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남자들은 잘 모를 수도 있겠다. 지금부터 20여 년 전, 왜 전국의 여자아이들이 일요일 아침이면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TV 앞에 앉았는지 말이다. 두 주먹 불끈 쥐고 가슴 두근거리며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으로 시작하는 만화 주제가를 목청껏 따라 불렀다. 일요 명작 만화 <빨강머리 앤>에서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그녀, 앤은 그 시대 소녀들의 감성을 지배하던 문화 아이콘이었다.
소녀 시절 로망이었던 앤을 만나러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Prince Edward Island)로 가는 길. 캐나다 동부의 거의 끝 지점에 위치한 탓에 여행길이 녹록지 않다. 인천공항에서 토론토로, 다시 토론토에서 30인승 작은 비행기로 두 시간을 더 날아가야 섬의 주도인 샬럿타운(Charlottetown)에 닿을 수 있다. 드넓은 초록 언덕과 군데군데 드러난 붉은 감자밭, 낮은 지붕의 소박한 주택. 게으른 소와 말과 양이 아무렇게나 풀을 뜯거나 낮잠을 잔다. PEI(이곳 사람들은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를 줄여서 ‘PEI’라고 부른다)의 첫인상은 소박하고 평화로운 전원마을 그 자체였다.
PEI에는 고층 빌딩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집은 단층이거나 2층이고, 주도인 샬럿타운의 도심에만 네모진 콘크리트 건물이 조금 있을 뿐이다. 샬럿타운 내에선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이 별로 없다. 워낙 작은 도시인데다 볼거리 대부분이 다운타운에 몰려 있기 때문에 쉬엄쉬엄 걸어 다녀도 문제가 없다.
6월 이후 이곳을 찾는 여행자라면 가장 먼저 다운타운의 연방예술센터(Confederation Centre of Arts)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빨강머리 앤>(원제목은 ‘Ann of Green Gables’)을 감상하는 것이 좋겠다. 해마다 여름이면 PEI 전체가 ‘샬럿타운 페스티벌’로 들썩이는데, 올해는 6월 19일부터 10월 7일까지 열린다. 페스티벌의 백미는 단연 뮤지컬 <빨강머리 앤>. 영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자칫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스럽겠지만 염려할 필요는 없다. 물론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앤의 무수한 대사를 모두 알아듣기는 힘들지만, 대략 줄거리를 알고 있는데다 앤의 독특한 캐릭터가 쉽게 이해되기 때문에 즐겁게 감상할 수 있다.
뮤지컬을 감상한 다음에는 예술센터 건너편의 아이스크림 가게 카우스(Cow’s)로 가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관행’이다. ‘카우스’는 캐나다를 대표하는 아이스크림 브랜드. 샬럿타운에 본사가 있다. 신선한 우유로 소설 <빨강머리 앤>에 나오는 PEI의 전통 아이스크림 제조법 그대로 만든다. 연방예술센터의 뒤편 빅토리아 길(Victoria Row) 입구에는 <빨강머리 앤>과 관련한 모든 것을 판매하는 ‘앤 오브 그린 게이블스 스토어(Ann of Green Gables Store)’가 있다. 작은 앤 인형이 대롱대롱 달린 연필에서 앤과 길버트, 다이애나 등 소설 속 등장인물의 인형과 성인용 ‘앤 드레스’까지 다양한 상품을 판매한다. 앤 스토어 옆에는 ‘앤 초콜릿’ 상점이 있다. 우리보다 훨씬 앤에 열광하는 일본 여성들(우리가 본 만화영화는 몽고메리의 소설을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것)이 넋을 놓고 구경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집! 그린 게이블스
<빨강머리 앤>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초록색 지붕 집 ‘그린 게이블스(Green Gables)’는 캐번디시(Caven dish)에 있다. 샬럿타운에서 서쪽으로 40여 분쯤 떨어진 해안가에 자리한 캐번디시는 작가 몽고메리(1874~1942년)의 고향이기도 하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조부모 밑에서 자란 몽고메리는 할머니가 운영하던 우체국 일을 도우며 그곳에서 소설 <빨강머리 앤>을 썼다. 때문에 캐번디시에는 더 다양한 앤 관련 여행지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가장 먼저 찾아볼 곳은 ‘그린 게이블스’. <빨강머리 앤>이 픽션임에도 소설 속 초록색 지붕 집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았다. 