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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 「방편품 제 2」를 풀어본다(16)
2-38.
“사리불이여,
나의 제자 중에는 스스로 <나는 아라한이다, 나는 벽지불이다.>
라고 말하면서 오로지 보살이 되도록 가르침을 펼치는 부처의
불사를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부처의 제자가 아닙니다. 아라한도 아니요, 벽지불도 아닙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이 법회의 비구나 비구니 중에는 스스로 <나는 아라한과(果)를
깨쳤다, 나는 최후신(最後身)에 이르러 구경열반(究竟涅槃)을
성취했다.>라고 말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고자 더
이상 힘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무리들은 자만심으로 가득 찬 교만한 자임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진정으로 아라한과에 이른 비구나 비구니라면 이 일승법을 믿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가 멸도한 후, 한 분의 부처님도 면전에 계시지 않으면
경우가 다릅니다. 왜 그런가.
부처가 멸도한 후에는 이런 가르침들을 수지(受持)하고
독송(讀誦)하여 그 의미를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일불승을 깨닫기는 극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른 부처님들을 만나 뵐 기회가 있다면, 일불승에 대한
그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금방 명료한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舍利弗 若我弟子 自謂阿羅漢 辟支佛者 不聞不知
諸佛如來但敎化菩薩事 此非佛弟子 非阿羅漢 非辟支佛
又舍利弗 是諸比丘 比丘尼 自謂已得阿羅漢 是最後身 究竟涅槃
便不復志求阿褥多羅三藐三菩提 當知此輩 皆是增上慢人
所以者何 若有比丘 實得阿羅漢 若不信此法 無有是處
除佛滅度後 現前無佛
所以者何 佛滅度後 如是等經 受持讀誦解義者 是人難得
若遇餘佛 於此法中 便得決了”
【풀 이】
●不聞不知
<귀담아 듣지 않으니 깨닫지 못한다.> 혹은 <듣고도 깨닫지 못한다.>
●但敎化菩薩事
<오로지 보살이 되도록 가르치는 일>, 또는
<보살에 이르는 길만을 가르치는 일>, 또는
<오로지 가르침을 펼쳐 보살이 되게 하는 일>,
즉 一佛乘에 대한 일.
또한 이 구절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법화경의 핵심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시는 목적과 취지가 바로 이 여섯 글자다.
●便94, 곧 변(卽의 뜻), 문득 변, 편할 편, 쉴 편, 소식 편, 말 잘할 편
●若有比丘 實得阿羅漢 若不信此法 無有是處
<어떤 비구가 실제로 아라한과를 성취하고도 이 일승법을 불신하는, 그런
경우는 성립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그는 아라한이 아니다.
실제로 아라한과를 성취했다는 사실과, 이 일승법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사실은 양립할 수 없다, 는 부처님의 무거운 말씀이다.
*若(A)有比丘 實得阿羅漢 若(B)不信此法(若A 若B)
<A 일지라도, B 라면>
*無有是處
<그런 경우는 있을 수 없다.>
-處1087 곳 처(장소, 지위), 머무를 처(정지하다, 머물러 살다,
그 경우에 있다)
●除佛滅度後 現前無佛 所以者何 佛滅度後 如是等經 受持讀誦解義者 是人難得
若遇餘佛 於此法中 便得決了
*<지뢰>의 파편, 誤譯이 또 다른 誤譯을 불렀다.
「2-29」의 <唯有諸佛 乃能知之>라는 글귀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윗글에서 드러난다. 이 여덟 글자의 오역(필자는 이것을 앞에서 <지뢰>라
칭했다.)은 아래와 같은 또 다른 오역을 낳아 법화경을 공부하는 이들을
헤매게 한다.
인용한 아래 번역문을 살펴보자.
(구經)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 현전에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는 예외니라.
왜냐하면, 부처님이 멸도하신 후에 이 경을 받들어 지녀 독송하고 뜻을
아는 사람은 만나 보기 어렵기 때문이니라. 만일 다른 부처님을 만나
뵙는다면, 이 법 중에서 분명하게 요달함을 얻으리라.
(무비)
다만 부처님이 열반한 뒤에 부처님이 없을 때는 제외하느니라.
왜냐면, 부처님이 열반한 뒤에는 이런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뜻을 해석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우니라. 이 사람이 만일
다른 부처님을 만난다면 이 법문 가운데서 곧 확연히 통달하게 되리라.
(일본)
[But] there is an exceptional case when, after
the Buddha's extinction, there is no [other] buddha
present. Wherefore? [Because] after the Buddha's
extinction it is hard to find persons who [can] receive
and keep, read and recite, and explain the meaning of such
sutra as these. [Only] if they meet other buddhas can
they, in this[same] Law, obtain [the] solution.
