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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 정공 묘갈명 병서(篪叟鄭公墓碣銘並序) – 입재 정종로
나는 어릴 때부터 영양(永陽, 경상도 영천을 말한다)에서 정훈수(鄭塤叟)와 지수(篪叟) 선생 형제가 우뚝이 일어나 성인(聖人)의 도를 배우며 당세에 중망을 받고 후인들에게 모범이 되었다는 것을 들었으니, 내가 우러러 사모한 지 오래되었다. 지금 지수의 증손자 태섭(台攝)이 그의 종질(從姪) 유수(裕壽)를 보내 선생의 유집(遺集)과 행록(行錄)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며 묘도의 묘갈명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는데, 내가 사양했으나 되지 않았다. 이에 삼가 살펴보고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의 휘는 규양(葵陽)이고 자는 숙향(叔向)이며 성은 정씨(鄭氏)이고 본관은 오천(烏川)이다. 고려조에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습명(襲明)이 시조이다. 조선조에 이르러 휘 광후(光厚)는 공조판서를 지냈고, 2세를 지나 사성(司成)을 지낸 휘 종소(從韶)는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이 있었으며, 또 2세를 지나 참봉을 지낸 윤량(允良)은 도산(陶山)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이분이 강호수(江湖叟) 세아(世雅)를 낳았는데, 세아는 임진왜란 때 창의한 공로로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강의(剛義)이다.
그로부터 2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목사(牧使)를 지낸 휘 호인(好仁)이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는 휘가 시행(時行)으로 무공랑(務功郞)을 지냈다. 아버지는 휘가 석주(碩胄)로 생원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의성김씨로 진사 김방렬(金邦烈)의 따님이며 숭정처사(崇禎處士) 김시온(金是榲)의 손녀이다. 현종 정미년(丁未年, 1667, 현종 8) 4월 모일에 영천 대전리(大田里)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외모가 청수(淸秀)하여 마치 물속에서 나온 부용(芙蓉) 같았다. 타고난 자질이 영민(英敏)하여 배운 지 몇 년이 되지 않아 글을 지을 줄 알았는데,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을 구사하였다. 11세에 서울에서 벼슬하는 족조(族祖) 주부공[主簿公, 정호신(鄭好信)의 셋째아들인 정시찬(鄭時贊)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사견으로는 정호문(鄭好問)의 첫째 아들로서 1671년(현종 12) 무과 급제하여 훈련원주부가 된 정시창(鄭時昌)으로 봄이 맞다]에게 편지를 보내서 말하기를 “지금 국가에 우환이 많으니 원하건대 할아버지께서는 남쪽으로 왜구를 정벌하고 북쪽으로 오랑캐를 정벌하여 만고의 충신이 되십시오.”라고 하였으니, 듣는 자들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겨우 15세에 여러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두루 다 읽어 식견과 지업(志業)이 날로 크고 넓어졌다. 과거 시험 글을 잘 지어서 붓을 잡으면 즉시 이루었다. 병인년(丙寅年, 1686, 숙종 12)에 별시(別試)를 보았는데, 이기(理氣) 대책문(對策文)의 수많은 문제 조항에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명확하게 답안을 쓰니 숙유(宿儒)들이 모두 혀를 내둘렀고 고관(考官)도 영재(英才)라 칭찬하였으나, 끝내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경오년(庚午年, 1690, 숙종 16)에 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선생이 숙환이 있어서 왕왕 몸이 곤하였으나 상제를 지키기를 오히려 엄중히 하였다. 삼년상을 이미 마침에 몸을 섭생하고 보양할 계획으로 소은동(小隱洞)에 들어가 거주하였다. 날마다 심경(心經)을 보면서 홀연히 깨달아 흘린 땀이 옷을 적시었고, 드디어 그것을 시로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다.
