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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상과 다른 복음은 최고의 가치입니다.(행14:3-7)
2022, 9/11 설교문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행14:3-7절 말씀으로 “세상과 다른 복음은 최고의 가치입니다.” 이런 제목으로 말씀 전할 때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이곳에 충만하길 원합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지난주에 태풍 힌남호가 자나갔는데, 2003년의 매미와 똑같은 진로로, 59년 사라호태풍과 매미와 같은 급으로 매우 강한 태풍이었지만 당시 사라호나 매미에 비해 큰 피해 없이 지나가 다행입니다. 다만 포항에서 지하주차장 침수로 인명피해가 생겨 안타까운 마음인데, 빨리 수습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앞 뒤 옆 사람에게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복음은 성도와 세상을 분리합니다.(4절)
둘째로, 복음을 전할 때 핍박은 자연스런 일입니다.(5-6절)
셋째로, 성도가 있는 그 자리가 전도의 장소입니다.(7절)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 무엇일까요? 복음은 복된 소식, 기쁜 소식으로 1차적으로는 유대인들에게 해당됩니다. 죄 많은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 나가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성전에서 소 잡고, 양 잡아 제사를 지냄으로 죄 사함을 받았는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단번에 제물이 되어 제사문제가 해결되어 이제는 더 이상 양 잡고 소 잡지 않아도 되니 유대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은 그야말로 복된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수혜자는 우리들인데, 우리도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되니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런데 이 기쁜소식 복음이 세상과는 합할 수 없는 독특한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기도 한데, 그럼에도 우리는 복음전파가 하나님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해야만합니다.
그러면 본문말씀을 따라가면서 복음이 왜 세상과 분리될 수밖에 없으며, 이 좋은 복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복음은 성도와 세상을 분리합니다.(4절)
본문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아멘.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으로 쫓겨나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 헬라인 가리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사도들에게 악감정을 뿜게 하고 복음을 대적합니다.
그 결과 이고니온이 두 편으로 갈라져 갈등과 대립이 점점 심화되어 갔는데, 혹자는 복음이 세상을 구원하고, 화평케 하며,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는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질병을 치유하고, 낙심과 절망에 빠진 자를 회복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으니 당연히 기쁨과 즐거움만 좋은 일만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런 왜 고난과 핍박이 있느냐고 의문을 가질지 모릅니다.
물론 복음이 들어가면 이런 좋은 일들이 생기는 건 당연하지만 반면에 유대인들처럼 마음에 악감정을 품고 복음을 대적하며 핍박하는 일도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사단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 백성들을 너무너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인 사단이 그의 뛰어난 외모와 능력 때문에 감히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하자 하나님이 그를 이 땅으로 쫓아버립니다.(사14:12-15, 눅10:18) 하늘에서 쫓겨난 사단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그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떼어 자기의 종으로 삼으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그 대상자들을 찾아 얼마나 헤매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쫓겨난 것은 그의 교만함 때문임에도 반성하고 근신하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성도들을 괴롭히며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니 이런 적반하장이 세상에 어딨겠습니까?
이렇게 책임전가와 거짓말, 내로남불이 사단의 도드라지는 성품인데, 사단을 따르는 악인들이 바로 사단과 똑같이 오늘도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바로 사단을 추종하는 전형적인 졸개들 모습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핍박과 아픔 고통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는 핍박이나 고통, 아픔을 유발하지 않습니다. 가능한 모든 사람들과 화평을 추구하지만(롬12:18) 사단과 그 악한 무리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차별하고 분리하며 그 책임을 교회에 떠넘기고 있습니다. 눅12:51절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함이로라."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주님이 세상을 미워하여 분열분쟁을 조장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주님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대적해서 이런 싸움과 다툼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제가 처음 신앙을 가질 때도 집안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집에서 교회 다니려면 호적을 파가라고 할 정도였으니 이것이 바로 분열분쟁, 싸움의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교회나간다고 하면 남편이나 가족들의 반대가 심한 집이 있고, 심하게 반대하지는 않아도 은근한 압박과 회유로 주저앉히는 경우도 있고, 본인 스스로 교회가 재미없다고, 교회 나가도 안 나갈 때와 별 차이가 없다고, 교회 나가도 도움이 안 된다고 갖은 핑계로 교회를 그만두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당시에는 직접적으로 핍박을 가하여 신앙생활을 막았지만, 인권과 자유민주주의가 발달된 지금은 은근한 압박과 유혹으로 스스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과 세상은 자연스럽게 분리되고, 또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그렇습니다. 저들과 분리하여 담쌓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세상과 고립되어 사회성과 대응력이 떨어지고, 전도도 할 수 없으니 우리가 먼저 분리해서 저들을 멀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전5:10절에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도할 대상자를 찾기 위해서라도 저들과 사겨야하지만 가나안에 동화된 이스라엘처럼 저들에게 동화되면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후6:14-16절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에게 동화되거나 타협하는 삶을 사지 말라고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항상 강조했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세상 사람들과 교제함으로 그들에게 동화되어 신앙이 약화되고, 신앙생활에 문제가 될 것 같으면 아예 교제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주부들이 남편 출근하면 이웃 여자들과 교제하는 경우가 많은데, 거기에서 저들에게 신앙인으로서 자존심을 세우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만나도 되지만, 그러나 동화되어 영향을 받을 것 같으면 아예 만나지 않는 것이 더 좋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걸 선한싸움이라 말했는데,(딤후4:7) 세상과 분리되는 아픔이 있어도 세상의 타락한 가치관과 죄악된 생활과 선한싸움을 싸우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이 이 땅의 축복과 내세의 상급을 보장받는 길입니다.
