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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역동적인 삶을 살다 - 인간, 문화, 사회 편
3장. 역동적인 하층민의 삶과 사회 진출
3-1. 민의 세계와 존재 형태
고려를 포함한 전근대 사회에서는 인간 집단을 크게 사, 농, 공, 상의 네 계층으로 구분하고 흔히 사민(四民)이라 합니다. 그 가운데 '사(士)'는 전, 현직 관료를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관료 경험은 없으나 유교적인 지식과 소양을 가진 독서층, 주로 향촌의 여론을 주도한 지식인층을 포함합니다. 한마디로 최상위 지배층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사'를 제외한 농공상에 해당하는 계층이 고려시대 피지배층인 민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피지배층 가운데 농민과 어부는 사민 중 '농(農)'에 속합니다. '공(工)'은 주로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이들을 '공장(工匠)'이라 합니다. 고려와 조선의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식화(食貨)'라는 용어는 일종의 경제 용어로 '식(食)'은 땅에서 나는 농산물, '화(貨)'는 수산물과 수공업을 통해 생산되는 각종 물품을 가리킵니다. '상(商)'에 속하는 상인은 '식화'를 판매 유통하는 일에 종사하는 계층을 뜻하지요.
고려시대 수공업 생산의 주체는 장인(匠人)입니다. 수공업과 이에 종사하는 장인들에 관한 제도가 정비되면서, 장인들 간에 위계와 서열이 생겨났습니다. 적잖은 고려 유물에 '상대장(上大匠)' '삼대장(三大匠)' '대장(大匠)' 같은 표현들이 등장하는데, 국가 소속 장인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전문 기술을 가진 상층 장인의 경우 기술 수준과 공로에 따라 '지유(指諭)'에서 '부장(副匠)'에 이르는 직위를 갖고 일반 장인을 지휘했지요. 이와 같이 위계와 서열이 존재했다는 것은 그만큼 수공업이 발달했다는 증거입니다.
고려왕조는 장인을 국가에 등록시켜 이들을 통해 국가가 필요로 하는 각종 제품을 생산했습니다. 장인들은 무슨 물품을 생산하는지에 따라 해당 물품을 관리하는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청에 이름이 등록되었습니다. 이들의 이름이 등록된 장부를 '공장안(工匠案)'이라 하는데, 성종 연간(981~997)과 현종 5년(1014) 두 차례에 걸쳐 공장안이 작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공장안에 등록된 장인은 거주지에 따라 중앙의 '경공장(京工匠)'과 지방의 '외공장(外工匠)', 관청 소속 여부에 따라 '관장(官匠)'과 '사장(私匠 혹은 민간장)'으로 구분되었습니다. "고려사"에도 중앙의 10개 관청 소속 67개 작업장에서 57종의 수공업 제품 생산에 종사한 장인 97명의 이름이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경공장일 것입니다. 이들은 최고 기술을 지닌 상층 장인으로 왕실과 귀족의 사치품이나 생활용품, 대외 조공품 등 고급 제품을 생산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경공장의 전부는 아니고, 그 밑에는 이들의 지시와 통제를 받는 일반 장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고려사" 식화지에 따르면, 경공장은 1년에 300일 이상 근무할 경우 그 대가로 녹봉을 받았습니다. 작업의 중요도에 따라 쌀은 최고 20섬부터 최하 6섬까지 지급되었습니다. 또한, 문종 21년(1067)에 제정된 전시과에 의하면 대장, 부장, 잡장인(雜匠人) 등이 무산계를 받으면 17결의 수조지가 지급되었습니다. 대장, 부장은 관청 소속 상층 장인이며, 잡장인은 중앙 관청 소속 일반 장인입니다. '무산계(武散階)'란 향리, 공장, 악인 등과 탐라 여진의 추장 등에게 내린 관계(官階)를 의미합니다.
지방에 거주하는 외공장에는 군현에 속한 장인과 소(所) 생산 체제에서 수공업에 종사한 소 소속 장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정 기간 역에 동원되고 나면, 나머지 기간은 개인적으로 수공업 제품을 생산해 판매했을 것입니다.
