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르심 -
☆ 2013년 다해 11월30일 (홍)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수원] 나를 달리게 하시는 분 -
수원교구 오산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로마 10, 9 - 18
† 복음 : 마태 4, 18 - 22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베드로 사도의
동생이다. 갈릴래아의 벳사이다에서 태어난 그는 형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였다(마태 4,18 참조). 안드레아 사도는 요한 세례자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이끌었다
(요한 1,40-42 참조). 그는 그리스 북부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유다인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민족들에게도 주어졌다고 선포한다. 그리하여 만민을 위하여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의 발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전한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유다인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민족들에게도 주어졌다고 선포한다. 그리하여 만민을 위하여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의 발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전한다(제1독서).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곧 ‘물고기 낚는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또한 사람 낚는
어부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어부가 훌륭한 어부인지 생각해 봅시다.
첫 번째로, 어부에게는 반드시 그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물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사로잡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나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드러나야 합니다. ‘나’에게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사로잡혀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어부에게는 배가 필요합니다. 배를 타고 나가야 그물을 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배는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 머물러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 있으면
우리의 모든 선행, 우리의 모든 기도, 우리의 모든 봉사는 마치 육지에서
그물질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교회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성사 생활과 계명 등에 충실한 것을 뜻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어부에게 필요한 자질은 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황금 어장을 잘 찾는 사람이 어부의 자질을 제대로
갖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황금 어장은 어디입니까?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처럼 ‘깊은 데’(루카 5,4 참조)입니다. 이 사회와
각 사람들의 ‘깊은 데’를 들어가야만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부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어부가 그물질할 때마다
고기를 바로 잡는 것도 아닙니다. 언젠가는 많이 잡힐 것이라는 희망으로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어부의 미덕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에게도 이러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따름으로써 얻게 되리라.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3년 다해 11월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4,18-22)
따름으로써 얻게 되리라.
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사도의 삶을 잘 살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다른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꺼이 따름으로써 큰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따르려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마침내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익숙해진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는
복지관에 부임한 지 10 개월 만에 인사발령을 받고 소임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막 익숙해지려는 데 다른 곳으로 가라하시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곳에 가서 또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주하지 않고 도전할
때 새로운 것을 얻게 된다는 은혜를 체험케 되었습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단지 순명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행동의 변화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이사 43,18). 도전할 때 새 일을 만날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순명과 실행을 통해서 주님의 섭리와 안배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은 ‘나를 믿어라’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라라’하셨습니다. 믿어서 따르는게 아니라 따름으로
확고하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시몬 베드로와 형제지간 입니다. 특별히 요한과 길을
걷다가 예수님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하며 형에게 말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형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소개하였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한6,8-9)를 가진 아이를 예수께 데려간 사람도
안드레아입니다. 그는 혼자만 메시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쇄신과
회개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체험을 전해야
합니다. 마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주님을 따름으로서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듯이,
믿음이 약한 이들이 우리를 보고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먼저 우리의 믿음을 다져야 하겠습니다.
큰 나무는 잘 부러지지 않고 큰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으며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답니다.
예수님께서 크신 분이셨듯이 우리 모두가 큰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모범과 표양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세상의 기준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여섯이나 둔 신앙적으로 아주 열심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부는 매일 같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려고 노력했지요. 이러한 정성이 주님의 마음을 움직였을까요?
주님께서 천사를 이 부부에게 보낸 것입니다. 천사는 이 부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주님께 최선을 다했으니, 미리 너희에게 선물을 주려고 한다.
자녀들을 데리고 오너라.”
여섯 명의 자녀를 모두 데리고 오자, 천사는 아이들에게 차례대로
말합니다.
“너는 큰 회사를 경영하는 회장이 되어라! 너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라! 너는 세상을 크게 발전시킬 과학자가 되어라! 너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훌륭한 정치인이 되어라!”
이렇게 말하는 천사의 말에 부부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다른 두 명의 아이를 향해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는 땀 흘려 일하는 농부가 되어라. 너는 길거리를 깨끗하게 하는
환경미화원이 되어라.”
