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0년경 서민들의 가슴에 신앙을 지닌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들 중 이도기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도기는 충청도 청양사람으로 나이 오십이 되던 해에 식구들 보고 "인생의 의미가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집을 떠난다 . 내가 만약 다시 돌아온다면 지금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떠납니다 이분이 서울로 와서 김범우 등과 만나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고 바오로라는 본명으로 영세입교 합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1년 만에 돌아갑니다 과연 그의 모습은 이전과 다릅니다. 사는게 기쁨에 넘쳐있고, 주변사람들에게 얘기할때 진실되고 소박하며 간절한 모습으로 말합니다 그러면서 천주교 교리를 전합니다.
이때가 을사추조 적발사건으로 박해 중일 때거든요. 그래서 당시 공주부윤이 그를 잡아들여 문초를 합니다. 기회있을 때 이 문초문을 찾아 읽어보십시오. 묵상자료로 삼으면 좋을것 입니다. 교인들이 잡혀가면 "네가 천주학을 한다던데 사실이냐?" "그렇다"고 하면 "너 어찌 사학을 하게 됐느냐?" 그러면 한결같이 순교자들이 "나는 사학을 한적이 없고 앞에 말씀 드린대로 천주학을 했다." 고 분명히 밝히죠. 그러면 관장이 조목조목 따집니다. 논어와 맹자에 있는 성현의 가르침을 얘기하면서 효와 충의 문제를 묻습니다. 그러면 십계명과 칠극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명쾌하게 대답합니다. 이도기도 그렇게 잘 대답합니다. 심문하던 공주부윤이 말문이 막히니까 말끝마다 "예의가 없다. 무례하다."며 하옥시키라고 그러죠.
그날 저녁에 관장이 곰곰히 생각해 보니 화도나고 자존심도 상하지만 그 사람말이 맞거든요. 그러니 벌 줄 생각이 없는데 국법에 벌을 주라고 그랬으니 안줄 수 없죠. 이사람을 살려줄 방법을 찾습니다. 밤중에 이도기가 도망을 쳐버리면 "죄수가 도망쳤습니다. 곧 잡겠습니다." 하고 안잡으면 되잖아요. 그래서 포졸을 불러 적당히 일러둡니다. 포졸이 눈치를 채고 옥문을 잠그지 않고 못들은척 돌아서 있죠. 한참있다 도망쳤나 돌아보니 이도기는 옥중에 점잖게 앉아있습니다. "저 사람이 옥문이 열려 있는걸 모르는가 보다" 하고 일부로 옥문을 열었다 닫았다. 해보인 후 포졸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예 잠자는 시늉을 합니다 이쯤되면 충분히 도망쳤으리라 하고 보니 아직도 그냥 버티고 앉았거든요.
그러다 날이 샙니다. 포졸이 이도기에게 "아이고 이 답답한 친구야. 당신이 천주교를 믿는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세상을 살려면 눈치가 있어야지" 하며 비웃습니다 그때 이도기가 조용히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여보시오, 당신은 죄수를 지킴으로써 국록을 먹지 않소 당신은 죄수를 잘 지키시오. 나는 내가 어디 있든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면 그만이오." 그러니까 포졸이 말문이 막히지만 옥중에 죄수가 하는 말에 기가 죽습니까? "아따, 그 양반 눈치코치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말은 잘하네. 당신이야 어쩐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버티고 앉아 잘난척 하다가는 매맞아 죽기 알맞소." 그렇게 비꼽니다. 그때 이도기가 또 그러죠. "내가 매맞아 죽을지 병들어 죽을지 굶어 죽을지 그것은 하느님만이 아시는 일이오. 내가 어떻게 죽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내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
포졸이 더 말을 못합니다. 이때부터 모욕이 가해집니다 어제까지 점잖게 살던 사람을 주리틀고 창피주고 그 방법들은 억장이 무너져 말로 다 못합니다 그래도 이도기는 아무소리 없고 온화한 모습으로 옥중에 있죠. 조선시대 옥중생활은 인권이고 뭐고 없습니다. 옥바닥은 맨흙이고 바람 막을 벽도 없습니다 나무 창살로 겨울추위가 그대로 느껴지는 겁니다 그나마 겨우 굶어죽지 않을 만큼 나오는 음식은 관리들이 차례로 떼어 먹습니다. <목민심서>에 그 떼먹는 단계가 나옵니다. 죄수한테 갈 게 없어요. 먹을걸 잘 안주니 옥중에서 거의 굶어죽습니다. 그러면 옥에 있는 사람들이 굶어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가족들이 음식을 들여주는 겁니다. 이도기의 부인도 남편이 굶어 죽지 않도록사식을 들여주고 갈아입을 옷을 넣어줍니다.
