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6:23]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교회 식주인 가이오 - 여기서 '가이오'는 마게도니아의 가이오가 아니며, 더베 사람 가이오드, 요한 삼서에 언급되어 있는 가이오도 아니다. 본절의 '가이오'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행 18:7의 '디도 유스도'와 동일 인물일 것으로 추정하여 고린도에서 바울에게 세례를 받은 인물로 본다..
가이오는 바울의 고린도 전도 사역에서 첫번째 회심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겨울을 보내는 동안 머물러 있었던 집 주인이기도 하다. 본절에서 그를 가리켜 '온 교회 식주인(食主人)'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에게 당시 어느 정도 재산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며 또한 그의 집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집회 장소로 개방되었음을 암시하며 아울러 가이오의 집이 고린도를 방문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개방되고 있음을 말해 주기도 한다
'식주인'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크세노스'로 처음에는 '객우'(客禹), '초청된 친구'라는 뜻이었다가 후에는 '나그네', '외국인' 또는 본절과 같이 나그네다 다른 사람을 친절하게 환대하거나 영접하는 사람으로'집 주인'의 의미로 바뀌었다. 여기서 바울이 가이오를 자기가 머물렀던 집 주인으로 언급한 것은 이 서신을 겐그레아나 또는 마게도냐의 어떤 지역에서 쓴것이 아니라 고린도에서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뒷바침하고 있다.
에라스도 - '에라스도'는 고린도 시의 '재무관'으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모스'는 '극장 지배인', '관리인'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여기서는 '도시의 재산 관리인'이라는 뜻으로 쓰여졌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고린도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고린도교회가 사회적 저명 인사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본절에서의 에라스도가 다른 신약성경에서 언급되어 있는 에라스도와 같은 인물이라는 근거는 없다
당시 그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이었다. 형제 구아도 - 이의 헬라어 '쿠아르토스'는 '네번째'라는 의미를 가진 로마식 이름이다. 바울은 그를 '형제'라고 부르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에라스도나 더디오의 형제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구아도에 대해서는 본 절에 기술된 것 이외에 더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서도 그에 대한 기록이 더이상 없기 때문이다.
한편 바울이 여기서 그를 언급한 것을 통해 그가 로마교인들과 관계를 갖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로마교인들이 이미 그를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상과 같은 본절에 언급된 사람들은 모두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로서 특별히 고린도시에서 영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예외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복음이 신분의 고하를 초월하여 역사한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롬 16:24] (없음)
[롬 16: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 - 먼저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위탁하심으로 전파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하고 있음을 말한다. '나의 복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타 토 유앙겔리온 무'로 복음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믿고 있고 전파하고 있는 메시지를 가리킨다. 여기서 '나의 복음'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해서 그를 자기 중심적이거나 배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다만 바울의 경우에 그 복음이 직접적 계시로 왔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고만 이해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바울의 복음은 모든 기독교적 선교사역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구속 사건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토 케뤼그마 예수 크리스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선포된 말씀'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선포된 말씀'을 가르키는 '케뤼그마'는 '나의 복음'과 같은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긴세월 동안에 걸쳐 숨겨져 있었던 것이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역사상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곧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 이것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크로노이스 아이오니오이스 세시게메누'로 직역하면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비밀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다음 두가지이다. (1)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2) 이 구원이 이방에 전파되져서 이방인들이 믿음을 통하여 유대인 신자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된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문맥상 (1)번의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영세 전부터'는 '천지 창조 이전부터' 의미로서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시간의 진전에 따라 수정, 발전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그 근원을 창조 이전에 이미 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이 영원한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통해서 드러났고 또한 성령에 의해서 충분히 계시되어졌다감취었다가'란 말은 구체적으로 '창조로부터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시대'를 두고한 말이다.
그 여러 시대에 걸쳐 '선포된 말씀'은 베일에 가려진 상태에서 여러 모양과 여러 형식을 통해 점진적으로 계시되어 오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비로소 온전히 계시된 것이다.
[롬 16: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 한글 개역 성경에는 '이제는'이란 말만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데 뉜'이란 복합 접속사를 사용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데'('그러나', '그런데'는 '강한 반의어'로서 앞절에서 말한 것들에 대한 대조와 함께 구체적인 강조를 표시하고 있기에 이를 살펴 '그런데 이제는'이라고 번역하면 문맥의 뜻이 훨씬 더 선명해진다. 이는 율법에서 복음으로, 옛시대로, 즉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함이 감추어져 있던 데서(25절) 이제 온전히 드러나게 된 역사의 전환점을 선언하는 중요한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를 가리키는 '파네로덴토스'는 '파네로오'의 부정과거 수동태로서 '베일에 가리웠던 것이 베일을 벗김으로써 나타나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또는 '그늘에 있던 것이 밝은 햇빛에 의해 드러났다'는 말로서 영세 전부터 감추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 밝히 드러난 복음의 역사적 확실성을 명시한 말씀이다. 따라서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이제는 감취어진 것이 아니다. 즉 더이상 비밀이 아닌 것으로 역사의 한 가운데 모두가 보고 들을 수 있도록 나타난 것이다.
구약시대부터 점진적으로 계시되어 오던 것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을 사도는 다시한번 천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해하는 데 이것만큼 중요한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좆아(카트 에피타겐 투 아이오니우 데우) - 계시의 커다란 변화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된 것이다. 이는 복음의 우주적 전파에 대해 권위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이 헌신하고 있는 사명도 포함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구속 역사를 담당하시고 직접 명령들을 내리시는 것에서 자기 자신의 임무의 근거를 찾는다.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아 테 그라폰 프로페티콘'으로 '성경의 예언서들로 말미암아'라는 의미이다. 문자 그대로 이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서'를 가리킨다. 물론 신약 시대에도 선지자들은 활동하였으며 그들은 권면과 안위(安慰)뿐 아니라 계시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말로 행해졌다. 그러므로 여기서 '선지자의 글'은 구약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것은 사도가 지금까지 전파한 '나의 복음'은 구약에서부터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아울러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를 떠나서, 즉 구약성경과의 통일성이 단절된 말씀을 전파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거짓 그리스도(복음)를 전파하고 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복음은 이처럼 점진적인 계시의 역사성과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더더욱 자신이 전파한 복음의 내용, 구원 진리는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은' 것이라 하여 구약에서부터 시작한 복음의 역사성과 통일성을 힘주어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가 본서의 첫머리에서 이미 밝힌 것이다.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 바울은 서론에서도 자기가 로마의 성도를 견고케 하기 위해서 로마교회 성도들을 하루속히 방문하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취지를 말한바 있다.
이제 그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이런 결과를 가져 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견고케 하는 도구로서 복음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이 복음으로'란 어구를 삽입하여 강조함으로 확실하게 천명한 것이다.
[롬 16: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 '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모노 소포 데오'로 직역하면 '유일하게 지혜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지혜로우신'이라는 말은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계획으로써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송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가리키는 구체적인 내용은 앞에서 계속 언급한 바 있는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된 구원의 비밀의 계시를 의미한다. 즉,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감추었다가 이제는 그 아들의 복음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내심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구원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구원 섭리의 오묘함을 뜻한다.
따라서 본절은 이러한 오묘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찬양의 첫 발성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구원 비밀을 간직했던 침묵이 이제 마침내 드러나 그 구원의 실체와 그 결과를 목격하면서 사도는 그 일을 이루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끝없는 찬양과 영광을 돌리면서 본 서신을 끝맺고 있다. 이 같은 그의 언급은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이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롬 16: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