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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전설
- 개 요
전설은 역사체험의 결정체이다. 전설은 역사상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전설이 비현실적인 모티프(motif)들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허황된 것이기에 앞서 구비전승을 위해서 필요한 장치이다. 인상이 선명해야 영원히 전승될 수 있다. 전설은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신성을 강조하는 신화나 흥미를 강조하는 민담과 구별된다. 신화나 민담과는 달리 전설은 구체적인 증거물을 제시한다. 그 증거물은 산, 바위, 높, 폭포 등 자연물일 수도 있고 역사적인 인물일 수도 있다.
전설을 생산하고 향수하는 계층은 주로 기층민이다. 따라서 전설에서 우리는 기층민의 역사인식을 읽을 수 있다. 기층민의 역사인식은 상류지배층의 역사인식과 다를 수밖에 없다. 똑같은 역사적 사건을 대상으로 하였더라도 지배계층의 어느 개인이 기록으로 남긴 역사문헌과 기층민 사이에서 공동으로 전승되고 있는 전설은 역사를 보는 시각에서 판이한 차이를 드러낸다.
전설은 생성과 전승의 범위가 그 지역에 국한된다. 이것은 전승범위가 민족전체로 확장되어 있는 신화나 전승범위에 제한이 없는 민담과 구별되는 점이다. 따라서 전설은 그 지역의 특수한 삶의 체험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그 지역민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 향토애를 길러 주기도 하고 삶의 태도를 반성하게 하는 지침이 되기도 한다. 전설은 역사성과 문학성을 공유한다. 전설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역사이고 그 사건을 소재로 하여 상상력이 풍부한 모티프들의 결집체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는 문학이다.
이처럼 전설은 그 지역 기층민들의 역사체험에서 우러난 문학적 창조물로서 기층민 나름대로의 역사인식을 담고있으며 지역민들의 정신적 구심점과 삶의 지표로서 기능하고 있다. 누군가가 구태여 기록으로 남겨 놓지 않더라도 전설이 유구한 세월을 두고 전승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전설이 역사성과 문학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때 그 전설의 가치는 기층민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진실한 역사인식과 기층민들의 창조적 상상력에 있다.
전설은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면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곧 존재를 창조하는 행위이다.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꽃이나 바위는 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로서 인간의 의식 밖에 있다. 사물은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의식 속으로 들어와 인간과 유기적인 관련을 맺는다.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곧 존재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과의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특정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전설에서의 유래담이 이에 해당한다.
춘천지역에 전승되고 있는 전설의 경우, 남산면 수동리의 할미바위, 신북면 발산리와 서면 방동리의 신선바위, 동면 감정리의 용바위, 신북면 발산리와 동산면 봉명리의 아들바위, 신동면 의암리의 옷바위, 서면 안보리의 귀바위, 동면 지내리의 무당바위 등은 간단한 유래담을 가지고 있다. 그 유래담이 지나치게 단순하기는 하지만 이들 바위는 이름을 부여받았기에 이름없는 다른 바위들과 크게 구별된다. 사북면 고성리와 지암리의 무당소, 서면 당림리의 파일골 등의 유래담도 이와 같은 수준의 전설이다.
신북면 유포리의 마적산, 서면 안보리의 멀두봉, 동면 월곡리의 맹이산, 동산면 봉명리의 연엽산과 구절산, 신동면 팔미리의 오소리봉, 남산면 행촌리의 미역골, 남면 한덕리의 매봉 등은 그 형태에 의미를 부여한 경우이다. 즉 옛날 천지개벽할 때에 홍수가 져서 온 세상이 물에 잠기고 산봉우리의 윗 부분만 물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 모습과 이름을 연관시켜 전설을 만들어 내었다.