고려 정부는 공장과 상인의 자제가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역을 자손에게 세습하여 그 업을 유지하게 만들고 그들이 가진 기술력을 국가가 통제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12세기 이후 무신정변과 농민항쟁, 몽골의 침입 등으로 국가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소속된 장인들이 무거운 역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 장인에 대한 신분적 차대가 작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상업의 발달은 수공업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을 갖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집안이 해상 교역을 통해 성장한 만큼, 고려 정부는 건국 초부터 상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고려의 상업은 크게 도시와 지방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습니다. 도시의 상업은 시전과 관영 상점, 장시(場市)로 이루어졌는데, 개경의 시전은 관청과 귀족들이 주로 이용했습니다. 종이를 파는 지전(紙廛), 종이의 원료이기도 한 닥나무를 파는 저시(楮市), 각종 기름을 파는 유시(油市), 말이 거래되는 마시(馬市)가 형성되어 있었고, 다점(茶店)이나 쌍화점(雙花店) 같은 찻집이나 음식점도 있었습니다
개경의 시전은 전국 각지에서 사람이 몰려드는 만큼 각종 물품의 유동량이 많았습니다. 고려 정부는 가치가 유동적이고 들고 다니기 힘든 곡식이나 옷감으로 값을 치르는 대신 화폐를 만들어 유통시키려 했습니다. 성종 때 처음으로 '건원중보'라는 철전(鐵錢)을 만들었고, 숙종 때는 '해동통보'를 비롯한 여러 주화를 만들었지요. 성종은 화폐를 유통시키기 위해 정책적으로 차, 술, 음식 등을 파는 점포들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숙종 때도 귀천을 막론하고 거리 양쪽에 각기 점포를 열도록 권장하고 주현에도 술집과 음식점을 개설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화폐 유통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숙종은 "사민이 각기 그 생업을 잘 닦아야 실로 나라의 근간이 된다"라면서 상업을 적극적으로 권장했습니다.
지방에는 주로 관아 근처에 인근의 농민, 수공업자, 관리 등이 물품을 거래하는 향시(鄕市)가 있었습니다. 부상(負商, 등짐장수), 선상(船商, 배에 물건을 싣고 다니며 파는 사람) 같은 행상들이 전국을 돌며 장사를 했지요.
지방에서는 특히 사원이 종교적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활발한 상업 활동을 했고, 사원이 주도하는 고리대가 매우 성행했습니다. 사원은 자체 생산한 술이나 농산물, 수공업 제품을 판매했으며, 직접 교역 장소가 되어 지방의 상업을 주도했습니다. 소유한 말을 이용해 숙박 시설인 '원(院)'을 운영하며 전국의 유통망을 장악한 사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적잖은 수의 사원이 권력과 경제력, 종교적 지위를 이용해 강제 매매와 인적 수탈을 자행한 탓에, 사원의 상행위는 늘 개혁론자들의 입에 오르내렸지요. 불법적인 강매를 시도하는 지방관 역시 적지 않았습니다.
고려는 배를 이용한 교역의 이익을 중시하고 해상 무역도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국내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도성 밖 예성강 하구의 후서강(後西江), 벽란도, 전포 등으로 상업 권역이 확대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조세와 공물이 모이는 벽란도는 국제 무역항으로서 국가 행사 때가 되면 세계 각국에서 온 상인들로 붐볐습니다. 개경에는 영빈관 같은 외국인 전용 숙소가 10여 곳이나 생겼을 정도로 한꺼번에 수백 명의 외국 사신이나 상인이 몰려들었습니다.
고려는 주로 나전칠기, 도자기, 옷감, 붓, 먹, 부채, 무기, 마구류를 수출했습니다(*고가 고기술의 선진국형 수출품이라 생각된다). 송나라는 고려 사신이나 상인을 위해 고려관(高麗館)을 따로 지어 편의를 제공하며 융숭히 대접했습니다. 고려 상인들은 송에서 관세혜택도 받았는데 다른 외국 상인들이 1/15을 관세로 냈지만 고려 상인들은 그보다 작은 1/19를 냈다고 합니다.
고려 말에는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말본론(末本論)이 점차 힘을 얻게 됩니다. 농업이야말로 천하의 근본이라고 여기는 말본론에 의하면 상업 활동은 생산하는 것 하나 없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이익을 취하는 천한 행위, 이른바 "본을 버리고 말을 쫓는 행위"였지요. 이에 따라 상업활동에 제약이 가해지고 전업적인 상인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는 등 공상천예(工商賤隸, 공장, 상인, 천민, 노예)를 하나로 묶어 신분적 차별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고려시대 상업 발달의 조건이 조선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고려의 민, 즉 하층민의 다수를 차지한 농민을 흔히 '백정(白丁)'이라 합니다. 도축업에 종사하는 조선의 천민과는 다른 농사를 짓는 일반 민을 뜻합니다. 이들은 군현 지역에 거주하면서 국가에 조세와 역역을 부담한 일반 농민입니다.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영(自營) 농민과 소유 토지가 부족해서 남의 토지를 빌린 뒤 이를 경작해서 가계의 수입을 보충하는 전호(佃戶) 농민이 있었습니다.
