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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제국-동북공정과 간도 그리고 통일의 대세!
북관대첩비의 진실-임진왜란때 함경도는 동북 삼성지역이다.
최근 북관대첩비가 10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북관지역의 승첩비를 일제시대에 관동군이 본국으로 가져서 보관한 비문이며 최근 반환운동이 결실을 맺어 다시 한국 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북관대첩비에 숨겨진 역사적 진실은 놀라운 것이다. 함경도의 북관지역이 길림과 장춘일대를 말하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 8도 중에 하나인 함경도라는 사실이다. 최근 재 부활한 KBS역사 스페셜에서 100년 만에 귀환한 북관대첩비에 방영된 함경도 지도가 요동반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역사 연구가가 함경도라고 제시한 지도가 화면에 잠시 방영되었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북관대첩비를 가지고 저주의식을 거행하다!
일제 때 약탈되어 일본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보관된지 100년 만에 귀환되었다. 일본 군구주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한 구석에 보관된 것이다 .이 유물이 여기에 보관된 것은 한국의 유물을 보관하는 차원이 아니라 저주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소품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지난 일제가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한반도 8도에 수백개 철심을 박아 정기와 지기를 끊으려 하였다. 이와 같은 연장선에서 야스쿠니 신사 일반인 손길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가두고 비석머리에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엄청난 머릿돌을 눌러 100년 동안 저주의식을 거행한 것이다. 바로 임진왜란 당시 가장 강력한 항거를 한 함경도의 기운을 꺽는 상징을 북관도 대첩비로 삼은 것이다. 그 곳은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철저히 격리된 장소에 보관하였다.
북관지역은 어디인가!
북관대첩비를 가지고 간 동기는 다음과 같다. 만주국을 세운 일제 관동군이 러일 전쟁을 하다 함경도 길주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한 것이다.이 비석을 발견하고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 발견 장소가 현 한반도 내에 있는 함경도 길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러일전쟁 당시에 만주국 전쟁터는 송화강 일대였으며 관동군이 활동한 지역의 중심이다. 일본이 만주에서 활동하는 군인을 관동군이라는 부르는 것은 만주 일대를 관동지방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원도 태백산맥 대관령을 중심으로 대관령의 동쪽을 관동지역이라 하고 대관령 서쪽을 관서지역이라 하는데 그것은 조작된 것이다. 관동군이라고 한다면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 활동하는 일본군이여야 한다. 그러나 만주에서 활동하는 군인을 관동군이라고 한 것은 이 일대가 관동지방이기 때문이다.
외국 고지도를 보더라도 북경의 동쪽을 관동이라고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만리장성이 끝나는 산해관을 중심으로 동쪽을 관동이라고 한 것이다. 위 그림에서 관동이라는 영문 표기를 볼 수 있으며 그 옆에 요동이라는 영문 표기를 볼 수 있다.또한 고구려 시대 천리 장성이 축조된 그림이 점선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이 지역이 1900년 전후 조선과 청 국경을 정한 지역이다. 또 다른 지도를 보면 목책이 있었던 지역이다.
관(關)이라는 것은 중요 국경이나 요충지역을 말한다. 국경이나 관경을 의미하는 말이나 관공서 관찰사 등에서 알 수 있듯 중요 국가 요충지역을 말한다. 그리고 관이라고 하는 것은 중심을 말한다. 흔히 경기장 내에 구경군을 관중석이라고 한다. 즉 경기장 중심을 바라보는 자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즉 관은 중심을 말한다. 그래서 관중지역은 수도가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 서안이나 북경이 고대 역사에서 수도로 사용되어 왔다.그래서 일대를 관중(關中)지역으로 불리웠다. 다른 말로 수도를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의 지역을 경기도라고 불리웠다.이 지역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관서와 관동 관북과 관남으로 부른 것이다.
관동군의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러시아와 맺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군 주둔권을 승인받고, 러시아의 조차지(租借地)인 랴오둥 반도[遼東半島]를 인수하여 관동주[關東州]를 만들고 관동도독부를 두었다. 관동주와 남만주 철도의 경비를 위해 병력을 주둔시킨 것이 관동군의 시초이다. 요녕성이 관동지방이며 북경을 관으로 보고 지역을 구분한 것이다.
간도의 유래를 알면 역사가 보인다!
북관이라고 하는 것은 관의 북쪽이므로 북경을 관중으로 불리웠으며 이 곳이 요동성이 있던 지역이다. 이 곳의 북쪽을 북관지역이며 북동쪽 방면을 간방이라고 칭하였다. 8괘로 동북방을 간(艮)으로 표현하였다. 이 일대를 간도라고 한 것도 간도(艮道)에서 간도(艮島)로 지명이 변경된 것이다. 그래서 만주 일대를 간도로 불리운 것은 중심에서 동북방이기 때문이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 고려와 조선의 중심이 중국 중심지역에 위치했다는 반증인 것이다. 간도를 동북방으로 보았으며 이 곳이 함경도 지방이며 김종서가 동북방 6진을 구축한 지역이다.
우리가 우리 땅인 곳을 간도라 부른 것은 우리의 영토의 중심에서 불렀다는 것이다. 간도는 동북방의 섬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룩에 존재한 중앙조선에서 만주와 한반도를 그렇게 불렀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대륙 조선론이 증명된 것이다.
북관대첩비 특집으로 방영된 함경도 지도가 요동반도 지역을 가르킨다!
지난 2005년 10월 21일 KBS에서 방영된 < [긴급기획 역사스페셜] 100년만의 귀환, 북관대첩비 >를 보면 놀라운 장면이 방영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진실에 대해 모르게 넘아간 엄청난 장면이 나온다. 그것을 취재한 PD도 그것을 시청한 시청자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장면이 무엇인가!
임진왜란 당시에 함경도를 침공한 대표적인 다이묘(大名)가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인데 그는 함경도를 장악하려고 많은 사전 준비를 한다.화면에 캡처된 <가타지마 만지> 교수가 연구한 지도를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 농업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다. 쌀을 물론 콩 . 기장. 조를 수탈하는 대상으로 삼고 생산량과 조세표까지 철저히 파악한 것이다. 그러면서 함경도 지방을 공격한 지도를 보여주고 있다.문제의 지도를 펼치고 가토 기요마사가 점령한 지명이 함경도이고 구체적으로 덕원.문천.고원.영흥을 가르킨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두가지 발견된다.
첫째는 한반도 함경도는 산악지대라 농사지울 땅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한반도 함경도는 가장 농지가 적고 가장 산악이 많다. 그런데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 농사 지역과 생산량에 대단히 욕심을 가지고 침공 전부터 심혈을 기울인다. 과연 한반도 함경도라면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지역을 공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함경도를 공략한 지명을 보여주는 지도가 함경도 동해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함경도 동해안은 강이 거의 없으며 섬도 거의 없다. 그 곳과 가장 흡사한 곳이 중국 요녕성 지역이다. 요하의 하구에 장산열도가 있으며 1000개에 가까운 많은 섬들이 존재한다. 양자강 하구 주산군도 다음으로 섬이 많은 지역이다. 그 곳에 한반도 지명과 같은 흑산도도 존재한다. 화면에 나온 지도는 대능하와 요하가 밀집한 곳이다. 이 곳은 화북평원으로 논농사는 물론 많은 농산물이 산출되는 중요한 곡창지대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드넓은 곡창지대와 목초지대인 것이다. 요하를 따라 올라가면 길림과 장춘이 나온다.