그런 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복음을 전할 때 핍박은 자연스런 일입니다.(5-6절)
본문 5-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여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아멘.
사단에게 장악된 유대인들과 그들에게 선동당한 이방인들이 두 사도와 복음에 대해악감정을 품더니 드디어 모욕하고 돌로 치려고 달려드는 상황까지 이르게 됩니다.
처음엔 선동을 하고, 세력이 모이니 드디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게 된 건데 이들의 과격함이 도를 넘고 있습니다. 욕을 하고, 인격적 모독을 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죽으라고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저들의 악독함이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핍박과 고난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현장마다 일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복 주시려고 작정하신 분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으면 고생 끝 행복시작이어야 하는데, 좋은 일만 생겨야하는데 왜 이렇게 복음 때문에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고난과 아픔을 겪어야할까요?
그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매우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요15:19절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이유를 밝히는데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쉽게 말하면 세상 사람들과 같은 편이었으면 저들이 우리를 사랑해줬을 뗀데, 같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도저히 함께 갈 수 없는 별종인거지요. 그래서 우리가 선한 일을 해도 미워하고 공격하는 겁니다. 마치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자기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온갖 방법들을 동원하는데, 그것이 핍박이고 미움이고, 유혹이기도 하며, 때로는 경제적인 불이익이고, 인격적인 모욕이며,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할 때도 있습니다.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으로 고통을 주어 어떻게든 하나님을 떠나도록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마5:11-12절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상 핍박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하며, 그럴 때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시는데, 왜냐면 천국에서 우리의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믿음의 선배들도 핍박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지금 같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좋은 나라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핍박보다는 복을 받고 행복하게 살아갈 확률이 매우 높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왜냐면 앞으로의 세상이 매우 유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믿음을 지켜왔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신실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셋째로, 성도가 있는 그 자리가 전도의 장소입니다.(7절)
본문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아멘.
안디옥에 이어 이고니온에서도 핍박이 심하여 안전과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두 사도가 루스드라로 급히 피신하지만 거기서도 복음을 전합니다.
이들은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때어난 사람처럼 보이지만 원래부터 이러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보니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저들은 남은 삶을 다른 세상을 전하는 것에 올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든지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는 그곳이 어디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왜 그래야할까요? 우리는 창세전부터 누가 구원받기로 작정되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불특정다수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4:2) 듣든지 안 듣든지(겔3:11)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전하면 어떻게 될까요? 겔3:27절에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다시 말해 복음을 들을 자도 있고, 듣지 않을 자도 있는데, 그러나 그에 대한 책임은 그들의 몫입니다. 그러니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를 보십시오. 교회에 박해가 일어나자 여기저기로 뿔뿔히 흩어졌지만(행8:4) 저들이 어디로 가든 그곳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장소가 되었는데, 그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가 바로 사마리아교회, 안디옥교회, 다메섹교회였고, 많은 초대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또한 초대교회 당시 믿음의 선배들처럼 어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내가 서있는 그 자리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장소가 되어야합니다. 그곳이 직장과 학교일수도 있고, 걸어가는 길거리일 수도 있고,물건을 사는 장소가 될 수도 있고, 버스 안이나 지하철 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오미가 고향에 가뭄이 들자 모압으로 피신을 갔다가 남편과 아들들을 잃었지만 그래도 복음적인 삶을 통해 며느리 나오미를 얻어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나, 사도바울을 비롯해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어딜 가든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까지도 당신이 어딜 가든 모여드는 사람들을 향해 천국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지금까지 예수 믿고 천국을 예약하여 신앙인으로 살아왔던 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도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복음을 전해준 분들에게 빚진 자로서 이 빚을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내가 서있는 그 자리에서 큰 수고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갚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에게 하나님이 여러 가지 복을 주시지만 특히 약5:20절에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전해서 옳은 길로 인도받는 사람이 사망에서 구원받고 허다한 죄가 덮여진다면, 전도자는 어찌될까요? 더더욱 구원은 물론 죄를 용서받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구원의 확신이 없거나, 주님께 사함 받아야할 죄가 있다면 복음을 전해보십시오. 마음의 확신과 평안함과 속에서 기쁨이 넘쳐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하는 제자의 삶을 통해 최고의 인생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