어느날 이도기가 부인을 불러서 말합니다. "부인, 나 때문에 번거로움이 많소.이제 괘념말고 면회오지 마시오." 부인이 매우 난감합니다. 남편이 오지 말란다고 굶는걸 뻔히 알면서 오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남편 몰래 살짝 와서 먹을 걸 계속 들여다 주죠. 이도기는 자기 부인이 오지 말라도 해도 계속 오는걸 압니다. 어느날 이도기가 부인을 부르죠. 창살을 가운데 두고 부부가 마주 앉았습니다. 그때 이도기는 비로소 옷자락을 들춰서 상처를 보여줍니다 먼저 맞은 상처는 썩어가고 새로 생긴 상처는 피가 흐르는데 뼈가 으깨어져서 그 살갗 속이 나와 있습니다. 차마 볼수 없는 기가 막힌 그 상처를 보여주면서 말합니다. "부인 보시오. 나도 사람인데 이 상처가 어찌 아프지 않겠소 그러나 내가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만은 고통을 잊을 수 있소. 그런데 부인이 오시면 나 또한 어찌 사랑하는 내 아내를 바라보지 않을 수 있겠소. 내가 당신을 바라보면 아내를 보는 기쁨은 누리지만 이 상처의 고통은 이겨낼 수 없으니 면회오지 마시오." 부인은 그때서야 남편이 왜 면회오지 말라고 하는지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면회가지 않습니다
그때가 1798년 7월 24일 (음6.12 )로 순교당시56세였다. 아침 포졸들이 와서 마침내 사형 집행일이 됐다고 알려주자 이 바오로는 기쁨에 넘쳐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이윽고 포졸들에게 끌려가 정산 형장에 다다른 그는 그곳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는다. 주변에 모인 미신자들까지도 이 가혹한 형벌에 가세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배교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머리를 쳐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성모 마리아님, 당신께 하례하나이다' 하고 외쳤다. 이 바오로는 여러차례 실신했고, 다리가 부러지기까지 매를 맞았다. 그리고 그는 버려진 채로 남겨졌다. 이틀 뒤 저녁 무렵, 정산현감은 그의 죽음이 궁금했는지 가서 살펴보고 '죽지 않았으면 아주 죽이고 오라'고 명했다. 포졸들은 이 지시에 따라 그의 몸을 짓이겼다. 더 이상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가 순교하던 날 밤 큰 광채가 그의 몸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유해는정산현감의 명에 따라 묻혔는데, 7~8일 뒤 정산 인근에 사는 교우들이 그 시신을 비밀리에 발굴해 자신들이 살던 마을로 안장했다."
한달이 지난 뒤에 포졸이 이도기 부인에게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립니다. 부인이 남편의 소식을 듣고 슬피울때 그 포졸이 부인을 위로하는 말 속에 이런 말이 들어 있습니다. "부인 슬퍼하지 마십시오. 당신 남편이 죽던 그밤에 찬란한 빛이 당신 남편의 시신에 어리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신자가 아닌 한 포졸이 그 아름다운 모습을 증언하게 됩니다. 이들은 분명히 증거자지요, 이게바로 거룩한 체험이고 은총의 체험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이 세상의 어떤 고통도 잊을 수 있는 이러한 신앙. 이러한 증거가 한국 교회 역사를 끌고갑니다. 출처: 달래 - 한국천주교회사 김길수 저- 하늘로 가는 나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