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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남2지구 開發史 안대환 ▷ 향남2지구 택지개발 예정지구 공람(2004년 7월 30일)되다. 2004년 7월30일 아침, 그날도 어김없이 방울산 능선 위로 찬란한 태양은 떠 올랐다. 하지만 그 태양을 바라보며 하루 일과를 준비하려던 향남 2지구 주민들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자신들이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삶의 터전 약 102만평이 택지개발 예정 지구로 지정되어 공람 절차에 들어간다는 건교부 발표와, 이날 자로 모든 개발 행위를 제한 한다는 지자체 화성시의 고시를 동시에 접해야 했던 것이다. 도시화에 밀려 바로 옆 동네가 아파트촌이 되어도 설마 우리 마을이 개발되리라는 것은 꿈도 꾸지 않고 있던 주민들로서는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건이 벌어진 것 이었다. ▷ 주민들 비상대책위 구성(2004년 8월 19일)하다.
향남2지구 약 102만평에 속하는 마을로는 하길2리(한절이), 하길3리(사창이),상신2리(손개) 그리고 일부 편입된 방축리(대밭말), 상신1리(피아치 골)이며, 가구 수로는 약 450여 세대의 1천여명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자연부락 위주로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39번 국도 주변으로 상가와 건설 관련 업종이 분포 되어 있으며 공장은 신흥공업사 등 손으로 꼽을 만큼 적은 지역으로 택지개발 사업자 입장에서는 최적의 지역이라 할 수 있으나 주민들은 땅이 비옥하고 물 걱정이 없으며 자연 재해가 전무 하다시피 한 이곳은 절대 내 줄 수 없는 삶의 터전이었으므로 향후 그 싸움은 대단히 치열 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을 전체가 편입된 하길2,3리와 상신2리를 주축으로 주민대책위가 구성되어, 하길3리 성일모 이장을 위원장으로 한 대책위가 하길 3리 마을 회관에 사무실을 설치 하였으며, 홍순범 전 화성시 의회 의장 등 공직 행정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자문단으로 선임하고, 전체 실무를 총괄하는 임무에는 공기업에 다년간 근무 경험이 풍부한 안대환 사무국장과 10명 내외의 대책위원들로 구성된 주민 대책위를 출범 시켰다. ▷ 초기 대책위 活動史 대책위 활동 초기에는 마을 입구와 국도변 등에 택지개발을 반대하는 프랑카드와 깃발, 구호 등을 내 걸고 토지공사 업무 관련자의 마을 출입을 봉쇄하는 방법으로 투쟁하였고, 대외적으로는 택지개발의 부당성을 알리는 [향남2지구 택지개발을 반대하는 이유]라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청와대,건교부,경기도,화성시 및 지역구 안병엽 국회의원등에 제출하고 지역 언론 등에도 적극 홍보하였다. 그 결과 대외적으로 향남2지구대책위의 명분있는 반대 이유가 공감을 얻게 되고 그 존재를 인정 받게 되며, 협상 대상자로도 인정되어 이후 3자 협의체(주민대책위, 토지공사,화성시) 가 구성되는 기반을 마련 하였다. 또한 주민 연명을 받아 택지개발 예정지구 취소를 탄원하는 탄원서를 각 관련 기관과 언론사에 발송하여 서면 항의를 계속해 나갔고, 관내 안병엽 국회의원과 인접 지역의 김진표 국회의원 등을 수시로 접촉하여 택지개발 백지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아 갔다. ▷ 택지개발 지구지정(2004년 12월 30일자)되고, 성난 주민은 총 궐기하다. 