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3:14~21)
'Multitudes, multitudes in the valley of decision! For day of the Lord is
near in the valley of decision.'(14)
오늘 말씀에 약간의 소름이 돋는다.
한글 성경에서 '심판의 골짜기'라고 해석한 그것이
영어로는 'valley of decision'으로 되어 있는 대목 때문이다.
막연히 심판의 날, 심판의 골짜기 등으로 해석된 내용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재판장처럼 앉아 계시고
우리는 줄을 서서 한 명씩 천국 백성이 되느냐,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가 판정 받는 장면을 생각한다.
그 판정의 근거는 그 심판의 자리까지 오기 전까지
하나님만이 꿰뚫어 아시는 사실의 여부,
즉 진정한 회개를 하고 복음을 받아들였는가이다.
그런데 영어의 decision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
약간 그런 느낌과는 다를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결정하는 행위는
주로 judge를 사용할 것 같았다.
decision은 인간의 선택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혹시 인간이 행하는 최종의 선택 아닌가?
물론 최종의 선택이라 하더라도
선택에 대한 보응 판단 영역까지 포함하면
큰 차원에서는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는 심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의 최종선택이라는 의미에 비중이 있다면
그간의 이해와는 많이 다른 점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어가 아닌 보다 근원적인 성경 원문을 잠시 검색해 보았으나
인터넷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만약 내가 평소의 상식으로 받아들여
decision이 인간의 최종선택 성격이 강하다면,
요즈음 내가 생각하는 것과 결을 같이 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지옥, 절대고통의 공간.
그것을 금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그것에 상응하는 인간의 악행, 죄의 정도가 심각하다는 증거임은 분명하다.
지옥이라는 절대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절대 고통의 처소를 소멸하지 않고
그 영원한 형벌로 분류되어야만 했던 그 악행, 죄.
그 정도 되려면
내 공정의식, 상식으로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우리를 그 절대 고통 속으로 영원히 분리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으셨어야 하고
사람은 모든 것으로 거부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있어서는 안 될 절대고통에 들어간다는 비극적 상황은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사람의 선택권
-그것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존중감, 거의 같은 반열에 둔 영적 존재라는 증거-
그 선택권으로 정말 지독하게(x무한대)
하나님을 거부할 때나 비로소 가능할까 말까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얼마 전, 묵상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임종 전, 며칠 간 호흡을 힘들어하시던 성도의 어머니 이야기 속에서
나는 주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임종을 직면한 사람과 하나님과의 마지막 선택에 대한 실랑이를 생각했다.
그 시간은 고통과 절망, 급박한 상황 속에서
매우 자극적으로 마지막 선택의 기회를 주시는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애절하게 하나님께서 영혼에게
죄와 악을 선택하지 말라고,
지금은 마지막 순간이라고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는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거부한다면......
오늘 본문에서도
결정의 계곡이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심판의 날이라고 명칭하는 우주 최고의 결정의 순간.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서울가는 사람, 부산가는 사람을 나누는 작업이 아니라
그 이전에 사람의 선택을 최종적으로 듣는 과정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듣는 과정.
마지막 선택을 듣고 난 후에도 하나님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심판의 주도가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어도
하나님이 지옥으로 영혼을 보낸다는 표현보다
차라리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갔다는 표현이 일면 일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요즘
하나님을 거부하고 믿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지독하게 사실과 양심을 부인하고 사는
처절한 죄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거듭하고 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제게 하나님의 귀한 메시지를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심령을 허락하소서.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