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8whYmsSVk20
바울일행은 아시아에서만 선교사역을 하다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유럽 땅에 도착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그 첫 성이 빌립보 였습니다.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일행은 기도하기 위해 강가로 갔다가 자주 장사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나 복음을 전함으로 예수믿는 첫 교인이 되었고 교회공동체가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지난번처럼 강가에 기도하러 가던 중 이번에는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 한 명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이 여종이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이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라고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대니 바울이 견디다 못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여종이 귀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이 여종은 구원을 받게 된 것이지만 여종의 주인들한테는 바울일행을 고소하는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귀신들린 여종을 통해 많은 수익을 얻고 있었는데 귀신이 떠나고 나니 더 이상 수익을 얻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 일행은 고소를 당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감옥에서 나오게 되고 감옥에 있던 간수의 집안까지 예수믿고 구원얻게 되는 역사가 일어남을 본문을 통해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구원의 역사를 다양하게 보여주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첫 번째 구원받은 인물은 바로 점치는 여종이었습니다. 이 여종이 바울일행을 따라다니면서 바울일행은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외쳤던 것인데 여기서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바울은 왜 이 여종으로 인해 괴로워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귀신이 무서워서는 아닐 것이고 귀신을 쫓아낼 능력이 없어서도 아닐 것이고 어떻게 보면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는 말을 해 주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17절입니다.
■눅 4: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실 때에도 귀신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말하자 이에 대해 말함을 허락지 않으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같은 맥락에서 본문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귀신들을 제지하셨을까요?
첫째, 사단이 예수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공격하는 사단의 전술전략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높이는 목적은 교만하게 만들어서 결국 파멸로 이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정말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믿게 하려고 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단은 속이는 자입니다. 메신저를 공격하는 전술 전략입니다. 주변에 이단소리를 듣던지 이단의 교주가 된 자들 보면 은사가 있던지 나름 카리스마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따르는 자들이 그렇게 된 것인데 결국 교만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십일 금식기도 하고 나서 사단이 세가지 시험을 하는데 시험 세가지 모두 교만과 욕심으로 무너뜨리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돌을 떡으로 높은 데서 뛰어내림으로 기적을 행하라 천하만국을 가지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행하면 예수님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귀신들린 여종의 말에 기분좋게 반응했다면 바울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두 번째 이유는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신 예수님이 전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이 계속해서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게 되면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신비한 능력에만 관심을 가지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적과 복음의 딜레마인 것입니다. 환자를 고치지 않을 수 없고 고치게 되면 복음이 아닌 기적에만 매달리게 되고 .. 옛말에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질이 아닌 현상에만 머무는 신앙은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주변에 신비한 체험, 기적에 관심이 많은 분들 보면 정상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분들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요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시고 난 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한 백성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경제적인 것보다 더 절실한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떡이 복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인데 이것을 백성들이 놓치고 있기 때문에 피하셨던 것입니다.
■고전 1:22-23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사단의 속삭임에 미혹되지 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말씀 속에서 만나시고 그 예수님을 통해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시길 축복합니다.
본문 19절 이하 보시면 여종에게서 결국 귀신을 쫓아냄으로 바울일행은 여종의 주인에게 고소를 당함으로 감옥에 갇히는데 엄청난 매를 맞고 갇히게 됩니다. 로마감옥은 일반 감옥과 구별되는 중죄인이 갇히는 감옥이 있는데 24절의 깊은 옥은 중죄인이 갇히는 감옥을 말합니다.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토굴같은 감옥인데 공기조차 겨우 들어오는 지하감옥이었습니다. 게다가 탈출의 가능성이 전혀 없음에도 죄수를 괴롭게 하기 위해 양다리를 벌려서 칼을 채우고 꼼짝을 못하게 바울을 가두어버린 것입니다.