택지개발 공식 지구지정이 임박 했다는 정보를 접한 향남2지구 주민 대책위는 2004년 12월 27일 전 주민이 참여하는 택지개발 반대 시위를 준비하였다. 당초 시위 장소로 건교부 과천 청사 앞으로 정하고 집회 신고 절차를 밟았으나 관할 경찰서에 집회 신고가 밀려 있어 원하는 날짜에 시위를 할 수 없어, 장소를 화성시청 앞으로 급히 변경하여 추운 날시에도 불구하고 집회를 강행 하였다. 지구내 청년들이 집회 도구 등을 직접 준비하고 부녀회가 나서 음식 등 먹거리를 마련하고 구호, 성명서, 탄원서등을 직접 작성하여 언론에 사전 배부하는 등 집회 준비를 완벽하게 하여 드디어 12월 27일 화성시청 앞에서 주민 3백 여명과 관련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향남2지구 택지개발 반대 시위가 벌어 졌다. 화성 경찰서의 전경 2개 중대가 파견되고, 수도권 언론사 기자들과 타 지역 택지개발지구 대책위 관계자가 참석한 당 集矢는 지휘부의 일사 불란한 지도하에 성공적으로 진행 되어 화성 시청이 생긴 후 가장 대규모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어 시위의 효과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고, 화성시와의 협상에서 택지개발을 함에 있어 주민의 권익이 최 우선 고려 되도록 적극 협조 한다는 약속을 받아 내는 성과를 거두고 또한 토지공사에는 향남2지구 주민들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 줌으로서 향후 관련 업무 처리에 있어서 주민 편의를 최대한 고려하는 업무 자세를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 지구 지정후 주민대책위 活動史 향남 2지구가 택지개발 지구로 공식 지정되자 대책위는 사무실을 39번 국도변 하길2리 입구로 옮기고 주민들에게 활동비 찬조를 받아 공식 활동에 들어 갔다. 주민총회를 거쳐 대책위 활동비를 거출하기로 결의하여 주민은 물론 외부 지주들의 적극 협조하에 80% 이상의 지주분들이 성금을 기탁하여, 상주 사무원과 사무 집기를 갖추고 대책위원들이 교대로 사무실에 근무 하는 등 대 주민 지원 업무를 적극 펼쳐 나갔으며 대외적으로는 관련 기관을 방문하여 주민 재산가치의 정당 보상 주장을 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펼쳐 나갔다. 그 주요 활동을 살펴 보면 첫째 건교부를 방문하여 조사 공표하는 지구내 표준지 공시지가의 상향 조정에 힘을 기울이 는 한편 실제 거래 가액과 괴리가 큰 지자체가 결정하는 개별 공시지가의 상향 조정을 위해 화성시장과 심의 위원들을 일일이 개별 접촉하여 저 평가 된 자료를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펼쳐 정당 보상의 기초를 닦아 나갔다. 둘째 내부적으로는 주민들의 적극 참여와 이해를 돕고자 윤병기 선생의 인터넷 카페를 적극 활용하여 홍보와 참여 그리고 소식을 전하는 매체로 활성화시켜 향남 2지구 대책위 활동을 한차원 높여 추진해 나아가고 이에 회원숫자가 1200 여명을 돌파 하는등 카페 활동이 매우 활성화 되어 수용 주민은 물론 타 택지개발 지구에서도 그 성공 사례를 벤치 마킹하고자 대책위 사무실을 방문 하는 사례가 늘어 갔다. 셋째 우리보다 경험이 앞선 김포신도시 대책위 이강안 대표의 자문과 책자 등을 통한 학습을 계속해 나아가 수용 관련 전문성을 키워 나가는 한편 시한의 촉박성을 감안하여 철저한 실용주의 위주로 수용 주민의 재산상의 피해를 최소화 시키는데 주력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일부 이해력이 부족한 주민들과의 갈등의 소지가 되기도 하였다.
