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 여행 둘째 날
오늘은 수원 화성을 두루 둘러보는 일정이다
수원 화성(華城)은
팔달산(八達山)과 그 동쪽의 낮은 구릉과 평지를 감싸며 쌓은 평산성(평지와 산을 이어서 쌓은 성)으로
타원형태를 이루고 으며, 성의 전체둘레는 5.744km이고 높이는 4.9~6.2m이다
정조(正祖)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마련하게 위해 신도시 화성을 계획하게 되었다
수원 화성은 당시의 최첨단 과학과 건축술이 빗어낸 역작으로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고
당시 화성 건설에 관한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에 모두 담겨 있다
화성(華城)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한국의 세계적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수원 화성의 그 방대한 공사를 2년 9개월이라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라는 젊은 실학자의 역할이 컸다
그는 화성의 설계를 맡아 전통적인 방법을 기초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여러 서양의 건축을 참고하였다
화성은 정약용의 설계를 바탕으로 채제공을 비롯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와 같은 유능한 실학자들의 젊은 패기와
거중기, 녹로와 같은 과학기술이 접목되어 만들어졌다
수원 화성의 남문(南門)인 팔달문(八達門) / 보물 제402호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정문(正門)이 아니고 정문은 북문인 장안문(長安門)이다
일반적으로 동북아에서는 남문이 정문이지만
수원화성에서는 정조가 한성에서 수원화성으로 올 때 북쪽에서 들어오기 때문에
임금이 들어오는 장안문(長安門)을 정문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장안문은 팔달문보다 크다
팔달문(八達門)의 문루는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원래는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어 남공심돈과 남암문, 그리고 남서/동 적대가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수원화성 복원 작업이 진행되며 상당수가 옛 모습을 되찾았음에도 이쪽은 성곽이 끊긴 채 그대로 있으나
2029년까지 성벽을 완전 복원할 예정으로 주변 건축주들과 철거 및 이전을 협상중에 있다고 하지만 어려워보인다
수원 화성행궁(水原 華城行宮)의 출입문인 신풍루
행궁(行宮)은 맨 나중에 답사를 하기로 하고 북문인 장안문(長安門)으로 간다
천주교 수원 순교성지인 복수동 성당
정조가 승하한 얼마 뒤인 1801년의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 병인박해까지 수차례의 천주교 박해시기 동안
수원화성에서는 무명 순교자를 비롯하여 2천여 명 이상이 순교하였다
그리고, 2000년에 수원교구에서는 수원 화성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을 헌양하기 위해
이 복수동 성당을 중심으로 하는 '천주교 수원성지'를 선포하였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용(세례명: 요한)에 의해 설계되었던 수원 화성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수원성(水原城)의 북문(北門)이며 정문(正門)인 장안문(長安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누문(重層樓門)으로
하나의 홍예문(虹蜺門)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바깥쪽에 둥근 옹성(甕城)을 갖추었다
홍예는 안쪽이 바깥쪽보다 높이나 너비가 조금 크게 만들어졌는데 안쪽 홍예는 높이 19척, 너비 18척 2촌이다
안쪽 홍예 좌우로는 무사(武砂)라고 부르는 네모반듯하게 다듬은 돌로 사다리꼴의 돌출면을 만들고
양쪽으로 계단을 설치하여 누각으로 오르도록 하였다
누각은 다포식(多包式)의 화려한 공포를 짜고 우진각의 기와지붕을 덮었다
공포는 하층 외2내3출목, 상층 내외3출목으로 양끝에 섬세한 장식이 가미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였다
옹성은 문 바깥쪽에 전(塼)으로 반원형을 그리면서 쌓았으며 한 가운데 홍예문을 내었다
홍예 위에는 오성지(五星池)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다섯 개의 구멍을 갖춘 큰 물통으로
적이 성문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수원화성 축소 모형도
오늘날의 수원화성은 수차례의 자연 재해와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것을 일부 복원한 것이다
원래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건축물은 원본 그대로인 건축물이어야 하나
수원화성은 1970년대에 대대적인 복원을 거쳐 이러한 규칙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수원화성을 계획하면서 그림과 글로 설계도와 내용을 철저하게 남겨 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설계도와 작업 진행기록이 싸그리 남아있는 덕분에
현대에 이르러 유지보수를 해도 세계유산 자격을 그대로 유지가 가능한 것이다
북동적대(北東敵臺)
장안문 동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 시설이다
적대(敵臺)는 우리나라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고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에만 남아 있다
홍이포(紅夷砲)
문 바깥쪽에 반원형 옹성을 쌓은 장안문(長安門)의 아름다운 모습
북동포루(北東砲樓)
장안문의 동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누각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등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였으며, 남포루(南 砲樓)는 팔달산에 위치해 있다