이 말에 이 부부는 깜짝 놀라면서 “아니, 선물을 주신다고 하면서 농부와
환경미화원이라뇨? 다 똑같은 제 자식들인데 이렇게 차별하시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따지자 천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두가 다 회장, 의사, 과학자, 정치인이 되면 어떻게 하느냐? 농부도
있어야 하고, 환경미화원도 있어야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좋고 나쁘고 가 있지만,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모든 일이 다 귀하고 소중한 자리이다. 따라서 어떤 자리에 있듯이 다
소중한 자리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를 낮추며 살 때만이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우리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주님의
거룩한 일이며, 그 일에 충실한 사람이 바로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결코 그 일에 대한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높고 낮음을 따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별 볼 일 없는 자리라고 생각되면
무시하고 천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이는 주님의 부르심을 무시하고 천하게
여기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원래 어부였지요. 고기를
잡다가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는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평생 해오던 어부의 삶이고 안정이
보장되는 삶이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이 더 중요했기에 자신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의 높고 낮음, 일의 안전성과 불확실성, 일의 귀하고 천함 등등.... 세상의
기준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뜻인지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 뜻을 실천하는 것이야 말로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삶입니다.
인생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아무리 나쁜 일도 지나고 보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든다는 것은, 복잡한
세상사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지켜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황경신).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시는 예수님. 로렌초베네치아노 작품입니다.
미래를 위한 준비
정말로 잘 살 수 있을 ‘언젠가’를 위해 스스로를 다그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잘 생각하면 이미 주어진 삶을 붙들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오늘이라는
시간은 언제 올지 모를 그날을 우한 준비시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금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언제 올지 모를 그날이 오지
않습니다. 삶이란 매 순간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사는 사람만이 언젠가 올 그 날 역시 멋지고 아름답게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먼 훗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올지 모를 그날에
응답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지금을 충실히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것이며, 자신에게 언젠가 올 그 날을 잘
준비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의 일을 먼저 하고, 그리고
나중에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말하지요. 이렇게 ‘나중에’를 외치다가 정말
마지막 순간이 되어 주님 앞에 섰게 되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 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2013년 다해 11월30일
저는 1991년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교구장님은 3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세분 모두 축일은 겨울철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스테파노’이시고
축일은 12월 26일입니다. 저는 사제서품을 추기경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적성 본당의 주임신부로 있을 때는 12월 8일에 대림특강을 청해서 듣는
기쁨도 있었습니다. 1998년 추기경님께서는 은퇴하셨고, 후임으로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께서 교구장이 되셨습니다. 정 추기경님의 축일은
12월 6일입니다. 저는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교구청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정 추기경님을 가까이서 뵐 수 있었습니다. 매일 저녁 기도하시는
추기경님을 보았습니다. 2012년 정 추기경님께서 은퇴를 하셨고 후임으로
염수정 안드레아 대주교님께서 교구장이 되셨습니다. 오늘은 교구장이신
염수정 안드레아 대주교님의 축일입니다. 저는 지난 8월부터 성소국장으로
교구청에서 지내기 때문에 매일 교구장님을 뵐 수 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고, 금요일에는 교구청 회의를 통해서 뵙게 됩니다. 교구장님은 지칠 줄
모르는 탱크와 같은 체력을 지니셨습니다. 사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열정을 지니셨습니다. 다른 이들의 의견을 끝까지 들어주시는 따뜻함을
지니셨습니다. 교구의 모든 일들은 국장 신부들에게 위임하시고,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축일을 맞이하시는
교구장님께서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내일부터는
새로운 한해를 시작합니다. 교회의 전례력은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으며,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탄생 4주전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 4주전입니다. 2013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 한해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드리며,
주님 앞에, 이웃들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잘못한 것이 있다면 겸손되이
뉘우치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신학교에 다녀왔습니다. 학교에 강의가 있었고, 예비
신학생들을 도와주는 담임 부제님들과의 송년모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쉬는 시간에 신학교의 교정을 걸었습니다. 예전에 지냈던 추억도
생각났습니다. 동창들과 토론을 하였고, 운동을 하였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함께 아파했고, 사제로 살아갈 꿈을 키웠던 곳입니다. 신학교를
‘못자리’라고 불렀습니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지덕, 체덕, 성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함께 모여서 공부하고, 운동을 하고, 기도하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못자리를 나와서 사제가 되는 것이 학생들의 꿈이고, 바램이지만
사제생활을 22년 한 지금 돌아보면 학교에서의 생활이 행복이고
기쁨이었습니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고,
주님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간다는 것은 ‘겸손, 희생, 봉사, 나눔’의
삶이기 때문에 때로 고단하고, 힘들기 마련입니다. 못자리에서 옮겨져서
논에 심어진 벼는 알찬 열매를 맺기 위해서 뜨거운 태양도, 거센 바람도,
사나운 비도 온 몸으로 받아야 합니다. 사제는 세상에 나와서 홀로서야
하기 때문에 많은 유혹을 겪게 됩니다. 규칙이 보호해 주는 것도 아니고,
학교의 울타리가 지켜 주는 것도 아니고, 동료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과 함께 대화를 하면서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를
생각하였습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제가 신학생 때, 신학교를 가시방석처럼 여긴 적이 많았습니다. 규칙적인
생활, 공동 기도, 성격이 다른 친구들, 어려운 공부가 힘겹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금 신학교에 있는 학생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 따른다면 그곳이 바로 ‘꽃자리’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진다면 그곳이 바로 ‘가시방석’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서울대교구라는 꽃자리를 더욱 빛내시는 교구장님의 축일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를 달리게 하시는 분
2013년 다해 11월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복음 : 마태오 4,18-22
< 나를 달리게 하시는 분 >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세상을 건너 갈 징검다리’란 제목의
내용입니다.