존재의 창조와는 반대로 존재의 소멸이 전설화되는 경우도 있다. 북산면 물로리, 사북면 송암리, 신북면 지내리, 서면 안보리, 남면 가정리 등에 전승되고 있는 폐사전설이 그것이다. 빈대가 들끓어 절이 망했다는 것이다. 존재의 소멸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들 유래담은 생성초기단계의 전설로서 서사구조를 갖추고 있지는 못하다. 남면 가정리와 남산면 수동리의 효행(孝行)전설과 남면 박암리의 열행(烈行)전설은 서사구조를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 사실에 너무 근접해 있고 문학적 형상화가 덜 이루어져 있다. 이에서 우리는 실화가 전설화하는 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북산면 가리산의 가리산 산신이야기는 신화형성의 초기단계를 보여 주고, 신북면 율문리의 여우고개이야기는 민담이 지명과 결부되어 전설처럼 전승되고 있는 예를 보여 준다. 두 이야기 모두 신화화, 전설화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춘천지역에 전승되고 있는 수많은 전설 중에서 서사구조가 비교적 완벽하면서 역사적, 문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전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신동면 증리의 아기장수전설
- 서면 금산리의 장수전설
- 신북면 유포리의 장자(長者)못전설
- 동산면 봉명리의 장자골 전설
- 서면 신매리의 부래산(浮來山)전설
- 동내면 거두리 및 효자동의 효행전설
- 북산면 청평리의 상사(想思)뱀전설
- 북산면 내평리 및 물로리의 한천자전설
- 퇴계동의 퇴계전설
신동면 증리의 아기장수전설은 우리나라 광포(廣布)전설 중의 하나이다. 광포전설로서의 아기장수전설은 지배계층의 강력한 억압 밑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던 민중의 역사체험을 형상화 하고 있다. 하늘이 내린 구세주인 아기를 그 부모가 압살시켜 버린다. 이 전설은 부모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있다. 부모의 근시안적인 태도, 개방적이지 못하고 가정의 테두리 안에 갇혀서 당장의 생명유지에만 집착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동면 증리의 전설은 아기장수를 압살시킨 주체가 부모가 아니라 동네사람들 혹은 일본사람들로 되어있는 것이 특이하다. 관군이 등장하지 않는 점에서는 강원도지역의 전설과 공통된다.
아기장수전설 특유의 처절성이 많이 약화되어 있다. 신동면 증리의 아기장수전설은 금병산 뒤의 장수골이라는 마을과 동내면 학곡리의 용마무덤을 증거물로 가지고 있으며, 증리(실레마을)에 살았던 김유정의 단편소설 『두포전』(1939)의 모태가 되었다.
서면 금산리의 장수전설은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어른장수가 태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어 특이하다. 잦은 외침과 이에 대한 지역민들의 수호의식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장군봉, 장군굴, 방동리의 마산, 현암리의 칼산, 중도의 말무덤 등을 증거물로 가지고 있으며,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안정효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1990)의 모태가 되었다.
신북면 유포리의 장자못전설은 광포전설이다. 서민들이 인색한 부유층에 대해서 갖는 적개심을 천상적인 존재가 지상의 악인을 징벌하는 구조로써 표현하고 있다. 이 유형의 전설은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소돔(sodom)전설과 그 기본구조가 같다. 신북면 유포리의 장가못전설은 장자의 인색함을 특히 강조하고 있으며 며느리의 인간상에 대해서는 새로운 해석을 내리지 않고 있다. 인간존재론적 시각에서 며느리는 초월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인데 이런 면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으며, 다른 지역의 전설에서는 며느리가 서낭신으로 좌정하는 경우도 있으나 유포리의 전설에는 이러한 모티프가 들어 있지도 않다. 증거물로는 아침못만 있다.
동산면 봉명리의 장자골전설도 장자못전설과 함께 광포전설이다. 장자못전설과 장자골전설은 여러가지 면에서 비교가 되는 두 유형의 전설이다. 이들 전설은 시아버지-며느리-중의 인물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과 부자의 몰락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러나 몰락의 원인이 전자에서는 시아버지의 인색함에 있고 후자에서는 며느리의 경솔함에 있다는 점, 그리고 징벌의 방법이 전자는 직접적이고 후자는 간접적이라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광포전설로서의 장자골전설에서는 중이 며느리로 하여금 바위를 깨뜨리게 함으로써 그 부자집을 몰락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동산면 봉명리의 장자골전설에는 이러한 모티프가 들어 있지 않다.