▷ 선 이주단지 건설 추진은 주민 이해력 부족으로 좌초되다. 인간이나 동물에게 있어 집단 생활은 자신의 삶의 수단이자 방편이다. 즉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말처럼 집단 생활은 인간에게 있어 정신적으로 그 무형 가치가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향남 2지구 대책위가 선 이주 단지 건설을 요구한 것은 이점과 맥락을 같이 한 것이며 또한 이 과정에서 주민 재산상의 이익도 최대한 고려하여 지구내에 건설이라는 원칙하에 실무적.기술적으로 추진 가능한 방법을 제시하며 요구하였다.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이라든가 택지개발 촉진법에 근거 사업 시행자는 해당주민 의 이주 대책을 수립 시행하게 되어 있는 것을 그 동안은 이주자 택지 분양권을 주는 방식으로 쉽게 해결하고 있었을 뿐이지,10가구 이상의 주민이 먼저 이주 단지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면 사업 시행자와 해당 지자체는 협조하여 선 이주 단지를 만들어 주게 되어 있으며 통산 택지개발 지구로 지정되어 본격 개발에 들어가기까지 4년 정도 걸리고, 주민 이주 후 이주자 택지를 분양 받아 그 곳에 집을 짓고 다시 입주하기까지 5년 이라는 세월이 걸리는 점을 감안 할때 사실상 원주민 복귀율이 10% 미만 이라는 근거를 내세워 마을부터 만들고 개발을 하자는 주장은 주민들로서는 마을을 유지 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무관심과 선 이주 단지는 지구 외곽으로 먼저 빠져 나가 재산 가치가 없는 곳에 건설 할 것이란 선입견을 내세운 일부 반대론자의 논리가 먹혀 들어가고 법적.제도적,행정 절차가 복잡하여 선 이주단지 건설은 그 듯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일부 뜻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매우 아쉽게 생각하고 있으며 향후 개발지에서는 반드시 이루어 져야 할 국가적 제도개선 사항으로 남아 있다.
그 구체적 추진 방법을 나름대로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구 단지 설계를 할 때 민가가 없는 블록을 선점하여 사업지구에서 분리하여 독립된 개발을 선행하여 선 보상- 선건설-선이주 후- 기존 주택 철거의 방법을 택하여 추진하면 지구내에 위치하므로 재산 가치의 하락 없이 마을 공동체가 유지되고 수용으로 인한 개인 파산 등 2차 피해를 막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택지개발 촉진법의 현실적 개정이 필요하고 관련 부처 및 관련 업무 담당자의 인식 전환이 필수적으로 뒤 따라야 할 것이다.
▷ 참여정부의 부동산 관련 세제 개편이 최대의 난관이 되다. 외환 위기를 극복하면서 김대중 정부의 주택 건설 경기 부양책 및 저금리로 인한 시중의 풍부한 자금 유동성은 극심한 부동산 투기로 나타 났다. 이것은 가히 부동산 열풍이라 할 만큼 전 국민이 마치 부동산만 사면 금새 차익을 얻어 부자가 될 것이란 생각으로 대출금을 동원하면서 까지 부동산 투자에 매달렸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으로 들어 서면서 부동산으로 인한 소득은 무조건 불로 소득으로 보고 중과세 해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으면서 세금폭탄으로 불리울 정도로 무거운 세금이 각종 부동산 거래 및 보유자에 대한 규제책으로 쏟아져 나왔다. 한 두차례의 규제책으로 약발이 먹히지 않자 가히 반 시장적이고 사회주의적이라고 할 정도로 강도 높은 규제와 중과세 조치가 계속해서 나왔고 이는 과열된 부동산 시장을 냉각 시켜 아예 부동산 거래가 끊기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이 정책은 이른바 공익사업으로 인하여 토지등이 수용된 자 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2007년 부터는 소위 양도 소득세의 혁명이라고 할 만한 실 거래가를 적용하여 세금을 부과 하는 세제가 시행되는 것이었다. 