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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기행] <2>울진 금강소나무숲길(옛 십이령길) 미역 소금 어물 지고 꼬불꼬불 열두고개 가도가도 끝이 없네 | ||||||||||
◆길에 서다 북면 두천1리 금강소나무숲길 입구에서 눈 덮인 징검다리를 건너자마자 휴대전화는 세상 시름 잠시 잊으라는 듯 스스로 신호음을 거둬들였다. 현재 개통된 1구간 13.5㎞(6시간)의 시작은 ‘울진내성행상불망비'(蔚珍乃城行商不忘碑)가 열어주었다. 이 비는 1890년 소금과 해조류를 교환하던 보부상들이 그들의 최고 지위격인 접장 정한조와 안동사람 권재민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만든 비로 보기 드물게 철로 제작됐다. 이곳의 옛 명칭은 ‘말래’인데, 말을 잃은 원님이 이 근처에서 말을 되찾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바릿재는 오르막으로 이어져 있었다. 무성하게 우거진 소나무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산길이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오르막길을 오르며 부풀 대로 부푼 장딴지는 온몸을 열기로 데워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50분 내내 오르는 길은 산짐승의 발자국만이 이곳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 더없이 고요했다. 눈으로 덮인 숲길은 드문드문 볕이 드는 곳에 자리한 황토만 없었다면 색깔의 감각마저 잃어버릴 정도로 하얗고 눈부셨다. 바릿재란 명칭은 소에다 물건을 바리바리 싣고 다녔다고 해서 붙여졌다. 앞장섰던 사단법인 울진숲길 이규봉(44) 사무국장이 “소금을 지고 내륙으로 향했던 바지게꾼들은 이 길이 얼마나 외롭고 고단했겠느냐”며 옛 노래를 재현하며 힘을 북돋웠다. "미역 소금 어물지고 춘양장을 언제가노/ 가노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가노/ (중략) / 꼬불꼬불 열두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가노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가노" 이 국장은 ‘바지게꾼 노래’를 소개하며 어원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바지게는 무거운 해산물을 지고 좁은 산길을 날렵하게 다니도록 지겟다리를 없앤 지게를 말한다. 그들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를 때도 서서 쉬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이 ‘선질꾼’이다. 울진은 예부터 염전이 많던 곳이다. 지금의 울진엑스포공원, 울진원전부지 등이 모두 염전이 있던 자리로 당시 30곳이 넘었다고 한다. 장평을 지나 이젠 평지로 이어진 길(임도구간)이다. ‘살아있는 화석’ 산양을 비롯한 야생동물이 지천에 깔려있다고 한다. 운이 정말 좋으면 산양을 볼 수 있고, 천운이 닿는다면 이곳을 수호신처럼 지켜주는 하얀 멧돼지를 만날 수 있다. 셔터의 속도를 무색하게 할 만큼 이들은 빠르고도 은밀하게 움직여 담기가 쉽지 않다. 임도구간은 밥벌이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숲속 나무들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준다. 땀으로 살짝 젖은 몸속은 이미 햇빛과 공기, 피톤치드를 받아들인다고 바쁘고, 눈은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한다고 틈이 없고, 머리는 자신과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고 정신이 없다. 이 맛이 울진의 길이 주는 묘미다. 2시간을 걸었을까. 여름에는 물이 차고 겨울에는 따뜻하다는 ‘찬물내기 쉼터’에 도착했다. 새재로 넘어가는 관문은 73개의 계단이 열어준다. 주변에는 고로쇠나무가 서 있고, 참나무 큰 잎은 바람에 서걱거렸다. 소나무는 가는 잎 사이로 스며들어온 앙증맞은 빛으로 길동무의 등을 어루만졌다. 금강소나무숲길은 끝없이 이어졌지만 힘들지 않았다. 4세 유아부터 85세 할아버지까지 이 길을 모두 완주했다는 정만식(62) 이장의 설명처럼 오르고 내리는 길의 조화 속에 누가 뒤에서 밀어주는 듯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앞으로 나아갔다. 30분쯤 오르니 400년 된 일명 ‘할아버지 할머니 소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에는 아찔한 낭떠러지가 길을 따라 50m가량 이어졌는데, 안전펜스가 없어 의아했다. 울진군은 관광객의 안전이 다소 걱정되긴 했지만 산 허리에 철심을 박지 않았다. 대신 숲 해설사를 통해 안전 동행을 강조하고, 주취자의 입산을 철저히 막았다. 이 국장은 “수천 년을 이어온 길이지만 이곳에서 사고가 났다는 얘기는 없었다”며 잠시 자연을 빌려 쓰고 있는 인간의 이기(利己)를 위해 산을 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30분을 더 걸으니 ‘샛재성황당(鳥嶺城隍堂)’이 보였다. 1819년 지역주민과 보부상이 만들어 휴식처로 이용하기도 하고 제를 지내기도 한다. ‘아구지맥’중턱에 위치해 있다. 성황당 아래에는 주막촌이 위치한 터가 있다. 한때 봉놋방을 가진 큰 주막이었으나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 이후 화전민 마을과 함께 철거됐다. 바위에 구멍을 뚫고 세워놓은 석비와 마귀할멈의 전설이 전해오는 말무덤도 눈길을 끈다. 