서면 신매리의 부래산전설도 광포전설이다. 부래산전설은 원래 신성한 존재의 도래를 진술하는 신화가 전설화한 것이다. 크기가 작고 산맥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주위의 형세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어 마치 장마 때 다른 곳에서 떠내려온 것처럼 생각되기 쉬운 산에 흔히 이러한 전설이 붙는다. 서면 금산리 고산(孤山)도 예외가 아니다. 고산은 모래벌 가운데 오똑하게 홀로 솟아있는 조그마한 바위산이다. 이 고산은 금성(金城)에서 떠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전설은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던 서민들의 역사체험에서 우러난 것이다. 그리고 부패한 관리, 무기력한 기성세대, 정의롭고 용기 있는 신세대의 등장인물구조는 전형적인 희극의 공식에 정확히 부합한다.
동내면 거두리 및 춘천시 효자동의 효행전설도 광포전설이다. 효행전설은 역사상에서 유교윤리를 특히 강조하던 시절에 형성된 것으로 오락적 기능보다 교육적 기능에 그 비중을 두고 있는 전설이다. 우리나라의 효행전설은 삼대를 등장인물로 설정해 놓고 주인공의 부모와 자식을 대비시키면서 부모를 위하여 자식을 희생시키는 것이 기본구조이다. 부모를 살리기 위하여 자식을 죽이는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 줌으로써 효도는 비장한 결단임을 강조한다. 어머니의 병환을 낫게 해 드리려고 어린자식을 가마솥에 삶아서 드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마솥에 삶은 것은 자식이 아니라 산삼이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효자가 난관에 봉착해 있을 때 호랑이가 나타나서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도 우리나라 효행전설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모티프이다. 거두리와 효자동의 효행전설에서는 가마솥에 삶는 대상이 어린 아들이 아니라 산 속에서 찾아낸 시체인 것이 특이하고 호랑이가 난관을 해결해 주는 것은 다른 효행전설과 같다. 거두리, 효자동이라는 지명을 증거물로 가지고 있으며 주인공은 조선시대의 반희언(潘希彦)으로 되어 있다.
북산면 청평리의 상사뱀전설은 이 지역에서만 전승되고 있는 특수전설이다. 상사뱀이야기는 민담에 나타나는 모티프인데 이것이 청평사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결합되어 전설이 되었다. 고려 충숙왕 때 원나라의 태정왕후는 청평산 문수사(지금의오봉산 청평사)에 지시하여 그녀의 자녀들의 복을 빌어 주고 자녀들의 생일에는 매년 잔치를 크게 베풀도록 하였다. 당시에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다. 고려에서는 원나라 태정왕후의 뜻을 받들어 문수사에 비석을 세웠다. 그 비문에 의하면 원나라의 황후는 은혜를 베풀어주는 훌륭한 인물이며 고려는 원나라의 시혜에 대해서 큰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황후의 자녀들을 정성껏 받들어 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1327년에 세운 이 비석은 1819년 이전에 누군가에 의해서 다섯 동강으로 깨뜨려졌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전설이 생겼다. 그 전설에 의하면 중국의 임금은 잔인하며 공주의 위기에 대하여 속수무책이다. 중국의 대사찰에서도 공주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국에 대해서 구원자이다. 중국의 대사찰에서도 구원하지 못한 공주를 우리나라의 절에서는 구원해 준다. 비문의 내용과 전설의 내용은 이처럼 대조적이다. 그리고 지금 청평사에는 비석은 없고 비석을 세웠던 자리만 남아있지만 전설은 계속 전승되고 있다. 청평사, 회전문, 공주폭포, 공주탑 등을 증거물로 가지고 있다.
