 다른 기회라고 여기면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기쁨과 행복의 순간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마지막 때를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될 때라고 하시면서 이때가 바로 징벌의 날이라고 하시지요.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가고, 짓밟힐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순간 예수님 말씀처럼 ‘불행하여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절망의 순간만을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언제나 오늘이 마지막인 날인 것처럼
주님께서 오심을 꾸준한 기도
그리고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으로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지금 전례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지막 날’에 벌어질 무시무시한 표징들을 듣습니다.
곧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고’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한 표징들입니다.
이는 ‘종말’, 곧 ‘구원’은 올 것이라는 사실과
하느님께서 그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그 때에 그 어떤 시련을 당하더라도 절망하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이는 ‘종말’ 그날이 우주의 파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곧 그날의 대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를 '속량'하신다는 것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 될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종말론적인 표징들은 우주론적인 표현이라기보다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분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고,
세상은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헨리 나웬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는 드러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주님!
새롭게 하소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게 하소서.
변형되게 하소서.
당신의 속량을 입게 하소서.
제 삶이 역전되고 당신 승리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첫눈치곤 많이 내렸습니다. 겨울은 겨울입니다. 건강 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녹음을 즐기고 가을에 풍성함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었고 가을인가 싶었는데 겨울입니다.
추위를 견디며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때가 되면 지나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과
세상에 매여 산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때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21,21).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는 화려함과 편리함 속에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지배하는 곳이요,
그것에 맛 들이면 빠져 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결국은 도시는 하느님의 다스림 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빠져나가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발을 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내일 망할 것을 알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온갖 죄악이 거기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산과 시골은 순수함과 깨끗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염 되지 않은 맑고 소박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 살아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을 적시고 발을 담글 수 있어 좋고,
메뚜기가 뛰어놀고 다람쥐가 활개를 치며, 까치밥을 남겨 놓은 감나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길에 모래를 뿌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그곳을 두고 성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순리가 살아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면 결국은 죽고 맙니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게 만듭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가 아파합니다.
예수님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 하시니
이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화려하고 편리한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재앙을 자초하거나
세상 것, 이상하고 신비한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임을 잊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가톨릭 성가 445번 ‘예수님 따르기로’ 함께 부르겠습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내 결코 뒤를 바람 봄 그분만을 따릅니다.
이 땅 위에서 산다 하여도 이 땅 위에서 산다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정태현 신부님의 ‘성서 입문’을 읽고 있습니다.
주제는 ‘성서의 형성 과정과 각 권의 개요’입니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를 알려주듯이, 성서 입문을 통해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미술도 시대에 따른 흐름이 있고, 음악도 시대에 따른 흐름이 있듯이,
성서의 형성에도 시대에 따른 흐름이 있습니다.
오늘은 예언문학, 지혜문학, 묵시문학이 전하고자 하는
사상과 교훈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언문학의 핵심 메시지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뜻을 대변하고, 경고와 위로를 통해
신앙 공동체를 회복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예언문학은 하느님의 정의, 자비, 공의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며,
특히 불의와 억압에 반대합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부조리를 지적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공의를 외칩니다.
예언자들은 종종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예언문학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회개와 회복이며,
백성들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삶을 변화시키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정의롭게 심판하실 것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심판을 경고하면서도, 심판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교정과 회복임을 강조합니다.
장차 올 구원자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약속합니다.
이러한 메시아적 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궁극적인 희망을 제공하고,
나아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중요한 메시지로 작용합니다.
예언문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백성들이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신앙을 지키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지혜문학의 핵심 메시지는 인생과 신앙, 도덕적 가치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으며,
인간이 지혜를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가르칩니다.
지혜문학의 시작과 중심은 하느님을 경외함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하느님을 인식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올바르고 정직한 삶, 즉 의롭고 도덕적인 삶을 강조합니다.
지혜는 올바른 선택을 하고 다른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겸손히 하느님 앞에 서야 함을 가르칩니다.
인간은 모든 걸 이해할 수 없고, 하느님의 계획은 때로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물질적 성공과 쾌락의 무상함을 강조하고, 진정한 행복과 의미를 추구하도록 이끕니다.
인생에서 겪는 고난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며,
이를 극복하는 지혜로서 인내와 신뢰를 가르칩니다.