(자설)
위의 세 번역(뿐만 아니라 시중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한글번역)은
모두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엉터리로 번역하고 있다:
<부처님 멸도 후에는 예외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부처님이 멸도하신
후에는 이 법화경을 수지독송하여 그 의미를 해득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당연히 잘못된 번역이다. 살펴본다.
① 이 번역문에서 <부처님 멸도 후에는 예외다>라고 한 그 <예외>는
어떤 사실에 대한 예외인가. 이것은 앞 부분 「2-38」의 마지막 구절,
<若有比丘 實得阿羅漢 若不信此法 無有是處>에 대한 예외를 말한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처럼 부처가 생존해 있을 때는, 아라한과에 이른 비구로서 일승법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없다. 믿지 못하는 비구는 부처의 제자도
아니며, 심지어 아라한도 아니고, 벽지불도 아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멸도하고 면전에 계시지 않으면 예외다, 즉 경우가 틀린다. 다시 말해,
부처님이 멸도한 후에는 아라한과에 이른 비구라 할지라도
일승법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예외적으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는
것이다.
부처님의 이 말씀은 바로 적중하고 있다. 남방불교에는 일불승을 믿지
않는 아라한들이 무량무수하고, 북방 대승불교에도 무량무수까지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무수한 아라한이 있지 아니한가.
② <그 이유는 무엇인가?>는 <아라한과에 이른 비구라 할지라도
일승법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부처님이 멸도하시고 면전에 계시지 않아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일불승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③필자가 「2-29」에서 <지뢰>라 딱지를 붙였던 <唯有諸佛 乃能知之>의
오역으로 인한 파편이 <所以者何 佛滅度後 如是等經 受持讀誦解義者
是人難得>의 번역에 치명상을 입혀 <부처님이 멸도하신 후에는 이
법화경을 수지독송하여 그 의미를 해득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라는 오역을 낳았다. 오역이 또 다른 오역을 낳은 것이다.
여기서 <是人難得>은 <그 사람은 일불승을 깨닫기가 지극히 어렵다>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가 아니다.
마지막 구절(所以者何 佛滅度後 如是等經 受持讀誦解義者 是人難得)을
필자가 번역한 것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멸도하신 후에는 이런 가르침들을 수지(受持)하고 독송(讀誦)
하여 그 의미를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일불승을 깨닫기는 지극히
어렵기 때문입니다>(그러니 아라한과에 이른 비구로서 일승법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예외적으로 있을 수 있다, 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 사람이 일불승을 깨닫기가 어려운 까닭은 무엇인가? ②에서 말한 것처럼
부처님으로부터 일불승의 의미를 직접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번역), (그러나 쌓은 복과 덕이 두터워 후세에) 다른 부처님을
만난다면 그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직접 듣고 금방 확실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함축된 의미), 그러니 사리불이여, 부처가 생존하여 면전에 있을 때,
다시 말해,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때, 귀담아
열심히 듣고 일불승에 대한 믿음을 지녀 일불승을 깨쳐라, 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필자는, <是人難得>을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라고 번역한
대부분의 번역서를 <뗀뿌라>라는 이름표를 붙인다.
(<뗀뿌라>에 대해서는 「2-59」를 참고하시라.)
經의 문자를 떠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위에 인용한 엉터리 번역처럼 만약 그런 사람(즉, 부처님이 멸도하신 후, 이
법화경을 수지독송하여 그 의미를 해득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한다면, 석가모니부처님이 멸도하고 난 후 현재 이 시간까지 법화경을
해설한 무량무수의 해설서들은 대부분 허망한 것들이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정말 그런가?
또 현재 이 시간에도 어디에선가 법화경을 해설하고 있는 무량무수의
스님들, 불교학자들, 그 외에도 불교를 안다고 하여 법화경을 입에
올리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허망한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정말 그런가?
그 뿐 아니다. 지금부터 새로운 부처님이 출현하기까지, 누가 나서서
법화경을 해설한다고 하면 그 사람 역시 허망한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정말 그런가?
<是人難得>을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라고 번역한 시중의 대부분의
번역자들은 이 구절을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得449 얻을 득(①손에 넣다 ②마땅함을 얻다(適宜하다) ③알다, 깨닫다
④성취하다 ⑤잡다 ⑥의기투합하다)
*遇 만날 우(길에서, 우연히), 뜻밖에 우
여기서 <遇>는 우연한 기회에 만난다는 뜻이 아니라, 복과 덕을 쌓아
우담발화가 피듯,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부처님을 만나 뵙는 것을 말한다.
*於此法中
<이 법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여기서 <此法>은 일승법을 말한다.
*決686 터질 결, 판단할 결, 정할 결(결단하다), 이별할 결
*了51 깨달을 료(명확히 알다,了解), 마칠 료(끝내다, 完了)
2-39.
“그러니 사리불이여,
그대들은 부처님들의 말씀을 반드시 일심으로 마음에 새겨
이해하고 수지해야 합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오직 한 가지 가르침, 일불승(一佛乘)이
있을 뿐, 다른 가르침은 있을 수 없다. 부처님들의 모든 가르침은
결코 허망하지 않다.>
바로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말씀입니다.”
