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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격려하라(히 10:19-25)
수년 전에 사람이 고통에 견딜 수 있는 역량이 어느 정도인가 측정하는 심리학자들의 실험이 있었습니다. 맨발로 사람들을 얼음물 속에 세워 놓았을 때 누가 오래 서 있을 수 있는지를 관찰해 보니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두배나 더 오래 있을 수 있게 하는 요인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여러분 그 요인이 무엇인지 추측해 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격려였습니다.
누군가가 그곁에 서서 격려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격려해 주지 않는 사람에 비하여 무려 두배나 더 고통을 견디게 된다는 것을 발견을 했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더 오래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은 격려입니다. 죠지 엠 아담스는 "격려는 영혼의 산소"라고 말했습니다. 독일의 철인이요 또한 시인인 괴테는 "바로 잡는 일은 많은 도움을 주지만 책망 후의 격려는 소나기 후의 태양과 같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월리암 위어드라는 사람은 자기자신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에게 아첨을 해보시오. 그러면 나는 아마 당신을 믿지 않을련지 모릅니다. 나를 비판해 보십시오. 아마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련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나를 무시해 보십시오. 그러면 아마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련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를 격려해보시오. 그러면 나는 분명히 당신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격려가 부족하면 건강하고 생산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요인이 됩니다.
그러나 격려를 받는다고 느끼면 불가능한 것도 감당할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역경까지도 견디고 극복하며 이길 수 있게 합니다. 지금처럼 여러 가지 대내외적으로 어렵고 힘들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려의 선물을 서로 주고받으며 나누어야 합니다.
1. 격려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격려라는 말은 '새로운 용기, 새로운 영, 새로운 소망 등을 갖도록 다른 사람들을 고취시키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헬라어 원어의 뜻도 '자극한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하도록, 선행하도록, 고취시키며 자극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격려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그 사람이 행한 일에 대하여 감사하고 인정하는 것, 2)그 사람 자신을 신뢰하고 그 사람 자신을 인정하는 것, 3)그 사람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할 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
격려가 필요치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인정받기를 원치 않고 감사히 여김을 받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믿어 주고 신뢰해주기를 원하지 '도움이 필요없다'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정해 주고 신뢰해주고 도움을 주는 이 세 가지 격려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면 히브리서가 기록되었던 초대교회의 배경을 살펴보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모임 자체가 위협을 당하였습니다. 매일 순교를 목도하는 그러한 여건속에서 살고 있었으며 매일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모임 자체가 어려웠고 모임 가운데에서도 두려움의 분위기가 항상 감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모이기를 피하기도 했으며 모이기를 폐하려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서 아무데도 가지않고 요지부동하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배경속에서 본문 24-25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렇게 모이기를 힘쓰도록 격려함과 동시에 모여서 서로 격려하고, 서로 사랑하도록 고취시키고, 서로 사랑하도록 자극을 주고, 선행을 하도록, 착한 일을 하도록, 섬기는 일을 하도록, 봉사의 일을 하도록 격려하는 그 모임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저들에게 세상과 타협하는 삶을 경고하며 격려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담력을 얻었다'라고 성도의 특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야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를 흘려 주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찢어졌고 믿는 자는 예수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앞에 당당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죄인으로 짐승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담력을 얻은 것입니다. 또한 21절에서는 말하기를 '우리에게 큰 제사장이 계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제사장은 바로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체휼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축복이며, 얼마나 힘이 되는 일입니까?
이러한 특권이 우리에게 있음을 상기시킨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22절)'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자‘,' (23절)'말씀을 더 굳게 붙잡자 ,' (24절)'서로 돌아보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격려해서 모이기를 힘쓰고 서로 사랑하도록, 선행을 행하도록 격려하는 일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모임은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하고 헌금하는 것 이상의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격려하는 사역입니다.
예배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증거와 교회에 대한 증거가 있고 세상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중 교회는 서로 세우고 서로 격려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고 또 우리라는 공동체를 주신 것입니다. 서로 붙잡아 주고 서로 격려하며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일으켜 세우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의 멤버로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서로 격려해주라는 것입니다.
엡 4:11-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직분을 주신 목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입니다. 봉사의 일, 즉 서로 섬기는 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격려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를 세워주신 것은 서로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그저 나만 행복하고 평안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웃을 격려하는 사람입니까? 진정으로 가까운 이웃, 가족 남편과 아내, 자녀와 부모, 모두에게 격려가 필요합니다. 격려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격려는 우리안에 계신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오직 권하여"라는 말은 '서로 격려하여'라는 의미인데 '보혜사(요14:26)'라는 말과 '서로 격려하여'라는 말은 서로 어근이 같은 말로서 '위로자, 격려자, 도우는 자, 곁에 같이 있는 자'를 말합니다. 성령이 하는 일이 바로 격려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다른 분을 격려할 때 성령이 곁에 계셔서 그 사역을 우리를 통하여 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힘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다른 사람을 섬길 때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분이 바로 이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오신 그 성령이 우리를 다스리고 충만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사역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어떤 분 곁에 있게 하시고, 그를 도와주고 격려하게 하는 일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 있게된 이유중 하나는 누군가가 우리 곁에 있었고, 누군가가 우리를 돌보아 주었고, 누군가가 우리를 격려해 주었고, 누군가가 우리와 함께 해 주었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 있게 된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과 주님을 섬겼고 하나님에 의해서 쓰였던 사람들의 사역은 바로 이런 격려의 사역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무너트리는 일보다 세우는 일에 더욱 쓰임 받아야 합니다. 세우기는 어렵지만 무너트리기는 아주 쉽고 잠깐입니다.
