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산(遊鶴山·839m) 줄기 동쪽 끝에 다부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대구에서 불과 22km밖에 되지 않는 곳으로, 여기서 소야고개를 넘으면 바로 대구에 들어서게 된다.
또 다부동은 북쪽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5번 국도와 25번 국도가 합치고, 왜관으로 넘어가는 79번 지방도가 갈라지는 교통 요충지다.
그 때문에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구를 지키려는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과 다부동쪽에서 대구로 진입하려는 인민군과 맞붙어 55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8월13일부터 12일간 주인이 15번이나 바뀌는 328고지(칠곡군 석적면 포남리) 전투와, 가장 희생자를 많이 냈던 837고지(유학산 정상) 탈환전 등 55일간
계속됐던 다부동 전투는 6.25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이었으며, 인민군은 17,5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한국군과 유엔군도 1만여 명의 희생이 있었다.
다부동 전투는 안강 전투와 함께 대구를 지켜낸 전투였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전사상 빛나는 전투였다.
이 다부동 전투의 빛나는 전적을 기념하기 위해 다부동과 중지리에 전적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다부동(多富洞)은 부자들이 많아 불렸던 이름.
또한 유학산(遊鶴山)은 학(鶴)이 노니는(遊) 평화스런 산이라는 뜻.
그래서 그런지 주변에 학(鶴) 자가 들어있는 지명이 유난히 많다.
학산동을 비롯해 황학동, 학상동, 학하동, 황학지(연못)가 있는가 하면, 삼학산이라 해서 유학산, 소(巢)학산, 황학산이 있다.
그런 평화스런 곳에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진 셈이다.
유학산 산행의 테마는 누가 뭐래도 한국전쟁이다.
뼈아픈 기억을 되씹어 볼 수 있는 전투 현장 답사와 전적기념관도 돌아볼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산행궤적
7km가 조금 넘는 거리를 잘못간 일행들을 기다리느라고 4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고도표
참고 개념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팥재'주차장.
카메라의 시간이 에러가 났다. 사진의 시간에 1시간을 빼야만 한다. 따라서 지금의 시간은 10:26..
팥재(해발 약450m)는 대형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화장실에서 화장을 하고 도봉사로 향한다. 도봉사는 우측 통제하고 있는 길로 올라도 좌측 화장실 앞 계단으로 올라온 길과 만난다.
안내판
춘계 산방기간(11/1~5/15)에 통제를 하고 있네.
유학산 안내판.
도봉사로 오르는 세멘트 포장도로는...
공사 중.
우중산행 채비를 차리고 전장에 나가는 병사처럼...
도봉사 입구에서...
안내판을 보고...
우측 깎아지른 절벽 밑에 똬리를 튼 도봉사.
포장도로는 끝이나고...
목계단을 오른다.
최근까지 국군 유해발굴이 진행했던 곳.
암릉을 에돌아...
전망이 트이는 곳에 올랐지만...
무심한 구름만이 소학산(巢鶴山) 을 감춘다.
더 뒤론 황학산과 백운산(?)
끊임없이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 사이로 피어 오르는 운무.
이제 산하는 온통 먹통.
헬기장을 지나고...
임도급 산길을 따라...
산정이 지척이다.
이층 팔각정자 유학정(遊鶴亭).
유학산 정상인 이곳이 839고지에서 피아간에 약 3만 명의 인명피해가 있었다.
이른 점심시간 2층 누각에서 해결한다.
정상석의 딋면.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립니다.'
전망 안내판은 아무 소용이 없어...
정자 뒤로 돌아가며 능선을 이어간다.
돌아본 팔각정자.
정상에서 200여m 지나면 도봉사 갈림길을 만나고...
트일 것 같은 전망은 온통 백색 천국.
깎아지른 바위와...
철계단을 내려서니...
예사롭지 않은 암릉.
기가 찬 곳이지만 역시 백색 천국.
그저 산하(山河)는 상상으로만 가능하다.
신선들의 영역이라 신선대(神仙臺)로 부르는 곳.
세찬 바람에 소나무는 옆으로 팔을 움추렸고...
나는 하얀 구름 위에 오른 신선을 닮아 있다.
천지는 상상으로만 가능하다.
빗속 미끄러운 암릉길을 조심조심 올라...
오 미터 앞의 암반과 곱게 물들어가는 수목들만 그저 즐길 뿐.
837고지에 올랐다.
안내판엔 지금부터 딱 67년 전 국군1사단과 미군들이 북한 인민군들을 상대로 전투를 치뤘던 곳이란다.
남용되던 태극기가 이곳에서 제자리를 찾았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하다.
31km의 '호국산행길' 푯말.
그리고 올라선 유학산2봉(836m). 이 지점에선 독도에 유의해야 한다.
유학산2봉 직전의 좌측 내리막으로 가는 능선에 나뭇가지 하나 걸쳐있다. 그쪽으로 가면 안된다는 말씀.
성호 씨 내외가 그 길로 알바해 왕복 30분을 한덤님과 함께 되올라와 합류를 했다.
알바탓으로 조금 지쳐있는 성호 씨 내외.
792.9m 삼각점봉. 젖은 태극기가 애잔하다.
등로는 수월하고...
전망대는 자꾸만 상상력을 강제하고...
내림길을 내려서다...
뒤따라오는 성호 씨 내외를 재확인하자...
674고지에 닿는다.
674고지의 안내판.
674고지의 이정표.
차츰 등로는 임도급으로 넓어지더니...
철탑도 지나고...
터벅터벅 내려서다 다시 성호 씨 내외가 보이지 않아...
쫓아 올라가보니 바쁠 것 없는 부부.
중앙고속도로 다부IC가 휘어도는 곳으로 진행하다...
돌아본 우측 산길이 내려온 길.
5번 국도(호국로)에 올라서...
차량들이 쌩쌩 달리는 중앙고속도로 밑을 지나...
5번 국도(호국로)를 무단횡단해야만 한다.
재빨리 스리슬쩍 무단횡단을 감행...
주차장의 우리 버스를 확인한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의 안내판. 1981년도에 건립하였다.
구국관.
위로 올라와 마침 견학을 온 대한민국 공군병사들과 함께 기념관을 둘러본다.
야외에 진열된 비행기.
전투기에 적재되는 포탄인 듯.
다부동지구 전적비 기념관.
야외 기념관.
구국용사 충혼비.
105mm 견인포(?)
안으로 들어가며...
개관시간(하계 09:00~18:00, 동계 09:00~ 17:30)을 확인하고...
두서없이 자료를 살핀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힘이 있을 때만 지켜지는 것임을...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핵으로 무장한 북쪽 미치광이들의 위협이 있는 한.
다부동 전투(1950,8,1~9,24)는 240km의 최후의 저지선(마산~왜관~낙동리~영덕)으로 대구로 진격하는 적을 격퇴하고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을 마련한 격전지였다.
.1950년 8월, 그 무덥던 여름에...
최후의 낙동강 방어선이 그어졌다.
소련제 탕크를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지만...
유엔 참전용사들의 희생으로 자유와 평화를 지켜냈다.
금강방어선과 대전 전투, 동락리 전투, 상주 화령장 전투.
후퇴를 거듭하다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보루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 재정비를 할 수 있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전기를 마련.
남북 군사력과 경제력 비교.
조지훈이 전쟁이 나던 1950년 9월 쓴 '다부원에서'란 시를 을해년 (1995년) 류영희가 적었다.
흠뻑 비를 맞고 선 탱크들.
15:30 산행이 완료되었다.
-다부원에서-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 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 무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조 지 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