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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5월 3일 주일
[(백) 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해마다 5월의 첫 주일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죽음의 문화’의 위험성을 깨우치고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참된 가치를 되새기는 ‘생명 주일’이다. 한국 교회는 1995년부터 5월 마지막 주일을 ‘생명의 날’로 지내 오다가, 주교회의 2011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이를 ‘생명 주일’로 바꾸며 5월의 첫 주일로 옮겼다. 교회가 이 땅에 더욱 적극적으로 ‘생명의 문화’를 이루어 나가자는 데 생명 주일을 지내는 뜻이 있다.
오늘은 부활 제5주일이며 생명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 주시고 무엇이 참된 삶인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성실히 걸어갈 때 우리는 진리를 깨닫고 생명과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말씀의 초대
열두 사도는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일곱을 뽑아 식탁 봉사를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기로 한다(제1독서).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선택된 값진 돌이시고,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6,1-7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입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2,4-9
사랑하는 여러분, 4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5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6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선택된 값진 모퉁잇돌이다.
이 돌을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7 그러므로 믿는 여러분에게는 이 돌이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하는 그 돌이며,
8 또한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은 정해진 대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그 돌에 차여 넘어집니다.
9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께 가서 그들이 머물 곳을 마련하고 꼭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요한 14,9)이며,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14,10)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는데, 어떻게 하느님께 가셨다가, 다시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는 말씀이실까요?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의 첫사랑인 제니는 가정 폭력으로 상처받고, 진정한 사랑을 찾아 떠돌다가 세월이 지나서야 주인공 포레스트에게 돌아옵니다. 포레스트는 두려움에 대하여 말하는 제니에게 달리기로 미국을 돌면서 본 애리조나의 아름다운 장면을 전해 줍니다. 그러자 제니가 말합니다. “나도 거기 너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포레스트는 대답합니다. “너는 나와 함께 있었어.”
여행의 진정한 가치는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과 하느님의 관계가 바로 이러합니다. 떠나지만 언제나 다시 돌아오고, 그런 관계 속에서 아드님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고 아버지 안에 아드님께서 계십니다.
요양 병원에 병자 봉성체를 갔을 때, 한때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졌던 이들도 돈도 명예도 다 남겨 두고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간다는 것과 우리는 하느님과 떨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우리를 속이고 실망시키더라도, 마음이 산란해지지 맙시다. 결국 우리는 이 긴 여행을 마치고 모두 아버지께 돌아갈 것입니다.(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얼굴을 통해 하느님을 뵙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신앙에 귀의한 사람들, 영적 삶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큰 갈망은? 아마도 ‘단 한 번만이라도 하느님을 얼굴을 한번 뵈었으면!’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게 너무 과도한 바람이라면 ‘적어도 하느님의 음성이라도 직접 내 귀로 들어봤으면!’ 하는 것일 것입니다.
필립보 사도는 이런 갈망을 아주 강하게 표출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14,8) 아직도 갈 길이 멀었고, 아직도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은 그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던 나머지 예수님의 큰 탄식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합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요한 14,9-10)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는 신앙 여정 안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 머릿속에, 마음속에, 삶 속에 명료하게 자리 잡아야 하는 화두(話頭)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파악하고 있는 바처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하느님은 일심동체입니다. 두 분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찰떡궁합, 불가분의 관계 안에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아는 것과 하느님을 아는 것은 따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십니다. 예수님을 뵙는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는데, 그분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100퍼센트 하느님의 의중을 반영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통해서, 하루에 몇 번이고 하느님을 만나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 두 분은 언제나 상호 내재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그 단순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진리를 겸손한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 오늘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 명제입니다.
돈보스코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했던지, 모든 측면에서 모방했던 후계자 필립보 리날디 신부에게 후배 살레시안들이 별명을 하나 붙여드렸는데, ‘제2의 돈보스코’, ‘목소리 빼고 돈보스코와 똑같았던 살레시안’이었습니다.