종합하면 함경도로 진출한 곳이 바로 요동만이라는 사실이며 요하(압록수)를 따라 내륙 깊은 길주(길림)에서 함경도 의병과 관병의 대접전을 벌인 것이다. 조선군 3000명대 왜군 22000명이 싸워 조선군이 승리하였다. 전술 중에 하나는 청야전술인데 왜병이 진군한 곳마다 곡식과 장비를 불태워 현지 보급품을 끊는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좁은 지역에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전술이 청야 전술인 것이다. 이 곳에서 유목족의 깅인한 조선족과 싸워 퇴각하여 이 이후에도 침공하지 못한 지역이다. 일제 시대에도 독립군이 활동한 지역과 동일하다. 역사는 반복될 뿐이다.
함경도라고 방영된 지도가 단순한 요하강 일대라는 가정이 아니라 진실인 이유는 또 다른 고지도와 아주 흡사하기 때문이다.위 지도에 위 부분은 조선후기에 북경을 다녀온 여행기에 나오는 지도이다.북경에서 신의주 까지 자세한 여행지도인데 그 중앙 부분과 가의 흡사하며 여러 강을 지나가는 구간이 있다. 산해관-(난하-대능하-요하-태자하)-요양-압록-신의주 일대 중에 4개강이 이 곳 지도와 거의 같다는 것이다. 왼쪽을 보면 산해관 북쪽을 지나는 장백산맥도 거의 같게 나온다. 과연 한반도 함경도에 4개의 연속된 강이 있으며 않은 섬이 존재한 지역이 있는 것인가! 아무리 찾아 보아도 일부라도 비슷한 지명이 없다는 사실이다.
가토 기요마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산악지대에 눈독을 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함경도가 최고 알짜 지역이기 때문에 욕심을 낸 것이다. 그 지역이 바로 요동만인 것이다. 일본 교수인 가타지마 만지는 알 것이다. 그 곳이 절대 함경도 일대가 아니며 요녕성이라는 것을 .. 그러나 시청자나 일반인은 물론 그것을 취재한 PD 도 그 곳이 한반도 함경도지도가 아니라는 것을 의심하지 못한다. 모든 정황과 증거가 한반도 함경도가 아니라 요녕성이어야 맞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가토 기요마사는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바보장군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반도 8도 중에 가장 농산물이 적은 곳에 가장 많은 농산물 확보를 위한 목적으로 침공하였고 최종적으로 욕심을 냈기 때문이다.
함경도는 동북삼성이라야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진다.
그것은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내에 존재한 모든 반도사관이 거짓이라는 것이 판명되는 것이며 고려와 조선의 한반도 정위론과 그것을 주장하는 강단사학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사건이며 재야사학과 민족사관이 승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륙고려 대륙조선의 결정적 증거가 많다고 하더라도 비록 사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절대 승복하지 못하는 세력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한다. 중국은 동북 공정과 중국 대통일을 위해서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리고 일본은 대륙 조선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만일 한일관계사에 있어서 일본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대륙을 여러번 공격하였지만 만일 그 공격지가 대륙이라고 밝혀지면 일본의 우월성 보다는 한국의 대륙지배가 밝혀지기 때문에 모든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명분 때문에 철저히 숨기고 있는 것이다.현 재야사학은 일제가 식민지 교육용으로 한반도 안에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반도사관을 세뇌시키고 있으며 그 후학이 강단을 장악한 것이다.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의 후손 이병도가 근대 역사학의 뿌리인 것이다. 그 후학의 학맥이 대세를 장악하는 이상.. 그 어떤 근거나 증거가 나와도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강단사학 전체가 괴멸되기 때문이다.우리는 중국과 일본 뿐 아니라 내부의 역사전문가라고 알려진 강단사학의 또 다른 적과 싸워 우리 민족의 웅대한 대륙사를 회복해야 한다.
함경도의 지명 유래와 길림의 지명 유래는 같다!
네이버 백과사전을 기준으로 함경도와 길림을 비교한 것이다. 함경도는 태조 때 영흥(永興)과 길주(吉州)의 이름을 따서 영길도(永吉道)라 하였으나, 1416년(태종 16) 함주(咸州)를 함흥부(咸興府)로 승격시켜 관찰사(觀察使)의 본영을 둠으로써 함흥과 길주의 이름을 따 함길도(咸吉道)라 고쳐, 이때 8도가 갖추어졌다.그리고
길림은 청(淸)나라 때부터 불러온 이름인데 1929년에는 융지현[永吉縣]으로 개칭하였다가 1936년에 지린시[吉林市]로 고쳤고, 청(淸) 말기에 성(省)이 설치되었으며 1954년까지는 지린성의 성도이었다. 여기서 조선은 함경도를 영길도(永吉道)라고 부르며 청은 길림을 영길현(永吉縣-중국 발음 융지현)이라 부른다. 즉 길림성의 지명을 공통적으로 영길이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길주는 길림이며 길림은 영길로 불렀다는 것이기 때문에 길림이 함경도 중심도시사 되는 것이다.조선은 도(道)로 지역을 구분하였고 청은 현(縣)으로 구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영길도를 영길현으로 바꾼 것 이외는 없는 것이다.현 길림성 지도에도 길림 밑에 영길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임진왜란의 당시 해저 유물이 남해안에서 거의 안 나오는 이유!
가토 기요마사와 이순신이 전투를 벌인 지역이 요하 근처인 장산군도 일대일 가능성이 많으며 특히 장문포전투와 고금도 해군기지 이전에 대한 추정지역이 장산군도 일 가능성이 많다. 또한 북경 일대가 순천부로 불리운 지역으로 보아 백의종군하고 난 이후 삼도수군 절도사 자리를 차지한 이후 해군을 재건한 지역 중에 유력한 추정지역이다.순천 광양 곡성 구례 지역은 어디인가! 북경에서 단동까지... 황하에서 압록까지....발해만와 요동만의 연안에서 해군 재건설을 하는 가장 유력한 지역이다.
부산이라는 지명은 산동성 동래현 지방과 양자강 항주 근처도 부산으로 불리운 적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주 수도는 서안과 북경 그리고 무한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개성과 평양 그리고 한성의 영역인 것이다.실제 임진왜란에서 싸운 이순신의 바다는 양자강 일대와 산동성 일대 그리고 요녕성 일대 그리고 한반도 남해안 잔적 소탕작전등으로 방대한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중일기에서 절강에서 강소까지 바다를 지켰다고 나온 것이다. 자세한 정위론과 전체 전쟁상황은 차후에 자세히 언급을 드린다. 조선 수군이 전멸했다는 거제도 칠천량 바다를 뒤져 보아도 임진왜란 당시에 침몰한 어떤 배의 흔적도 안 나온다. 그 이전에 침몰한 배는 많이 나와도 확율적으로 많은 것 같은 임진왜란 유적은 거의 안 나온다. 그것은 임진왜란 당시 주 강역이 한반도가 아니기 때문이며 변방에 지나기 않았기 때문이다. 막강한 자금을 동원해 남해안을 뒤져도 거의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양자강이나 황하강 그리고 요하의 바다를 뒤져보면 많은 임진왜란 유물이 나올 것이며 거북선도 나올 것이다.