북산면 내평리 및 물로리의 한천자전설도 특수전설이다. 머슴이 아버지의 묘를 잘 쓰고 중국의 천자가 되는 줄거리로 되어 있는 이 전설은 궁핍한 서민이 가지는 신분상승의 욕망이 풍수(風水)관념과 결합되어 실현되고 있으며 중국에 대한 우월감도 적절이 가미되어 있다. 현상의 초월을 본질로 하는 골계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이 전설의 특징이다. 달걀 모티프는 풍수설화에 흔히 나타나는 것이고 북 모티프는 신화의 흔적이다. 지금은 소양댐 속에 잠겨 와는 내평리 한터마을, 물로리의 한총, 한총 근처의 붉은 흙, 배소구미 옆 산줄기의 형상 등을 증거물로 가지고 있다.
퇴계동의 퇴계전설도 이 지역에서만 전승되고 있는 특수전설이다. 공지천(孔之川)의 원래 이름은 곰짓내이고 퇴계동의 원래 이름은 무린개이다. 곰짓내가 동북쪽으로 물러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냇물이 뒤로 물러갔다는 뜻의 무린개를 한자식 표현으로 바꾼 것이 퇴계동(退溪洞)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황(李滉, 1501∼1570)의 호와 일치하고 마침 이황의 어머니가 춘천박씨여서 퇴계전설이 생겨났다.
퇴계에 관한 전설은 여러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한 유형이 춘천에서 전승되고 있다. 퇴계전설들은 율곡전설들과 유사한 것도 있고 대조적인 것도 있다. 용왕의 아들을 가르치고 용궁에 갔다온 이야기, 귀신을 물리치는 이야기, 죽을 운명에 있는 사람을 살려내는 이야기 등에서는 두 사람의 전설이 유사하다. 그러나 퇴계는 인간의 본능을 자연스럽게 긍정하는 데에 반해서 율곡은 인간의 본능을 억제하고 결백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전설은 대조적이다. 퇴계의 모친과 율곡의 모친이 춘천 및 강릉과 인연을 가진 분이어서 두 성인의 전설이 강원도를 배경으로 전승되고 있다.
- 자 료
* 신동면 증리의 아기장수전설
(1) 신동면 증리 금병산 뒤 장수골에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2) 부인이 아들을 낳았다.
(3) 아기의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 있었다.
(4) 동네 사람들이 아기의 날개를 잘라 버리자 아기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혹은 일본사람들이 아기에게 뜨거운 물을 부어 죽였다).
(5) 아기가 태어나자 용마도 태어났는데 이 용마는 아기가 죽자 따라 죽었다.
(6) 용마의 무덤은 동내면 학곡리에 있다.
* 서면 금산리의 장수전설
(1) 서면 금산리에 장군봉이 있는데 이 장군봉 위에 장군굴이 있다.
(2) 우리나라 조정이 권력 다툼으로 혼란할 때 장군굴에서 장군이 태어났다. 나라에서 이를 알고, 그 장군을 장군굴에 몰아넣고 횟물을 부어 죽였다.
(3) 외국이 우리나라를 침범해 왔을 때 또 장군이 태어났다. 장군이 장군터로 내려오자 방동리 (芳洞里)의 마산(馬山)에서 날개 달린 말이 나왔다. 장군이 말에 올라타자 현암리(玄岩里)의 칼산에서 칼이 나왔다. 장군이 칼을 잡으려는 순간 적군이 장군을 무찔렀다. 장군은 버들버들 떨다가 죽었다. 그곳이 현암리의 버드래(버드내, 柳浦)이다. 말도 죽었는데 말무덤은 중도(中島)에 있다.
(4)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이 장군굴 속에 불을 피웠다. 막 태어나려던 장군이 굴속에서 죽었다. 일본사람들은 장군이 다시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장군봉에 돌못을 박았다.
(5) 그러나 앞으로도 나라가 위태로울 때이면 장군은 또 태어날 것이다.
* 신북면 유포리 장자못전설
(1) 신북면 유포리에 부자가 살고 있었다.
(2) 중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자 부자는 쇠똥을 퍼주었다.
(3) 며느리가 중에게 쌀을 시주하였다.
(4) 중은 며느리에게 자기를 따라오되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였다.
(5) 산중턱에 이르러 천둥소리가 나서 며느리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6) 부자집은 물 속에 잠겨 있었다.
(7) 며느리는 그 자리에서 바위가 되었다.
