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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라(마 18:21-35)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에게 속한 것은 유리하게 해석하고, 자기가 하는 일은 다 관대하게 봐주고, 자기에게는 100점 이상의 후한 점수를 줍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은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 늘상 잘못해서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으로, 평균 점수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는 항상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하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나에게 찾아와 용서를 빌어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눈에 들어 있는 티는 잘 보면서도, 자기 눈 안에 들어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있는데, 믿음의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감추려고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죄를 범한 엄청난 죄인들입니다. 어찌 하나님 앞에서만 그렇겠습니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완전무결한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이 봤을 때, 그냥 흠결이 가득한 불량품일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크신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고, 용납하시고, 인정해주는 것을 생각한다면, 용서하지 못할 일들이 어디 있으며, 용서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폭염과 무더위가 더욱더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작은 일에 분노하며 살아가기보다는 이해하고, 용납하며,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용서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21-22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내게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몇 번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요?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면 충분하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세 번까지 참을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세 번까지 참을 수 있을까요? 한 번 용서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세 번까지 용서하라”는 랍비의 가르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칭찬을 듣고 싶어서,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기대는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진짜 용서는 끝이 없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는 “세 번도 아니요, 일곱 번도 아니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는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임금에게 만 달란트를 빚진 종 하나가 있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우리가 발버둥치며 번다고 해도 벌 수 없는 천문학적인 금액입니다. 기간을 연장해 준다고 해도, 이자를 면제해준다고 해도,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여 돈을 번다고 해도, 절대로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그 종은 결코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임금은 그 종에게,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빚을 갚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실제로 그 돈을 받겠다는 것보다는 그에 합당한 형벌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종으로서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종은 임금에게, “제발 참아달라”라고 빌었습니다. 임금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탕감해 주었습니다. 한두 푼도 아니고, 만 달란트를 아무런 조건없이 탕감해 주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 역사에 이런 임금에 대한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그 종은 임금으로부터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더 이상 빚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의 몸으로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아무런 조건없이,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이 종의 기분을 상상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겠습니까?
그 종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임금이 탕감해 준 자신의 빚과 비교해 보았을 때, 아주 아주 작은 금액입니다. 그런데, 종은 그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다가, 결국 동료를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길에서 벌어진 일을 다른 동료들이 보았습니다. 이것은 동료들의 눈에도 납득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 은혜를 알지 못하는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달려가서, 그 일을 다 알렸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그 종을 불러다가, 아주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그 종은 결국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임금과 종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죄의 용서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용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탕감받은 죄악은 만 달란트에 해당하는 엄청난 죄악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사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죄를 살펴보면, 백 데나리온 정도에 해당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와 허물을 모두 다 용서받았는데,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아주 적은 죄와 허물은 “용서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용서는 아무리 강조하고 강조한다고 해도, 지나치지가 않습니다. 용서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용서는 우리 인생에서 경험하는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 나에게 빚진 것이 있는데, 그것을 아무런 조건없이, 다 탕감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누군가, 나에게 잘못한 것이 있는데, 용서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버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미디안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팔아버렸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팔려 와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훗날, 요셉이 그의 형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기근과 가뭄을 피하여 애굽에 내려온 아버지 야곱과 그의 형제들을 잘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이 죽자, 그의 형들은 요셉이 그들에게, 그 옛날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복수할까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요셉은 그런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20-21)라고, 오히려,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서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어쩌면, 그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믿음으로, 그 모든 것들을 극복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온 힘을 다하여, 형들과 그의 자녀들을 돌보았습니다.
요셉처럼, 자기를 죽이려고 했고,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말로는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만 달란트 빚진 자였습니다.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빚을 다 탕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후에도,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누군가를 용서해야만,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그런 뜻은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내용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만 달란트 빚진 자였습니다. 만 달란트 빚을 졌다고 하는 것은 절망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다는 뜻입니다.