국가 운영에 필요한 공적 업무, 즉 직역을 갖지 않은 계층으로, 직역 부담자인 정호(亭戶)*1와 대비되는 존재입니다. 조선의 양인 농민층과 같은 존재입니다. 백정은 직역을 부담하지 않는 대신 수확물에 대한 조세를 바쳐야 했고, 특산물을 공납해야 했으며, 성을 쌓거나 도로를 건설하는 등의 토목공사에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양인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을 정도로 과거의 문호가 열려 있었고, 합격 가능성도 고려 때 보다 높았습니다. 특히 고려 초에는 아버지가 부호정 이상의 향리층이라야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지요. 고려 중기부터 백정도 과거 응시가 가능해졌지만, 문제는 과거 공부가 가능한 교육 기관이 조선에 비해 적고 과거 시험에 필요한 학문인 유학이 보편화하지 못해 일반 양인인 백정은 과거를 준비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백정이 지배층이 될 방법은 주로 군인이 되어 군공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잡척도 고려시대 농민을 구성하는 계층 중 하나였습니다. 잡척은 공해전, 둔전 같은 국가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는 데 동원된 향, 부곡의 주민, 각종 수공업 제품과 농수산물 생산에 동원된 소의 주민, 궁원과 사원에 조세를 바치는 장처전의 주민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수공업 생산 같은 특정의 역을 추가로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백정보다 사회 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있는 최하층 양인 농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민인 백정 농민은 평균 1결의 농지를 소유했습니다. 고려 전기 농지 1결은 대체로 1,200평, 6마지기 정도였지요. 고려 후기에는 결의 측정 기준을 토지의 면적이 아닌 수확량으로 바꾸고 20석을 그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비해 고려 전기 토지 한 결의 생산량은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최소 10석에서 최대 18석으로 평균 14석입니다. 백정 농민의 주 수입원인 이 토지는 보통 부부와 3~4명의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이 함께 경작했는데, 이 가족을 기준으로 고려 전기 농민의 한 해 수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성인 한 사람의 식량 소비량은 하루 1되, 1년에 약 2.4석 정도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자녀 한 명의 소비량을 성인의 반으로 가정하면 5인 가족에게 1년간 필요한 식량은 9.6석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한 해 수확량의 1/10인 조세와 기타 요역과 공물 비용을 내야 합니다. 조세는 수확량에 따라 1석에서 최대 1.8석을 내야 하고, 요역과 공물 비용으로는 포 3~4필을 바쳐야 하는데 포 1필이 쌀 2두이므로 약 3석이 필요하지요. 여기에 이듬해 생산을 위한 종자곡 0.5~1석과 빌린 돈이나 기타 경비 2~3석을 합하면, 가족이 소비할 식량을 제외한 한 가족의 1년 경비는 수확량에 따라 최소 6.5석에서 최대 8.8석입니다.
고려 전기 1결의 농지에서 최대치인 18석을 수확한다 해도 이 8.8석을 빼고 나면 9.2석이 남게 되므로, 가족이 먹을 1년치 식량(9.6석)조차 부족합니다. 경조사비 같은 예상 밖의 지출은 그대로 부채로 떠안을 수밖에 없지요. 더욱이 수확량이 10석이 지나지 않을 경우 종자곡을 남겨두기는 커녕 끼니조차 걸러야 합니다.고려시대의 농민 1가호(家戶)는 최대치를 수확해도 자기 가족의 기본 생활비조차 충당하기 힘든 처지였던 것이죠. 자식을 팔아 빚을 갚는 사례들이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고려 정부는 적자를 메우는 방법으로 개간을 통해 소유 농지를 늘려가는 방법을 권장하였습니다. 여기에 돼지, 닭 등 가축을 기르거나, 채마밭을 일구거나 남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거나, 땔감이나 약초, 나물을 채취하는 등의 방법으로 부족한 생계를 보충해나갔습니다.