각종 경과 조치와 감면 조항을 두긴 하였지만 수용지구 주민의 재산권에 미치는 영향은 2006년 중으로 보상을 받느냐 아니면 2007년으로 넘어 가느냐는 매우 큰 양도 소득세의 차이를 가져 오며, 이는 보상 평가액이 다소 오른다고 가정하여도 이 손해를 극복 할 수 없는 정말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또한 부재 지주의 중과세 조치는 2006년 중으로 사업시행 승인을 받는 지구까지만 적용 예외를 두는 경과 조치에 걸려 있어 그만큼 2006년 중으로 사업 승인(개발계획 승인)을 받아 보상을 마치는 일이 대책위로서는 지상 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은 현 대책위 집행부와 대립적 관계에 있는 주민들에게는 매우 좋은 현 대책위 공격 빌미가 되었고 주민들에게 [무슨 대책위가 보상을 빨리 못 받아 안달이냐] 하는 식으로 왜곡하여 전달이 되어서 주민들 간에 내분에 시달리는 불씨가 되었다. 대책위 핵심 관계자는 가까운 지인들과의 인간적 갈등에 시달리면서 까지 본 정부 정책의 불변을 강조하며 소신껏 2006년 내 보상이 살길이란 주장을 굽히지 않고 나아 간 결과 그러한 사실은 현실로 나타나서, 시간이 지나며 수용 주민이 주장하는 내용은 볼멘 소리에 불과하지 토지 수용으로 인한 거래와 이로 인한 양도 차익도 분명한 소득이므로 절대 예외 조항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정부의 방침은 확고했고, 다만 자경, 대토에 한해 5년간 1억원만 감면해 주는 정도로 수용 주민의 불만을 잠재우는데 그쳤다. 이러한 정부의 부동산 관련 세제 정책 시행을 간파한 대책위는 어떻게든 2006년 중으로 사업 승인을 받아 보상을 마치는 것만이 주민들의 재산상의 피해를 최소화 시키는 것임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 혼신의 힘을 경주해 각 관련 기관을 설득해 나갔다. 그리고 주민 홍보와 이해를 구하는데도 전력한 결과 대다수의 주민이 2006년에 보상 받는 것이 좋겠다고 동의해 주고 격려도 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 대책위원들은 다시 힘을 얻어 개인적 경비와 시간을 투자해 가며 경기도와 화성시 그리고 토지공사 화성지사 등을 수시로 방문해 2006년 내 토지 보상 실현을 위해 전력투구해 나갔다.
▷ 드디어 사업 인정고시(2006년 8월 23일)를 받아내다.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대책위원들은 경기도청에 3일간 상주하며 조속한 시일내 개발계획 승인을 주장하며 각계각층에 호소하여 지원을 이끌어 냈다. 당시 쌍둥이 지구라 할 수 있는 평택 소사벌 지구는 사업인정 고시 결재가 이미 난 상태고 향남2지구는 지구 내 일부 주민의 민원으로 결재가 보류 되어 있는 상태였다. 사업 인정 고시일 이후 토지 감정 평가와 지장물 조사를 거쳐 보상에 이르기 까지 걸리는 절차상의 일정을 감안하면 사실상 8월 20일까지 사업 승인을 받지 못하면 2006년 내 보상은 사실상 물 건너 가는 상황 이었으나 대.내외적으로 반대 민원의 부당성을 알리고 수용 주민의 90% 이상이 년내 보상을 희망하고 있다는 점과 정부의 주택 조기 건설 의지가 맞물려 드디어 8월 19일 경기도의 사업 승인 결재를 받아 내는데 성공하였고, 경기도 고시는 8월 23일자로 공고 되어 년내 토지보상이 가능한 여건을 만들어 놓았다. 이후 일정은 년내 보상을 목표로 숨 가쁘게 일사천리로 진행 되었다. 9월5일자로 보상 공고가 나고, 9월 27일부터 감정 평가 업체가 선정되어 토지 감정 평가에 착수하고 , 10월부터는 주민의 협조하에 토지공사는 지장물 조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한 주민 대책위는 토지공사의 보상 업무 추진이 과다한 점을 고려, 직접적으로 양도세 부담이 되는 토지와 양도세 부담이 없는 지장물을 분리하여 토지만 2006년 내 보상을 추진함으로서 촉박한 업무 일정에 협조 하는 방식으로 2006년내 보상을 가능케 하였다. ▷ 수용 지구내 주민이 격는 주된 고통은 이러했다. 정부의 토지 수용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배앗기는 수용 주민들은 과정별로 대략 다음과 같은 갈등 및 내부 분열에 시달리게 된다. - 지구지정 초기 그 사실을 인정 할 수 없다는 부정하에 백지화 대 정부 투쟁에 매진하게 된다. 하지만 정부의 택지개발 지구 지정이 한번 결정되면 농림,국방,환경 문화재 등 관련 부서의 거부권이 작용하지 않는 한 그 사실은 투쟁으로 백지화 시키기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실리파와 명분파의 내부 분열에 시달리게 된다.