종민이는 몸이 약합니다. 조회 때 쓰러진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종민이는 이렇게 약하게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도 원망스럽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개교 50주년 기념행사로 10킬로 단축
마라톤 경기가 있었습니다. 종민이는 이번에는 꼭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으로 집 근처 공원에서 매일 한 시간씩 마라톤
연습을 하였습니다. 부모님은 이런 종민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으로나마 응원해 주었습니다.
마라톤 경기가 있던 날 종민이는 끝까지 경기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습니다. 출발 신호와 함께 100여 명의 학생들이
교문을 빠져나갔습니다. 한참을 달리다 경사진 언덕을 오를 때,
종민이는 가슴이 뻐근해졌습니다. 1킬로도 채 뛰지 못하고 종민이의
체력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몇 명의 아이들이 종민이를 앞질러
갔습니다. 종민이는 꼴찌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고 몇 번을
뒤돌아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기를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열 걸음 정도를 걸었습니다. 바로
그 때, 종민이의 등 뒤에서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종민이와 100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한 명이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종민이는 꼴찌가 아니었습니다. 종민이는 힘을
내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꼴찌는 종민이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꼴찌를 향해 환호와 격려의 박수를 계속
보내주었습니다.
자신의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고 있다는 안도감에 종민이는 9킬로를
달렸습니다. 경기는 종반에 이르렀습니다. 마지막 힘을 다해 교문을
들어설 때까지도 꼴찌는 종민이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습니다.
선생님과 학생들의 박수를 받으며 종민이는 마침내 결승점에
도착했습니다. 종민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뒤를 이어 달려
들어올 친구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친구가 결승점을
얼마 남기지 않고 경기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종민이는 왠지 마음이 아팠습니다.
종민이는 집에 돌아와 자랑스럽게 자신이 10킬로를 완주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종민이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밤늦도록
책상에 앉아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안방 문틈 사이로 아버지의
가는 신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종민이의 아버지도 종민이처럼 몸이
많이 약했습니다.
다음날, 종민이는 아버지가 왜 밤새도록 끙끙 앓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마라톤 경기가 있던 날, 자신의 뒤에서 꼴찌로 달렸던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종민이 아버지는 꼴찌로 달리며
종민이에게 안도감을 주고 싶었던 거였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꼴찌의 모습을 통해 종민이를 격려하고 싶었던 거였습니다. 종민이보다
더 약한 몸으로 아버지는 그 긴 거리를 달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흘린 땀은 종민이가 세상을 건너 갈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우리는 조선 명필 서예가 한석봉 어머니가 아들을 어떻게 교육했는지 잘
압니다. 아들이 공부를 다 마치지 않고 돌아오자 불을 끄고 당신은 떡을
썰고 한석봉은 글을 쓰게 하였습니다. 한석봉은 자신을 위해 어머니가
얼마나 노력하고 계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수학하여 위대한
명필가가 됩니다. 종민이 아버지가 뛰어주었기 때문에 종민이도 끝까지
뛸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일을 하는 힘이 당신을 위해
일해주시는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어부인 안드레아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의 형과 마찬가지로 사람 낚는 어부로 일을 시키십니다. 모든 사도들은
순교의 길을 가셨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도 나중에 엑스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설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죽기직전까지
시간이 아까웠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나누고 계신 스승을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께서 나와
함께 뛰어주십니다. 나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계십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가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를 뛰게 한다고 해서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결승점에 도달하는 기쁨은 우리 것이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분은 나에게 힘을 내라고 오늘도 그 차디찬 나무 위에서 힘겹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주님,당신께서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사람은 희망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것입니다.'