백두산 경계비의 진실-압록강과 두만강은 요하와 아무르강을 말한다.
아래 지도에 나온 것은 지리와 강이름을 표시한 것이다. 여기서 두가지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다. 첫째는 조선 초 세종 때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 동북방에 6진을 설치하는데 그 설치지역이 한반도 두만강 안이 아니라 서북으로는 바이칼호에서 동북으로는 사할린까지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청나라와 영토분쟁이 일어나서 경계를 확정지은 것으로 유명한 백두산 경계비의 영역이 만주 일대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백두산은 조작된 지명이며 원 지명은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요하의 서쪽 상류 시라무렌강에서 거란제국을 세우다.
요하라는 강이름이 형성되는 계기는 거란족의 부흥지이기 때문이다. 요하(遼河) 상류이며 서요하의 끝인 시라무렌(Siramuren) 유역에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거주하였는데 916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합한 다음 황제를 칭하고 거란을 건국하였으며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947년 국호를 요(遼)로 개칭한 것에서 유래한다. 시라무렌강 상류는 바이칼호와 몽고고원 아래에 있으며 내몽고 자치주에 해당된다.
압록강은 요하이며 난하가 요하라고 한다.
<삼국유사>와 <중국 요사지리지>에서 "요하를 일명 압록이라 하였다" 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환단고기>><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서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난하가 '요수(요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동과 요서의 기준은 어디인가!
거란족이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요(堯)라고 하였으며 여진족이 나라를 세우고 금(金)이라 하였다. 이는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가! 단군조선이후 대부여와 고구려까지 5부족 유목 연맹체를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역사의 뿌리는 같다. 그렇기 때문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요나라의 이름을 따서 국호를 요라고 한 것이다. 요(堯)는 성이 이기(伊耆), 이름은 방훈(放勛), 호는 도당씨(陶唐氏)이며, 제요(帝堯)라고도 하고 당요(唐堯)라고도 한다. 그래서 서이족의 당(唐)이라는 나라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다. 유목족은 대대로 부족 연맹에 의하여 나라를 세우고 동서양 스탭지역을 활동기반으로 하면서 실크로드를 상업기반으로 하면서 제국을 다스렸던 것이다.
요라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7회력인 월-화-수-목-금-토-일요일에 들어가는 요도 같은 유래인 것이다. 또한 중요하다는 말도 중앙의 요라는 뜻이며 모든 사물의 중심이자 상징을 요라고 한 것이며 이것이며 국호와 왕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란족도 같은 유목족 뿌리이기 때문이다. 고구려도 5부족 연맹체에서 비롯되었으며 고주몽 계열의 계루부를 중심으로 연합하였다. 역사를 따라 추적해 보면 계루부가 거란족이 되었으며 그 연원은 그리이스 유목족까지 연결이 된다. (글안->거란->코란->카라->가야)
요라는 것은 거란족의 요나라를 세우는 중심지역이기도 하며 황제국의 중심을 요라고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준에 따라 시대에 따라 각각 달라지는 것이다. 요나라는 황제국이기 때문에 황제국이 중심이 되어 그 중심에서 동쪽을 요동이라 하며 서쪽을 요서라 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시대에는 유프라테스와 티크리스강을 중심으로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것이며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것이며 황하의 중심 장안에서 요서와 요동을 나누는 것이다. 시대 변천과 함께 각기 달라지는 것이며 제후국 나라에서는 방향이 바뀌어 나타나기도 한다.
요동과 요서라는 개념도 황제국이 사용하는 일명명사가 된다. 특히 수도를 칭하는 평양(平陽)이나 안(安)도 요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며 한수(漢水)나 압록수(鴨綠水)도 같은 개념이 된다.
압록강은 어디를 말하는가!
압록강의 어원은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압록강의 물빛이 오리머리 빛과 같다(…水色如鴨頭…)고 하여 압록강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리 머리 모양을 닮은 강이라고도 하며 오리의 음을 따서 오리->아리->아리수->우리수 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리는 알과 같은 말이며 알은 <안-한-우리-울-훈>과 같은 말이기 때문에 한수=압록강=한강=아리수 와 같다. 민족의 중심강을 아리수의 파생영역으로 발전되어 여러 이름으로 변형 발전된다. 중심강이기 때문에 황하강으로 부르기도 하며 문명의 중심이기 때문에 불->.파이어->페르->비류로 발전되어 비류슈=패수로 발전된 것이다.크게 보면 여러 강의 어원은 비슷한 메커니즘의 영역인 것이다.
크게 본다면 아리수나 압록수는 아랄해의 지류인 아무다리아강과 시르다리아강이 압록수이자 아리수이자 한강이며 요하의 여러 지류도 압록수이자 아리수이자 한강이 된다. 그리고 황하도 같은 개념으로 바라 보아야 한다. 민족의 흥망성쇠와 이동 그리고 영토의 확장과 축소에 따라 달리 불리워지며 자국과 경쟁국의 역사적 명분에 따라 왜곡되기고 하고 변형되기도 한다. 때문에 획일적인 적용과 해석이 곤란하며 그 당시 상황에 맞는 적용이 필요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9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세 개의 큰 물이 있는데 하나는 백두산(白頭山) 아래의 마죽동(馬竹洞)에서 나와 혜산진(惠山鎭)과 인차외(仁遮外)를 거쳐 최천이동(崔天已洞)의 물과 합류하여 군계(郡界)로 들어오고, 하나는 길성현(吉城縣) 북쪽 장백산(長白山) 서북보(西北堡)에서 나와 운총보(雲寵堡)를 거쳐 허천강(虛川江)과 합하여 강기(江岐)에 이르러 군계로 들어오고, 또 하나는 함흥부(咸興府)의 황초령(黃草嶺)ㆍ부전령(赴戰嶺)과 평안도 강계부(江界府)의 오만령(五萬嶺) 등의 물이 어면강(魚面江)과 합하여 군계로 들어온다. 세 개의 물이 합류하여 압록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삼수(三水)라고 이른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군(郡)이 어면강ㆍ압록강ㆍ삼수동수(三水洞水)의 세 가닥 사이에 있기 때문에 삼수라 했다.” 한다.
삼수또는 삼수동수라는 지명이 있는 곳이 아무르강 삼강평야와 요녕성의 요하하류 지방 두개가 있다. 그 중에 요하가 압록강인 이유는 요하의 지형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는 내용과 같다. 그리고 현 압록강은 전혀 내용이 틀리다.요하 하류에 싼장커우[三江口] 부근에서 창바이[長白]산맥에서 발원한 동랴오허강을 합쳐 랴오허강이 된 뒤, 그대로 남하하다가 훈허강[渾河]을 합치고 나서 잉커우[營口]에서 보하이해[渤海]로 흘러든다. 그리고 혼하는 원래는 랴오허강[遼河]의 지류였으나, 1958년 와이랴오허강[外遼河]을 가로막은 뒤부터 독립 수계가 되었다. 칭위안만주자치현[淸原滿族自治縣] 동쪽 군마링[滾馬嶺]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푸순[撫順]?선양[沈陽]?랴오중[遼中] 등을 지나 하이청시[海城市] 싼차강[三酒河] 부근에서 타이쯔강[太子河]과 합류한다.
