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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재
능주는 상상 그 이상의 명품 도시었다.
능주는 청동기 시대와 마한 시대에 죽수부리(竹樹夫里)였고,
백제시대에 이릉부리(爾陵夫里)였으며
통일신라 시대는 능성(陵城)군이었고(757년)
고려 태조 왕건 때(940년)는
묘(왕)릉을 비단 릉으로 바꾸어 능성(綾城)현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년) 전국 행정구역을 8도제가 처음 도입되면서
전라도 능성현이 되었으며
조선시대 인조 때부터(1632년) 목사 고을 능주(綾州)목이 되었고
조선말 고종 때(1896년) 전국 행정구역이 13도 331개 군으로 개편되면서
전라남도 능주군이 되었으며
1908년 능주군은 화순군을 능주군에 포함시켜 17개면 323리를 관할하였다.
능주군은 1910년에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통계연보(統計年報)에 의하면
호수는 12,837호이고, 인구는 55,696명이었다.
1913년 일제 강정기에 능주군을 화순군으로 명칭을 완전히 바꿔
능주군의 이름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1년 후 1914년 조선 총독부는 전국 331개 군을 220개 군으로 축소시키면서
화순군 능주면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능주의 화려한 역사 -
능주는 상상 그 이상의 명품 고을이었다.
청동시 시대부터 일제 강정기 1914년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자랑할만한 대단한 도시 중의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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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능주는 바다를 끼고 있는 나주를 통하여
지석강을 따라 육지로 들어가는 관문의 자리에 능주가 있었으며
산과 강과 평야가 아주 적당하게 펼쳐저 있어
큰 부족들이 살기에는 이상적인 곳이었다.
능주는 나주보다 작았으나
나주는 바닷길과 연결되어 장사하는 곳이었고
나주의 갑부들과 귀족들은 능주에 와서 살았다.
그리고 화순이나 동복은 항상 능주의 작은 집이었고
1914년 일제 강정기까지 화순보다 큰 도시였다.
이런 역사적인 능주가 어찌하여 지금은
전국에서 가장 최하위의 작은 면(面)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고
어떻게 목사고을이 되었으며
삼충각의 인물들과
능주 사람 최경회 장군의 후처 논개가 기생이 되어
진주성의 꽃이 되었는지 그 이야기들을 해 보고자 한다.
삼한 시대 마한에 속한 능주는 - 죽수부리(竹樹夫里)라 하였는데
죽수(대나무) 부리(넓은)라 불리게 된 것은
대나무 밭(단지)들이 마을 곳곳에 있어 죽수부리라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능주면 석고리에 옛 관아 건물을(사진첨부) 보수하여
'죽수절제어문'(대문)이라 하고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으며
새로운 도로명으로 능주 중앙로를 죽수길이라 하고
죽수서원(모산리)과 죽수도서관(관영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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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와 마한 시대에 귀족들의 많은 능묘(고인돌)들이
지금의 능주 비봉산과 도곡 효산리에 생기면서
백제시대 사람들은 '이릉부리'라 부르게 되었으니
왕릉, 묘릉이 있는 넓은 고을이라는 뜻으로 이릉(爾陵)부라 하였다.
(저爾, 너爾, 묘陵, 언덕陵)
왕릉(묘릉)과 같은 고인돌이 있는 넓은 평야가 있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부리란 벌(서라벌, 황산벌, 넓은, 큰)의 다른 이름으로
넓은 들판, 평야가 있는 곳을 말하며
통일신라 시대까지 능주는 이릉부리 군(郡)이었다.
이릉(爾陵)부리라 한 것은 지석강의 돌로 만든
지석묘(고인돌)들이 많은 고장이 되면서
넓은 평야(능주평야)가 있어 이릉부리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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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도곡면에서 춘양면까지 400여기의
고인돌 묘릉(공원)이 즐비한데 그곳도 옛날에는 능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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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고인돌(화순 도곡)
통일신라시대 757년(경덕왕 16)에 지명을 모두 현대화 시켜야 한다며
이릉(爾陵)부리 군을 능성(陵城)군으로 개명하여
금성(나주) 무주(광주) 능성(능주)이 가장 큰 도시들이었다.
고려시대 940년 고려 태조(왕건) 때 능성(陵城)군이 능성(綾城)현이 되었으니
묘릉이었고 언덕 릉(陵)을 사용하던 능성(陵城)이
실사변으로 바꾸어 비단릉(綾)이라는 능성현으로 개칭하게 되었으니
비단처럼 곱고 아름다운 능성(綾城)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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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산과 평야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고을이라는 뜻으로
능성(綾城)이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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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봉(만인리 뒷산)과 연주산(連珠山) -
금오산(용암산) - 안산(능주 향교 안쪽 산) -
비봉산성 - 비봉산(능주, 도곡 경계)
비단 병풍과 같은 산들이 성(城)을 이루고 있어 능성(綾城)이라 한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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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연주산(連珠山)이란 연결할 연(連)과 구슬 주(珠)로
다섯개의 산들이 연결되었다 하여 연주(連珠)라 하였는데
일본에서는 오목(五目)을 연주(連珠)라 한다.
