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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님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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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9* 예수님 흔적
로마서 2장 25–29절 / 이찬수 목사
마이클 샌델 교수가 쓴 책 중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것들 이런 제목에 책이 있는데 그 책 제목이 모든 걸 다 담고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 책에 보면은 중국의 그 독특한 회사를 하나를 소개를 하는데요. 그 회사 이름이 텐진라지니 우리말로 하면은 사과회사 벌써 이게 회사 이름부터가 좀 재밌지 않습니까? 그 이름 그대로 그 회사는 어떤 일을 하느냐? 이제 사람이 이제 살다가 사과할 일이 생기는데요. 그런데 이제 뭐 이런 저런 껄끄러운 상황 때문에 이제 직접 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놓이는 일이 생기면 이 회사에다가 의뢰를 하는 거예요. 저 대신 사과를 해주세요.
그 회사에서 보니까 아주 그 전야에 여러 전문가들도 언변이 뛰어난 사람 사회 경험이 많은 사람 이런 사람들을 직원으로 채용을 해 가지고 그 의뢰인 대신에 이제 사과를 해 주는 그런 서비스를 하는 데가 바로 이 텐진 어팔러지 컴퍼니라는 거예요. 제가 그 기사를 그 책을 보면서 글쎄 아무리 그 언변이 뛰어난 직원이가 가지고 대신 사과를 한다고 해서 그게 통했나? 아마 그 회사는 좀 있다가 망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 겁니다. 여러분 아무리 돈으로 못할 일이 없다 이런 세상이지만 마이클 샌델 교수의 그 책 제목 그대로예요.
여러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많이 있습니다. 그 제가 그 책을 읽다가 불쑥 떠올랐던 게 옛날에 그 인터넷에서 읽었던 그 돈으로 살 수 없는 여덟 가지 그런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요. [돈으로 집은 살 수 있지만 가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잠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시계는 살 수 있지만 시간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책은 살 수 있지만 지식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지위는 살 수 있지만 존경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약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피는 살 수 있지만 생명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친구는 살 수 있지만 친구의 사랑은 살 수 없습니다.
이게 지금 마이클 샌델 교수가 말하는 그 책 제목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바로 그거 아닙니까? 그 저는 그 여덟 가지 항목을 보면서 이 돈으로 집은 살 수 있고 침대는 살 수 있고 시계는 살 수 있고 책은 살 수 있지만 그러나 돈으로 이 평안을 상징하는 잠은 살 수가 없고 건강은 살 수가 없고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그러면 이 신앙생활이라는 게 뭐냐?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그것을 추구하는 이게 신앙생활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을 점검할 때, 나는 이 신앙생활을 통해 뭘 추구하느냐? 그 돈으로 살 수 없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물질적인 것 밖에는 추구하는 게 없으면? 여러분이 신앙생활이 그만 지금 저질이라는 걸 말하는 거예요. 우리 신앙생활이 절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점점, 점점 확장이 되고 있다면 내 신앙이 지금 좌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 보면서 제 신앙도 점검해 보기를 원하는데요.
그러고 보면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그 돈으로 살 수 없는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보니까 마음이 굉장히 중요한 거요. 우리 마음이 어떤 마음의 동기 저는 우리교회 교역자들에게 종종 하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원하는 그것들을 이렇게 압축하고, 압축하고 압축하면 딱 하나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게 많지 않습니까? 뭐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이것도 해라. 저것도 해라. 많은 걸 요구하시는데 그걸 다 압축하고, 압축하면 딱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진액은 딱 하나예요.
네 마음을 다 내 마음을 다 이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저는 새벽에 일어나 묵상을 하다가 가끔씩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 새벽에 일어나 주님 앞에 묵상하며 나아가면 그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아요. 이 목사! 네 마음을 다 그 때문에 우리가 신앙이 자라간다 한다면? 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귀하게 여기는 그 가치를 생각을 하고 그러다가 보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고요. 우리와 우리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이 마음을 주고 이 마음을 받는 일을 귀히 여기는 이런 열매가 나타나는 거예요.