- 지구 지정에서 보상까지 일단 지구 지정이 되면 보상까지 약 2년이 걸리는데 그 와중에 주변의 지가가 상승하게 되므로 상대적으로 낮은 보상금을 받은 결과로 나타나 재산상의 손실을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바로 주변과의 비교이지 전국 평균치로 보면 최근의 보상은 과거에 비해 현실을 많이 감안하여 평가 보상 된다는 점을 알고 보상이 시작되면 조기 수령자와 이의 신청자로 다시 양분되게 된다. - 보상 완료에서 이주까지 고향을 떠나는 마음속의 허전함은 크지만 젊은 층은 생업에 바쁜 관계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나 다만 나이 드신 노인분들은 새롭게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 다시 돌아가야 할 고향은 개발되어 없어지고.. 수원 터미널을 떠난 버스가 삼천 병마골 언덕을 굽이 돌아 팔탄 저수지 맑은 물로 목을 적시고 성당앞 면허 시험장 S코스 같던 길을 건너면 평평한 그곳이 발안 장터랍니다. 그래도 우리집은 남녁벌 논틀 길을 한참을 더 걸어 으스스한 상여집 곁을 지나고 불꺼진 초가집을 여러채 더 지나야 비로서 도착하게 된답니다. 소년은 청운의 꿈을 안고 매일 새벽 이 길을 달려가고 또 별을 보며 다시 그 길을 달려 오며 참 열심히도 공부하고 기술도 배웠지요. 물론 쉬는 날엔 농사일도 도와 가면서.. 성인이 되어 사회로 진출한 이들은 어린 시절 몸에 밴 부지런을 무기 삼아 착실히 직장 생활을 한 덕분에 나름대로 인정 받아 출세도 하였고 또 사업을 열심히 한 친구는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었다지요. 이제 검은 머리엔 서리가 내리고 각자의 무대에서 은퇴 할 시기가 되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었지요. 그러나 우리들의 고향은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진달래 활짝 피던 뒷 동산은 회색 콘크리트 아파트 숲으로 변하고 정겨운 사람을 만날까 걸어보는 거리는 온통 낯선 사람들의 모습으로 가득 차 버렸지요. 그리고 다시 그곳엔 뒷 동산을 대신할 공원이 생기고 지금도 낯선 아이들의 초등학교에서 가을 운동회 소리가 들리지만 선듯 들어가 볼 마음이 생기지 않으니 진정한 내 고향은 기억속에서나 찿아야 겠지요. 할아버지는 손자와 함께 그 곳을 거닐며 옛 기억을 더듬어 혼자 말인 듯 말해 주지요. 이쯤에 할아버지가 살았던 옛집이 있었지. 그리고 저기 저쪽에 우리 논밭이 있었고.. 가만 있자. 네 증조할아버지 산소가 있던 곳이 어디더라... ▷ 우리 고향 향남은 왜 도시화. 개발 압력이 높았나.