고난 속에서 믿음을 유지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의 한 부분임을 강조합니다.
삶의 작은 부분들 속에서도 지혜를 실천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는 가정과 사회생활, 인간관계 속에서 도덕적이고 올바른 태도를 보이는 것을 포함합니다.
지혜문학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경외하고, 정직과 의로움으로 삶을 살아가며,
삶의 일시적 본질을 깨닫고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을 통해 충만한 인생을 누리도록 이끕니다.
묵시문학의 핵심 메시지는 시련 속에서 희망을 전하고,
최후의 승리와 하느님의 정의로운 통치에 대한 약속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박해와 고난 속에서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위해 쓰였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일시적이며, 끝까지 인내하면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합니다.
역사의 모든 흐름이 하느님의 섭리 속에 있으며,
모든 사건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하느님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현재 상황이 불확실하거나 고통스러워도 궁극적인 목적이 있음을 신뢰하도록 돕습니다.
종말에 하느님께서 완전한 새 창조를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을 전합니다.
이는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창조를 의미하며,
신앙인들에게 영원한 희망과 소망을 줍니다.
강력한 상징과 비유를 통해 독자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도록 촉구합니다.
비유적인 언어와 환상은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며,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신앙을 경계할 필요성을 일깨웁니다.
세상의 악과 싸우는 영적 전투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신앙인들이 이 싸움에서 영적 무장을 통해 승리하라고 요구합니다.
믿음을 지키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이 있어도
하느님이 함께하시며 그분의 계획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겁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종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희망입니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탑을 쌓으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청빈과 정결 그리고 순명의 삶을 산다면
이곳이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 땅에는 무서운 재난이 닥칠 것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을 더 분명히 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때를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신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20절)
그런 다음 다시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너희가 달아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때 큰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마태 24,19-21)
우리가 이런 환난에서 이겨나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종말이 우리에게 어떤 모양으로 온다고 하여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예언의 참된 결말이요 새로운 신비가 일어나는 계기이다.
해와 달과 별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요엘 2,10; 3,3-4; 4,15).
많은 사람이 신앙에서 멀어질 때, 불신의 구름이 밝은 신앙을 가릴 것이다.
우리의 악덕이 거룩한 빛을 가로막으면,
거룩한 교회 또한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빛의 밝음을 빌려 쓸 수 없다.
박해 때는 이 세상 삶에 대한 애착이 하느님의 빛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깨어서 지켜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시면
온 세상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분을 볼”(즈카 14,5; 마태 24,30)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밀리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신성에 어울리는 영광을 떨치며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만물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드실 것이다.
창조계를 새롭게 하시고 사람의 본성을 본래 상태로 돌려놓으실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8절)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당신처럼 영광스런 몸으로 변하도록 해 주실 것이다.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
죽음은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벽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의술의 발달로 인해 임사 체험자, 근사 체험자, 죽음 유사 체험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때가 되어 한 인간의 수명이 다해 맥박이 그치고 숨이 멎는 순간,
의료진들이 열심히 심폐소생술을 실시합니다.
이제 요르단강을 건너 꿈에 그리던 하느님 나라로 들어섰는데,
유능한 의료진으로 인해 심폐소생술이 성공해서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많은 임사 체험자들이 죽음 이후 공통적으로 겪은 체험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죽음과 동시에 체외 이탈을 해서 자신과 가족들을 보게 된답니다.
그리고 그토록 간절히 보고 싶었던 먼저 떠난 가족들과 친지들을 만났답니다.
세상 강렬하고 환한 빛의 통로를 본답니다.
아마도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통로겠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세상 따뜻하고 자상한 크신 분의 현존을 느낀답니다.
그분이 마중 나와 계셨답니다.
그분을 뵙는 순간 그간 지니고 있었던
그 모든 상처와 두려움, 고통과 슬픔이 눈 녹듯이 사라진답니다.
그래서 임사 체험자들은 하나 같이 고백했습니다.
죽음은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벽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이라고.
죽음은 절대로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건너가는 사다리요 통로라고.
요즘 예수님께서는 계속 종말에 펼쳐질 광경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간 단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던 공포스런 분위기에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까무러칠 것이겠지만,
평생토록 주님을 의지하고 살았던 신앙인들을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답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7-28)
보십시오. 평생 주님 안에 살아왔던 우리에게 그날은 공포스러운 날이 아니라
황공스럽게도 몸소 우리를 맞이하러 나오실 주님을 대면하는 날입니다.