《한서(漢書)》의 <조선전(朝鮮傳)>과 <지리지(地理志)>에 패수(浿水) ?염난수(鹽難水) ?마자수(馬水) 등의 이름으로 나온다.압록강의 한 지류에 소금강을 뜻하는 염난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소금기가 있는 강이 포함되어야 하는데 소금기가 있는 강은 요하의 서쪽 지류 상류인 시라무렌강에 소금강이 존재한다. 지금도 그곳은 식물이 자라지 못하는 소금기가 머금은 지역이며 내륙에 많은 소금이 산출되는 장소가 실존한다.
또한 염난수라고 일컬어지는 강은 아랄해 일대의 아무다리아강이며 아랄해가 염수가 있으며 서쪽으로 흐른다. <한서지리지>에는 “마자수는 서쪽으로 흘려 염택에 들어간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염택은 소금 연못이므로 아랄해를 지칭한다. 압록은 두 곳을 말한다. 또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에 들어가서, 서남쪽으로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간다.”라고 자세히 기술하였는데 서안평이 바로 서 투르크 평원인 파미르 고원을 넘어 존재하는 아랄해 일대 평원을 말한다.참고로 현 요하 지명에 역사 기록에 중첩이 일어나는 것은 압록강을 지칭하는 것을 한 곳에 모아 적용시키는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것이 나타나는 것은 민족의 이동과 함께 비슷한 자연환경에 같은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두만강은 어디를 말하는가!
두만강은 두만강(豆滿江)은 콩이 가득하다는 말이다. 콩은 태극이며 생명이며 시초를 말한다. 아무르의 <아>도 아사에서 나온 말이며 새로움이며 알파벳의 A도 감탄사의 의미도 있지만 생명현상의 명사를 의미한다. 만은 마르로 연음이 되며 마르->무르로 연음이 된다.그러므로 아무르를 한자로 옮기면 두만강이 되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0권>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鴨綠江),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松花江)과 혼동강(混同江), 동북으로 흐르는 것은 소하강(蘇下江)과 속평강(速平江),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豆滿江)이다.” 또 “여진 말로 만(萬)을 두만(豆滿)이라고 하는데, 여러 갈래의 물이 여기로 합류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라고 기술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여러 갈래의 물이 하나로 합류되는 것이 두만강이므로 현 압록강이 아닌 것이다. 또한 남으로 압록강이 흐르고 이 압록강이 요하라면 북으로 흐르는 것은 송회강과 여러 지류에 해당된다. 이 지류가 다시 동으로 흘러 하나로 뭉쳐 바다로 흘러간다고 하였다. 바로 아무르강을 말하는 것이다.
두만강은 만주강을 말하며 만주 일대를 가득차게 채우는 강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흑룡강이라는 별칭이 붙는 것은 동단국-조선족-고구려의 상징색이 흑색이기 때문에 붙은 명칭인 것이지 현 두만강의 짧은 강이 아니다.
이순신이 여진족과 싸운 두만강 하류에 녹둔도 전투지역은 어디인가!
녹둔도는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서 방영되어 유명해진 전투와 지명이다. 여진족인 야인의 습격을 막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녹둔도를 사수한다는 내용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렇게 기록되었다. 1587년(선조 20) 여진족의 습격을 받고 큰 피해를 당해, 당시 책임자였던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그 책임을 지고 해임된 바 있다.
두만강이 현 한반도 두만강이 아니고 아무르강이라면 두만강 하류에 있는 녹둔도도 아무르 강 하류로 가야한다. 이 뿐만 아니라 녹둔도는 이순신 장군이 여진족과 싸운 섬이며 이 섬이름을 따서 녹둔도 전투라고 한다.역사기록을 보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세종실록지리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공주를 거쳐 동류해 25리에 이르면 사차마도에 도달하고 여기서 강물이 나누어져 5리쯤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하고 있다.세조 원년(1455년) 8월에는 이전까지 사차침도, 사차마도라 하던 것이 녹둔도 또는 녹도로 명명된다.>
현 두만강 하류에 삼각주로 된 지명이 녹둔도라고 한다. 두만강 하구에 있는 둘레가 8키로인 타원형의 자그마한 땅이다. 직사각형으로 환산하면 가로 세로 2키로에 해당한다.과연 그곳이 녹둔도인가! 얼마가 그곳이 중요하길레 여진족이 목숨을 걸고 침범하였으며 얼마나 중요하길레 그 안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설치했을까! 그 땅속에서 금이라고 나오는 비밀이 있는 것인가!
아무르 강을 두만강으로 옮기다 보니 아무르 강 하구에 있는 사할린 섬을 억지로 끼워 ??추다 보니 코메디를 연출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인냥 우기는 식민지 사학이나 그것을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일반인이나 마찬가지다.
녹둔도가 두만강 하류의 작은 섬이 아니라 아무르 강 하류의 사할린섬이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정황으로 보면 절대 녹둔도가 될 수 없다.여진족은 유라시아 일대를 주름잡은 유목족이며 훗날 금나라를 세우며 나중에 청나라로 발전하여 중국 대룩을 장악한 몽고제국이래로 가장 강력한 유목집단이다. 여진족은 몽고 초원과 만주일대를 주름잡은 유목족이다. 그런 민족이 가장 작은 척박한 한반도 함경도를 노리고 두만강을 노리겠는가! 만주일대는 화북평야로 한반도 보다 몇 배 넓은 농경지와 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 만주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그래서 절대로 한반도로 넘지 않으며 넘을 필요성을 못 느낀다. 그것도 고작 작은 땅인 두만강 하류 작은 땅을 노린단 말인가! 여진족이 그렇게 바보 집단인가! 드넒은 화북평야와 송화강과 아무르강 그리고 흑룡강의 농경지와 목축지를 버리고 어디에 붇어 있는지 모르는 한반도로 가서 그것도 아주 작은 섬 녹둔도를 노린단 말인가!
녹둔도는 어떻게 기록되었는가! 한번만 읽어 보아도 안다. 세종실록지리지 내용 중에 중요한 것을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조선 세종 때 6진(鎭)을 개척한 이래 여진족의 약탈을 막기 위하여 섬 안에 길이 1,246척의 토성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을 둘러 병사들이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을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농민들은 상주가 금지되었고, 춘경추수기에 한해서만 출입이 허가되었다.
여기서 녹둔도가 두만강 내에 섬이라면 성을 쌓고 군대가 상주하고 그리고 농사를 지을 땅면적이 나오는가! 그것도 직경 2키로 안에 모든 것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사할린 섬이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녹둔도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역대 왕들은 자주 언급을 한다.<세조는 함길도 도절제사인 양정과 도사 강효문에게 조산구자(造山口子) 녹둔도 농민이 들에서 일할 때 야인들이 배를 타고 침입, 약탈할 것이 우려되므로 진장(鎭將)과 만호들에게 엄중히 방비하라는 밀유(密諭)를 내리다.>라는 기록이 나온다.<중종 9년(1514년)에는 봄철 농사를 지을 때면 조산보의 군민이 녹둔도로 들어감으로 본보가 빌 정도라고 하고 있다. >라고 되어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는 것을 알수 있다.
사할린이 왜 녹둔도(鹿屯島)인가!