연주산은 만연산(화순)으로부터 시작되어
- 국사봉(만인리 뒷산)을 거쳐 연주산까지 5개의 산이 병풍처럼(城) 이어져 있다.
또한 능주의 강이 비단(綾) 길과 같다.
이양천과 춘양천이 만나 충신강(오리정)을 이루고
한천천을 만나 영벽정강의 절경을 만들어
다시 화순천과 만나 지석강이 되는데
이강들이 모두 능주평야를 만들고 있으니
어찌 비단 능(綾)이라 하지 않으리요
산들이 성을 이루고 있다면
지석강 또한 비단처럼 곱고 아름다워
비단 능(綾)을 사용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다.
이와 같이 산과 강과 평야가 아름다운 땅이기에
고려 태조 때는 능성(綾城)으로 개명되었던 것이다.
산과 강과 바다가 비단처럼 펼쳐져 있고
강과 산이 성처럼 둘러 있으며
비봉산성과 용암산성이 외적들로부터 보호하고 있어 능성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1413년 전국의 행정구역이
처음으로 전국이 8도로 개편되면서 전라도 능성현이 되었고
임진왜란으로 큰 손실을 입고 관아와 향교가 불타 소실되면서
1597년(선조 27) 화순현에 병합되었다가
1611년(광해군 3) 능성현으로 다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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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2년(인조 10)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의 고향이라 하여
능주목으로 승격되어 목사가 파견되면서
지금의 능주, 춘향․ 이양, 청풍․ 도곡․ 도암․ 한천․
화순, 동복 일대가 다 능주 관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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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관찰사(도지사) - 목사(시장) -
현령(군수) - 현감(면장)이 있었는데
이조시대 전국 8도에 20개의 목사관 중에 그 하나가 능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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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1개, 평안도, 2개, 황해도 2개, (북한)
경기도 3개, 강원도 1개, 충청도 4개, 경상도 3개, 전라도 4개
1759년에 편찬한『여지도서』를 보면
능주목의 호구와 인구는 각각 5,033호와 19,650명이었다.
그 반면에 화순은 1,715호에 5,777명,
동복은 2,106호에 7,390명이었으며,
능주목은 두 고을을 합한 인구보다 많았다.
고종 1896년 13도 331군으로 개편되면서
전라남도 능주군이 되었는데
능주군은 1910년에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통계연보(統計年報)에 의하면
호수는 12,837호이고, 인구는 55,696명이었다.
당시 능주군이 관할한 면(面)은 17면(面)이었고,
동리(洞里) 숫자는 323리(里)에 달하였다.
1908년 화순군은 능주군에 편입되어 화순면이 되었고
1913년 일제 강정기에는 능주군을 화순군이라 불리게 되면서
능주란 이름은 완전히 삭제하였던 것이며
1914년 전국 331개 군이 220개 군으로 축소되면서
화순군 능주면이 되어 그나마 능주라는 이름을 다시 찾은 것이다.
능주는 능주목이 되어
일제 강정기까지 282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고
목사가 파견된 기간은
1632년부터 1895년까지 263년이었으며
고종 때(1895년) 행정개편으로 능주군이 되었고
1896년 우리나가가 8도에서 13도로 개편되면서
전라남도 능주군이었다.
능주군은 일본의 피해를 가장 많이 본 군(郡)들 중의 하나다.
임진왜란 때도 관아와 향교가 불타
선조 1597년 능성현이 화순현에 편입되었다가
광해군 1611년에 다시 능성현이 되었는데
일제 강정기에 능주군이 화순군에 편입되면서
면으로 추락하여 지금의 능주는 가장 밑바닥에서
옛명성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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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모든 여건들이(강, 평야, 인구,
전라도의 중심이요 화순군의 중심이 능주다.)
화순보다 갑절이나 월등한 상황이었는데도
능주가 화순군에 편입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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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능주가 목사 고을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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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는 능성 구(具)씨 시조 '구존유'로부터 시작된다.