그날 우리는 주님과 함께 손을 잡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는
찬란한 빛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각자 개인의 죽음은 개인 차원에서의 또 다른 종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두고 울며 슬퍼하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영원한 나라에 참여하는 순간이며,
그분 나라에서 다시 한번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주님의 구원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산으로 달아나고 ...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 21,2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파괴를 예고하시며,
그 상황에서 제자들이 취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십니다.
과거 역사 안에서 수 차례 이민족에 의해 무너졌던 예루살렘은
실제로 기원후 70년경 로마군에 의해 다시 한번 포위되고 점령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실제로 벌어질 상황이지만,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산"이나 "예루살렘"의 영적 의미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예루살렘은 인간의 재력과 기술과 제도로 쌓아 올린
한낱 모래성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사람의 재간으로 지은 예루살렘은 무너지겠지만,
영원한 하느님의 도성은 건재합니다.
우리가 달아나야 할 "산"은 변치 않는 하느님 현존의 장소를 의미하지요.
이 "산"이 곧 영원한 천상 예루살렘으로 이어질 것이고요.
마지막 날이 오기 전, 우리는 모든 인간적 욕망과 위선과 허세의 장소를 떠나야 합니다.
장소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내적 자세도 포함합니다.
아직 푹 잠겨 있다면 서둘러야 하고,
이미 거리를 두고 있다면 되돌아갈 생각을 아예 말아야 하지요.
우리가 달아나야 할 곳은 "산"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신,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라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21,26)
예수님은 현실 안에서 벌어질 파괴 예고와
더불어 천재지변을 동반한 종말적 표징까지 덧붙이십니다.
이로써 언젠가 닥칠 그날이 결국 인간들의 일을 넘는 하느님의 계획임이 명백해집니다.
"자지러짐, 공포, 두려움, 까무라침..."
종말의 현상 앞에서 인간이 겪게 될 심상이 그저 참혹할 뿐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심판의 그날, 주님은 우리에게 죽음이 아니라 속량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날 우리가 서슬 퍼런 정의의 낫에 잘려 영원한 불로 떨어지리라 하시지 않고,
오히려 죄의 용서와 구원을 약속하시니, 대체 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은 어디까지인 걸까요!
제1독서에서는 죄악의 거대하고 강력한 표상인 바빌론의 몰락을 예언합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묵시 18,2)
바빌론은 거짓과 탐욕과 폭력을 성공으로 위장하여 우상화하고
선과 악의 경계를 흐리는 현세의 모습까지도 담고 있습니다.
바빌론은 내면의 숨은 악을 부추기고 응원하며,
수치로 감추어도 시원찮을 더러움과 부패를
당당히 주장하게 만들어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니,
바빌론의 멸망이야말로 곧 하느님 정의의 실현입니다.
"과연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묵시 19,2)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심판의 날, 바빌론으로 대변되는 악은 심판을 받고,
그로 인해 고통받고 무죄하게 피를 흘린 모든 이들은,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인내로써 고통을 견디어낸 모든 선한 영혼들,
그리스도의 제자들, 예언자들과 순교자들 모두 주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묵시 19,9)
천상 예루살렘은 이 혼인 잔치의 영광으로 찬란히 빛나며 기쁨으로 일렁일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천체를 휩쓸었던 무시무시한 심판은 끝나고,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믿음을 지킨 충실한 이들이 신랑이신 주님과 함께
혼인 잔치의 주인공이 되어 영원한 신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파괴와 환란, 종말의 말씀들이 기쁨과 찬양을 노래하는 시편과 짝을 이루어
미사 안에 울려 퍼지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에게 심판은 버림받고 내쳐지는 단죄의 순간이 아니라,
속량과 구원, 즉 영원한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행복의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당장의 부족함과 불결함에 무너지지 말고
끝까지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며 나아갑시다.
구원을 꿈꾸며 희망으로 삶을 엮어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자,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구원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예루살렘의 최후와 예언의 성취
박상대 마르코 신부
루카 복음이 기원후 80-90년,
즉 예루살렘이 실제로 멸망한 70년 8월 29일 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마르코복음(13,14-20)의 같은 대목과 비교함으로써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마르코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세상 종말 직전의 징조로 다루고 있는데 비하여,
루카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역사적 사건으로 열거하여 평가하고 있으며,
이를 확대하여 세상 종말에 대입시키고 있다.