저는 우리 교회 부 목사님들에게 원하는 거 정말 없습니다. 가끔씩 후배 목사님들이 오랜만에 그 저를 찾아와서 그 무슨 홍삼진액 같은 거 사갖고 오면요 그게 뭐 별로 반가운 정도가 아니고 전 너무 싫어요. 그게 이 돈도 없는 부교역자 생활을 하면서 뭐 하러? 이런 비싼 그 마음으로 그냥 환불 해라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 무슨 손에 들려진 그 선물이 반가운 게 아니에요. 그 사람 자체가 반가운 거 아닙니까? 그러다가 보니까 가끔씩 이제 또 이런 것들 때문에 또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는데요. 미국 유학 가서 있는 제가 아끼는 후배인데 아 참 고맙게 늘 제게 마음을 줘요. 메일로 근황을 소개하고 목사님 힘들 때 그 목사님 설교를 통해 이렇게 제가 참 회복이 됐습니다. 그런 격려의 글도 보내오고 정기적으로 그렇게 제게 마음을 주던 교역자가 있었는데요. 이분이 이제 유학 생활을 끝나고 한국으로 귀국해 가지고는 또 이제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또 메일을 나누고 그렇게 마음을 주는 교역자가 있었는데 이제 유학을 끝내고 한국으로 왔는데 교회가 이제 잘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목회를 해야 되는데 그래서 이제 이분이 교회를 하다가 개척을 한 거예요.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기 후원해 주는 내가 한 군데도 없으니까요. 자기 집에서 이제 개척을 시작한 거예요. 여러 번 그 과정에서 저를 찾아와서 이제 기도 부탁을 하고 그랬기 때문에 저도 이제 마음을 갖고 기도를 했는데 바로 그 하나님이 일하시면 참 놀랍습니다. 분당 우리교회 어떤 권사님 한 분이 저를 찾아오셔 엄청난 돈이에요. 1억 원을 내놓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거 목사님 어디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데 쓰십시오. 그래 제가 그 돈을 우리 사무장을 통해서 교회 헌금에 접수를 하고 그 권사님께 여쭈어 봤습니다. 권사님이 어마어마한 돈인데 이거 어디다 쓰기를 원하십니까? 이 목사님이 그냥 알아서 하시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순간에 퍼뜩 떠올랐던 게 그 후배 얼마나 요긴하게 헌금이 쓰겠나? 또 그분은 제가 신뢰할 수 있는 목사님이 누구든 그 권사님께 이래도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아 좋네요 그렇게 하시라 그러더라고 그 막 얼마나 마음이 기쁜지 바로 그 목사님께 전화를 해서 이제 오라고 그랬어요.
그리고는 이제 이 헌금에 대한 설명을 하고 우리 교회에서 이제 그 권사님의 목적 헌금이 이거는 바로 이제 전달할 수가 있으니까 이제 계좌 이체로 헌금해 주겠다고 그렇게 잘 전달이 됐어요. 아 그런데 그러고 나서 참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딱 그렇게 1억 원이 전달되고 나서 그 목사님이 더 이상 저한테 연락을 안 하는 거예요. 전화도 안 오고 메일도 안 오고 뭐 찾아오지도 않고 가끔씩 소문으로 이제 아 교회가 잘되고 있다. 또 워낙 또 신실한 분이니까? 그 제가 마음으로 아 날 위해서 그려주는 거지 바쁘고 그러니까 자기라도 날 배려해 주느라고 그런 거지라고 억지로 내가 그렇게 이해를 하는데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도 그렇지 메일 한통 보낼 수 있는데 아니 계속 이제 시간이 갈수록 자꾸 내 마음에서 이게 부담이 되는 거예요.
그 자꾸 이제 나쁜 공상이 되는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은 애당초 나라는 인격을 귀히 본 게 아니고 나 큰 교회 목사니까 내 손에 들려져 있는 떡을 쳐다보고 처음부터 다가온 건가? 이런 사실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런 못된 생각까지 제 마음에 자꾸 들더라고요. 제가 지난주에 설교를 준비하다가 문득 그 일이 떠올랐던 것은? 그 목사님에 대한 마음 때문이 아니에요. 그 목사님에 대한 원망을 내가 지금 말하지 않는 게 아니고 그건 다 정리가 됐는데 그 과정에서 그분에게 좀 섭섭한 마음을 가지면서 너무너무 중요한 영적인 사실을 내가 하나 깨닫게 된 거예요.