27세에 과거 시험을 그만두고 성리학을 강구(講究)함을 전일하고 정밀하게 하였다. 먼저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공부 과정으로 삼고 또 편지로 당대의 선각자인 이갈암(李葛庵, 이현일을 말한다), 윤명재(尹明齋, 윤증을 말한다), 정우담(丁愚潭, 정시한을 말한다) 등에게 질문하여 그 식취(識趣)를 넓혔다.
기묘년(己卯年, 1699, 숙종 25)에 천연두가 유행하는 가운데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선생도 막 그 병에 걸려 완쾌하지 못하였으나 집상(執喪)을 아버지 상과 같이 정성을 다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 횡계(橫溪) 가에 이주하였다. 그 지명이 횡거(橫渠)와 서로 근사하기에 장자(張子)의 ‘육유(六有)’ 두 글자를 취하여 재실에 편액을 달았다.
백형(伯兄, 훈수 정만양을 말한다)과 공부에 매진하면서 서로 즐겼는데, 훈지(塤篪) 두 글자를 나누어서 호로 삼은 것은 이 때문이다. 또 창화응수(唱和應酬, 한 사람이 한시를 읊으면 상대방이 한시로 응수함을 말한다)한 여러 글을 모아 합쳐서 한 질로 만들고 훈지록(塤篪錄)이라 이름하였다.
고산사(高山社)를 창건하여 사방의 학자들을 거처하게 하고 또 진수재(進修齋)를 지어 주자(朱子)의 백록동규(白鹿洞規)와 여러 잠훈(箴訓)을 걸어 놓고 실행하게 하였다. 매달 초하루에 반드시 강학하였으며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투호례(投壺禮)를 행함에 질서정연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714, 숙종 40)에 암행어사가 경행(經行, 경학과 행의)을 칭찬하여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무신년(戊申年, 1728, 영조 4)에 반역의 변고(이인좌가 주동이 되고 정희량 등이 공모한 무신란을 말한다)가 안의(安義)와 합천(陜川) 지역에서 일어나자 선생이 비분강개하며 백형(伯兄, 훈수 정만양을 말한다)과 격문을 초안하여 의병을 창도하였으나 곧바로 역적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경자년(庚子年, 1720, 숙종 46)에 관찰사가 조정의 명령으로 장차 호포법(戶布法), 유포법(遊布法), 결포법(結布法), 구전법(口錢法) 등을 시행하려고 글로써 편리한지 아닌지를 물으매, 선생이 조목별로 대답하여 그것의 불편한 점을 말하였으니, 대개 모두 먼 훗날을 내다보고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경술년(庚戌年, 1730, 영조 6)에 훈수(塤叟)의 죽음에 통곡하였다. 일찍이 옥간정(玉澗亭)을 중수하여 훈수(塤叟)와 함께 거처하였는데, 이로부터 다시는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 “내가 어찌 차마 홀로 거기에 거처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선생을 방문하여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의 심오한 뜻을 질문하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였다.
이로 인해 특별히 조정에 추천하여 말하기를 “정모(鄭某) 같은 사람은 마땅히 예를 갖추어 간곡히 초빙하여 치도(治道)를 묻기를 명종(明宗)과 선조(宣祖)의 고사처럼 한다면 거의 인재를 널리 부르는 실제의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다른 재상들도 교대로 추천하니, 임금이 어벽(御壁)에다가 선생의 성명을 써 놓고 등용하려고 하였으나, 선생이 얼마 있지 않아 돌아가셨으니, 곧 영조 임자년(壬子年, 1732, 영조 8) 6월 모일이었다.
병환이 위독해지자 입으로 자경잠(自警箴, 스스로를 경계하는 잠언)을 말하며 벽에 쓰게 하고 또 자리를 바르게 고치게 하고는 돌아가시니, 향년 66세였다. 겨울 10월에 신녕(新寧) 동쪽 신촌(新村) 묘좌(卯坐) 언덕에 장례를 지내니, 제문을 지어 가지고와 곡하는 원근의 학사(學士)들이 줄을 이었다.