저희 후배 살레시안들은 필립보 리날디 신부를 통해 돈보스코를 봤습니다. 또한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는 돈보스코를 통해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뵈었습니다.
한 무신론자가 택시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단순하고 어눌했지만, 진심과 사랑으로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에 큰 감동과 매력을 느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듣는 동안 온몸은 전율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즉시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콜코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였습니다. 곧바로 찾아갔고, 그녀의 소박하면서도 강렬한 영적 조언을 들은 그는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는 마더 데레사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오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 우리의 얼굴, 우리의 말투,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 뵙고 있습니까?
죽음의 두려움 없애는 법: 더 큰 생명 안에 머물러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찬미 예수님! 부활 제5주일입니다. 부활 시기라 부활을 말해야 하는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가득합니다. 3년 동안 모든 것을 걸고 따랐던 스승님이 이제 곧 떠나신다니, 그들에게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였을 것입니다. 이는 부활이 곧 나의 부활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주님 부활은 우리에게 의미가 없어진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람은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그건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내 존재가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 수 없기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낍니다. 반대로 말하면 두렵지 않으려면 '알면' 됩니다. 그렇다면 아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세상과 생명을 관통하는 '법칙'을 발견하면 됩니다.
우리가 처음 가보는 낯선 다리를 건널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다리가 무너질까 봐 벌벌 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수많은 사람이 그 다리를 건너다니는 것을 보았고, 설계자가 부실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내가 살아오는 동안 깨닫게 된 '법칙'에서 옵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은 안전하다'는 원리를 경험했기에 처음 건너는 다리라도 두려움 없이 건널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죽음이라는 처음 가보는 길 위에서 두려움을 없애려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세워놓으신 '관계의 법칙'을 깨달아야 합니다.
첫 번째 법칙: 모든 생명은 더 큰 생명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사과 하나를 보며 "맛있다"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과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사과는 '땅'이라는 거대한 생명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땅을 죽은 흙덩어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 영양분 없는 모래밭에서는 사과나무가 자랄 수 없습니다. 땅은 수많은 미생물과 생명체가 태어나고 죽으며 형성된 하나의 거대한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그렇다면 땅의 그 생명력은 어디서 왔을까요? 바로 태양입니다. 태양이 빛을 보내 광합성을 하게 하고, 태양이 비를 만들어 내려주어 땅을 적셨기에 비로소 땅은 비옥해질 수 있었습니다. 태양이 없으면 땅이 죽고, 땅이 죽으면 사과는 맺히지 않습니다. 결국 사과 하나를 베어 문다는 것은, 사과 속에 들어있는 태양의 빛살과 땅의 영양분을 내 몸으로 흡수하여 에너지를 만드는 행위입니다. 사과 안에 태양과 땅이 이미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14,9)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생명의 연쇄 고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생명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태양과 땅에 전적으로 속해 그 생명을 받아 우리에게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우주의 근원인 아버지를 소유한 것입니다. 출처를 알면 죽음은 더 이상 고립된 소멸이 아닙니다. (출처: 리처드 도킨스, 『지상 최대의 쇼』)
탯줄의 법칙: 어머니의 품에 머무는 유일한 방식 태중의 아기를 보십시오. 아기가 엄마라는 더 큰 생명 안에 존재합니다. 아기가 엄마에게서 양식을 공급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엄마가 더 큰 세상으로 나가 아빠가 벌어오는 양식을 공급받아 아기에게 전달해주어야 합니다. 엄마는 아기를 위해 아빠라는 근원에 철저히 속해야 하고, 아기는 엄마라는 통로에 철저히 머물러야 합니다.