그날도 이제 마음이 섭섭해지는 생각이 들던 그 어간 있데 불쑥 내 마음에 드는 생각이 뭐냐면? 이게 혹시 하나님을 향한 내 태도가 아닐까? 이게 여러분의 태도 아닙니까? 수능 시험을 앞에 놓고 있으면 막 득달같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좋은 대학 보내 주시옵소서! 찍는 것마다 다 맡게 주시옵소서!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다가 수능 딱 끝나고 나면은 그 목사님이 저한테 그랬던 것처럼 끝 뭐 연락도 없고 관심 없고 이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 아닌가? 하나님이 이찬수 목사에게 이런 모습을 혹시 섭섭해 하지는 않을까? 이게 저에게 너무너무 큰 교훈이 된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그 목사님이 고마워 라고 목사님이 교훈을 내게 주시려고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내가 이 교훈을 얻겠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을 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 손에 들려져 있는 떡 잘 보여 가지고 조거 내가 얻어먹어야지 또 반대로 하나님 손에 들려지는 회초리가 무서워 가지고 지옥 갈까봐? 그거 아니에요. 모든 신앙생활의 동기는 그래서 우리가 자꾸 이런 고백을 해 드려야 돼요. 저는 하나님 손에 들려져 있는 떡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손에가 아니고 저는 주님이 좋습니다. 내 마음을 다 내 마음을 다 여러분 제가 왜 오늘 말씀을 이렇게 시작하는가?
오늘 본문에서 지금 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 할례의 문제를 가지고 이제 지적을 하는 내용들이 열거가 되는데 그 모든 내용을 딱 한마디로 요약하라. 바로 이 문제예요. ➤본문말씀 2장28-29절 “28. 이는 겉으로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겉으로 육체에 행하는 할례가 그 할례가 아니기 때문이라. 29. 오직 속으로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글자 안에 있지 아니하고 영 안에 있는 마음의 할례니라. 이런 사람에 대한 칭찬은 사람들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
네 몸의 새기는 할례가 중요한 게 아니고 네가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 이것도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동기 보십시오.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라. 하나님 의식하고 하나님의 칭찬을 목말라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늘 그분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그분이 주시는 위로를 받고자 하는 모든 그 이면에는 내 마음을 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신앙생활에서 기인한다는 거 여러분이 부분을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더 명료하게 하나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자 보십시오.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그 칭찬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여러분 여기 오는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마음에 받은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걸 다 다른 말로 요약하면? 네 마음을 다 네 마음으로 행한 할례. 네 마음으로 지키는 율법. 네 마음으로 들여지는 모든 행위.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딱 그거 하나라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전반기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지난 한 학기를 전체를 요약해 이 한마디로 우리에게 던져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바울은 지금이 할례 문제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어긋나 있는가를 아주 정확하게 지적하는 거를 볼 수가 있는데요.
할례가 유례가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이 할례는 창세기 17장에 그 유례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이 두 가지 약속을 주십니다. 하나가 4절입니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는데 7절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내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내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거 관계 아닙니까?
이 언약을 하나님이 주시고는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할례에 10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자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할례의 유례가 할례의 출발이 이렇게 시작이 됐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 할례라는 종교 의식을 통해 뭘 원하시는 거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한례 의식을 통해 가지고 하나님과 이 관계 맺음에 대한 감사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백성 삼아 주신 것에 대한 감격이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맞아 내가 하나님의 자격 없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됐는데 내가 율법을 지켜야지! 그래야지 그럼 내가 주님의 거룩함을 닮아가야지 그래야지! 그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할례의 흔적을 자기가 보면서 맞아 나는 하나님이 택한 하나님의 자녀지! 로마서 2장에서 유대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정신을 잃어버린 거예요.