동북각루와 북수문
북수문(北水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북수문은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華虹門)이라는 별칭으로 더 불리며
군사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북암문(北暗門)
북암문은 지형에 맞춰 좌우 성벽까지 벽돌로 둥글게 만들었다
동북각루(東北角樓)
화성 동북쪽 용두바위(龍頭岩) 위에 각루를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북각루(東北角樓)는 아름다운 연못인 용연(龍淵)과 함께 있어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많이 쓰였다
정자의 별칭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다
동북포루(東北舖樓)
동북각루(東北角樓)/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과 동장대(東將臺) 사이의 치성(雉城) 위에
군사들이 머물도록 지은 시설인데 화성에는 모두 5곳의 포루(舖樓)가 있다
동북포루(東北舖樓)에서 보이는 동북각루(東北角樓)
용연(龍淵)과 동북각루(東北角樓)
화성의 북쪽 성 밖에 있는 연못으로 용머리처럼 생긴 용두바위(龍頭岩)에서 유래하였으며
용두바위 위 동북각루(東北角樓)에 있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용두각(龍頭角)이라고도 부른다
소식을 듣고 달려와 수원화성 이곳저곳을 안내해준 반갑고 고마운 친구 정철권과 함께 한 청기와 회원들
동암문(東暗門)
수원화성 동장대(東將臺)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東將臺)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西將臺)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썻던 동장대(東將臺)의 현판은 연무대(鍊武臺)로 씌여 있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화성 동북쪽의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墩臺)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3층으로 이루어진 원통형의 벽돌 건물로서
출입문에서 통로를 따라 빙글빙글 올라가면 꼭대기 망루에 이르는 구조다
동북노대(東北弩臺)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지은 시설로
적의 동태를 살피고 깃발을 이용하여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는데,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 옆에 있는 서노대(西弩臺)와는 달리
동북노대(東北弩臺)는 별도의 높다란 대를 만들지 않고 성벽에서 돌출시켜 만들었지만
주변이 평탄해서 시야가 확보되었다
이윽고 도착한 동문(東門)인 창룡문(蒼龍門)
창룡문(蒼龍門)은 돌로 쌓은 홍예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우고
밖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쪽이 열려 있는 옹성을 쌓은 구조로 되어있다
창룡문(蒼龍門)
동1포루(東一舖樓)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하였다
참고로, 포루(砲樓)는 화포(火砲)를 갖춘 누각이고, 포루(舖樓)는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누각을 말한다
동1포루(東一鋪樓) 답사를 마치고 점심을 먹고 난 뒤 화성행궁을 찾기로 한다
풍년탕이라는 국밥
설렁탕, 곰탕, 내장곰탕, 도가니탕 등에 들어가는 각종 고기가 섞여 들어있다는 풍년탕이다
모듬수육
수원 화성행궁(華城行宮)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
행궁(行宮)은 왕이 궁궐 밖을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궁궐을 지칭하는데
화성행궁은 화성 안에 건축된 행궁으로, 정조가 융건릉에 능행할 목적으로 건축하였다
화성행궁의 규모는 전체 557칸으로 다른 행궁에 비해 현저히 크며
정조 20년(1796) 화성 축조와 함께 지어졌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한 처소로 마련된 것이지만
평상시에는 수원부 치소로 사용되었다
행궁 입구의 수령 600년 이상된 노거수 느티나무(槻木)
화재로 인해 훼손되었으나 2003년부터 나무 살리기 작업을 통해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단다
낙남헌(洛南軒)
화성행궁에서 공식적인 행사나 연회를 열 때 사용하는 건물이다
노거수 향나무
화성행궁의 정전(正殿)인 봉수당(奉壽堂)
임금 행차 시 정전으로 쓰인 건물이며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린 곳이다
봉수당(奉壽堂) 에서의 진찬연(進饌宴)
1795년 을묘원행 시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예를 드리고 있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유여택(維與宅)
정조는 유여택에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는 곳이다
사도세자의 뒤주 체험을 위한 뒤주
정조대왕의 행궁 행차시 연주된 각종 악기들
이상으로 수원화성의 답사를 마친다
아쉬운 것은 수원화성의 서문이자 보물 제403호인 화서문(華西門)을 답사하지 못한 점이다
여러 친구들이 피곤을 호소하는 바람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조금 떨어져 있는 화서문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첫댓글 딜라일라님!!!
서울에 서식한 지도 어연 45년
그동안 수원을 한번도 가 본 적이 없었는데 덕분에 앉아서 구경을 잘 헀습니다
구경 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 .
좌우간 감사합니다
이번에 아주 좋은 역사탐방하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