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獨島)에 가면 수석(壽石)의 모든 것이 있다.
필자가 처음 독도의 비경(秘境)을 밟은 것은 1969년 전후의 여름쯤이니까 지나간 햇수로 50년을 훌쩍 넘겼다. 하도 오래전이라 정확한 연대를 기억하지 않았으나, 그때는 나의 대학 졸업 무렵이어서 그렇게 짐작한다.
그토록 오래전에 흔치 않게 독도를 현장 체험할 행운이 있었다면, 당시 울릉경찰서장으로 근무하시던 선친께서 독도 방문을 어렵사리 허락해주셨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처음 독도를 방문하려 했던 그 날은 태풍이 올라온다는 기상예보가 있었다. 하지만 필자의 선친께서는 아무 말 없이 나의 독도행 경비정 승선을 허락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니 부모로서의 걱정을 감내(堪耐)하며 태풍 속의 승선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주신 것이 고마웠다. 당시에는 파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늘 상 다니던 독도행 경비정의 승무원들조차 날씨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상이 웬만큼 나빠도 독도 경비원들의 식량 보급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어려운 항해를 해야만 했다. 지금이야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쾌속정으로 두세 시간 항해하면 되지만 그때는 정말이지 사정이 달랐다. 높은 파도와 6~7시간동안의 악전고투 끝에 독도에 도착했을 때는 예상대로 온갖 종류의 뱃멀미를 다 경험한 바이었다. 그래도 행운이랄까 독도 부근의 기상은 도착 직후 바람이 잠잠해졌으니 동해의 파도는 참으로 해신들의 장난기있는 놀이와 같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더 큰 폭풍우가 올라온다는 말에 겁을 먹기도 했지만, 승무원들의 능청스러운 말에 의하면, 그런 항해를 황천항해라 부른다니 뱃멀미로일그러진 얼굴에 쓴웃음이 절로 났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우여곡절 끝에 독도에 도착하여, 다시 섬 가까이 짐이나 사람을 실어 나르는 작은 거룻배를 타고 기우뚱거리며 상륙을 하니, 이상스럽게 멀미로 고생하던 몸 상태가 단번에 역전되었다. 처음 보는 눈앞의 독도가 너무 아름다워 기운이 솟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수석(壽石)처럼 생긴 섬 독도의 환상적 풍광이 기이했기 때문일까 어쨌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독도여!, 푸른 바다, 맑은 공기, 온갖 모습의 기이한 바위들, 정말이지 독도의 풍광명미(風光明媚)는 두 말이 필요 없다. 보는 쪽 쪽이 하도 신기하여 누구든 독도를 처음 올라간다면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다. 독도의 경치 이모저모를 보는 순간 머릿속의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도 이렇게 만들어진다는 느낌을 경험하리라. 그곳의 끼륵, 끼야약 까악! 하는 이상한 소리도 정말 그대로 들은 바닷새 소리다. 알을 품은 회색 갈매기 소리를 바로 가까이서 처음 듣는 것도 참으로 이상한 경험이지만, 한 발짝 한 발짝 독도의 정상을 오를 때마다 각도를 달리하여 보는 나의 시선은, 그곳의 단아한 풍광에 흠뻑 흠뻑 취했을 뿐만 아니라 기기묘묘한 바위들을 보며 넋을 잃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꿈속의 수석궁전(壽石宮殿)’을 구경하며 걸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수석(壽石) 스타일이 그때의 독도 풍광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지금도 든다. 물론 자연의 비경(秘境)에 흥분하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처럼 깨끗하고 푸른 동해의 독도를 방문한다면 누구든 좀 더 고급스럽고 귀한 수석의 아름다움이 마음속에 각인되리라는 생각이다. 동도와 서도의 수려한 쌍봉(雙峯), 장군바위나 숫돌바위라는 단봉(短峰), 삼 형제 동굴 바위의 절경(絶景), 탕건봉과 이어지는 연봉(連峰), 코끼리 모양의 바위, 그리고 부채 바위와 한반도 모습의 바위 등 대충 20여 개의 신령스러운(?) 바위가 동해의 푸른 물 위에 백 퍼센트 완벽하게 실물 명석으로 연출되어 있다. 어떤 예술가가 이처럼 아름다운 수석 궁전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추측건대 신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이 글을 읽는 수석인이라면 누구든 인터넷으로독도의 사진을 하나씩 헤아려 보고 그런 느낌을 있는 그대로 실감해낼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직스러운 결론이라도 내려 보자. “독도에 가면 수석의 모든 것이 있다.” “독도야말로 한국 수석의 교과서다운 교과서가 될 것이다.”