녹둔도는 한글로 풀어보면 <사슴+ 언덕+섬>이다.과연 사할린이 사슴언덕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사할린 내에 홀름스크는 사할린 남서안의 항구도시로 인구는 약 5만 2,000명이다. 러시아어로 '언덕'을 의미하는 이 마을의 뒤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즉 홀름이 언덕이라는 말이다. 홀름->할림->할린 이니 같은 음운 계열이다. 그리고 스크는 섬을 의미하니 홀름(할림->할린-언덕)+스크(?C->섬-도)이니 언덕섬(둔도-屯島)가 된다. 그러므로 사할린의 할린은 언덕인 것이다. 그렇다면 샤(사슴)+할린(언덕)이 된다면 샤가 사슴이라는 말인가!
샤할린은 영어로 Sakhalin(Sak+hill+lin)으로 표현되며 사슴이나 양 소고기를 뜻하는 영문은 다음과 같다.
sheep(숫양) Stag(숫사슴)Caribou(순록)Steak(쇠고기)로 발음된다. 일본어로 보면
鹿しか
(시카)로 발음된다.즉 한글은 사슴이며 일본은 시카이며 영어는 샤가 공통으로 발음된다. 그러므로 샤는 사슴을 말한다. 샤할린은 사슴언덕이 되며 녹둔이 된다. 사할린은 완벽한 녹둔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할린은 목축으로 소와 사슴을 기르고 있기 때문에 사슴섬으로 부른 것이다.
녹둔도라는 이름을 지을 때에는 반그시 사물의 특성을 보고 지은 것인데 현 두만강 녹둔도는 전혀 특징이 없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녹둔도는 사할린섬이다.우리의 6진 최전방 연해주와 사할린은 반드시 찾아야 할 땅이다. 이순신의 젊은 시절 숨결이 묻어 있으며 우리 조상이 개척한 땅이다. 지금 사할린은 유전지대로 탈바꿈되어 황금의 땅이 되었다.특히 사할린의 북쪽은 천연가스가 풍부하며, 1999년 7월부터는 원유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러시아의 보고로 통하는 지역이다. 간단한 도표가 제일 첫 그림에 사할린이 소개되어 있다.사할린은 육지와 8키로 정도로 떨어져 있으며 겨울철에는 바다가 얼어 걸어서 사할린까지 갈 수 있다.그러므로 여진족인 겨울철에 말을 타고 섬에 침공이 가능하며 평상시에는 배로 침공이 가능하다.사할린과 연결된 콤소모몰스크와 하바로프스키가 6진 중에 하나인 경흥인 것이다. 그 곳에 조산만호가 존재한다. 사할린이 녹둔도라는 것도 필자가 최초로 주장한다.
사물의 형상을 따라 이름을 짖기 때문에 함경도 녹둔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억지로 아무르 강을 두만강으로 영토를 축소하다 보니 두만강 유역을 뒤져 만들어낸 코메디 자작극인 것이다.누가 이런 자작극을 만들어 내는 것인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아래 그림은 간도지방을 세밀하게 그린 지도이다.요하와 송화강을 결합한 지역을 표시한 것이다. 노란색 지도는 1895년 전후로 하는 조선과 청의 국경지도다. 요하 근처를 절충지로 하여 송화강 지역을 양분한 지도다.그리고 푸른색 지도는 일본이 정밀 측량하면서 백두산 유역의 세부 지도이다. 백두산 위쪽으로 표시된 강이 토문강으로 나온다.
우리는 중국으로 부터 간도반환 운동과 함께
러시아로 부터 연해주와 사할린 반환운동을 해야 한다.
아직 국제법 상 법적 청구가 가능한 시점이다.
이순신이 지켜낸 녹둔도가 사할린이며
우리는 녹둔도 회복운동을 해야 한다!
김종서의 6진중에 한 지역이 바이칼호 남쪽에 회령진을 설치하다.
조선 세종때에 4군과 6진을 개척한다고 알고 있다. 6진은 조선 세종 때 동북방면 여진족(女眞族) 침입에 대비하여
종성(鍾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의 여섯 진을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6진을 운영하
는 가운데 변동사항이 있는데 영북진을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겨 종성군으로 하고 알목하에 회령진을 신설하는 조취를 내린다.회령진이 신설치된 것은 여진족 내분으로 후퇴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목하라는 지명이 놀랍게도 징기스칸(成吉思汗) 의 손자 쿠빌라이칸(원 세조)이 카라코롬(和林)북쪽 알목하 상류에서 나라(원=몽고)를 일으킨 곳이다. 이 곳을 회령으로 부르는 것은 헤를렌 강(몽고 수도 울란바토르 동쪽) 흐르기 때문에 헤를렌을 음사한 것이 회령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강은 헤란강으로 부른다.선구자의 노래 가사 중에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혜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라고 나온다.구한말 이전부터 혜란강(헤를렌)은 유목족의 중요한 강이기 때문이다. 바이칼호에서 동남쪽으로 만주를 가다보면 반드시 건너야 할 강이기 때문이다. 이곳이 바로 회령인 것이다.
6진 중에 경흥은 연해주이며 회령은
혜를렌강 일대를 말한다.
그러므로 만주 전체가 함경도 땅이자
동북부 간방 조선의 영역이다.
문명의 난생신화와 흑계룡!
백두산은 민족 이동과 함께 중요한 신앙과 정신적인 상징의 대상이다. 항시 정북에 위치하고 있다.중앙아시아에서는 힌두쿠시 산과 칸탱크리 산을 백두산으로 삼았다.신강성에서는 천산산맥의 천산을 백두산으로 삼았고 서안에 수도를 삼을 때에는 삼서성에 있는 태백산을 북경에 수도를 삼았을 때에는 의무려산을만주에서는 길림성에 있는 북산(베이산)을 몽고 동부에서는 초이발산을 백두산으로 삼았다. 즉 백두산은 하나의 산이 아닌 민족의 중심지역의 북쪽을 백두산으로 삼은 것이다.
만주와 몽고를 나누는 축은 강으로 보면 헤를렌강이며 이 강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갈린다. 그리고 동과 서를 기준으로 나누면 대흥안령산맥이다. 몽고고원에서 대흥안령 산맥을 지나면 만주 평원으로 뚝 떨어지는 공간이 나온다.대흥 안령산맥의 북쪽 끝에서 소흥 안령 산맥이 뻗어 장백산맥으로 이어진다. 장백산맥은 현 한반도 압록강과 두만강을 축으로 지나가는 산맥이다. 이 산맥이 있어서 한반도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대흥 안령산맥과 장백산맥의 중간에 위치한 곳이 마치 알을 품은 것처럼 타원형의 평원이다. 이 지역의 중심지역의 작은 산악을 중심산으로 삼았으며 백두산으로 인식한 것이다. 후일 한반도로 내려와 1900년 이후에 새로운 상징으로 백두산을 중심산으로 삼은 것이다.
이성계가 태어난 지명이며 이씨 조선의 세력 기반이 되는 지방이다.그러나 이 지방은 청원만족자치구지역이며 청나라가 태생한 곳이라 알려진 곳이다.그리고 길림성 길림과 장춘 사이에 있는 북산이 천하 제일의 명산이라 지칭되며 여러 만주족 유적이 있다. 그러나 만주족이 아닌 조선족의 유적이다.유목 연합이기 때문에 같은 뿌리를 기반으로 출발을 하기 때문이다. 만주는 또 다른 난생지역의 계룡지역인 것이다. 그 상징을 흑룡으로 보는 것이며 고구려의 상징이자 고조선의 후신으로 본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만주는 신만주이며 원만주는 신강성 만주이다.둘다 지형이 계란형이다. 그래서 계룡산이라 한 것이지 어떤 특정한 산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상형주의 원칙이 적용된다. 구만주(신강성)는 황계룡 신만주(간도)는 흑계룡이다.
