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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보셨습니까-김형익
1. 인간 안에 있는 본성적 갈망(7)
“하나님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거의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갈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이 “하나님이 있으면 보여봐”하는 말이 비록 갈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면 보고 싶다” 혹은 “하나님을 보면 믿겠다”하는 식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빌립 처럼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주십시오” 하는 갈망을 신자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체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뭔가 화끈한 것을 경험하고 싶은 그런 마음들일 것입니다. 물론 아주 경건한 신자도 하나님을 뵙기를 간절히 원할 것입니다. 앞의 사람들과 그 방법이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실재하시는 분이시지만, 보이지 않으시지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을 보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하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2.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
A. 하나님을 본 사람들(출 24:10; 33:18)
오늘 본문도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주제지만, 성경에 보면 그런 표현들이 종종 나옵니다. 실제로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모세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구했습니다(출 33:18). 이 구절이 구약의 헬라어 번역 성경인 칠십인경에 보면, “주를 보게 하옵소서”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영광을 보여달라는 것이나 하나님 자신을 보여달라는 것은 사실상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표현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하시면서도(출 33:20) 모세를 반석 틈에 숨기신 채, 당신의 영광 곧 모든 선한 형상이 지나가는 것을 모세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후에, 모세와 아론, 그리고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와 70인의 장로를 산으로 부르셨습니다. 출애굽기의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출 24:10~11).” 그들은 하나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물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현을 목격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는 장면과 같은 예들도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B. 하나님을 볼 것에 대한 예언(사 40:5).
그러나 선지자의 예언 가운데 하나님을 본다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사야 40:5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이것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요한복음 1:14이 그 해석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즉,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의 사람들에게 드러나서 비추일 것이라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은 세상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이런 구약의 사건들과 말씀을 기억하고 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을 본다는 것에 대한 갈망이나 경험은 잘못된 것이 아니며, 또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구약 성경에 이미 예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3. 오래도록 그리스도 곁에 있지만,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9a)
그럼 이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위대한 선언 후에 이어서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7). 이것은 일단은 주님의 예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이라고 하신 것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이어 보혜사 성령을 부어주시는 일련의 사건들이 메시아에 의해서 일어나게 될텐데 이때에 비로소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하게 알고 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 주님의 말씀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는 빌립은 제자들을 대표해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8).” 주님께서 빌립의 요구에 대해서 약간의 책망조로 말씀을 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 빌립이 하나님을 보고서도 보여달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를 책망하시는 요점은 하나님을 보고서도 왜 보여달라고 하느냐에 있지 않고 주님이 그와 그렇게 오래(약 3년 동안)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누구신 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빌립이 예수님께 요구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라는 것을 수없이 많이 가르치셨고, 제자들은 메시아에 대한 신앙 고백도 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더 이상 오해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요 10:30).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했다고 하여 돌로 치려고까지 했습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나님을 보는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7,9).”
4. ‘본다’(seeing)는 것의 의미
이 지점에서 제가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셨습니까? 가끔 어떤분들에게 제가 이런 질문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만날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모호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답도 제 각각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진짜 만났든가 못 만났든가 둘 중 하나인 것입니다. 역시 문제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입니다.
A. 빌립의 기대(추측): 보는 것, 감각적 경험, 큰 것.
먼저 빌립이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빌립은 이제까지 주님과 함께 하면서 주님이 행하시는 엄청난 기적들을 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시는 권세 있는 말씀도 빠짐없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요청하는 것은 뭔가 지금까지 보고 듣고 경험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대단한 어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소위 사람들이 ‘한 방’이라고 말할 수 있는 큰 것 하나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가 이제껏 주님을 좇으면서 경험하고 들은 것들을 생각하면 어찌 그가 더 큰 것을 요구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을 저는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이 결코 부족하지 않은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어떤 것을 원하는 인간의 욕구는 사실상 아무리 큰 것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만족하지 않고 더 큰 것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 본문에는 ‘본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빌립이 쓴 말과 주님이 쓰신 말은 단어가 다른 단어입니다. 빌립이 ‘보여주옵소서’라고 할 때 사용한 단어는 ‘보여주다, 전시하다. 증거를 제시하다’와 같은 뜻입니다. 말하자면, 빌립의 요구는 하나님을 보게 해서 증명해 달라는 식의 요구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이해하다, 깨닫다’는 뜻입니다. 사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B. ‘본다’는 말의 용례
참고로 우리가 성경에서 본다는 말을 쓸 때 얼마나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는가를 볼 수 있는 좋은 본문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요한과 베드로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요한이 젊었기에 먼저 무덤에 도착했는데 그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몸을 ‘구푸려 (무덤 안에)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다”고 한 것이 5절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어 도착해서 ‘무덤에 들어가 보았’는데 세마포가 놓였고 머리를 쌌던 수건이 세마포와 함께 놓여있지 않고 딴 곳에 개켜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 것이 6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도 무덤에 들어가서 그 상황을 ‘보고’ 믿었다는 말이 8절에 나옵니다. 첫번째로 요한이 세마포를 본 것은 세마포가 그의 눈에, 시야에 들어왔다는 가장 평이한 의미에서의 봄(seeing), 의식적이기 보다는 무의식적인 봄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가 본 것은 세마포가 놓여있는데 머리를 쌌던 수건도 다른 곳에 개켜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눈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본 것입니다. 이상하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자세히 살펴 본 것입니다. 그 뒤에 요한이 따라들어와서 보고 믿었다고 했을 때 그가 보았다는 것은 이해심을 가지고 본 것, 즉 깨달은 것, 이해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 단어가 다 다른 단어들이 사용된 것입니다.