주변에는 노란 띠를 두른 번호 적힌 소나무(4천137그루)가 많이 보이는데, 문화재 복원이라는 중책을 지고 있다. 길은 구간이 끝나는 소광2리까지 이어졌다. 어깨를 짓누르는 소금을 지고 내륙을 향해 걸어야 했던 고달픈 밥벌이의 바지게꾼 길은 오늘날 현대인들의 안식처가 돼 돌아왔다. 아직은 복원이 마무리되지 않아 ‘휑’하다고 느낄 수 있는 길이지만, 숲 해설사의 설명은 100년 전 세월을 거스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 출발 지점부터 성가시게 불었던 칼바람은 어떠한가, 어느새 솔향을 퍼 나르는 고마운 친구가 돼 있고, 땀을 씻어주는 시원한 청량제로 변해 있다. 최윤석(54) 숲 해설사는 울진금강소나무숲길이야말로 ‘밥 안 먹어도 배부른’길이라고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이곳에서만은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울진금강소나무숲길 복원 계획 1980년대 초 불영계곡을 관통하는 36번 국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십이령길은 울진과 봉화를 동서로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일제강점기 때 울진과 봉화의 장시를 장악했던 보부상조직이 퇴조하자 선질꾼 혹은 바지게꾼이 등장했다. 그들은 울진에서 바릿재∼새재∼너삼밭재∼저진터재∼새넓재∼큰넓재∼고채비재∼맷재∼배나들재∼노룻재를 거쳐 봉화까지 130리 길을 오가며 장사를 했다. 1구간(13.5㎞) 금강송숲길 출발은 울진군 북면의 두천1리다. 울진내성행상불망비~바릿재~장평~임도구간~찬물내기쉼터~새재(조령)~조령성황당~대광천~너삼밭~저진터재~소광2리다. 1구간은 지난 7월 개통한 이래 최근 4달 동안 4천700명의 관광객이 다녀갔다. 하루 방문인원을 80명에 묶어놓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수치다. 2구간은 소광2리~한나무재~넓재~쌍전리~원곡마을~구암사~광희1리 마을회관(16.7㎞)으로 이어지며 내년 초 마무리될 예정이다. 소광2리~통고산자연휴양림을 잇는 3구간(15㎞)과 통고산자연휴양림~박달재(16.7㎞)에 이르는 4구간은 순차적으로 조성된다. 금강소나무숲길은 산림청이 소광리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 통고산, 불영계곡 등 울진 지역의 우수한 산림자원과 역사·문화자원을 연계한 숲길을 조성해 지역 산림자원을 보전·이용하면서 지역경제 활성화 및 지속가능한 산림경영을 실현하기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다. 금강소나무숲길 조성사업은 ‘공정여행·책임여행’을 지향한다. 자연을 최대한 보호하는 범위 안에서 지역주민에게는 경제적 이윤창출을, 관광객에게는 울진의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 때문에 숲길에는 인공요소가 배제되고 주변의 돌이나 나무 등을 이용해 조성됐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 가운데 30%가 민박을 했고, 30%가 지역민들이 제공하는 도시락을 구매했다. 임광원 울진군수는 “금강소나무숲길은 울진의 자연과 문화, 역사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라며 “금강소나무숲길의 남은 구간을 성공적으로 조성하고 더 나아가 소광리 생태경영림과 연계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산림청은 이 지역이 국내 최대 금강소나무 군락지 및 멸종위기종인 산양 서식지에 위치했다는 점을 감안해 하루 탐방인원을 제한하는 예약가이드제를 운영하고 있다. 희망자는 금강소나무숲길 홈페이지(www.uljintrail.or.kr) 또는 전화(사단법인 울진숲길, 070-7718-2999)로 신청하면 된다.
◆사람과 이야기가 있는 길 울진 사람들은 우직하고 소박하다. 태백정맥을 품에 안고 하늘로 솟은 굽은 소나무 줄기처럼 울퉁불퉁하지만 변함이 없다. 그 사람들이 기억하는 십이령길은 신비롭고도 아름답다. 장사를 전문으로 했던 선질꾼은 현재 생존해 있지 않지만 태게를 지고 십이령을 넘은 어른은 한 명 생존해 있다. 또 65세 이상의 어른 대부분이 선질꾼을 보았고, 당시 주막을 했던 할머니도 살아있다. 이상휘(86) 할아버지는 선친이 직접 선질꾼을 했고, 본인 역시 그들의 삶을 지켜봤다. 김순이(82) 할머니는 두천 1리 비석거리 근처에 살고 있다. 16살에 주막집으로 시집와 26살까지 장패에서 주막을 했다. 박금년(81) 할머니 역시 19살에 두천으로 시집와서 시어머니와 함께 주막과 양조장을 운영했다. 박 할머니는 지금도 ‘두천 주막집 할매’로 통한다. 노창국(86) 할아버지는 십이령을 넘어 춘양으로 가는 개장수를, 김상순(78) 할아버지는 소금장수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고, 정복래(82) 할아버지는 종이 지고 선질꾼을 따라 길을 나섰던 경험을 각각 소개했다. 박금년(81) 할머니는 20마리의 소를 몰고 십이령 길을 넘어가던 소장수가 소 한 마리당 밥값으로 사람의 몫과 똑같이 지급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고, 황법재(71) 할아버지는 선질꾼의 대부분이 울진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이규형(84) 할아버지는 산적도 덤비지 못했던 지게꾼 무리를, 한원기(71) 할아버지는 문제가 생기면 떼로 덤비고 주모를 건드리는 등 불미스러운 행동을 하면 멍석말이를 했던 선질꾼의 성향을 설명했다. |
첫댓글 옛날 사람들은 삶을 위해 금강 소나무 숲길을 걸었고 현세인들은 건강을 위해 이길을 걷고 있습니다.
솔향이 나는 금강 소나무 숲길을 걸으며 피톤치드를 숨쉬면 저절로 건강은 찾아 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