이성계의 고향과 함흥처사의 비밀
이성계가 태어난 고향은 함경도 영흥(永興) 출생이다. 영흥과 길주를 합하여 영길도라고 하였으니 영흥은 길림성에서 그리 멀지 않는 요충지에서 태어났다고 보면 된다. 영흥은 요양이나 심양일대로 추정되기 때문에 요녕성이 영흥지방이며 길림성이 길주지방이 된다.
고려말 공민왕 시기에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李子春)이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활동한 지역이다. 이 시기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회복이 되었기 때문에 동북방의 쌍성총관부는 요녕성과 길림성 일대가 된다.이성계도 이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이다.
고려말에 요녕성 길림성 일대 상황을 보면 이성계가 예맥족/ 만주족/조선족의 활동무대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1234년 금나라가 몽고에 멸망하자 여진족은 만주지방에서 부족단위로 할거하였고,만주 일대에서 세력의 이합집산이 일어났다. 금나라에서 몽고로 몽고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세력 순환의 격동 속에서 이성계의 가계 내력이다.이 시기에 부 이자춘은 쌍성총관부 천호 자격으로 고려조정에 내조하러 왔다. 여진족과 몽고족 틈바구니에 있는 만주에 기반을 둔 이성계 집안이 지방 호족으로 등장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청태조의 발상지는 청태조의 선조인 이성계의 발상지이다.후일 임진왜란 당시에 청나라에서 조선에게 먼저 왜 공격에 격분하여 먼저 도워 주겠다고 하면서 <쥐 새끼 같은 왜를 몰아내 부모님의 나라에 원수를 갚겠다고 나온다.> 조선은 우리 부모님의 나라라고 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의 성이 <애각신라>라는 사실이다. 신라의 후예를 지칭한 것이다. 청나라 이전에 금-후금을 세운 여진족도 김씨 후손을 내세운 것이다. 태조 이성계 이후에 왕자의 난이 있고 이성계가 함흥으로 세력 기반을 옮겼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함흥처사는 바로 만주에 세력 기반을 둔 만주족의 근거지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구축한 것이지 자기 고향에 휴양삼아 기거한 것이 아니다.
이성계의 초상화는 푸른색 곤룡포를 사용한다. 다른 왕은 붉은색이나 노란색 곤룡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의외인데 후일 청나라의 상징은 푸른색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피줄이자 가계인 것이다. 같은 뿌리를 상징하기 때문에 청색의 곤룡포와 청나라의 국호 그리고 만주는 하나로 연결된다. 몽고에서는 <따르따르>족라고 하며 우리 문헌에는 <조선조선>족 이라 부르는데 <조선>이 <따르>인 것이다.
조선이 황제국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여진족도 이성계 가계를 정통맥으로 삼았으나 나라를 세우고 황제국으로 부상하자 후기 계승자인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를 정통맥으로 삼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조 발상지가 청조 발상지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조선에서도 연동되며 이성계 가계 유목족 내력을 숨기게 된다.새로운 가계인 전주 이씨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이 있다 보니 유목족의 가계 역사에 대해 미화 작업을 함과 동시에 여진족과의 연계된 부분은 조작하게 된다.
대대로 활동해온 만주족의 무대가 어느 날 갑자기 여진족의 무대로 탈바꿈하는 순간이 된다. 백두산 경계비에 일어난 사건은 이성계 고향을 차지하기 위한 정통성 싸움인 것이다. 만주에서 존재한 청나라 유적은 조선족의 유적을 바꿔치기 한 것이며 실제 청나라가 일어난 지역은 만주가 아닌 신강성 지역에 기반을 두고 동진을 한 것이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한족에 동화되었으며 실제 만주어를 사용하는 일부 민족이 남아있는 지방이 신강성 일대에 약간 남아있으며 만주에는 거의 없다. 이것은 바로 만주에서 청나라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청나라가 중국을 침공하고 그 빈 공간을 한반도 세력이 차지하여 간도를 개발했다는 논리는 허구 일 뿐이며 청나라를 세운 후금이 자기 민족의 발상지를 소홀히 할 리는 없다. 청나라 건국지와 수도는 절대 요녕성을 중심으로 하는 심양이 아니다. 신강성이나 내몽고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이다.
대륙 조선이 망하여 한반도로 피난하는 과정
중앙대륙 고조선-중앙 대륙삼국-동양 대륙고려-동방 대륙조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황제국의 위상과 역사는 사그라 들고 동북방 변방에서 우리는 존재한다.이제 옛 화려한 영광과 역사를 찾아야 하며 그것이 우리의 미래이자 숙명이다.조선의 몰락은 서양과 동양의 패권에서 희생량으로 전락한 것이다.동방의 강자 조선은 다시 일어서야 하며 서양 문명을 이기도 새로운 동양문명을 창조해야 한다. 그 웅홍한 장대한 시작은 한류에서 뜨겁게 타 오르고 있다. 이제 옛 것을 회복하는 다물운동이 벌어저야 한다. 잃어버린 역사와 정신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것이 우리의 밝은 미래인 것이다.
서북방의 위협
조선 초기 4군과 6진을 기반으로 광대한 황제국을 자랑하나 4군을 이내 곧 무너지게 되며 4군을 통한 유목족이 유입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6진은 임진왜란 전후까지 강하게 버티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0년 동안 북방에서는 유목족의 이합집산이 일어나면서 여진족은 해서(海西) ·건주(建州) ·야인(野人)의 3부로 나누어진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여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워 신강성 일대와 내몽고에서 발흥하기 시작한다. 임진왜란 이후에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위협하게 된다.
서남방의 배신
명나라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어부지리 효과를 보고 양자강 이남과 상류지방에 머무는 활동 영역을 더욱 넓혀 양자강 하류지방까지 확대하는 계기가 된다. 전통적으로 동이족과 서이족은 형제관계를 통한 친선 교류의 나라였으며 중국을 양분하는 거대 세력이었다. 그러나 그 주도권을 서이족인 한족에게 한번도 빼앗기지 않은 황제국의 위상을 대대로 지켜왔다. 황하강 일대를 중심으로 중국 동해안을 중심으로 동양 역사의 주도적 역활을 해온 것이다.서이족은 남서방이나 서방 또는 남지나 해를 기반으로 하는 변방의 열국에 지나지 않았다.
