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게 삽시다.
-창12:1-4-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온 황일수 목사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본 받아야 하는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다윗, 모세, 엘리야, 사도바울, 다니엘 등등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믿음의 선배들인데요~~
이런 많은 믿음의 선배들 가운데 믿음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오늘 본문에 소개되어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우상을 섬기고 있던 아브라함을 선택하사 그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에게 복 주시사, 그의 자손을 통해 이스라엘 나라가 되게 하셨던, 참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자 그러면, 그는 어떻게 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 시작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익숨함을 포기하고 불편함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이 1절을 함께 읽어 볼까요? 시작!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어느날 아브람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떠난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목적이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목적지가 불분명합니다.
보여준 땅이 아니라, 보여줄 땅으로 가라하십니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어디로 가야하는 지 아브라함에게 가르쳐 주지 않은 채, 아브라함에게 조상적부터 오랫동안 살아오던 삶의 터전을 떠나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할지 확실한 목적지는 없었으나 그 말씀에 순종하면 얻게 될 복을 약속해 주십니다.
우리 같이 2~3절을 읽어 볼까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그 약속이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어딘지 모르지만 고향을 버리고 길을 떠나면, 후손을 낳아 그 후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어 아브라함의 그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아브라함이 복이 되어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제 이 부르심에 대한 선택은 아브라함에게 있습니다.
그곳이 정확하게 어디가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의 고향을 버리고 무작정 길을 떠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안정적인 고향에 머물것인지... 아브라함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어떠한 선택을 합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을 믿고 과감하게 어딘지 모를 불확실한 곳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당시 그는 자신의 떠남이 어떠한 의미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겠지만, 그 떠남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의 삶을 시작하게 되는 첫 발걸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결단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익숙함과 편안함에 대한 포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러분, 당시에 아브라함이 조상적부터 살아오던 고향을 떠난 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아십니까? 단순히 우리가 치앙마이 살다가 방콕으로 이사 가는 정도, 아니면 미국에 이민 가는 정도라고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다는 것은 자기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오던 유업을 포기한다는 것이며, 생명의 안전도 더 이상 보장 받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고대 사회에 있어서 땅은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땅은 농부나 목자에게 있어서 생계 수단이며 오랫동안 이어져 오던 삶의 터전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땅을 포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정되고 익숙한 편안한 삶을 포기한 것입니다.
또한 고대 사회는 치안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입니다.
길을 떠나가다가 강도를 만나거나 약탈로 생활을 이어가는 족속들을 만나면
재산은 물론이고 목숨도 다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는 정상적으로 죽어 장례를 치르는 것 그 자체를 축복으로 여기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향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간다는 것은,
마치 우리를 떠난 한 마리 양이, 맹수가 득실대는 숲속에서 길을 잃은 것과 같이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강도를 만나 재산을 다 빼앗기고 목숨을 잃게 될지 모를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함, 편안함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의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삶, 다시말하면 불편함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부로 살던 그들에게 배와 그물은 익숙함과 편안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배와 그물을 던져 버렸습니다. 익숨함과 편안함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익숙하지 않은 불편함을 선택했기에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의 사람으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앞에 익숙함, 편안함을 내려놓고, 순종의 삶,
즉 불편한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편하게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기꺼이 익숙함을 내려놓고 불편함을 선택하는 사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를 들어서
원래 성경을 읽지 않던 사람들이 매일 성경말씀 읽는 다는 것 익숙한 일이 아니기에 불편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안해 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말씀 안 읽으면 무슨 수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우리의 일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불편해도 시간을 정해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매일 시간을 정해, 기도하는 것 안해본 일이라면 그것도 불편한 일입니다.
그냥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 하는 게 익숙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늘깨어 기도하라 하셨기에 불편해도 일어나서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자기전에도 기도하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신자라면 불편해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절대로 불편하다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전도하는 것도 참 불편한 일입니다. 말꺼내는 순간 불편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복음을 전하라 하셨기에 불편해도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회사에서, 학교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불편하게 생활합시다.
내가 좀 손해 보더라도, 내가 희생하고, 내가 섬김으로, 내가 좀 더 수고함으로 그것을 통하여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진다면
그렇게 사는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야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복음이 확장되어가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의 사람으로 쓰임 받기 위해,
이제 편안함을 내려놓고 불편하게 살기로 결단합시다.
좀 불편해도, 말씀 읽고, 기도하고, 좀 불편해도 전도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렇게 살아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의 사람으로 쓰임받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