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그들’
요새 우리집에 오는 전화는 3대2의 비율로 아들의 것이 내 뒤를 바짝 뒤따르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반이 된 그의 행동 반경은 차츰 넓어져 가고, 이쪽은 워낙에 한정된 교유 범위나마 날이 갈수록 좁아져 가고 있음의 반증이다.
그나마 아직은 그런대로 가장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지만, 머지 않아 우리집의 세력 판도는 어미로부터 아들로, 새 술은 새 부대로 옮겨 담겨질 터인데 지금으로서는 단지 그 시기를 가늠하기가 다소 유동적이라 것 뿐이다.
조금도 유감스럽지 않은 흥망성쇠의 법칙에 따라 아쉬울 것 없는 세대교체의 문 앞에서 목하 우리집 문전은 전 같지 않게 떠들썩한 편이다.
아들을 닮았고, 덩달아 ‘우리들의 어머니’라 나를 부르는 젊은 사내들, 혹은 그들의 여자 친구들까지 집 근처에 오가는 길이라며 들리고, 때로는 아닌 밤중에 술에 취해 엉긴 채 몰려와선 바닥이 드러난 가계에 구멍을 뚫어 놓기도 하는 그들이기에 나의 늙마 인생이 싱겁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 중에는 어느 새 장가들어 일가를 이룬 인생 선배가 있는가 하면, 불과 1년 동안에도 강산이 몇 차례나 바뀌는 대학 생활로 접어들면서, 새파란 프레쉬 맨으로 서로 만나 사귀면서 4년을 정들여 온 여자 친구와 홀연히 엊그제 청춘의 첫 이별의 쓴 잔을 맞대고는, 저 빛나는 감각파, 프랑소와즈 사강의 표현대로 울적함과 달콤함이 뒤엉킨 이 생소한 감정에 슬픔이라는 묵직하고 훌륭한 이름을 붙여도 될지 말지 어리둥절 당황하며 있는 얼굴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차피 맞을 매, 일찍 맞는게 수라고, 벗들의 떠들썩한 환송회까지 받아가며 단순히 입대한 친구들 틈에는 본의 아나게 철 이른 군대밥을 먹고 있는 계룡거사도 있다.
남 유다른 반골 정신, 그 속에 밉지 않은 객기도 섞여서 더욱 사랑스러운 우리들의 계룡거사에게서 어느날 느닷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수험 삼수 끝에 대학생이 된 그의 별명은 그가 드러내어 깔보는 같은 또래 여대생들에 의해 합작 헌정한 것으로 삼수 기간 동안 주로 조국 산야에 묻혀서 살아온 그의 평범치 않은 이력과도 잘 어울리는 것이라 나까지 덩달아 애용하는 형편이다.
남들처럼 벗들의 환송회는커녕, 어느 경찰서에서 곧바로 입대한 후 처음 듣게 된 계룡거사의육성이어서 반가움에 앞서 놀람 족이 더욱 컸다.
그는 아침부터 근처로 면회 나온 김에 거는 전화라며, 워낙에 그렇듯이 친구 모친에 대한 수인사는 깍듯이 얘우를 다한 끝에 마침내 나로 하여금, 그의 친구인 내 아들에게 꼭 전하라고 당부 아닌 명령을 내린 용건이라는 것이 마냥 예삿일은 아니었다.
왈, 한이(아들 이름)에게 내일 토요일 늦어도 오후 2시까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T의 일필휘지로 ‘일기 당천’ ‘상승 육군’ ‘필승 부대 육성’ 등 세 가지 글씨를 받아 말미에는 꼭 저의 이름에다 낙관을 찍어 갖고 오라고 해주십시오.
삽시에 무어라 대꾸해야 할 말을 잊고 아연한 채 있는 이쪽 기색을 살폈는지
“죄송합니다. 어머니, 어려운 전갈을 부탁드린 점 용서하십시오. 그럼, 전화료가 오르므로 끊겠습니다.”
이쪽은 그제서야 재빨리, 물론 꼭 전하기야 하겠지만 꼭 된다고는 믿지 말 것, 마침 내주부터는 시험 기간이어서 밤 늦게까지 도서관에 박혀 있는 탓으로 한이가 돌아올 시간이 번번이 야밤중인데다 붓 글씨 잘 쓰는 T는 현재 대학원 시험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T를 학교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문제인데다 더구나 어느 사아에 낙관을 새겨서 그 시간까지 당도할 수 있겠느냐, 상식적인 계산으로는 도저히 가망 적은 일인즉, 된다고는 믿지 말고 기댜려 보라는 요지의 당부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 후에는 하던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이리저리 궁리를 해보아도 계룡거사의 부탁은 허탕으로 될 수 밖에 없을 듯 싶었고, 그런 힘겨운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 것만 같은 예감으로 해서 이쪽의 심중을 산란케 하는 그에게 슬그머니 화가 나려고도 했다.
어느날처럼 아들은 12시가 다 된 시각에 돌아왔다. 잔뜩 지쳐 있는 그에게 계룡거사의 용건을 전하기가 어미된 마음으로 안쓰러웠지만 말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한이는 잠자코 듣고 있더니 T가 요즘 시험준비 때문에 주소 불명의, 전화도 없는 집에 하숙하고 있으니 아침 일찍 학교에서 만날 수 있을지도 문제라고, 혼잣소리처럼 말하면서 씻지도 않은 체, 제 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역시 예상하던 바 낙관적 상황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이튿 날, 첫새벽에 아들은 뜨이지 않는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어떻게든 놈의 부탁이라는 걸 들어 줘야게끔 움직여보기로 해야겠단다.
먹히지 않는다고 우유 한 잔 겨우 마시고, 될지 말지는 나가봐야 알겠지만, 어제처럼 늦으면 된 줄로 알라면서 집을 나서는 그에게 귀찮지 않느냐고 슬쩍 물어보았다.
“귀찮지 않을리야 있겠습니까.”
문 열면서 히죽이 돌아보며 웃는 녀석의 치아가 오늘따라 유난히 희다 싶었다.
어제 그맘 때 시각이 되자 아들이 휘파람을 불며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달려나가 열어준 문으로 기분 좋게 둘어서는 녀석은 술기운 탓인지 어느날 같지 않게 다변이었다.
용케 찾아낸 T는 계룡거사의 청을 전해 듣더니 빙그레 회심의 미소를 짓더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군대 안에는 친구 이름으로 대필해준 제 글씨만도 무릇 기하일 거라고 선뜻 달필 휘지란 T는 많이도 있는 낙관 가운데 하나를 골라 계룡거사 본명 위에다 선명히 찍어주는 두루마리를 받아 쥐고는 마감 시간 오후 2시에 데어가느라 부랴부랴 달렸다고 하였다.
“그런데 더 걸작은 요녀석이 얼른 갖다 바친 일필휘지를 보더니 특무상사인지, 선임하산지 하는 사내가 주먹을 처들더니” ‘야 이걸 니가 썼다구, 임마! ’ 그러면서 치는 시늉을 하더래요.
아닌 밤중에 녹차 끓여 앞에 놓고 가가대소.
두어 달 쯤 지났다. 어느 날 난데없이ㅣ 검게 그을리고 짧게 머리깎은 이등병 하나가 멋쩍게 우리집 문전에 나타났다.
덕분에 이렇게 휴가를 얻어 나왔노라. 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그는 당연히 저 회초리처럼 깡마르고 기세선인처럼 장발이던 계룡거사가 아니구 누구였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