귀신들린 여종을 통해 바울일행은 귀빈자리에 올라갈 수도 있었습니다만 오히려 정반대로 지하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인데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요 인도하심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귀빈자리에 올라갔다면 그것으로 복음사역은 끝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지하감옥에 갇힌 것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하심의 결과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구원방식이 바로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5절에 보시면 바울일행이 기도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18절에서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던 것과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반대가 되어야 정상일 것입니다. 지극히 놓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좋아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고 감옥에 갇혔을 때 심히 괴로워해야 하는데 오히려 거꾸로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육신적으로는 힘들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고 온전한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빌 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25절에 보시면 바울이 찬양하는 것을 죄수들이 들었다고 나옵니다. 에파크로마이.. 주의깊게 듣다.. 정신나간 듯이 듣다.. 성경에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 상황에서 노래하는 사람을 처음보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리고 나서 26절의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지진이 나면서 옥문이 열리고 매였던 것들이 벗겨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단순한 지진이 아닌 것은 매인 것이 풀어졌기 때문에 이는 찬양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의 응답이요 역사하심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성결교단 부흥목사님 이성봉 목사님이 6.25 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목포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미군 간첩으로 누명을 쓰고 인민군들에게 끌려가게 됩니다. 몽둥이로 개패듯 맞고 3평 정도 되는 감방에 30명이 갇히니 여름에 냄새나고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혔던 바울이 생각나서 그곳에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홍안 소년 미인들아 자랑치 말고 영웅 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마라 유수 같은 세월은 널 재촉하고 저 적막한 공동묘지는 널 기다린다" 찬송을 부르고 나니 문지기가 쌍욕을 하면서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찬송 후 옥문이 열렸는데 자신은 욕만 먹었다고 회고록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삼일후에 빨치산 20여명이 총을 반역자를 숙청한다고 감옥에 들어옵니다. 여기 죽일놈 없냐고 했더니 간수가 목사 한 놈이 때려도 찬송만 부르니 저걸 어떡하면 좋겠냐고 하니 왜 그냥 내버려뒀냐고 하면서 당장에 끌어내라고 하길래 이제 죽었나 보다 싶었는데 빨치산 대장이 목사님을 보자 마자 목사짓 몇 년 해 먹었냐 묻길래 25년째라 했더니 많이도 해 먹었다 하면서 그래서 이렇게 살이 졌냐고 하길래 원래 깡말랐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해졌다고 대답을 합니다. 예수는 왜 믿냐고 묻길래.. 당신들은 사회를 혁명하지만 기독교는 사람을 혁명합니다. 천당이 어딨소? 봤소? 본점은 못 봤지마 지점은 봤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지점이 있소. 은행도 지점이 있고 경찰소도 지서가 있듯이 천당도 지점이 있소.. 거 말되네.. 이 전쟁을 어떻게 봅니까?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때 바벨론을 들어 친 것처럼 이 나라가 이조 5백년동안 범죄함으로 일본 방망이로 얻어맞았고 하나님이 해방시키셨으나 감사한 줄로 모르다가 공산방망이로 얻어 맞았소.. 하지만 공산당이 이렇게 예수믿는 사람들 핍박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소.. 그리고 나서 몸을 여기저기 살피더니 약을 발라주더니 함께 있던 전도사 한 명을 나오라 하더니 둘을 제외하고 29명을 총살시키고 떠나버렸다는 내용이 이성봉 목사님 회고록이 나옵니다.
찬양과 기도의 응답의 결과인 줄로 믿습니다. 사명이 있어서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감옥과 같은 상황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시고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어지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구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세 번째 사람이 간수장과 그 가족들입니다. 27절입니다.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이 탈출하게 되니 이에 대한 책임으로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간수는 자결하려고 했던 것인데 이때 바울은 우리가 여기에 그대로 있으니 죽지 말라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 물었을 때 바울이 31절로 대답을 합니다. 다같이..
예수를 믿어 얻게 되는 구원과 이런 상황이 무슨 상관이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만 으면 영혼이 구원을 얻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상황과 환경속에서도 구원하시는 은혜가 있음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35절, 36절 보시면 간수가 절망에 빠졌던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한 분위기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임하게 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동일하게 경험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