본래 몽고메리 외조부의 사촌이 살던 집이었는데 몽고메리가 자신의 소설 속에 등장시킨 것. 방문자 센터에서 몽고메리와 소설에 관련한 간단한 영상물을 본 후 밖으로 나가면 마구간을 지나 드디어 초록 지붕 집을 만나게 된다. 소설과 만화영화에서 봤던 그 집과 어찌나 똑같은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다. 금방이라도 주근깨투성이의 앤이 문을 열고 뛰어나올 것만 같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매튜의 방과 거실, 부엌 등이 나오고, 2층에는 마릴라의 방과 앤의 방이 있다. 앤의 방에는 소설 속에서 그녀가 그토록 입고 싶어 하던 자줏빛 퍼프소매 원피스(앤은 ‘공주풍 소매’라고 했다)와 자신을 홍당무라 놀린 길버트의 머리를 내려쳤던 깨진 석판도 있다. 그린 게이블스 주변의 산책로도 꼭 거닐어봐야 한다. 소설 속에서 앤이 이름 붙인 ‘연인의 오솔길(Lover’s Lane)’과 ‘유령의 숲(Haunted Wood)’도 있고, 앤이 그녀의 절친한 친구인 다이애나와 우정을 다짐한 시냇가의 작은 나무다리도 재현돼 있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몽고메리와 소설의 내용 등이 적힌 팻말이 군데군데 보인다. 그린 게이블스 1층 입구에 마련된 방명록에 한 줄의 글을 남기는 것도 잊지 말 것. 지금까지 이곳을 찾아온 세계 각국의 여행자가 남긴 글을 읽어보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간간이 한국 여행자의 글도 보여 반갑다.
그린 게이블스에서 나와 캐번디시 관광안내소 쪽으로 가면 몽고메리 일가의 무덤에 가볼 수 있다. 관광안내소 오른쪽에는 몽고메리가 <빨강머리 앤>을 집필했던 우체국(Green Gables Post Office)도 당시 모습으로 복원해 놓았다.
몽고메리에 관련한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그녀의 생가에 들러보면 된다.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몽고메리가 결혼식 때 입었다는 허리 22인치(개미허리다!)의 웨딩드레스와 아담한 웨딩슈즈가 눈에 띈다. 2층에는 몽고메리가 태어난 방과 그녀와 가족이 직접 만들었다는 퀼트 작품을 볼 수 있다. 꽃과 나뭇잎으로 장식한 그녀의 개인 스크랩북과 자작 시, 자필 원고 등 작가 몽고메리의 흔적이 가득하다.
이 밖에 그린 게이블스 박물관(902-886-2884)이나 루시 모드 몽고메리 헤리티지 박물관(902-886-2807)을 비롯해 <빨강머리 앤> 속편에 등장하는 앤과 길버트의 신혼집을 재현한 ‘앤의 꿈의 집’(902-886-2098) 등 ‘빨강머리 앤 투어’는 끝이 없다.
19세기를 간직한 복고풍 도시와 초원
PEI에 ‘앤’만 있는 것은 아니다. PEI는 캐나다에서 가장 작은 주지만 풍경만큼은 캐나다 최고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인구가채 4만 명도 되지 않으니, 그 넓은 땅은 대부분 푸른 초원이 차지한다. 수백 년 된 건물은 주 정부의 철저한 관리하에 있어 함부로 철거하거나 고칠 수 없다. 덕분에 과연 지금이 21세기가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스러움을 잘 간직하고 있다.
샬럿타운의 연방예술센터가 있는 퀸스트리트는 구시가의 중심지다. 고풍스러운 상점을 하나씩 구경하거나 수백 년 된 울창한 가로수 길을 거닐어봐도 좋다. 연방예술센터 근처의 그래프턴스트리트(Grafton St.)에는 맥주 한잔 마시기에 좋은 캐주얼한 분위기의 펍이 몇 군데 있다. 캐나다 동부의 유명한 맥주인 무스헤드(Moosehead)를 맛볼 것. 보통 맥주보다 약간 시큼한 맛인데 독특한 향이 매력 있다. 잘 가꿔진 빅토리아 공원과 성 던스턴스 성당도 들러봐야 할 명소다. 공원에서 바라보는 빼어난 바다 풍경도 만족스럽다. PEI와 대륙을 연결하는 컨페더레이션 다리(Confede-ration Bridge)도 여행자에겐 필수 코스다. 총길이 12.9km의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로, 교각 수만 해도 400여 개에 이른다. 다리를 건너는 시간은 10~12분 정도. 다리 입구에는 PEI의 상징인 흰색의 예쁜 나무 등대와 소박한 기념관이 있다. 또 주변에 기념품 상점이 많아 가벼운 쇼핑을 즐길 수도 있다. 토요일에만 열리는 파머스 마켓(Farmer’s Market)에 가면 PEI 주민의 소소한 일상도 엿볼 수 있다. 유기농산물이 주로 거래되는데 식재료는 물론 그 자리에서 바로 먹을 수 있는 조리 식품과 아기자기한 수공예품, 허브로 만든 핸드메이드 화장품도 살 수 있다. 시장 입구에서 파는 핫도그가 제일 맛있다. 3~4캐나다달러(CAD) 정도로 소시지 종류도 다양하고 핫도그 안에 넣어주는 매콤한 고추절임의 맛도 일품이다.