향남은 東으로는 경부철도와 경부 고속도로 등 국가 대 동맥의 교통이 발달되고 西로는 서해안 고속도로와 평택 당진항 등 물류 중심의 국가 간접자본 투자가 활발하고 南으로는 향남제약 단지와 발안산업단지,금의공단 등 산업입지로 대규모 공단이 자리 잡고 北으로는 수원,용인 그리고 태안,동탄 등 제2기 신도시가 주거단지 위주로 개발됨에 따라 수도권 과밀.팽창에 따른 자연 확장의 영향이 미치게 되고 수도권 제2 순환 도로가 화성의 중심을 꿰 뚫고 지나가게 되고, 43번 국도와 신.구 39번 국도가 남북으로 동시에 관통되고 82번 지방도가 동서로 지나가는 중심에 위치하는가 하면 경부 고속 철도와 호남고속철도의 교차점의 최적지로 거론 되는 등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산업단지와 주거개발 수요가 점증하는 필연적인 지역이 되었다. 또한 박정희 정부 시절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내용에 환 아산만권 광역 개발계획에 이미 포함되어 개발이 예고되어 있었으며, 아산만에 평택.당진항이 대규모로 개발 가동되고, 주변에 기아자동차와 현대자동차가 들어와 그 관련 협력업체가 화성 지역으로 자리를 잡게 되며 수도권 1,2기 신도시 택지지구에 있던 공장들이 대거 이주해 오면서 폭발적인 인구증가와 이에 따른 대규모 주거 수요가 뒤 따르게 되었다. 향후에도 황해 경제 자유구역 지정으로 추가 개발 수요가 있고 수도권 제2 순환도로의 개통과 송산 그린시티, 화성시 공설운동장 등 체육.문화 관련 시설들이 입지함에 따라 명실 상부한 화성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이는 향남 2지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추가로 주거지역 개발에 따른 토지 수용을 예상하게 하는 것이다. 다행히 수용을 면한 지역은 그 발전의 혜택을 보게 될 것이나, 고향 마을을 내어 주는 주민의 입장에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발전이요.개발이 될 것이니 그 명암이 엇갈릴 것이다. 전국적으로 주택 보급률이 100%를 넘어 서고 있으나 수도권은 아직도 90% 이하에 머물고 있으며 이에 따라 향남은 추가 택지개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아! 내 고향이 사라지다니..
고향을 잃는 향남2지구 주민들의 서러운 마음을 표현해 보았습니다. 내 할배가 오두막집 지으셨고. 울 어미가 무쇠솥에 보리밥 지어 나와 내 부모 형제 허기진 배 채워 주던 내 고향을 그만 떠나 가래요. 아지랑이 아물 거리는 들판 끝으로 꼬부랑 논길 따라 단숨에 달려오던 마당 가득 곡식이 널려있던 고향집은 이제 꿈속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건가요? 종달새 소리 가슴 울렁이는 봄이 오면 뒷동산에 흐드러지게 피던 진달래는.. 울가에 활짝 웃던 노란 개나리는 어찌하고. 할아버지 무덤가에 피어나던 할미꽃은 또 어찌 할꼬나. 여름이면 가슴까지 시원하던 그 소낙비는 이제 정든 땅을 떠나 어느 낯선 곳에 내리고. 넓은 들판을 가득 뒹굴던 온갖 과일들은 누굴 위해 고운 빛으로 익어 가려나. 가을 들녁에 황금물결과 안개 자욱한 이슬 들길은. 색깔 고운 앞산 단풍과 눈 위에 선명한 산토끼 발자욱은.. 다시 봄이 오면 버들강아지 손 씻던 실개천을... 이제 내 고향땅에서 더는 볼 수 없는 거지요.
아이고 데고나 서러워라. 나 태어나 처음으로 탯줄 묻은 곳 내 아비 어미의 육신이 묻혀 편히 잠든 곳 그리고 내 후손이 다시 천년 만년 살아가야 할 하나 밖에 없는 내 고향 땅이여! 쳐다만 보아도 배 부르던 문전 옥답을. 손길 다은대로 밥상 차려주던 양념꺼리 텃밭을.. 지친 내 처자가 곤히 잠들던 보금자리를... 그만 내어 주고 떠나 가래요. 돈으로 보상해 줄테니 멀리 떠나 가래요.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고향에 대한 애착이 매우 크다. 그도 그럴 것이 수 많은 추억과 자신이 땀 흘려 개척한 논밭과 가족과 함께 살던 집과 함께 정을 나누던 이웃과 친구들에 대한 그 기억들을 쉽게 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이에 따른 산업화에 결국 우리의 고향도 개발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어 정든 고향의 보금자리를 내 주고 뿔뿔이 흩어져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살기에 우리의 역사와 삶을 사이버 고향 전시관이라는 현대 문명의 도구를 빌어 사이버 공간 내에 다시 고향을 구축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공간에는 그 동안 우리가 살아온 모습과 이야기가 담기고, 신도시가 완공되면 중앙공원에 우리의 흔적들을 전시할 향토 전시관이 만들어져 옛 물건들을 전시 하게 됩니다.