선생은 뛰어난 자질로 풍부한 학업을 온축하여 훈수 선생과 함께 대유(大儒)가 되었는데, 만년에 이르러서는 기상이 더욱 좋아 청명(淸明)하고 확 틔었으며 장중(莊重)하고도 응정(凝定)하였으니, 멀리서 바라봄에 도덕군자임을 알 수가 있었다.
선생의 학문하는 규모를 논해 보면 한결같이 옛 성현의 법도를 따라 하였다. 경(敬)을 주로 하여 그 근본을 세우는 데 있어서는 동정(動靜)을 꿰고 시종(始終)을 관철하여 오직 한 가지 생각도 혹 소홀히 할까 염려하였고, 이치를 궁구하여 그 앎을 극진히 하는 데 있어서는 겉과 속을 철저히 조사하여 밝히고 진실함과 망령됨을 분별하여 오직 한 가지 물건도 혹 빠뜨릴까 염려하였으며, 힘써 행하여 그 실제를 밟는 데 있어서는 충신(忠信, 충성과 신의)을 주로 하고 이륜(彝倫,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을 돈독히 하여 오직 한 가지 일도 혹 미진할까 염려하였다. 대저 이와 같다면 학문에 깊이 나아간 공부가 어찌 저와 같이 고명하고 광대한 데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날마다 볼만한 훌륭한 행실에 대하여 말해 보면, 부모를 섬기고 형제들을 대함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유감됨이 없었으며, 종족을 화목하게 하고 빈우(賓友, 손님과 벗)를 대함에 또한 처지에 따라 분수를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사람을 가르치는 법은 반드시 하학(下學, 소학이나 근사록, 심경 등과 같이 쉽게 알고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상적 공부를 말한다)에 종사하여 실제로 터득함을 구하게 하였으니, 사장학(詞章學)과 과거학(科擧學) 같은 것은 또한 금하지는 않고 말하기를 “다만 자신의 뜻을 빼앗기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흉금과 도량이 광활하였고 학문 수양의 공력이 보통보다 특출하였으니, 진실로 현명한 분이었다.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따라 공경의 차이가 없었으며 타인의 말로써 마음에 흔들리는 것이 없었다. 일찍이 밤에 강도 백여 명이 칼을 들고 뜰에 돌입하였는데, 선생이 등불 아래에서 옷깃을 바로 하고 정좌한 채 꼿꼿하게 꼼짝하지 않고 있다가 천천히 “부녀자들이 밖으로 나가 대피하고 난 뒤에 들어와서 약탈해도 좋다.”라고 말하니, 도적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서 흩어졌다.
동강(東岡)을 지키려는 뜻이 확고하여 도신(道臣, 관찰사)과 재상들이 이구동성으로 천거하였지만, 공은 무덤덤하게 벼슬을 마치 뜬구름 보듯이 하였으니, 마음 속에 지극한 즐거움이 있지 않았다면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일찍이 횡계(橫溪)의 산수를 좋아하여 정자를 지어서 마음껏 즐기고 때때로 흥이 이르면 조그만 배를 띄워 홍류(紅流, 붉은 단풍이 비치는 물을 의미하는데, 모고헌 아래를 흐르는 계류를 홍류담이라고 한다)의 못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고는 관자(冠者, 관례를 행한 갓 쓴 젊은이)와 동자(童者, 어린 아이)들로 하여금 어부사(漁父詞)와 적벽부(赤壁賦)를 외우게 하여 들었으니, 그 유연자득(悠然自得)한 생각을 다른 사람들은 알 수가 없었다.
저술로는 훈지록(塤篪錄) 외에 대학차록(大學箚錄), 개장비요(改葬備要), 의례통해(疑禮通解), 심경질의(心經質疑), 계몽해의(啓蒙解疑) 등이 있다. 선생이 일찍이 훈수(塤叟)의 가장(家狀)을 지었는데, 그 대략을 말해 보면 “평소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질하며 의관을 정제한다.