(8) 유포리에 있는 아침못은 바로 그때 생긴 것이다.
* 동산면 봉명리의 장자골 전설
(1) 동산면 봉명리 웃산거리에 부자가 살고 있었다.
(2) 부자집이라 손님이 많이 찾아왔고, 며느리는 손님을 대접하느라고 늘 고된 부엌일을 해야 했다.
(3) 시주 온 중에게 며느리는 손님 좀 오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4) 중은 손님이 오지 않게 해주었다.
(5) 부자집이 망했다.
* 서면 신매리의 부래산전설
(1) 장마때에 금성(金城)에서 산이 떠내려오다가 서면 신매리에서 멈추었다.
(2) 금성의 관리가 매년 이곳에 와서 그 산에 대한 세금을 받아갔다.
(3) 이 고을사람들은 매년 세금을 내어서 가난해지고 고을 원님은 고민에 빠졌다.
(4) 원님의 어린 아들이 금성 관리에게 이 산을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5) 그 후로는 세금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
(6) 서면 신매리에 있는 고산(孤山)이 바로 그 산이다.
* 동내면 거두리 및 효자동의 효행전설
(1) 지금의 효자동에 한 총각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2) 어머니가 병환으로 누웠다.
(3) 총각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대룡산에 가면 시체 세 구가 있을 것이니 그 가운데 시체의 목을 잘라다가 푹 고아서 어머니께 드리라고 하였다.
(4) 그대로 하였더니 어머니의 병환이 나았다. 알고보니 그것은 시체가 아니라 산삼이었다.
(5) 어머니는 한겨울에 딸기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6) 총각이 대룡산에 가 보니 신기하게도 딸기가 있어 그것을 땃으나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다.
(7) 호랑이가 나타나 총각을 집에까지 태워다 주었다.
(8) 동내면 거두리(擧頭里)는 그때 총각이 시체의 머리(頭)를 들고(擧) 온 곳이며 춘천시 효자동은 그 총각이 살던 곳이다. 그리고 그 총각의 이름은 반희언(潘希彦)이다.
* 북산면 청평리의 상사뱀전설
(1) 중국의 미천한 총각이 공주를 사랑하였다.
(2) 중국의 임금이 그 총각을 죽였다.
(3) 총각은 죽어서 뱀이 되어 공주를 찾아와서는 공주의 몸을 감고 풀어주지 않았다.
(4) 공주는 중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뱀을 풀어달라고 빌었으나 효험이 없었다.
(5) 공주는 우리나라의 명산대찰을 찾아 강원도 춘천의 청평사로 왔다.
(6) 청평사 앞에 이르러 공주는 뱀에게 절에 들어가 불공을 드리고 올테니 잠깐만 풀어달라고 말하였다. 중국에서는 전혀 말을 듣지 않던 뱀이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말을 잘 듣고 공주를 풀어주었다.
(7) 공주는 절에 들어가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8) 공주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뱀은 공주가 나오지 않으므로 절로 기어들어가기로 하고 회전문에 이르자 갑자기 뇌성벽력이 울리며 폭우가 쏟아졌다. 뱀은 회전문 앞에서 회전하여 물에 쓸려 나갔다.
(9) 공주는 비로소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10) 청평사에 회전문이 지금도 남아 있고 청평사 계곡의 공주폭포는 그 때 뱀이 쓸려간 폭포이다.
* 북산면 내평리 및 물로리의 한천자전설
(1) 북산면 내평리 한터마을에서 한 총각이 아버지와 함께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다.
(2) 아버지가 돌아가시었는데 산소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 남새밭 옆에 가매장해 놓았다.
(3) 어느날 저녁에 중이 상좌와 함께 찾아와 머슴방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4) 중이 머슴에게 달걀을 달라고 하여 머슴은 쇠여물 끓이는 가마에 달걀을 삶아서 중에게 주었다.
(5) 한밤중에 중이 상좌와 함께 밖으로 나가자 머슴이 몰래 그들의 뒤를 따랐다.
(6) 중은 가리산(加里山) 중턱에 이르러 지형을 살펴보고 나서 달걀을 땅에 묻었다.