이 '머무름'에는 반드시 '법칙'이 있습니다. 아기가 엄마의 자궁이 싫다며 탯줄을 이빨로 물어뜯거나, 배고프다고 엄마의 가슴을 물어뜯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엄마 품에 머물 자격을 잃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모든 계명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분의 품 안에서 튕겨 나가지 않게 하려는 '사랑의 안전벨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법칙)을 완벽히 지키심으로써 그분 안에 머무셨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의 모든 생명이 아드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이 나라의 법을 지켜 국가가 제공하는 모든 안전과 연금을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할 때, 주님은 우리 안에 사시게 되고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거대한 복지 시스템 안에서 보호받습니다. (출처: 에리카 라카르트, 『태내 기억』)
수명의 법칙: 하느님께서 살과 피를 주신 진짜 이유 여기서 우리는 소름 돋는 두 번째 법칙을 마주합니다. "나보다 더 큰 생명력을 지닌 존재가 나에게 얼만큼을 주느냐가 나의 생존 기간을 결정한다"는 법칙입니다.
사과는 땅보다 훨씬 수명이 짧습니다. 그 이유는 땅으로부터 자신의 형체를 유지할 아주 일부분의 에너지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고기가 수천 개의 알을 낳지만, 대부분 일찍 죽는 이유는 어미가 그 많은 새끼에게 자기 생명력을 똑같이 나누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새끼들의 평균 수명은 부모의 발치에도 못 미칩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부모는 자녀 하나를 위해 자신의 전 생애와 전 재산, 심지어 목숨까지 바칩니다. 부모가 자신의 생명을 통째로 자녀에게 이양할 때, 자녀의 수명은 부모의 수명과 맞먹게 됩니다. 부모가 가진 만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고, 그분의 '살과 피'를 통째로 내어주셨다는 것은 무슨 표징입니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수명을 우리에게 그대로 수혈하셨다는 선언입니다! 하느님이 영원하시니, 그분의 살과 피를 먹은 우리도 그분만큼 오래 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사람은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 이유는 우리가 먹은 양식의 '수명'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가톨릭교회교리서』 1213-1274항 참조)
정체성의 신비: "나는 하느님이다"라고 믿어야 사랑이 나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위대한 선물을 받고도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내가 '누구'인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욕구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개라고 믿는 존재는 짖고 싶어 하고, 사람이라 믿는 존재는 말하고 싶어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법칙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보잘것없는 인간'이라고만 믿으면, 그 사랑은 불가능한 고역이 됩니다. 하지만 내가 성체를 통해 하느님의 유전자를 수혈받은 '진짜 하느님'임을 믿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내가 하느님인데, 고작 이 정도 자존심 때문에 미워하는 게 격에 맞는 일인가?"라는 어색함과 부끄러움이 생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만큼의 사랑을 하고 싶은 '거룩한 욕구'가 터져 나옵니다. 그 정체성이 우리를 그리스도처럼 살게 하고, 그분 안에 영원히 머물 자격을 확정 짓습니다. 그분처럼 사랑할 수 없다면 그분 안에 머물 수 없습니다. 사랑이 유일한 법칙이기 때문입니다.(출처: 성 아타나시오, 『말씀의 강생』)
진짜 죽음의 정의: 잎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뽑히는 것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죽음을 다시 정의합시다. 사과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는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기 위한 변화일 뿐입니다. 진짜 죽음은 '뿌리가 뽑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는 이와의 연결이 끊기는 것이 유일한 죽음입니다.
「사례 1: 영화 '그래비티' (Gravity, 2013) - 생명줄을 놓친 자의 공포」 영화 '그래비티'에서 우주 비행사 라이언 스톤(Sandra Bullock 분) 박사는 지상에서 어린 딸을 사고로 잃고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걸어 다니는 시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거부한 채 고독의 진공 속에 자신을 가두고 살았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죽음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 그녀가 우주선 밖에서 작업을 하던 중, 갑작스러운 파편의 습격으로 우주선과 자신을 잇던 '생명줄(Tether)'이 끊어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산소는 떨어져 가고, 통신은 두절되었습니다. 광활한 우주 한복판에 홀로 던져진 그녀는 우주 전체를 소유한 듯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가장 비참한 죽음으로 빨려 들어가는 우주 미아였습니다.