벽면에다가 ‘상제가 너에게 임하고 있으니, 너의 마음을 두 갈래로 하지 마라. 마음을 명경지수와 광풍제월처럼 하라(上帝臨汝, 毋貳爾心, 明鏡止水, 光風霽月).’는 16글자를 써 놓고 그 가운데 단정하게 앉아 어깨와 등을 똑바로 세우고 앉아 종일토록 게으른 용모가 없었다. 한 번 보면 마음에 보존한 상태가 심오한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훈수(塤叟)의 논학(論學)과 논지업(論志業) 등 여러 격언들을 역력히 열거하고서는 “내가 형과 비슷한 점을 알려고 하면 이것을 보면 족할 것이다.”라고 스스로 말하였다. 아, 선생 형제 같은 사람은 어찌 이른바 뜻이 동일하고 도가 합치되어 서산(西山)의 두 채씨(蔡氏, 송나라의 도학자 서산 채원정의 두 아들인 채연과 채침을 말하는데, 둘 다 주자의 제자로서 도학이 높았다)와 함께 천고토록 아름다움을 나란히 할 자가 아니겠는가.
부인은 인천이씨(仁川李氏)로 교관(敎官)을 지낸 이석복[李碩馥, 정종로의 유집인 입재집(立齋集)에는 이석하로 기재되어 있으나, 이는 오기(誤記)이다]의 따님이다. 자식이 없어서 족제(族弟)인 중록(重祿)의 아들 일규(一珪)를 양자로 삼았다. 딸은 조인경(趙麟經)에게 시집갔다.
일규의 두 아들은 동범(東範)과 양자로 나간 하렴(夏濂)이고, 두 딸은 김학전(金學傳)과 장수연(張壽淵)에게 각각 시집갔다. 조인경의 두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낸 석룡(錫龍) 그리고 석응(錫鷹)이며, 두 딸은 생원을 지낸 황계희(黃啓煕) 그리고 이정갑(李挺甲)에게 각각 시집갔다.
동범의 두 아들은 태환(台煥)과 태섭(台攝)이며 두 딸은 홍교(洪灚)와 이종표(李宗標)에게 각각 시집갔다. 하렴의 두 아들은 계휴(啓休)와 재휴(再休)이고 딸은 서유경(徐惟磬)에게 시집갔다. 태환의 두 아들은 귀령(龜齡)과 학령(鶴齡)이고 두 딸은 이정구(李鼎久)와 김승교(金升敎)에게 각각 시집갔다. 태섭의 두 아들은 필건(必虔)과 양자로 나간 유건(裕虔)이다.
계휴의 아들은 유수(裕壽)이고 딸은 권치은(權致殷)에게 시집갔다. 재휴의 외동딸은 이총발(李聰發)에게 시집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조선의 문운이 / 國朝文運
중엽에 크게 열렸네 / 大啓中葉
선각자 회재와 퇴계가 있어 / 有覺晦退
위로 정자와 주자를 접하였으니 / 洛閩上接
문하에 이른 제자들이 / 及門諸子
별과 산악처럼 나열해 섰네 / 星羅岳立
정맥이 끊어지지 않아 / 正脈不絶
유풍을 서로 이었네 / 遺風相襲
아, 선생께서 / 猗歟先生
또 영남 지역에 태어났네 / 又起南邑
재주는 빼어나고 출중하였으며 / 才挺英邁
뜻이 제한되거나 좁지 않았네 / 志不局狹
처음에 과거 공부에 힘써 / 初事公車
책을 두루 보고 널리 섭렵하였네 / 汎觀博涉