이 정신은 다 잃어버리고 할례 행위라고 하는 그 자체에 자꾸 관심이 가다가 보니까 그들이 어느 정도 타락했다. 이 할례 자체가 하나의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 전락을 해 버린 거예요. 마음은 없어도 되고 할례 받기만 하면 난 저절로 구원을 받았다. 나는 할례 받았기 때문에 나 천국 간다. 하나님은 지금 할례를 통해 내 마음을 다오. 그걸 원하시는데 마음은 못 주겠고요. 원하니까 할례는 받았습니다. 됐어요. 더 요구하지 마세요. 이게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이 본문에 나오는 이 바울이 할례를 가지고 유대인들에게 지적하는 이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유대인들이 할례와 관련해서 그 범한 게 뭐냐? 저는 이걸 두 가지로 정리를 해보았는데요. 할례와 관련한 유대인들의 잘못 첫째 그들은 할례를 혈통적 우월주의로 전락시켜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갖고 있다는 거 지키지도 않으면서 그들이 그들은 자기 민족이 할례를 갖고 있다는 거 이거를 혈통 우월주의로 전락을 시킨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그들이 너무나 교만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31-32절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31. 이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그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시니라.”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대뜸 하는 응수가 뭐냐? 바로 그다음 33-34절을 보십시오. ➤“33. ¶ 그들이 그분께 응답하되, 우리는 아브라함의 씨로서 결코 누구에게도 속박된 적이 없거늘 어찌 네가 이르기를, 너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하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니라.”
지금이 율법과 할례를 혈통적 우월감으로 전락시켜 얼마나 교만해 있는가를 지금 볼 수 있는 그들의 내면세계를 볼 수 있는 말씀 아닙니까?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이런 혈통적 우월감에 빠져 있는 그들에 대한 세례요한의 그 무서운 질책이 나오는데요.
자 우리 읽어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 7-9절까지 “7. ¶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중의 많은 자들이 자기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그가 보고 그들에게 이르되, 오 독사들의 세대야, 누가 너희에게 경고하여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게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너희 속으로,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이 우리 아버지로 있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에게 자손들을 일으키실 수 있느니라.”
오늘 우리 중직자들 가운데 저 같은 목회자나 장로나 또 권사나 혹은 모태신앙 내지 예수 그리스도 믿고 이런 분들에게서 찾아보기 쉬운 안타까움이 이 우월주의 우월감 아닙니까? “난 이런 사람인데 난 목사인데 말이야!” 하나님이 참 싫어하시는 게 그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3장9절에서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그들보다 나으냐? 결코 아니라. 우리는 앞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검증하여 그들이 다 죄 아래 있음을 입증하였느니라.” 여기 지금 예수님 믿은 지 지금 한 달도 안 되신 분이나 저같이 55년 동안 교회를 다니고 목사가 된 사람이나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으나 말씀으로 주님 앞에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두 번째로 할례와 관련한 유대인들의 잘못이 뭐냐?
그들은 할례를 종교적 형식주의로 전락시켜 버렸다는 겁니다. 여러분 로마서2장 28-29절을 다시 보십시오. ➤“28. 이는 겉으로 유대인이 유대인 아니요 겉으로 육체에 행하는 할례가 그 할례가 아니기 때문이라. 29. 오직 속으로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글자 안에 있지 아니하고 [영] 안에 있는 마음의 할례니라. 이런 사람에 대한 칭찬은 사람들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
제가 물로 베푸는 이 물세례는 이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물세례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의 자리로 나아가야 되겠다는 결단의 그 마음을 받는 거지 물로 찍어 바르는 거 행위가 아니에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이 세례는 마음에 할지니 이 예배는 마음에 할지니 우리 전 신앙 영역을 이 잣대로 돌아봐야 되는데요. 점검해 볼게 참 많습니다.
제일 먼저 점검할게 예배요. 예배 매 주마다 드려지는 예배가 여러분 마음으로 들여지는 예배입니다. 요한복음 4장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러분 온 마음이 들여지는 예배입니다. 아 저는요 지난 5월 달에 온 마음으로 들어지는 예배가 어떤 모습인가를 제가 신문을 통해서 봤는데요. 놀랍게도 온 마음을 통해 들여지는 예배가 어느 예배당에서 목사님이 설교하는 부흥회 본 게 아니고요. 놀랍게도 잠실 주경기장 토요일저녁 비틀즈의 원년 멤버인 폴 맥카트니 공연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이런 거구나 내가 발견을 한 거예요. [폴 맥카트이]라는 유명한 비틀즈 멤버 가수가 70몇 살 되신 그 어른이 이제 공연을 했는데 그날 잠실 주경기장에 4만 5천명이 다녀오신 분 계세요. 손들어 보세요. 계시잖아요.