2013년11월30일 연중 제 34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루카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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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의(長白衣)에 무명실로 엮은 허리띠 두르고
붉은 주단 위에 엎드려
하느님과 사람을 위해 살겠노라고 흐느끼던 결심을 기억한다.
사제라는 버거운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들. 기쁨도 아픔도,
가슴 흐뭇한 웃음도, 고개 들 수 없었던 부끄러움도 내 얼굴이었다.
잃지 않기 위해 잃어야만 하는 것들도 많았고,
미워하지 않기 위해 미워해야 하는 것들도 많았다.
죽어야 산다는 말을 늘 안고 산 삶이었지만,
나만 볼 수 있는 나의 등에 절망해야 했던 날들.
두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낼 수 있었기에 행복했던 날들.
초심의 앳된 얼굴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묵은 때를 벗기는 매일의
싸움은 계속되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은 끝이 보이지를 않는다.
“그분께서 쓰시겠다고 하셨으니 알아서 하시겠지.”
더 이상의 생각은 교만임을 받아들인다.
사람이 희망일 수도 있고, 절망일 수도 있다면 희망이 되게 해야만
한다.
사랑하며 살라 하신다. 사랑하다가 죽으라 하신다.
이것이 허락된 삶의 이유인 것을 알라 하신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말씀이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임을 알기에, 오늘도 두 손을 모아 용기를 청한다.
“주님, 당신께서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기타] 모든 것을 버리고
2013년 다해 11월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 송영진 모세 신부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 4,18-22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18-20)."
마태오복음에는 '그물을 버리고' 라고만 되어 있는데 루카복음을 보면,
'모든 것을 버리고(루카 5,11)' 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린
것은 직업을 버린 것이고(어부로서의 인생을 버린 것이고), 그것은
사실상 모든 것을 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물을 버린 것은 그것이 악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부에게 그물은 선한 것입니다. 그들의 어부라는 직업 자체도 선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더 좋은 것을 받기 위해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었던 좋은 것들을 버렸습니다.
이것은 '진주 상인의 비유'와 같습니다.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5-46)."
값진 진주를 얻으려면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해야 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가진 것을 처분하기가 아깝다고 하면서 움켜쥐고
있으면 값진 진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해도 최고로 좋은 것을 얻으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악한 것이라면 무조건 버려야 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소유한 채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얻을 수는 없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이 말씀에서 '부자'는,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애착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바늘구멍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낙타가 될 뿐입니다.)
"왜 꼭 그래야만 하는가?" 라고 다시 묻는다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물'을 버린 것은 자기들의 소유물과 인연과 인생 전체에 대한 애착을
버린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기꺼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정말로 모든 것을 다 버렸을까?
사도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걱정했고(마태 16,7 ; 마르 8,16),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청했고(마태 20,21 ; 마르 10,37),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고
논쟁했습니다(마르 9,34 ; 루카 9,46 ; 루카 22,24).
그리고 믿음이 약하다고 예수님한테 혼난 일이 많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종합하면, 그들은 처음에는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고, 권력욕과 명예욕 등을 버리지 못했고,
아직 믿음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그런 것들까지 모두 버리고 위대한 믿음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버리지 못한 것들을 보면 광야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사용한 것들과 거의 비슷합니다. 사탄은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고 유혹했습니다(마태 4,3). 이것은 먹고사는 문제에 관한
유혹입니다.
사탄은 하느님을 시험해 보라고 유혹했습니다(마태 4,6).
이것은 믿음을 흔들기 위한 유혹입니다.
사탄은 세상의 영광을(권력을) 가지라고 유혹했습니다(마태 4,9).
이것은 권력욕과 명예욕을 부추기는 유혹입니다.
사도들이 버리지 못한 것들과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유혹의 내용들은
모든 신앙인들이 실제로 날마다 겪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정말로 신앙생활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더라도 먹고사는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어떤 힘든 일을 당하게 되면 믿음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자기 자신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각하는데도,
실제로는 명예욕과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높은 자리를 욕심내지는 않더라도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으면 기뻐하고, 자기도 모르게 은근히 그것을 더 바라게 되는 모습...
또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되면 힘들어 하는 모습도...
그런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은
한 번에 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계속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루카 9,23)."
- 송 영진 모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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