만 달란트는 우리가 범한 죄의 크기를 말해 주고 있으며, 더불어, 그 죄를 갚을 수 없는 우리 인간의 무능력함을 의미합니다. 만 달란트의 빚을 진 인생은 답이 없고, 길이 없는 절망 그 자체입니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는 것만이, 만 달란트의 빚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힘쓴다 해도, 만 달란트의 빚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 달란트의 의미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만 달란트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와 사랑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탕감해 주셨습니다. 모든 것들을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 달란트와 같은 크고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찬송가 216장 4절 가사입니다.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우리는 만 가지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받았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살아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용서하는 삶을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용서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 주시려고, 이웃의 잘못을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모든 형벌을 탕감해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은 사람은,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며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도 은혜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친절을 베풀고, 이해하고,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하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이 지금보다는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십자가 위에서, 멸시와 조롱을 받으시던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은 “용서하여 달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모욕하고, 조롱하고, 무자비하게 내려치고 핍박한 사람들, 십자가에 매달고 못을 박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것인데,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조롱하고 멸시하던 사람들조차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용서를 말씀하셨고, 사랑을 강조하시다가, 죽으실 때에도, 용서의 기도를 드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용서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본받아,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우리가 머무는 자리에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대립과 다툼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용서와 사랑이 없다면,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기에, 부끄러울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이 없다면,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용서와 사랑이 없다면,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이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용혜원 시인의 시 중에 “우리들의 삶의 무대가”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무대가 / 막을 내리기 전에 / 마음껏 행복을 누리며 / 살아가야 합니다 // 죽음이 언젠가 우리를 / 갈라놓을 걸 생각하면 / 사소한 일에 가슴 아파하고 / 미워해야만 할 이유가 없습니다 //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 점점 줄어드는 / 삶의 시간들 속에 / 마음껏 기쁨을 누리며 / 살아가야 합니다 // 열렬히 사랑해도 / 언젠가 둘 중에 하나는 / 홀로 남을 것을 생각하면 / 작은 일로 화를 내고 투정할 필요 없이 / 삶을 온통 사랑의 시간들로 / 채워 나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소한 일에 가슴 아파하고, 미워해야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작을 일로 화를 내고, 투정할 필요 없이, 삶을 온통 사랑의 시간들로 세워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 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 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교만한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먼저 손 내밀며, 먼저 용서하며, 먼저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친구가 사막을 걷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걸은 후, 그들은 어느 지점에 이르러,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한 친구가 다른 친구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친구는 매우 아팠지만, 아무 말 없이, 모래 위에, 다음과 같은 말을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내 뺨을 때리다.”
그들은 계속 걸어 오아시스에 도착했습니다. 물 속에 들어갔다가, 뺨을 맞았던 친구가 수렁에 빠져,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뺨을 때린 친구는 그를 서둘러 구해 냈습니다. 친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그가 돌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내 생명을 구하다.”
그를 구한 친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까는 모래에 썼는데, 지금은 왜 돌에 쓰는 거야?”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누군가 나를 아프게 할 때, 모래에 쓰는 것은,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지워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지. 그렇지만, 누군가 내게 선을 행하면, 절대로 바람이 그것을 지을 수 없도록, 돌에 새겨 넣는 거야.”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만 달란트에 해당되는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런데, 백 데니리온에 해당되는 용서할 수 있는 작은 죄를 용서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그 사람만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라고, 벼르고 저주하는, 그런 마음은 없습니까? 그런 마음을 버리고, 조건 없이,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찌 보면, 용서는 용서받을 사람이 아니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나를 위한 것입니다. 용서하면, 반드시 기쁨과 감격의 기적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미움과 분노와 싸움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갈등과 분열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대립과 다툼이 일상화되어진 세상입니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며, 용서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었던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할 차례입니다.
용서함으로, 하나님의 더욱더 크신 사랑과 은혜 속에서, 날마다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용서를 받았으니, 용서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이 마음 변하지 않도록, 더욱더 큰 은혜와 사랑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