동남방의 위협
왜는 해양세력을 말한다.왜(倭)는 외(外)이며 바깥을 의미하며 여인국을 의미한다.광동성과 복건성 그리고 동남아 일대를 대상으로 해적질을 하는 도적때이며 왜구라는 별칭으로 존재하였으며 일본과 또 다른 분류를 하고 있다. 일본이 왜가 아니며 단지 대륙왜의 근거지를 일본왜의 근거지로 바뀌는 것 이외는 없다.왜는 조선국의 제후국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임진왜란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지방 체계로 보면 도 관찰사의 지위이며 지방 호족의 왕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상한 명나라와 이상한 조약이 체결되는데 일본이 점유한 탐라를 주고 조선이 점유한 대마도를 맞교환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탐라는 제주이고 대마도는 쓰시나 섬이 아니다. 탐라는 대만이고 쓰시마는 일본인 것이다. 즉 대륙왜가 일본왜로 쫓겨 들어갔지만 왜는 일본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임진 왜란 당시에 일본은 해양도 소속이며 부속 도서일 뿐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은 교역이 거의 없는 변방이였으며 왜구들이 해외 포르투칼 세력과 해석과 해양 세력의 엽합을 통해 대륙 조선을 정벌하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완전 할양 받은 일본은 덕천가강에 의해 에도막부 [江戶幕府(강호막부)]가 열린다. 강호라 불리운 것은 양자강 일대를 형성한 대륙 왜 세력이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붕괴시키고 천황 친정 형태의 통일국가를 형성시키고 다시 조선을 침공한 것이다. 두 번의 침공으로 조선은 완전 패망으로 전략하게 된다.
동북방의 피신
동북방인 간도와 한반도로 피신하는 과정은 서서히 여러 차례 과정을 통해 전개된다.1차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많은 유민이 대륙을 떠나 간도로 진입하게 되며 2차로 청나라의 오르도스 지방인 서안 북부 내몽고 지방을 점령하게 되고 북경을 위협하자 한반도로 이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대동법과 사회제도가 크게 바뀌게 된다. 또한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많은 지리서가 출간된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정치적 분열은 당파 싸움이다. 당파는 단순히 정치적 견해가 틀리는 것에 따른 국론 분열이 아니다.지방 호족간에 이견과 이합집산인 것이다. 임진왜란을 통해 동인과 서인이 나누어 지고 다시 동인 남인과 북인이 나누어 지는데 남인과 북인이 나누어 지는 계기가 분조(分朝)활동이다. 그 시작은 광해군 때에 분조 활동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 직후 토지결수가 1/10로 줄어들게 된다. 급격한 세입감소는 지방 호족의 이탈을 의미하는 것이지 전쟁을 통한 인구 감소나 농사 지을 인구 감소가 아니라 중앙 조선 황제국에서 이탈하는 지방 호족이 늘어남과 동시에 새로운 지방으로 이전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대륙 조선은 동방조선국(중국 동해안)과 북방조선(만주국과 한반도)으로 나누어 지게 된다. 이 이후 본토 조선이 멸망한 시기는 정확하게 추산하기 어려우나 명성황후 시해를 기점으로 추산된다.그 때까지 황후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은 황제국의 전통을 이었다는 것이다.
조선개국 480년에 한양시대가 끝나다!
북경과 서안을 기반으로 하는 한양시대가 끝나는 시기는 정확하게 추산하기 어려우나 1895년 10월8일(양력) 명성 황후 시해(을미사변)를 기점으로 열리는 시기로 본다. 대륙 조선이 망하자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많은 조선인이 한국으로 배를 통해 육지를 통해 건너오게 되거나 한족에 동화되거나 대량 학살이 된다.관동대학살 남경대학살. 중국 해남성 조선인 학살 사할린 대학살 그리고 만주 지방에 거주하는 많은 조선인을 이억만리 땅으로 이주 시킨다. 자세히 조사
되지 않았지만 뿔뿔히 흩어지는 비극의 역사가 된 것이다. 수 많은 임시 정부가 상해임시정부-충칭 임시정부-북경 임시정부-만주 독립국이 들어선 것이 그 실 예이다.가장 극심한 타격이 된 이유는 일본의 대륙 진출과 정복 지역이 정확히 대륙조선과 만주 한반도 조선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동남아 제국을 침공한 것은 해양도 백제의 영역이며 해양조선의 영역이다. 중국 동부와 만주 그리고 한반도를 침공한 것은 대륙조선과 만주조선의 영역이다.
중국에서는 서울을 한성이라 부르고 일본에서는 경성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그냥 서울이라고 부른다. 왜 이렇게 다르게 부르는 것인가!
중국에서는 전신이 명나라와 청나라이므로 조선에 대하 잘 안다. 한양과 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륙에서 망한 조선인이 건설한 수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성이라고 부른다. 한성 중에 황제가 사는 곳이 한양인 것이다. 한민족은 동대문을 낙양으로 서대문을 서안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새롭게 만들어 동대문 서대문을 일본인이 강제로 부르게 해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의 동대문과 서대문으로 부르는 것은 일본인 일뿐..우리는 그냥 서대문을 서문으로 불렀다고 한다.
덕수궁 대안문이 일제시대 대한문으로 바뀌었다. 서울 한 복판에 일어난 사실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어떤 학자의 주장과 근거가 나와 얼마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물며 이런 상황인데 임진왜란 이후에 벌어지는 엄청난 대륙조선의 수난사를 왜곡하는 것은 아주 쉬운 것이다. 거기에 36년 동안 일제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충분한 시간이다. 또한 근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비로소 일본에 의해 본격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건립 당시 이름인 대안문(大安門)에서 1906년 지금의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뀐 것을 둘러싸고 여러 억측이 있었다. 왜 대안문이라고 했는가! 북경은 천안문이다. 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安) 을 쓰는 것은 황제국에서만 쓰기 때문에 안을 못 쓰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대한(大漢)과 대한(大韓)중에 대한을 쓴 것인가! 그것은 한나라의 피지배 민족을 심어주기 위한 의도이거나 우리가 원래 한문을 쓰는 주도국이라는 의도인데 확실히 단정하기는 어럽다. 다만 안북-안남-안동-안서를 쓰는 것은 대대로 환인제국 안파견의 정통맥이자 천손민족이기 때문이다. 북경이 천안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한민족이 세운 건물과 말인 것이다.
일본에서는 왜 경성이라고 부른 것인가! 옛날부터 경성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대로 부른 것이다. 경성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조선은 3경 5부 제도를 유지해 왔다 .즉 복수의 수도를 두고 그 수도를 지키는 주변 도시를 세우는 것이다. 한성을 둔다면 3개의 한성이 있고 그 중에 임금이 계시는 곳을 한양이고 나머지는 한성이 된다. 그것이 3경 제도나 수도제도다. 그리고 그 수도를 중심으로 전후좌우 포진된 도시가 경성인 것이다. 경을 지키는 성이 경성이며 양을 지키는 성이 한성인 것이다. 경성이라고 하는 것은 3개의 성을 지키는 하나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왜 서울이라고 했는가! 새로운 울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터전기반이기 때문이다. 즉 변방의 한반도 주도세력이 이주한 것에 불과하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도 조선인이 살았지만 주도세력이 대량으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해방을 전후로 하여 엄청나게 서울로 들어 온 것이다.1960년대만 하더라도 서울은 강북 일부를 제외하고 허허 벌판이였으며 논과 밭이 가득한 한적한 도시였을 뿐이다. 조선 500년을 이어온 수도가 아닌 그저 경성이였다.현 경복궁에 완벽한 왕궁이 있는데 무슨 소리며 조선 개국시기부터 건설한 대들보 상량 기록과 흔적이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 할 수 있다. 고려 말 강화도 천도가 임시로 되는 계기가 경성에 왕궁이 들어선 내력이다.즉 강화도가 한반도인 것이다. 고려 역사에서 강화도 섬은 한반도 이며 대륙에는 한반도를 섬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래서 간도도 사이섬이라 하여 대룩을 섬으로 본다. 동쪽 바다에 작은 섬 황하강(한강) 하류에 작은 섬이 강화도인 것이다. 강화도가 천혜의 피난지인 것은 여러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첫째 한반도 대룩과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완전 분리돤 지역이다. 그리고 그 위는 장백산맥으로 험난하게 장막이 처진 상황이다. 그리고 한반도 북부는 산이 많기 때문에 대륙을 통한 침공은 대단히 힘들다. 한반도 산은 대단히 특이해서 작은 산이 뽀쪽하게 여러겹 존재하여 대룩의 산과 다르다. 대륙의 산은 크고 웅장하지만 말이나 마차로 넘기 쉬운 구도를 가진다. 그러나 한반도 산은 불가능한 구조가 된다. 그래서 그리고 경성(서울) 주변에 농사 지을 땅이 역사 기록에 나온 내용과 부합한다. 역사 기록에 보면 강화도 내에 여러 왕궁을 짓고 여러 절터를 세웠다고 나온다. 현 강화도 내에서는 불가능한 구조를 보인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제작한 팔만대장경이 유일하게 남은 것은 한반도의 지리적 이점인 것이다. 한반도는 황하강 하류에 존재하는 작은 섬에 불과하며 날씨 맑은 산동 반도에서 산 위에서 보면 한반도가 작은 섬처럼 보인다.