루카는 또한 세상 종말의 징조로 우주적 파국을 제시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종말의 목적은 완성이요, 인자의 재림이다.
인자의 재림은 곧 끝까지 참고 견디어 낸 사람들이 구원 받는 때이다.(28절)
예수께서는 암탉이 병아리를 품에 모으듯 예루살렘을 품으려 했으나(루카 13,34)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그들을 향한 당신의 비통한 눈물조차도(루카 19,41)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이루어졌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자신의 구원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니 유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되도록 먼 곳으로 몸을 피해야 하고,
성도에 있는 자는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며,
시골에 있는 자는 성도에 들어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21절)
상황이 이쯤되면 거동이 불편한 妊婦나
젖먹이를 가진 産婦가 불행한 것은 뻔한 일이다.(22절)
기원후 70년 2월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8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당도하였고,
3월부터 8월까지 5개월간 성도를 포위하여
일전일퇴를 거듭하면서 8월 29일 성을 함락시킨 후,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버티던 960여 명이 최후의 죽음을 맞이한 그날까지
이스라엘은 매일 세상의 종말을 눈으로 보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유대장군으로서 로마군에 항거하여 싸우다 굴복한 후,
이름을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로 改名한 ‘요셉 벤 마티아스’(37-100년경)가
직접 기술한 유대전쟁사(Bellum Judacum)를 펼쳐 볼 필요가 있다.
유대전쟁사는 75년부터 70년 사이에 기록되었다.
기원전 2세기 중반 이후의 유대 역사를 기술하고 기원후 66-70년의 유대반란,
70-73년 로마군의 침략과 이스라엘의 멸망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야기체로 쓰여 진 이 전쟁사에는 유대의 애국주의자들에 대한 著者의 반감이 드러나 있으며,
로마의 군사전략과 병법을 높이 평가하여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5개월간 예루살렘이 고립되자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휩쓸고 다녔으며,
유대인들은 굶주림에 지쳐 급기야 자식까지 잡아먹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로마군에게 투항해 오던 자는 산채로 배가 갈리고, 수많은 자들이 체포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소리쳤던 그들 스스로가 매일 400-500명씩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끝내 항복을 거절한 독립당원들 때문에 성전을 불타고,
예루살렘은 송두리째 폐어가 되어버렸고,
투항한 자들은 포로가 되어 노예로 전 세계에 팔려 나갔으니,
그야말로 무화과 나무가 말라버린 것이다.“(유대전쟁사)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되는
‘그때가 바로 성서의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22절)이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귀담아들어야 할지를 깨우쳐 준다.
다음 구약성서의 구절을 묵상하면서
교회 전례력 마지막 주간이며 성서주간을 더욱 열심히 지내도록 하자.
“ 그러니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지시하는 그의 모든 계명과 규정을 성심껏 실천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온갖 저주가 너희를 사로잡을 것이다. (중략)
마침내 너희를 쓸어버리시리니, 너희는 이내 망하고 말 것이다. (중략)
야훼께서는 너희를 원수에게 패하게 하실 것이다. (중략)
저주가 너희를 덮쳐 사로잡는 날, 너희는 망하고 말 것이다.
이는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그가 지시하신 계명과 규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너희는 마침내 굶주리고 목이 타며, 헐벗을 몸으로 아무것도 없이
야훼께서 보내신 원수를 섬겨야 하리라. (중략)
너희 원수가 이렇게 너를 포위하고 몰아치면 너희는 자기 배속에서 나온 소생,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아들과 딸을 먹게 될 것이다. (중략)
자기가 먹는 자식의 고기를 아무에게도 나누어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원수가 너희 모든 성을 포위하고 몰아쳐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아 마침내 이런 지경에 이를 것이다. (중략)
궁한 나머지 제 다리 사이에서 나온 자식을 탯줄 째 몰래 먹어 치울 것이다.
원수가 너희 모든 성을 포위하고 몰아치면 마침내 이런 지경에 이를 것이다. (중략)
야훼께서는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온 땅에 있는 만백성 가운데 너희를 흩으실 것이다. ” (신명 28,15-64)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