(7) 한참 후에 달걀 묻은 자리에서 닭이 쾌를 치며 울었다.
(8) 중은 이곳이 명당자리라고 상좌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묘를 쓰려면 세 가지를 지켜야 하는데 그것은 금관을 써야 하고, 황소 백 마리를 잡아야 하고, 하관할 때 투구철갑한 사람이 곡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9) 머슴은 이 말을 엿듣고, 이튿날 노란 귀리짚 공석으로 부친의 시신을 둘러싸아 가지고 그 명당자리로 갔다. 투구처럼 솥뚜껑을 머리에 쓰고 곡을 하고, 옷을 벗고 황소 같은 이 백 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신을 그 명당자리에 묻었다.
(10) 머슴은 중국으로 갔다. 어느 대처에 이르니 많은 사람이 모여 천자를 뽑고 있었다. 짚으로 만든 북을 쳐서 소리나는 사람이 천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11)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차례대로 북을 쳤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12) 머슴이 북을 치자 북소리가 온 장안에 울려퍼졌다. 바로 그때 춘천 가리산에서는 머슴 부친의 시신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13) 머슴은 중국의 천자가 되었다. 그가 곧 한천자이다.
(14) 세월이 흐른 뒤에 중국 황실에서 한천자 부친의 묘가 조선의 가리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치산(治山)하러 오려고 하였다.
(15) 조선의 조정에서는 가리산에 가려면 십년강(지금의 의암댐이 있는 신연강)을 건너 삼천리(춘천시 삼천동 혹은 신북면 산천리) 버덩을 지나 구만리고개(구만이고개)를 넘어야 한다고 했다.
(16) 중국의 황실에서 이 말을 듣고 치산을 포기하였다.
(17) 한천자가 된 머슴이 살던 한터마을은 지금 소양댐 속에 잠겨 있고, 한천자부친의 무덤인 한총은 물로리에서 가리산에 오르는 곳에 있다. 천자 부친의묘로는 좀 초라하지만 그것은 그때 치산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소구미 옆의 산줄기는 중턱이 허물어진 형상인데 그것은 한천자 부친의 시신이 용이 되어 나가면서 산을 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덤 근처에는 지금도 비
가 오면 물이 붉게 흐르는데 그것은 머슴이 장례지낼 때 황소 같은 이 백 마리를 잡아 그 피가 아직도 거기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 퇴계동의 퇴계전설
(1) 퇴계 이황이 춘천 퇴계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2) 강아지가 찾아와서 마루 밑에 쭈그리고 앉아 글을 배웠다.
(3) 퇴계는 끼니때마다 자기의 밥과 반찬을 강아지에게 나누어 주었다.
(4) 그 강아지는 원래 용왕의 아들인데 용궁에서 학업을 게을리하여 용왕이 아들에게 개탈을 씌워 주며 퇴계 선생에게 가서 글을 배우라고 하였던 것이다.
(5) 용왕의 아들인 강아지는 삼년 동안 글을 배우고 용궁으로 돌아갔다.
(6) 용왕의 아들이 이번에는 초립동이의 모습으로 다시 찾아와서 퇴계를 용궁으로 모셔갔다. 용왕이 은혜를 갚으려고 퇴계를 모셔오게 한 것이다.
(7) 퇴계는 용궁에서 며칠 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8) 용궁에서 나올 때 용왕은 퇴계에게 짚 한 오라기를 주며 조금씩 잘라 잡수시라고 했다.
(9) 세상에 나와 그대로 하니 그것은 용궁에서 먹던 진미의 고기였다.
(10) 지푸라기가 조금만 남았을 때 퇴계는 그것을 공지천에 넣었더니 수많은 고기가 되었다. 그후로는 공지천에 손을 넣기만 하면 고기가 한 마리씩 잡히었다. 그것이 바로 공지천의 공지어이다.
(퇴계가 머슴에게 여물을 썰게 한 다음 그것을 삼태기에 담아 공지천에 넣었더니 여물로 썬 조각들이 전부 공지어로 되었다고 하는 각편의 전설도 있다.)
<춘천백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