“舍利弗 汝等 當一心信解 受持佛語
諸佛如來 言<無虛妄 無有餘乘 唯一佛乘>”
【풀 이】
없음.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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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가 맞는지 안 맞는지 판단은 앞으로 많은 시간을 요하겠읍니다만, 다만 과연 법화경 전문가이구나!라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如是等經 受持讀誦解義者 是人難得... 구경등에서는 受持讀誦解義者 = 是人 이 말이 동사 得의 목적어가 되어 문법상으로는 맞습니다.
그런데 거사님의 해석을 문법적으로 볼 때... 如是等經 受持讀誦解義者이 문장에서 어떻게--->
이런 가르침들을 수지(受持)하고 독송(讀誦)하여 그 의미를 이해했다 하더라도... 이런 해석이 나옵니까? 또 "者"는 여기서 무슨 뜻?
如是等經 受持讀誦解義者 = 是人도 일불승 깨닫기가 어렵다
(수지독송해의를 한 者 이런 사람도)
이것을 풀어서 "이런 가르침들을 수지(受持)하고 독송(讀誦)하여 그 의미를 이해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했는지???
역시 阿修羅 居士님입니다. 저가 번역에 엄청 고심한 부분을 송곳처럼 찔러 오시니 말입니다.
<佛滅度後 如是等經 受持讀誦解義者 是人難得 若遇餘佛 於此法中 便得決了>에서
<者>는 <~할 경우>, 혹은 <~할 때>로 번역하는 게 정상입니다.
저가 <~할지라도>라 번역한 이유는, 문장의 앞뒤 흐름을 감안해서
이 부분을 아주 세게 부각시켜, 경문의 의미에 강한 포인트를 찍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阿修羅 居士님처럼 번역하더라도 경문의 본래 의미에는 아무 변함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是人難得>을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없다>가 아니라, <그 사람은 깨달을 수가 없다>라고만
번역되면 이 부분의 번역은 제 역할을 다했다고 봅니다.
좌우간 훌륭한 문제제기를 하셨군요!
만약 시중의 번역서처럼, <是人難得>을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없다>로 번역하게 되면, 법화경 전체의
방향과 취지가 흔들리게 되어 저가 본문에서 제기했던 3 가지 문제에 답을 내 놓을 수 없게 됩니다.
阿修羅 居士님의 탁월한 식견으로 저는 좀더 열심히 법화경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맙습니다!!
<者>는 <~할 경우>, 혹은 <~할 때> 이런 뜻이 있읍니까? 저의 옥편도 동아출판사(1992녀 발행)의 "동아 한한대사전"=2만6천字 / 민중서림 "한한대자전"=2만천字/ 두가지로 보는데 ...여기 두개엔 그런 뜻이 전혀 없는데요???
저가 보는 <중한사전>,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2002년, 2월20일, 전면 개정판의 <者>에는, 문어체로 <시간을 나타내는 말 뒤에 쓰여 "~때에"라는 뜻을 나타냄>이라 되어 있습니다.
글자 <者>는 그 외에도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법화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예를 들면, 마지막 품, 보현보살권발품에는 一者爲諸佛護念 二者植衆德本 三者入正定聚 四者發救一切衆生之心...... 이런 문장도 있잖아요. 앞뒤 문장을 연결하는 접속사 노릇도 하고, 또, 韻을 중요시하는 한문이니만큼 이 글자 외에도 여러 글자들이 문장 가운데나 끝에 사용되어 아무 뜻도 없이 단지 문장의 韻만을 멋을 내는 경우도 법화경에서 볼 수 있지요. 저 같은 사람이야 그런 걸 100% 이해 못하지만요.
또,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사전 외에도, 네이버의 한자사전을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법화경 공부를 하면서 한문사전으로 해결 안 되는 경우, 네이버 한자사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참 편리한 세상이구나, 라 생각합니다. 참고 하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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除佛滅度後 現前無佛 所以者何 佛滅度後 如是等經 受持讀誦解義者 是人難得
若遇餘佛 於此法中 便得決了 확실히 짚고 넘어 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_()()()_
구마라즙법사님은 이 법화경을 한문으로 옮기면서 엄청 고심하셨구나, 하는 점을
법화경을 대할 때마다 느끼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음 세대에 최대한 자세하게,
또 확실하게 전하기 위해서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구나하는 점을 다는 몰라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만약 즙법사님이 한글로 옮겨놓은 법화경을
보게 되면 아마 기겁을 할 겁니다. 만약 부처님이 오셔서 한글법화경을 보셨다면 어떤 말씀을 하실까?
저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우리 불자들, 정신 차려야한다고 봅니다.
벅찬 감동의 물결이 용솟음 치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