i. 시야에 들어오다(요 20:5)
ii. 의식적으로 쳐다보다(요 20:6)
iii. 이해심을 가지고 보다(요 20:8).
우리가 여기서 본다는 말에 대해서 왜 이렇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실 때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 것인가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냥 무의식적으로 힐끗 보듯이 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주님이 ‘아버지를 본다’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바로 위에서 사용된 단어의 용례 중 세번째로 사용된 것, 즉 요한이 보고 믿었다고 할 때 본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를 쓰셨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조금 더 그 의미가 분명해지는데 주님은 아버지를 본다고 말씀하실 때, ‘이해한다, 깨닫는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5. 하나님을 보는 방법
아버지를 본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버지를, 하나님을 깨닫는다, 이해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간단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깨닫는 것이 보는 것이라는 명제, 둘째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는 명제입니다.
A. 깨닫는 것이 보는 것이다(고후 3:18).
먼저 깨닫는 것이 보는 것이다 하는 명제를 살펴보지요. 고린도후서 3:18을 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서도 주의 영광을 본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으로 본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4:2을 보십시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사도는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거짓 교사들처럼 행하지 않고 오직 진리를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4:6입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바로 복음의 선포와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다시 3:18에 “주의 영광을 보매”라는 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명확해지셨습니까?
B.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요 11:40; 고후 5:7).
두번째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라는 명제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믿음은 일면 보는 것과 완전히 반대의 개념이지만 동시에 일종의 인식 감각이기에 종종 보는 것에 비교하여 설명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가령, 바울 사도는 조금 전의 말씀을 하고나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말합니다(고후 5:7). 믿음은 육안이 아니라 영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무덤 앞에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 여기서 주님은 분명하게 “믿으면 본다”는 말씀으로 믿는 것이 곧 보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두 가지 차원에서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임이 자명해졌습니다. 즉 복음의 진리를 진정으로 깨달았다면 그는 하나님을 본 자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는 말입니다.
6.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신 하나님(요 1:18)
결국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그 대상과 열쇠는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진리라고 말할 때에도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롬 1:2). 복음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원리를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았다는 말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나타나신 하나님입니다.
A. 성부와 성자의 완전한 내주하심(indwelling)
예수님은 “당신을 본 것이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10절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이것은 이미 제자들이 들은 바요 믿는 바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는 서로 내주하는 면에서 완전히 하나이시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행하시는 일을 주목할 때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라는 근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 하나됨을 선언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맹목적 신앙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지 않으십니다. 두 가지 믿음의 대상을 분명하게 제시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입니다.
B. 예수님의 말씀(10)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독자적으로 성부 하나님과 상관없이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읽어보면, 이런 말입니다. “내가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이 세상에서 당신의 뜻을 주권적으로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불렀을 때 나사로가 살아나온 것 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성취하시는 전능한 능력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당신 자신을 입증하시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권면하십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하시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C. 예수님의 일(11)
그러나 주님은 이것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혹시 안 믿어지십니까? 그래서 주님은 다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의 근거로 당신의 행하신 일들을 제시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사도 요한은 이미 많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100여 차례에 걸쳐서 이 말씀들을 상고해오고 있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일을 하나 하나 살펴보십시오.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인하여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7. 성령이 아니고는 깨달을 수 없다(행 2; 고전 2:14)
그러나 이 말씀을 맺기 전에, 결정적인 것을 하나 더 말씀드려야만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7절에 ‘이제부터는’이라고 하신 말씀을 저는 예언이라고 앞서 언급했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의 죽으심,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 부어주심이 이루어질 때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라고 책망조로 말씀을 하고 계시지만, 완전한 지식, 온전한 이해는 성령이 부어지고 나서야 가능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동행하던 이야기가 누가복음 2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서도 주님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갈 것이 아니냐?”(눅 24:25~26)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교회에 부어지고 나서 베드로나 기타 사도들은 놀라운 믿음으로, 그리고 놀라운 영적 지각으로 설교를 하고 교회를 세워나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을 믿는 것은 결코 인간의 지적 능력이나, 다른 어떤 인식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믿음으로만 인식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께서 허락하시는 영적 지각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셨습니까?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자,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본 자들입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교회를 다니고, 수없이 많은 말씀을 듣고서도 오늘 주님의 책망을 들어야 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그 말씀을 인하여, 그리고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인하여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선언하실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예수 그리스도 없이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께로 갈 수도 없습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이 복된 은혜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께 부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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