이때 베테랑 비행사 맷 코왈스키(George Clooney 분)가 나타납니다. 맷은 끊어진 라이언의 생명줄을 대신하여 자신을 그녀와 연결합니다. 그리고 더 큰 생명의 원천인 '지구'로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해, 자신을 묶고 있던 연결 고리를 스스로 해체하며 우주 저편으로 사라집니다.
맷 코왈스키의 희생을 통해 라이언은 깨닫습니다. 죽음은 소중한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생명의 원천에서 뽑혀 나가는 것임을 말입니다. 그녀가 다시 살기로 결심하고 구조선의 해치를 열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더 큰 생명'인 지구의 인력과 연결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생명줄을 놓치고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고집하는 순간, 우리는 화려한 우주복을 입었어도 영적 질식 상태에 빠집니다. 연결됨이 생명이고, 단절됨이 죽음입니다. (출처: 알폰소 쿠아론 감독, 영화 '그래비티' 2013)
결론: 마음의 평화는 생명을 주시는 분 안에 머물 때 옵니다 살려면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 안에만 머물면 됩니다. 그러면 그분만큼 삽니다. 그분이 안 보일 때도 있는데 이는 그분이 더 큰 생명을 얻으러 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리를 마련하러 가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어라." 이 믿음은 막연한 낙관이 아닙니다. 사과가 땅에 속하고 땅이 태양에 속하듯,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그분께 속하고 그분이 지니신 영원한 생명을 그대로 상속받았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속함을 믿고 주저 없이 우리에게 당신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이는 엄마가 아버지에게 속해있음을 믿고 자녀에게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영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수명을 살고 있습니다. 죽음은 마치 태아에게 탯줄이 끊기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는 '출산'과 같습니다. 뿌리가 박혀 있는 나무에게 겨울(죽음)은 휴식일 뿐이듯, 주님께 정박한 우리에게 죽음은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축제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요즘 뉴스를 통해 전쟁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4년째 이어지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벌써 2달째 이어지는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있습니다. 미사일 한 발이 발사될 때마다 수백만 달러가 사라집니다. 하루 작전에 수천만 달러, 많게는 수억 달러가 사용됩니다. 항공모함 한 척을 움직이는 데에도 하루 수백만 달러가 들어갑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숫자이지만, 그것은 분명 사람들의 땀과 세금입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미사일 한 발의 비용이면, 가난한 이들의 치료비를 얼마나 도울 수 있겠습니까? 하루 전쟁 비용이면, 얼마나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겠습니까? 항공모함 하루 유지비면, 얼마나 많은 공동체를 살릴 수 있겠습니까? 전쟁은 막대한 돈을 태워 버립니다. 그러나 그 불꽃은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생명을 무너뜨립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는 전혀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음식 나누는 일이 소홀해졌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을 세워 그 일을 맡깁니다.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고, 제자들의 수가 많이 늘어났다.” 초대교회는 ‘모든 일을 다 잘하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분별한 공동체’였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교회에도 조용히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어디에 힘을 쓰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디에 돈을 쓰고 있습니까? 물론 교회에 행사도 필요하고, 건물도 필요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향한 나눔보다,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눈에 보이는 것과 외적인 확장에 더 많은 마음과 재정을 쓰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초대교회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교회의 중심은 구조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이 되어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십시오.” 살아 있는 돌은 벽을 높이는 돌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돌입니다. 서로를 지탱하고, 생명을 이어 주는 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맡기셨습니까? 미사일이 아닙니다. 권력이 아닙니다. 복음입니다. 사랑입니다.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다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 우리 공동체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 우리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우리의 삶이 따라갑니다. 우리의 재정이 흐르는 곳에 우리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전쟁은 돈을 태우지만, 사랑은 생명을 살립니다. 전쟁은 폐허를 남기지만, 복음은 공동체를 세웁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살아 있으려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열매를 맺으려면,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명을 선택하게 됩니다. 나눔을 선택하게 됩니다. 사랑을 선택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선택의 자리 앞에 서 있습니다. 파괴인가, 생명인가. 소비인가, 나눔인가. 확장인가, 사랑인가. 마지막으로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쓰는 돈이 우리의 믿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길이 우리의 신앙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그곳에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됩니다.
