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16일 대림 제3주간 (금) 복음 묵상 (요한 5,33-36) (이근상 신부)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만나려면 그의 일, 그것도 그저 손을 대신 일이 아니라 완수해야하는 일, 완수를 향하고 있는 일을 만나야 한다는게 말씀의 골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완수하고자 하는 일은 실로 미완의 일이다. 사랑, 그것도 죽음을 통과해야하는 사랑이란 도무지 이승의 사람들로서는 좋게 말하면 신비,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황당한 실패. 증언이란 모호한 것을 명료하게 만드는 행위인데, 예수님의 일은 모호할 것도 없는, 그저 실패. 증언이 아니라 반증언이다. 십자가를 통한 사랑은 우리에게 주검을 남기는데 주검은 아무것도 증언할 수 없다.
그러니 예수의 일, 몇 가지 기적들말고, 진짜 그의 온 삶을 종결짓는 수난/죽음에서 증언을 발견하려면 부활을 만나는 수 밖에 없다. 그의 온 생애를 죽음과 딱 붙어있는 부활의 프리즘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살아있어야 증언할 것이니.
예수의 부활. 죽음이 딱 붙어 있는 그의 부활. 홀연히 다가와 인사하고, 또 인사하며 같이 밥을 먹고 홀연히 사라지는, 해서 감질나는, 대부분 짜증나는, 그러나 다 타버려 무너지기 직전의 재가 된, 무심한 그들의 숨소리로도 가루로부서져버릴 영혼들이 자기모습 그대로 깃들일 수 있는 순한, 착한, 보드라운 바람.
사람을 숨쉬게 만들고 살게 만들고, 산들바람이 되었다 태풍이 되고 바위가 되도록 격려하는, 사람을 완수되어야 할 작품으로 만드는, 증언으로 만드는 부활.
출처: https://www.facebook.com/simonksyi/posts/pfbid02F8UAGoQ7RcfLiUBWoQJ2YtDEv6ZXk1DWa63sanB6vSZRPyJhrjvySiG2Fj9EdfEN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