특정한 역을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잡척의 가계 수지는 더욱 열악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직전, 의종이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전국의 역과 원에서 수집한 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온종일 뙤약볕 아래 농사를 지어도
한 말의 조를 얻을 수 없구나
바꾸어 조정에 있기만 하면
앉아서 만 석의 곡식을 먹을 수 있구나
-- 이인로, "파한집"
다음은 문장가 이규보의 시로, 무신정권 초반인 1190년대에 지어진 것입니다:
햇곡식은 푸릇푸릇 아직 논밭에 자라는데
아전들은 벌써 세금 걷는다고 야단이네
힘써 밭 갈아 나라 부강하게 하는 일 우리에게 달렸는데
어찌 이다지도 괴롭히며 살갗마저 벗겨 가는가
위의 시는 12세기 시작된 하층민의 유망과 봉기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고려 농민이 항상 이같은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던 것만은 아닙니다. 1375년(우왕 1) 전라도 나주 거평(居平) 부곡에 있는 소재동에서 2년간 유배 생활을 한 정도전이 묘사한 민의 모습입니다. 그 속에 보이는 농민의 생활상은 오늘 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순박한 농민의 생활상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소재동에) 사는 사람들은 순박하고 꾸밈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그 중에서도 황연(黃延)은 더욱 그러했다. 집에서 술 빚는 것을 좋아했는데 황연은 마시는 것도 좋아해서 매번 술이 익으면 반드시 나에게 먼저 잔을 청했다. 손님이 오면 항상 술을 내놓았고, 오래 사귈수록 더욱 공손했다. 김성길이란 자는 제법 글을 알았다. 그 아우 천(天)은 함께 대화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형제 모두 술마시기를 좋아했고, 한집에서 살았다. 서안길이란 자는 늙어서야 중이 되었는데, '안심(安心)'이라 불렀다… 김천부와 조송이란 자도 김성길이나 황연과 술 마시는게 비슷했다. 날마다 나를 찾아와 놀았다. 철마다 토산품이라도 얻는 날에는 반드시 술과 된장을 갖고 나에게 와서 한껏 즐기다 돌아갔다. --- 삼봉집(三峯集) 권 4
조세와 지대 외에 가호마다 관에 바쳐야 할 공물의 양도 적지 않았습니다. 공물로는 주로 포를 짜서 바쳤는데, 포짜는 일은 전적으로 여성들의 몫으로 부족한 가계를 보충하는 데도 유용하였습니다. 포는 화폐의 기능을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16세에서 59세까지의 남성은 군역과 요역도 부담해야 했습니다. 군역은 3년마다 한 번씩 돌아왔고 그 때마다 1년가량 복무해야 했습니다. 군역을 지는 동안에는 군인전을 받아 여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군복이나 양식, 무기에 드는 비용을 자비로 충당했습니다. 대신 군인전을 경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습니다.
요역은 1년에 약 20일 가량 궁궐이나 성의 수축, 도로 보수 작업 등에 동원되었습니다. 그 때도 양식은 스스로 마련해야 했습니다. 다음은 의종 때 '중미정(衆美亭)이란 왕실의 정자를 짓는 공사에 동원된 한 역졸과 그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정자(중미정)를 지을 때 역졸들은 각자 식량을 가져 왔다. 어떤 역졸은 집안이 가난해 양식을 가져올 수 없어서 다른 사람들이 한술씩 덜어준 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어느 날 그 처가 음식을 차려와서, "친한 분들을 모셔 함께 식사하셔요"라고 했다. 그 역졸이 "가난한 살림에 어떻게 음식을 준비했소? 다른 사람과 정을 통해서 얻은 것이요, 아니면 훔친 것이요?"라고 추궁했다. 처가 말하기를, "얼굴이 추한데 누가 나와 정을 통하겠으며, 겁이 많은데 어찌 도적질을 할 수 있겠소? 머리카락을 팔아 준비한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깎은 머리를 보여주었다. 역졸이 울면서 음식을 먹지 못했다. 듣는 사람도 다들 슬퍼했다. ---- "고려사" 권 18, 의종 21년(1167) 3월
무거운 조세나 역역 부담, 지배층의 수탈 등 고려 민의 어려움은 조선시대나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 전반적으로 낮은 생산력 수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농업 기술 수준은 휴경 없이 매년 같은 땅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상경화 단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력을 돋우는 시비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데다 수리 시설 정비 기술도 그다지 좋지 않아 자연재해가 잦으면 농민이 농사짓기를 포기하는 일이 많았지요. 이로 인해 경작지가 묵은 땅으로 바뀌는 진전화(陳田化) 경향이 심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려의 상경 수준은 아직 불완전한 단계라 농업 생산량이 해마다 일정하지 못하고 수확량 자체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생산력이 높아지고 그로 인해 토지나 생산물에 대한 사유 개념이 발달하면서 고려의 민은 차별적인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해 한국사의 어느 때보다도 약동하는 존재로 성장하게 됩니다.
주 1. 정호: 고려의 중류층. 주로 기술직이나 전문직, 지방 향리, 하급 장교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조상 대대로 그 직업을 세습했고 그 대가로 한인전, 외역전, 군인전 등을 지급받아 상속했습니다. 직역이란 국가의 공무와 관련된 일을 말하는 것인데, 거기 관련된 일을 한다고 다 중류층은 아니고 간혹 일반 평민이나 천민들 중에도 직역수행자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중류층처럼 관직이 있는건 아니었으나 직역수행 대가로 국가로부터 토지의 수조권을 지급받았지요.
주:
이 글은 "오백년 고려사"(박종기,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2020)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 요약자가 곁들인 글
첫댓글 당시
농민들의 모습이 서언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