하루아침에 잘못을 깨달아 / 一朝省悟
두려워하며 땀이 몸을 적셨네 / 惕然汗浹
세속의 과거 시험을 내던져 버리고 / 撥棄俗臼
학업에 전념하며 정진하였네 / 專精學業
이에 백형과 함께 / 爰曁伯氏
공부에 매진하며 학업을 익혔네 / 征邁服習
금과 옥처럼 서로 비추고 / 金玉交暎
질나팔과 젓대처럼 함께 화합하였네 / 塤篪偕協
광대한 규모와 / 有廣規模
치밀한 심법으로 / 有密心法
깊이 학문에 나아가 자득하여 / 深造自得
옛 법도에 다다를 수 있었네 / 往軌克躡
영화가 밖으로 드러나고 / 英華外發
경륜이 마음에 모였네 / 經綸中翕
재능에 따라 제자들을 가르치니 / 隨才施敎
선비들이 앞다투어 모여들었네 / 襟佩爭集
덕망을 보며 풍도를 듣고서 / 覿德聞風
공경과 재상들이 교대로 추천하였네 / 卿宰交汲
그러나 견고하게 동강을 지키며 / 牢守東岡
궁핍한 골짜기에서 늙기를 달게 여겼네 / 甘老竆峽
살아서는 순리에 따르고 죽어서는 편안하여 / 生順歿寧
심오한 경지에 넉넉히 들어갔네 / 奧域優入
훌륭한 저술을 남겨 / 炳然筆出
책 상자에 가득 남아 있네 / 滿貯遺篋
공의 정신은 없어지지 않고 / 公神不亡
남아서 영원히 비추리 / 留照浩劫
나무꾼과 목동에게 말하노니 / 寄語樵牧
묘소에 가까이 가지 마라 / 楸梧莫逼
공의 옷과 신이 묻혔으니 / 衣履所藏
공의 말씀과 모습을 공히 높이 받들어 절하리 / 聲光共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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篪叟鄭公墓碣銘 並序.
愚自少則聞永陽有鄭塤叟篪叟先生兄弟。崛起學聖人之道。負當世重望。而爲後人所矜式。景仰之夙 矣。今者篪叟之曾孫台攝。使其從姪裕壽。奉遺集曁行錄示余。求墓道顯刻文。辭不獲。謹按而敍之。公諱葵陽字叔向。鄭氏出烏川。高麗樞密院知奏事襲明。其始祖也。至本朝有諱光厚。官水部卿。歷三世有參奉允良。遊陶山門。是生江湖叟世雅。以壬亂倡義功贈夏官卿諡剛義。又二世有文科牧使諱好仁。是爲公曾祖。祖諱時行務功郞。考諱碩胄生員。妣義城金氏。進士邦烈女。崇禎處士是榲孫。以顯廟丁未四月日。生先生于大田里第。儀容淸秀。若出水芙蓉。天資英敏。受學未數歲能屬文。出驚人語。十一致 書于族祖主簿公仕于京者曰。今國家多憂。願祖南伐倭北伐虜。作萬古忠臣也。聞者大異之。甫成童遍讀諸經史。見解志業。日大以廣。妙能爲擧子文。操筆立就。丙寅赴別試。對理氣策許多條問。若指掌。宿儒皆吐舌。考官稱英才。而竟屈南省。庚午遭外艱。先生有宿疾。往往谻。守制猶嚴。制旣闋。爲攝養計入小隱洞以居。日閱心經。忽覺發汗沾衣。遂作詩以自警。二十七謝公車。專精講究性理。先以小學家禮爲課程。又書質於當世先覺。如李葛庵,尹明齋,丁愚潭諸公。以博其趣。己卯遭內艱於痘疾。先生亦纔經未穌。而 執喪如前喪。畢移家橫溪上。爲其名與橫渠相近。取張子六有二字扁其齋。與伯氏征邁相樂。以其塤篪分而爲號者此也。又合唱和應酬諸篇爲一帙。而名之曰塤篪錄。刱高山社。以處四方學者。又築進修齋。揭朱子白鹿洞規及諸箴訓。使服行之。月朔必設講。而行鄕飮酒投壺禮秩秩也。甲午繡衣以經行褒 聞。除顯陵參奉不赴。戊申逆變起安陜境。先生憤慨。與伯氏草檄倡義旅。旋聞賊平而止。庚子道伯以朝命將行戶布遊布結布口錢等法。書問便否。先生條對言其不便。大抵皆經遠慮也。庚戌哭塤叟。嘗修