송나라가 원나라 곧 몽고 징기스칸에게 멸망할 때(1224년)
구존유는 한림학자 주잠(주자의 증손)과 함께
송나라에서 망명 나주에 살게 되었고 주잠은 능주에서 살게 되었는데
주잠의 딸과 결혼하게 되면서 구존유는 능성을 본관으로 하는
능성 구씨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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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려시대 상장군이 되면서 고려시대 유력가문이 되었고
문화좌정승, 대제학, 공주목사, 좌시중
구본유 7대손이 고려말에 좌시중(부총리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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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태조부터 영조 때까지 무인의 명가로
권력의 핵심에는 능성 구씨 가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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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54명
무과 104명
영의정 2명
공신 9명
부마(공주의 남편) 3명
종2품 무과 9명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훈련대장, 어영대장,
세조때 우의정, 영의정 - 구치관
성종때 상주목사
관찰사 - 구봉령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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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씨의 후손인 인헌왕후가 원종의 비가 되면서
16대 왕 인조의 생모가 되었다
인헌왕후는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태어나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 정원군과 혼인하여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에 봉해졌고
능양군(인조)을 비롯, 능원대군(綾原大君),
능창대군(綾昌大君)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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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과
비범한 관상으로 부왕인 선조(14대왕)의 사랑을 받았다.
선조가 죽고 이복형인 광해군이 임금이 되자
정원군은 견제와 감시를 받았다.
정원군은 셋째 아들 능창군이 신경희과 모의하여
왕이 되려고 했다는 무고를 받아 죽는 등
많은 시련을 겪었다.
정원군은 울분 속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나,
4년 후인 1623년에 광해군이 쫓겨나고
큰 아들 능양군이 임금에 오르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요즘 드라마 화정에서 광해군을 페위시키고
왕이 된 분이 조선 16대왕 인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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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양군이 인조반정으로 왕권을 빼앗아
28세에 왕이 된 후 1632년 왕후의 관향이라 하여
능성을 능주로 개편하고 목사를 파견한 것이다.
- 작성자 : 유명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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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주 삼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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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회, 문홍원, 조현 장군들의 충신을 모신 전각으로
최경회는 고려시대 무인정권을 주름잡았던
최충의 후손으로 화순 삼천리에서 태어났지만
삼충각이 세워질 때(1685년)는
능주 목사관아의 소속이었기에 능주 사람이었고.
조현(일본 70여척의 해적들 소탕중 사망) 장군도
춘양사람이지만 능주목사 관아의 소속이었으며
문홍원 장군은(최경회장군과 함께 진주성에서)
능주 남정리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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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회(崔慶會,1532년 ~ 1593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1561년 명종 16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에 이어
옥구, 장수, 무장의 현감을 지냈고
영암군수와 영해, 담양부사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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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선조 23년) 모친이 임종하자
상을 치우기 위해 벼슬을 내어놓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1592년 모친의 삼 년상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큰 형 경운(慶雲)과 둘째 형 경장(慶長)과 함께
고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화순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한다.
그는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500여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조카 최홍재로 하여금
고경명 장군의 휘하에 합류하여 싸우게 했다.
그러나 금산전투에서 고경명이 전사하자
그의 휘하였던 문홍헌 등의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합류함으로써,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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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과 무주에서 전주와 남원으로 진격하는
왜병과 싸웠고, 금산에서 퇴각하는 왜적을 추격하여
우지치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로 인해 진주로 집결하는 일본군을 방어함으로써
진주 대첩을 가능하게 하였다.
최경회는 이 전공으로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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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경상도병마절도사로 진주성에 주둔 중
6월 가토 기요마사 등이 다시 진주성을 공격해오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 병마절도사 황진(黃進)
복수의병장 고종후(高從厚) 등과 분전했으나
9일 만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결국 남강에 투신자살하였다.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을 지키고 있던
지휘관과 병사를 비롯하여 양민들까지
7만명이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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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1753년 영조 29년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리고 순조왕 때 사당을
지금 한천면 금전리 저수지 안에 세웠고
1963년 저수지가 매몰되면서
화순읍 다지리로 사당을 옮겼다.
그러나 영정은 능주 포충사(褒忠祠, 모산리)에
그대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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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촉석루의 꽃 논개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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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회의 후처 논개가 진주 촉석류의 꽃이 되었다.
논개는 전라북도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태생으로,
1574년 선비 주달문(朱達文)과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 반가의 딸로 태어났다.
부친 주달문은 진사(進士)로서 슬하에 아들을 두었으나
15세에 괴질로 요절하였다.
이후 40이 넘은 나이에 논개를 보았다.
1578년 부친 주달문의 별세 후
숙부 주달무의 집에 의탁하였으나,
숙부가 벼 50석에 김부호(金富豪)에게
억지(사기) 결혼(許婚)을 허락하니
모녀는 경상도(慶尙道) 안의현의 친가로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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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9년 부호의 기소로 구금되었으나,
장수 현감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의
명판결로 석방되었고 논개는 갈 곳이 없어
현감의 관저에 의탁하게 되면서
최경회가 논개를 부실(副室)로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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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최경회가 전라우도의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병사를 훈련할 때 논개가 모든 막일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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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동행하게 되었던 것이며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스스로 기생이 되어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을 때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같이 투신하여 순국(殉國) 하였다
첫댓글 우와 참 잘 읽었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