이제 누구라도 독도를 보면 아름답다는 말 외에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우리의 독도를 이웃 나라 일본의 망나니 나부랭이 인간들이 자기네 땅이라 망발을 하니 무척 화가 난다. 제대로 교육을 받고 양심이 있는 사람이면 일본인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참에 우리는 수석인으로서도 독도를 지키는 애국의 주장을 분명히 다짐하고 싶다. 온갖 암석의 기이한 형태를 수도 없이 보아온 정통 수석인(壽石人)의 경험과 안목으로 보는 실물 독도의 수려한 형태나 지질학의 면면은, 정말이지 독도의 특이한 모습을 보는 그 순간부터 독도가 바로 우리나라 한국 땅인 점을 실감할 수 있다. 아마도 수석이 너무 좋아 그것에 미치다시피 시간만 나면 강이나 바닷가 혹은 무인도까지 방문해서 호시탐탐의 예리한 눈으로 수석을 찾아온 수석인이라면, 독도의 석질(石質)이 우리나라 울릉도 석질과 같다는 점을 단번에 안다. 즉 독도의 수려한 바위들은, 가까운 울릉도의 암석과 생긴 스타일이나 돌 피부의 질량감(texture)이 하나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특히 두 섬이 주는 생김생김이나 그 아름다움의 맥으로 판단컨대 모든 것들이 구조적으로 같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울릉도와 독도는 수석으로 말하면 아름다움의 패턴이 전혀 다르지 않은 동일 구역의 수석산지(壽石産地)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상상컨대 영산(靈山) 백두산과 남쪽의 한라산 백록담처럼, 독도의 천장굴 분화구나 울릉도의 추산 용출소(湧出所)까지도 조물주께서 명절날 송편 만들듯 시간별로 유사하게 만들어 놓은 것 아닐까?
독도의 많은 돌에서 굳이 기하학의 구조나 황금비 같은 수학적 질서의 유사함을 찾아내지 않아도, 우리 수석인들은 울릉도와 독도라는 두 섬이 똑같은 자연 질서로 생성된 돌과 바위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다. 자연 속에는 언제 어디에든 무수한 예술적 구조(artistic pattern)나 자기 유사성이라는 프랙털(fractal) 구조가 이리저리 숨어있다. 그래서 우리 수석인들은 독도에서도 여지없이 우리 수석의 재미있고 고유한 특징을 함께 찾아낼 수 있다. 쉽게는 곡선의 마무리가 고비마다 멋스럽게 생긴 등 굽은 삼각 봉우리로부터, 어렵게는 꽃돌의 꽃잎처럼, 혹은 앵무조개의 태극무늬처럼 온갖 숨어있는 한국 고유의 돌 모습을 다 찾아낼 수 있다는 거다. 거저 수석이라는 말만 잠깐씩 들어온 비수석인이라도, 단봉(單峰)이나 쌍봉(雙峰), 괴석(怪石) 그리고 구멍 뚫린 투(透) 같은 수석의 형성 질서가 두 섬에 함께 나타나 있는 것을 너무 쉽게 잘 알 수 있다. 딴말이 필요 없다. 수석의 아름다움으로 대비해 보건, 또는 수석인의 감각적 본능으로 판단하건, 또 다른 지질학적 무엇으로 판단하건, 독도는 어느 모로나 틀림없는 우리의 산야이다. 해적으로 무장한 일본 도적 떼가 몇 번 지나쳤다고 일본 땅이라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스스로 자신들을 비하하는 양아치나 도적의 막된 사고일 뿐이다.