폴 맥카트이를 찬양하는 분, 그날 4만5천명이 입추에 여지없이 들어차 있는데 폭우가 쏟아져 폭우 막 폭우가 비가 조그만 온 게 아니고요 포구가 쏟아지는데 잠실 주경기장에 여기처럼 지붕이 있는 데가 아니잖아요. 비를 고스라니 다 맞으면서 세 시간 가까운 시간 떠나가는 사람 없이 그냥 그 사람의 공연을 듣기만 한게 아니고 떼창이라고 그러더라고요. 4만5천명이 합창을 부르면서 라라라랄라 랄라랄라 랄랄라 온 정성을 다하여 그를 경배하며 찬양했는데 월요일 날, 아침에 제가 신문을 폈는데 그 기사가 대문짝 같이 나오더니 하필 그 전날 말씀이 잘 안 풀리고 그래서 막 조는 사람 있고 이래서 마음이 심란하던 차에 이걸 보니까 더 심란해요.
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목사는 설교가 이렇게 밖에 안 되고 조는 사람은 이렇게 많은데 맥카트니는 그 우중에 4만 5천명이 그를 찬양하고 경배를 하고 얼마나 메카니가 흐뭇했을까 공연 다니는 이분이 그 잠실 그 공연을 잊을 수가 없다고 그랬대요. 제가 그 신문 기사를 보면서 하나 결심했습니다. 좋다. 맥카티는 내 라이벌이다. 내 생애에 정말 단 한 번이라도 매카트니가 공연하며 보여주었던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는 게 어떤 건가를 나도 한번이라도 구현을 해 볼 것이다. 그렇게 라이벌로 삼고 5월에 결심했는데 지금까지 구현은 안 되고 있습니다.
내가 5주 설교를 쉬면서 뭐가 문제인지 좀 곰곰히 좀 생각하고 올게요? 여러분은 또 그거 깨닫게 전에는 오지 마세요. 그러지는 말아 주시고요. 아이 마음이 참 이상하더라고 그 너무 제가 좀 초라하고 왜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가 들여지는 게 이렇게 어렵나? 그 내가 당회를 하다가 장로님들께 그 이야기를 했어요. 이런 일이 있을 때 그랬더니 참착하신 한 장로님이 저를 이렇게 위로해 줬습니다. “목사님 그 공연은 몇 년에 한번 있는 건데요. 목사님은 매주 인도하는데요.” 힘이 났어요. 여러분 좋아하고 따르는 가수가 무대에서 노래를 해도 마음이 거기에 몰입하고 마음이 들여질 때는 비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비가 올 때에 우리 지붕 뜯고 예배를 드려볼까요?
여러분 헌금 생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교회를 개척 하면서요 헌금과 관련해서 세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첫째 헌금 주머니 안 돌린다. 아직 믿음이 약하고 아직 헌금할 그런 신앙이 없는데 그 주머니가 왔다 갔다 하면 얼마나 민망하겠나? 하나님께 드리면 되지? 사람에게 이거 왜하나? 그리고 또 하나 절대 내가 헌금 강요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세 가지를 잘 지켜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할 때는요 제 안에 무슨 자신감이 있는가? 헌금은 강요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똑똑하면 여러분들이 내가 좀 강요한다고 하겠습니까? 안 하지 당연히 그러나 제가 믿는 게 뭐냐 은혜 받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마음 안에 폭포수처럼 부어지면 그래서 분당 우리교회가 헌금 주머니 한번 돌린 적이 없고 우리가 그 주보에 명단 쫙 낸 적 없어도 예산 없어 가지고 일 못한 적 없습니다.
제가 궁금해서 설교 준비하다가 복지 담당하는 그 이웃 사랑 담당하는 목사님께 내가 확인해 봤습니다. 참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했어요. 세상에 지금 긴급 구호헌금, 또 이삭 주기 헌금, 이런 명단 하나 밝히지 않는데요. 넘치도록, 넘치도록 구제 헌금이 들어오고 있다는 거예요. 제가 개척하면서 결심했던 또 하나가 뭐냐 하면은? 임직 예배를 드릴 때 장로로 세워지고 안수집사로 세워지고 권사로 세워질 때 헌금 내가 요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장로 3천만 원, 권사 천만 원, 안수 집사 천만 원, 이게 저는 이해가 잘 안 되는 거예요. 저희교회는 지금까지 장로 된다고 권사 된다고? 얼마요? 얼마, 얼마 이렇게 할당하는 거 그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지난 4월 달에도 우리 교회에서 임직 예배가 들여졌습니다. 제가 이번에 장로 후보, 권사 후보, 안수 집사 후보, 다 모아 놓고 매번 똑같은 말을 하는데 그날 또 되풀이했습니다.