그동안 택지개발 과정에서 무지와 오해 그리고 의사 전달 체계의 막힘에서 비롯된 주민들간 수 없이 많은 갈등과 반목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잘해 보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가슴 아픈 일들 이오니 이제는 서로가 모두를 용서하고 포용해서 앞으로는 더 이상 마음의 상처를 입지 말고 치유하는 일에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발안 이라는 지역사회는 모두 한 생활권에 속해 있어 발안 주변으로 이주를 하신 분들은 차후에도 자주 만날 기회도 생기고 학교, 읍사무소,보건소.농협 등 생활 여건이 별로 변할 것이 없으니 고향을 떠난 서운함이 다소 덜 할 것이나 완전히 생활권을 달리 하신 분들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 하는데 시간도 걸리고 마음 고생도 매우 크리라 짐작 됩니다.
▷ 마치는 글 그 동안 고향의 택지개발 수용으로 인해 3년여 시간을 마음 고생하신 주민 여러분! 그리고 자신의 생업에까지 지장을 받으며 시간과 경비를 들여 대책위 활동을 위해 헌신하신 대책위원장 이하 위원 여러분! 이제 우리의 고향은 저 저무는 태양처럼 택지개발이라는 정부 정책의 희생양이 되어 이제 그 모습은 우리 앞에서 모두 사라져 갑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과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동안 대책위 활동은 정말 열정적이고 체계적이며 또 효과적이어서 수용 주민의 재산권을 지켜 내는데도 일조를 했다고 대 내외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성원을 아끼지 않으신 주민 여러분들의 참여와 격려가 없었더라면 이와 같은 성과는 이루기 어려웠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동안 축적된 경험과 업무 지식은 차후에 수용.개발되는 지역의 주민들에게 나눠 주어 그들이 마음 고생을 덜 격게 하고 효과적으로 보상을 받아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하는데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화성시와 토지공사 관계자 여러분께서도 그 동안 여러 차례 충돌과 갈등의 시간도 있었지만 이를 슬기롭게 잘 해결하여 여타의 불상사 없이 택지개발이 이루어 지게 된 점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향을 비록 사이버 세계와 지면으로 나마 구축해 주고자 노력하신 토공과 (주) 역사 만들기 제작팀 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불편한 마음속에서도 취재에 적극 협조해 주시고 옛 물건들을 향토 전시관에 선듯 기증해 주신 주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향남 2지구의 개발 관련 역사를 한정된 지면에 다 서술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능력이 부족한 점을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라오며 향남2지구 인터넷 카페에 그 동안의 활동 사항과 기록이 더 많이 수록 되어 있으니 부족한 부분은 인터넷 카페를 참고 하시기 바라며 빠진 부분은 여러분 스스로 글과 사진을 올려 보충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사이버 고향 전시관은 홈페이지로 구축 되어 향후 지속적으로 운영 될 예정이오며 여러분의 참여와 관심이 그 성공 여부를 결정하게 될 것으로 봅니다. 수용주민 여러분! 항상 건강하시고 가정이 평안하시며 하시는 일 모두 만사형통 하시길 두손 모아 빌면서 이만 부족한 펜을 놓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자년 정월에 고향을 떠나가며... 대책위 사무국장 일을 보았던 안대환 씀. |
첫댓글 본 글은 소정의 고료를 받은 원고로써 (주) 역사 만들기 회사에 그 저작권이 있어 무단 전재 및 도용을 금하며 향후 향남 2지구 사이버 고향 전시관 및 마을지에 게재할 예정입니다. 다만 그동안 본 카페를 사랑해 주신 회원 여러분의 성원에 보답코자 사전 열람이 가능토록 게시 하오니 많은 지도 편달 있으시길 바랍니다.
수고 했습니다... 아품과 그 아품을 딛고 살아야만하는 우리의 심정을 개탄합니다...
그동안 참 수고들 많이 하셨구요~수용 주민의 심정과 처지를 잘 표현해 주셔서 좋왔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고향의 중요함이 점점 더 할것 같아요. 전말을 다 보니 당시는 대책위원들께서 마음고생도 많았겠네요.글로 적은 것이니 [누구 말이 맞는거야] 하고 의문을 가질 것 없이 다 검증이 가능한 것이니까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