이제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보면 늘 자랑스러운 사진 하나를 보여드린다. 위의 오래된 사진은, 당시 필자의 선친께서 애쓰시어 1968년 10월에 민관 합동으로 독도 정상에 설치해놓은 항공용 누운 태극기의 모습이다. 그 후 1983년 경비대 시설 보수 때 다시 콘크리트로 수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으나지금은 그 태극기가 그대로 있는지조차 모른다. 아마도 그 모습이 변했다면 지금은 더 좋은 재료로 잘 만들어 놓은 국기 게양대가 함께 있을 터이지만, 그때는 억지스럽게 만든 콘크리트 바닥 위에 페인트로 태극기를 그려놓고 독도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알다시피 그 당시의 울릉도에는 시멘트용 모래가 매우 귀하여, 육지로부터 배로 모래를 싣고 오는 일이 쉽지 않았다. 지금은 헬리콥터나비행기로 쉽게 모래 공수할 수 있겠지만, 그 무렵에는 태극기 게양대를 만들 수 있는 모래 운반이 무척 어려워 애를 태웠고, 그 때문에 울릉도의 도동에서 저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부근 바다 쪽 절벽 아래에서 어렵게 모래채집을 했던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것도 비가 오면 생기는 실 폭포 아래에 조금씩 생기는 검은 모래를 당시 울릉도에 살고 계셨던 선친의 옛 전우가 손수 어렵사리 마련했던 기억도 난다. 지금 선친께서 살아 계신다면 아흔의 끝을 한참 넘었으니까 그 고마운 전우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다. 어쨌거나 그런 어려운 과정으로 만들어진 ‘누운 태극기’는 내가 두 번째 독도를 방문한 그때도 ‘서 있는 태극기’와 함께 늠름하게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잘 있는지 혹은 다르게 교체했는지 모호하다. 추측건대그곳은 독도를 지키다 산화한 경찰과 전경대원들의 6기 비석도 함께 있을 것이고, 그 옆으로는 24시간 무장한 채 고성능 쌍안경을 소지하며 경계근무를 서는 우리 경비대원들의 씩씩한 모습도 있을 것이다. 독도는 이제 우리의 민족혼(民族魂)이 서린 섬이다. 아! 내가 사랑하는 독도여! 이제 내 나이도 많아져 백발이라도 수석인(壽石人)의 새로운 안목(眼目)으로 또다시 독도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다.
첫댓글
석재님, 갑사합니다.
외로운 섬 독도가 한결 우리켵에 가까이 왔습니다.
독도의 날 10월 25일, 이런 기념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낸 아둔함을 반성합니다.
수석가에 더하여 어느 등단 수필 작가보다 출중하신 글 솜씨에 놀랐습니다..
석재님 친구들을 위해 긴글 쓰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아항 그때 일장기 똥구라미에 붉고 푸르게 칠하고 괘를 그린 사람이 석재 였따꼬ᆢ 만고불변 대한 법국 만만세
우리땅 독도를 굳건하게 지키신 석재 대감 先大人의 멋진 사진이 여러 생각을 갖게 해줍니다. 우리를 얕잡아보는 일본을 배척하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힘을 키우는 길을 모색해야겠지요. 독도와 울릉도는 그 자체가 곧 거대한 壽石인지도 모르겠네요. 또 온갖 모양의 수석들의 집합체가 독도인 것 같습니다. 수석가가 아니더라도 우리땅 독도의 아름다움을 만천하에 자랑할 만합니다. 고맙습니다.
독도의 날을 맞아 젊은 날 독도 방문시 느꼈던 감정과 울릉경찰서장을 하셨던 선친에 대한 그리움을 石在 특유의 문장으로 멋지게 풀어낸 글이네요.
나도 1983년 승진했다는 罪目(?)로 울릉경찰서 경비과장으로 1년을 재직하며, 경비대원 교체, 방어시설 설치나 요인 안내 등으로 독도를 9차례나 다녀왔지만, 마음이 메말라선지 독도의 아름다음은 별로 느끼지 못하고 경비대원들이 갈매기 알 삶아주어 먹은 것은 기억나네요. 그때 내 수준이 그랬지요.
그러셨군요.
소생도 석재 선친께서 울릉서장하실 무렵 지은수,도재욱,최상진 동기와 함께 울릉을 가본 추억이 있지요.
그 때 독도는 못가봤지만 10여년전 개인적으로 울릉여행중 독도를 감격스럽게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배에서 내려 꼭대기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수십,수백년을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저렇게 검게 타버렸는지...그렇지요 독도 그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壽石이었지요.
'독도'
너는 부모 없는 고아가 아니다.
아비가 힘이 없어 지켜주지 못할 뿐
본관은 한반도이며 막둥이 내 자식이다.
- <따뜻한 밥상>(정진호 시조집, 책만드는 집, 2021)에서
*정진호 : 성주 출신, 금오공대(공학석사)
<시사문단>(2003)과 나래시조(2008) 신인상 수상 ,
율전의 기억 이해가 됩니다. 그때는 독도에 갈매기가 하도 많아 잠깐만 통을 들고 다니면 갈매기 알을 순식간에 한통씩 수집할 수 있었지요. 정말 세월이 많이 지났네요. 마침 올해가 저의 선친의 탄신 100주년이군요. 댓글 모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