헌금 교회가 정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분 자격 없는 자에게 이 귀한 직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된다. 감사헌금 드려야 된다. 단 하나님께 마음으로 드려라. 여기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이 계시는 걸 내가 아는데 만원만 하십시오. 천원만 하십시오. 액수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이 들여지는 걸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 10여 년 동안 누가 헌금 얼마 했는가를 뒤져본 적이 없습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렇게 광고를 하고 끝났어요. 그리고는 뭐 실제로 저는 뒤져보지 않습니다.
뭘 우리가 추구하는 겁니까? 네 마음을 더 주보의 이름 실지 않아도 헌금 주머니 들락날락 하지 않아도 네 은혜를 하나님께 표현하는 마음을 다 여기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 계시면 저한테 문의가 가끔씩 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그 정신을 다 갖고 계시다면 헌금 때문에 그렇게 신경 쓰시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만약에 우리 교회가 헌금 주머니를 만약에 돌린다고 치고 여러분이 지금 드리고 싶은데 헌금이 없으면 빈 주머니 넣었다 빼면 돼요. 빈 주머니 넣다 빼면 돼요. 아버지 드리고 싶은데 물질이 없습니다. 내 마음을 느립니다.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에요.
여러분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시간을 내서 묵상하는데 네 마음을 다 저는 새벽에 주님 앞에 네 마음을 다오. 여러분 우리가 왜 신앙생활 가운데 이런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는 이 종교적 형식주의가 아니라 이것이 왜 중요하냐? 능력은 거기서부터 나오는 거기 때문이에요. 기독교가 날마다 죽기 위해서 추구하는 방식은 ➤고린도전서 15장30-31절 “30. 또 우리가 어찌하여 매시간 위험 속에 서 있느냐? 31.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로 인한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우리가 자력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은혜로 되는 거예요. 십자가로 되는 거예요. 오직 성령의 은혜로 이것이 된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 불교 신자들에게 너희들로 안 됐지? 너희들 노력으로 안 됐지? 나 지금 되고 있잖아! 왠지 아니?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거야! 이거 보여주는 거 확실한 거 아닙니까? 우리가 더 안돼요. 우리가 더 안돼 조차도 안 하잖아요. 여러분이 목사님들에게 상처 받는게 뭐예요 설교 못 해서 상처 받습니까 매일 저 목사님은 강단에서 은혜로 날마다 죽는다고 그렇게 매일 설교했는데 자기에게 결정적인 일이 닥칠 때 그렇게 죽는 길을 안택하고 비겁하게 사는 길을 택하는 그거 보고 상처받는 거 아닙니까?
결론을 맺으면서
➤갈라디아 6장17절에서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17.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주] 예수님의 자국들을 지니고 있느니라.” 지금 갈라디아 6장에 보면 바울을 괴롭히는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다만 예수 그리스도 잘 믿어도 할례 받아! 할례 왜 할례를 안 받느냐? 그랬더니 바울이 나는 할례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 여기 나오는 흔적은 원어로 스티그마는 단어인데요. 이 스티그마는 뭐냐? 고대 사회에서 주인이 노예에 대한 그 소유권을 이제 확보하기 위하여 노예의 몸에 낙인찍는 것, 이 도장 이게 스티그마에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나는 육신의 할례 소중한 것,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 내가 주의 종으로 헌신하고 살다가 상처받은 아픔의 흔적, 자격 없는 나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습니까?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는 23살 어린 나이에 제가 시카고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해 방황할 때 어떻게 인도해 주셨고 부인할 수 없는 스티그마 주님의 흔적으로 저를 여기까지 견인해 준 그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오늘 저를 여기까지 오도록 해 주신 동력이라는 표시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흔적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영상녹취 / 김은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