한반도는 대대로 대륙 조선국의 피난지이며 유배지이며 휴양지이며 변방으로 그 역활을 해 왔기 때문에 삼국과 고려와 조선의 역사 위에 유적도 그대로 연동돤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허상의 반도사관이자 식민사관의 실체이다. 현 한반도 지명은 1차적으로 대륙조선에서 건너와 반도 조선에 그대로 포게지게 되었으며 2차적으로 일제시대 의도된 목적으로 다시 포게지게 되었다. 중국 본토는 명나라 이후 청나라 이후 중국정부 이후 여러 차례 지명이 바뀌게 된 것이다.물론 그 이전은 기원 후 5세기 전후로 하는 중국 고구려 백제 신라 3국 세력의 한반도 유입이 그것이다. 또한 독자적으로 인도에서 일본과 한반도로 직접 들어온 세력도 존재한다.
중국에서는 대륙에 존재한 동이족의 흔적을 지우고 조작하는 혁명에서 비롯된 누적된 결과이며 일본에서는 식민지 교육을 통한 영구 지배 목적으로 조작한 것이다. 또한 대륙조선을 뺀 만주와 간도 지방의 땅도 러시아에게 연해주와 사할린을 빠앗기고 청나라에게 일방적으로 만주 철도 부설권을 얻기 위해 간도 협약을 맺은 것이다.
또한 조선말은 그 당시 말세와 같기 때문에 많은 도참사상이 유행하였다. 특히 남조선 사상이다. 중국 본토에 남은 조선사람은 살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학살의 대상이 되거나 강제 이주가 되거나 한족에 동화되는 멸문이 된 것이다.그 중에 하나가 산맥이 끊어진 섬에 들어가라는 말도 있었으며 십승지를 찾아라는 말도 있었다.비록 해방 이후에 남북전쟁의 아품이 있었지만 한민족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피난지이자 생존지가 한반도가 되었으며 그것도 남쪽이 되었다. 이제 위대한 황제국 후손으로 다시 새롭게 일어서야 한다. 다시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시간대가 다가오고 있으며 다시 찾아오는 위대한 동양문명과 한국의 문명이 열리고 있다.
중국 대륙조선 한양운이 480년으로 끝났으며 간도조선운이 1875년 이후 108년인 1983년에 새롭게 시작한 것이다. 서울 한양이 끝난 것이 아닌 중국 조선 한양운이 끝난 것이다.1984년이 새로운 갑자년이며 하원갑자 마지막 바퀴를 돌고 있다.
특히 국제법상 100년이 되는 시한을 넘겨서는 안된다. 일단 국제법을 통해 소송을 걸어 놓고 보아야 한다.간도 협약 만료시기가 2007년이니 이제부터 준비해야 한다. 차기 정부가 아닌 현 정부에서 문제 제기를 통해 차기 정부로 해결을 넘겨야 한다.
영토 회복 대세와 프로젝트
일단 중국과 소련으로 부터 소송을 걸어 놓아야 한다.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된다.역사 회복에서 국제 명분에서 승리해야 한다. 국제적으로 불점 점유한 영토에 대한 엄청난 부도덕의 낙인을 찍어야 한다. 언젠가는 스스로 포기를 하든 국제적 환경이 우호적으로 바뀐다. 중국 자체도 민족 단위로 되면서 자체 분열된다. 중국 통일시대는 끝난 것이다.
청나라가 조선국 대륙을 정벌한 루트 그대로 신강성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위구르 독립투쟁에서 내몽고와 몽고 통일 투쟁에서 티멧트의 독립에서 동북 삼성의 민족운동에서 들불처럼 번질 것이다.
소련은 한국을 경제 협력 파트로 생각해 장기적 안목에서 포기 할 수 있다. 그렇게 나온다면 중국도 변화를 가져 올 것이며 중국 자체의 각 소수 민족변화와 미중의 파워 게임에서 어부지리를 보일 수 있다.
아시아 거대한 중앙에 유목제국의 위대한 연맹체를 만들어야 한다. 단군조선이 건국한 카스피해에서 바이칼까지 중앙 제국을 만들어야 한다. 카자흐와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몽고와 만주를 아우르는 단군조선을 건설하자!
간도 문제는 북한의 권한이 아니다. 사할린도 마찬가지며 통일이 되기 전에도 충분히 가능하다. 통일이후에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 우리의 현실이다. 역사 부흥운동으로 국내적 관심충만과 국제적 우호가 일단 선결과제다.
황제국에서 다시 세계제국으로!
잃어버린 역사를 찾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해야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여 간도찾기 운동을 해야 하며
소련의 사할린 불법 점거에 대항하여 이순신의 녹둔도(사할린)찾기 운동을 해야 한다.
일제에 의해 침탈된 북관대첩비가 100년 만에 돌아왔다.
그것은 한국의 미래를 보여주는 기미와 징조이다.
사물은 반드시 근본으로 돌아간다!
한국은 조만간 세계제국을 건설한다.
광개토태황의 세계 제국 건설이 20년 걸랐다.
2004년부터 시작하는 20년 정복전쟁이 부활한다.
북관대첩의 위대한 사상이 부활한다는 것이며 고구려의 다물정신이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며 잃어버린 만주와 사할린을 다시 찾는다는 것이다.
역사는 반드시 그렇게 흘러간다!
이제 우리는 역사의 변방에서 중심무대로 가고 있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닌 미래인 것이다.
한류는 모든 동양의 새로운 지표이며 표준이다.
과거에 불었던 단군조선 문명과 문화가 일어나고 있다.
깨어나라! 웅비하라!
간(艮)은 모든 것의 마지막이자 새로운 시작이듯
간도(間島)를 찾는 것은 새로운 웅비의 시작이다.
통일을 넘어
만주로 세계로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나부터 씨를 뿌리면 들불처럼 보인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특정인의 분야가 아닌
한국인라면 가저야 할 소양과 책임 그리고 권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