오늘의 성인
성 필립보(Philip)
신분 : 사도, 순교자
활동연도 : +1세기경
같은이름 : 비리버, 필리뽀, 필리뿌스, 필리포, 필리포스, 필리푸스, 필립, 필립부스, 필립뽀, 필립뿌스, 필립포, 필립푸스
갈릴래아의 베싸이다(Bethsaida) 출신인 사도 성 필리푸스(Philippus, 또는 필립보)는 아마도 세례자 요한(Joannes Baptistae)의 제자인 듯하며, 사도들 명단에도 기록되어 있다(마태 10,3; 마르 3,18; 루가 6,14; 사도 1,13). 그 외에 그가 언급된 곳은 요한 복음서이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제자로 간택되었으며 나타나엘(Nathanael)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였다(요한 1,43-48).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중에도 그가 참석했고(요한 6,1-15), 예수를 찾아온 이방인들을 예수님께 소개하기도 하였다(요한 12,21-22). 예수님의 수난 직전에 그는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고 간청도 하였다(요한 14,8). 전설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를 무대로 설교하였다고 하며,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소아시아 중서부 프리지아(Phrygia)의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에서 십자형을 받아 순교했다고 한다.
성 야고보(James)
신분 : 사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예루살렘(Jerusalem)
활동연도 : +62년?
같은이름 : 소야고보,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제임스, 차야고보
알패오(Alphaeus)의 아들인 성 야고보(Jacobus)는 복음서에 그리스도의 12사도 중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같은 인물로 가끔씩 등장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 후에 예루살렘의 어느 2층 방에 모여 있던 열 한 제자 중 한 명이다(사도 1,13). 성 야고보는 분명히 주님의 형제로 언급되고(마태 13,55), '주님의 동생'으로 불린다(갈라 1,19). 사도 베드로(Petrus)가 자신이 기적적으로 감옥을 빠져나온 사실을 알려주라고 이른 사람이 바로 성 야고보이다(사도 12,17).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성 야고보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첫 번째 주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러므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고,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고 해야 합니다."(사도 15,13-21 참조) 하고 비 유대계 그리스도인에게 네 가지 관행만을 실천하도록 요구하였다.
후대에 생긴 전승에 의하면 성 야고보는 팔레스티나(Palestina)와 이집트에 정착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집트의 오스트라키네(Ostrakine) 또는 시리아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는 복음을 열심히 전하였는데, 그의 설교가 군중을 노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신전 지붕에서 내던져졌다고 한다. 그리고 군중들로부터 곤봉과 방망이로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교회미술에서 그의 모습은 곤봉이나 방망이를 든 모습으로 자주 그려진다.
성 알렉산데르 1세(Alexander I)
활동년도 : +113년경
신분 : 교황, 순교자
지역
같은 이름 : 알레산드로, 알렉산더, 알렉산델, 알렉싼데르, 알렉싼델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교황 성 알렉산데르 1세와 두 명의 사제 성 에벤티우스(Eventius)와 성 테오둘루스(Theodulus)는 오랜 투옥 생활 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재판관 아우렐리아누스의 사주에 따라 불로써 온갖 고문을 받고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교황 성 알렉산데르는 감옥에 있는 동안 성 퀴리누스(Quirinus, 3월 30일)와 그의 딸 성녀 발비나(Balbina, 3월 31일)를 신앙에로 인도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유해는 로마 근교 노멘타나(Nomentana) 가도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오늘날 도미니코회에 속한 성녀 사비나(Sabina) 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비록 로마 순교록에는 오늘 기념하는 순교자가 교황 알렉산데르라고 되어 있으나, 이 명단은 알렉산데르라는 군인 순교자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