玉澗亭與共處。自是不復入曰吾何忍獨處乎。趙豐原顯命按本道委訪。質心近奧義甚勤。因特薦曰如鄭某者。宜以禮敦召。詢訪治道。如明宣朝故事。則庶有旁招之實效矣。他卿宰亦交薦之。上爲書先生姓名於御壁。以擬甄用。而先生未幾易簀。卽英廟壬子六月日也。疾方革。口呼自警箴使題壁。又使正席而終。享年六十六。冬十月葬于新寧東新村負卯原。遠近庠舍生操文哭者相續焉。先生以絶異之資。蘊富有之業。與塤叟先生共成大儒。而及其晩年。氣像益好。淸明洞豁。莊重凝定。望而可知爲道德君
子也。若論其爲學規模。則一循古聖賢法度。主敬以立其本則貫動靜徹終始而惟恐一念之或忽。竆理以致其知則覈表裏辨眞妄而惟恐一物之或遺。力行以踐其實則主忠信篤彝倫而惟恐一事之或未盡。夫如是則其造詣之功。安得不至於高明光大如彼也耶。至其日可見之行。則其事父母處兄弟。極致無憾。睦宗族待賓友。亦莫不隨處盡分。而敎人之法。必令從事於下學以求實得。如詞章科擧之學。亦不之禁曰。但不令奪吾志可矣。襟量廣濶。定力出常。苟賢矣。敬之無間於親疎。不以人言而有所撓。嘗夜有
強盜百餘。持劒突入庭。先生於燈下。整襟危坐。凝然不動。徐謂俟婦女出避。可入掠也。盜相顧愕眙散。確守東岡之志。道臣卿宰交口薦引。而漠然若浮雲視。其非有至樂於中。能如是乎。嘗愛橫溪山水。築榭以寄傲焉。有時興到則浮小艇泝洄於紅流之潭。令冠童誦漁父詞赤壁賦以聽之。其悠然自得之想。人莫能知也。所著述塤篪錄外。又有大學箚錄,改葬備要,疑禮通解,心經質疑,啓蒙解疑等書。先生嘗作塤叟狀。其略有曰平居晨興盥漱。整衣巾。壁面書上帝臨汝。毋貳爾心。明鏡止水。光風霽月十六字。端坐其中。 肩背竦直。終日無惰容。一見可知其所存者深。又歷擧其論學論志業等諸格言。而因自云欲知髣髴。觀於此足矣。噫。若先生兄弟者。豈非所謂志同道合。而與西山之二蔡。幷美於千載者耶。配仁川李氏。敎官碩𩡘之女。無子。子族弟重祿子一珪。女一趙麟經。一珪二男東範,夏濂出。二女金學傳,張壽淵。趙麟經二男錫龍文科承旨,錫鷹。二女黃啓煕生員,李挺甲。東範二男台煥,台攝。二女洪灚,李宗標。夏濂二男啓休,再休。一女徐惟磬。台煥二男龜齡,鶴齡。二女李鼎久,金升敎。台攝二男必虔,裕虔出。啓休一男裕壽。一女 權致殷。再休一女李聰發。銘曰。
國朝文運。大啓中葉。有覺晦退。洛閩上接。及門諸子。星羅岳立。正脈不絶。遺風相襲。猗歟先生。又起南邑。才挺英邁。
志不局狹。初事公車。汎觀博涉。一朝省悟。惕然汗浹。撥棄俗臼。專精學業。爰曁伯氏。征邁服習。金玉交暎。塤篪偕協。
有廣規模。有密心法。深造自得。往軌克躡。英華外發。經綸中翕。隨才施敎。襟佩爭集。覿德聞風。卿宰交汲。牢守東岡。
甘老竆峽。生順歿寧。奧域優入。炳然筆出。滿貯遺篋。公神不亡。留照浩劫。寄語樵牧。楸梧莫逼。衣履所藏。聲光共挹。
[출처]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 묘갈명(墓碣銘)|작성자 변호사 정승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