캐번디시에서는 PEI 주민의 유명한 여름 휴양지인 캐번디시비치를 빼놓을 수 없다. PEI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주말이면 곱고 단단한 해변으로 일광욕을 즐기러 접이 의자를 들고 나들이 나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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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김셈앉아서 구경 잘하고 갑니다^^
이곳이 제가 가장 가고싶은 곳입니다.
호호호 아직도 소녀같은 감성이...전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랍스터..가 입맛을 댕기는데요 글구 아이스크림또 쵸컬릿...먹는거에만 눈길이 간다는... 그리고 보니..김선생님 머리카락도 빨강머리앤임다 다음에 아드님께 방문하시는길에..꼭 가보시기 바랍니다^^
루시 몽고메리의 생가가 캐나다였군요. 예쁘고 앙징맞고 ... 마치 동화속 나라 같습니다. 책도 재미있었지만, 만화책으로 너무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네요. 길버트 대따 좋아했었는데 ... ^^
TV에서 연재물로 보여준 영화도 정말 좋았어요. 이곳을 배경으로 찍은것 같네요.
우리의 인생은 굽은길과 같다. 굽은길 끝은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굽은길 끝에 다다르면 새로운 길이 펼쳐져 있는것이다.》---"빨간 머리 앤中"---어렸을 적 읽었던 빨간머리 앤을 최근에 "신지식"번역본으로 다시 한번 읽었습니다. 삽화 속에서 막연히 상상 하던 풍경이 저렇군요.
김선생님, 한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 이 여행을 다녀오신 분은 개인 여행이셨는지요 자꾸 여기가 몹씨 가고 싶어집니다.
미국에 사는 친구가 여고동창 카페에 올린것을 옮겨온건데 그 친구가 직접갔던게 아니에요. 어디서 옮겨온걸거에요. tv에서 보여준 연속극 한번 구해 보세요. 배경이 완전 여기 사진과 똑같이 아름답고 만화와는 전혀 다른 재미가 있어요.앤이 어른이되어 길버트와 결혼하고 그 뒤 이야기까지 보여주더라구요. 저도 너무 가보고 싶어요. 가면 여름에 가는게 좋겠지요?
제가 이 글을 저희 홈피에 가져가서 보여줬더니 바로 7-8명 정도가 줄을 서더라구요. 빨강머리 앤의 팬들이 많은 걸 실감했지요. 문제는 누가 총대를 메느냐 하는 건데, 토론토 사는 친구들이 있으니 그 쪽을 뚫어볼까 하는 의견도 있고 ... 간다면야 물론 여름이 좋겠지요. 장기 프로젝트 한 건 생겼네요. ^^
저희 동창회에서도 한번 일을 벌려봐야겠어요.저희는 중학생 시절부터 앤과함께했거든요. 저희 국어선생님이 신지식선생님이셨는데 앤을 처음 번역하여 교지에 일주일에 한번씩 연재를 해주셔서 너무나 즐겁게 앤을 읽은 추억이있답니다. 아마도 국내에서 앤을 처음 번역한걸로 읽은 사람들이 아닌가 싶어요.
'내가 읽은책에는 앤셜리가 아니고 일본어로 번역된것을 다시 "신지식" 이라는 분이 한국어로 번역한 책 (5권짜리 문고판..아직도 간직하고 있고 미국 연수갈때 유일하게 싸들고 갔던 책,심심할때 읽으려고, 2번이나 읽었지) 일본어를 한국어로 다시 번역하다보니 이름이 "앤 샤아리" 였어, DVD도 샀는데....(만화 아니고 드라마)' -- 제가 올린 글에 제 친구가아놓은 댓글입니다. 그 '신지식' 선생님이 김선생님 선생님이셨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근데, 아무래도 내년 여름에 거기서 뵐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
Sophee님 그 DVD 꼭 빌려 보세요. 그리고 친구분께 dvd어디서 구하셨는지 여쭤봐 주시겠어요? 저도 가지고 싶어서요.
싱겁게도 교보문고에서 샀다네요. ㅎㅎ 저두 주문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