하나님은 세우는 일을 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임받아야 합니다. '인간의 의무중 최고의 의무는 격려하는 것이다'라고 어떤 이는 말했습니다. 세상에 격려가 필요치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열심에 찬물을 끼언기는 쉽습니다. 세상은 용기를 잃게 하는 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격려의 특징은 누구나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격려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입니다.
종종 칭찬과 감사와 격려하는 말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 그 길을 가게 합니다. 격려는 외롭고 힘든 사막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오아시스입니다. 패배한 사람, 고난당한 사람을 살아나게 합니다. 마가렛 미첼 여사가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원고를 쓰고 있을 때, 하루는 누군가가 책을 한 권 보내왔는데, 그 당시 '스테반 빈센트’는 사람이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하여 쓴 "존 브라운의 시신"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은 '마가렛미첼 여사'는 그 작품의 훌륭함에 비하여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이 너무도 보잘 것 없다는 생각에 빠져, 쓰다만 자신의 원고를 책장 안에 6개월 동안 쳐박아 두고 시름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때 가까운 지인이 이런 말로 조언해주었다고 합니다. '스테반 빈센트'도 훌륭하지 만, 당신도 훌륭합니다. 나는 당신이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한 소설을 쓸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마가렛미첼여사는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드디어 완성하게 된 것입니다.사람의 혀는 배의 키와 같고 불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말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인격을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항상 은혜를 끼치는 말, 덕을 세우는 말, 축복하는 말을 통해서 이웃을 격려하는 일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말. 예를 들면 죽겠다, 못살겠다, 만사가 귀찮다, 내가 하는 일이 지겹고 피곤하다는 말을 삼가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격려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격려가 사명입니다. 격려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특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서로간에 격려가 필요합니다.
우리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십시다. 우리는 서로 격려하기 위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격려하고자 한다면 우선 그를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한번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 만남을 통해 한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세워주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만남의 기회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규칙적인 모임이 필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소그룹 모임 즉 목장모임이 필요합니다.
주일 예배를 통해 이런 개인적인 격려를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무서운 신앙의 핍박에 직면하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당시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비밀이 바로 집에서 거의 날마다 모인 교회의 교제를 통해 얻은 격려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 25절에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합니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더 복잡한 위기에 직면해 있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예수님이 재림이 더 가까운 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더욱 규칙적인 성도의 모임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을 광야로 내보내시면서 그들을 공동체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공동체의 교제만이 광야의 위험과 고독에 대한 승리의 처방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 광야의 행진에 가장 중요한 자산은 성막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의 행진을 멈출 때마다 성막을 둘러싸고 열두지파로 나뉘어 공동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밤마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직면한 문제들을 토론하고 그래도 힘겨운 문제들은 제사장으로 하여금 그 문제를 짊어지고 성막을 열고 휘장 안에 들어가 하나님께 나아가 아뢰이게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또한 성막 밖에서 중보 기도를 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리하여 공동체의 모임은 매 순간순간 그들에게 진정한 축복이었고 안식이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이 광야의 모임을 가르켜 '광야교회'라고 불렀습니다(행7:38). 기독교는 처음부터 '공동체'로 출발했던 것입니다. 신약교회는 '새언약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저는 얼마나 이 공동체의 모임을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공동체의 모임을 통해 규칙적인 격려를 받으며 살고 계십니까? 격려는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3. 격려는 사랑의 실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랑이 으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 24절은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서로 격려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으면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싫어합니다. 주일날도 사람들을 피해 몰래 예배만 드리고 갑니다. 그러면 위로와 격려를 나누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교제를 평생 경험하지 못합니다. 더 아쉬운 것은 사역(ministry)이 없습니다. 사역은 사람을 대상으로 일하는 겁니다. 전도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말씀으로 한 사람을 세워주는 것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싫어하고 사람을 피하면 사역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피차에 사랑하는 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격려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격려는 모임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는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형제자매를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를 만나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합니다.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격려하려면 우선 같이 있어야 합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 억울함을 당한 사람, 마음속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과 같이 있어 주는 것이 격려의 시작입니다. 거창한 말을 해야 격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옆에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격려가 될 수 있습니다. 고통당한 사람에게 가서 공연히 그 고통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잘못하면 욥의 친구처럼 될 수 있습니다. 위로하러 갔다가 오히려 더 상처를 주고 오는 것입니다. 그냥 같이 있어 주시면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격려는 같이 있어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자극할 줄 아는 것입니다. 좋은 의미의 자극, 서로가 서로의 성장을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격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일 때마다 어떤 격려를 주고받아야 하겠습니까? 본문 22-24절 말씀에 세 가지 중요한 격려의 내용이 나옵니다.
1)믿음(22절)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우리가 진실한 마음과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을 갖도록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로 주님께 나아가도록 격려하십시다. 우리가 만날 때마다 온전한 믿음으로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 앞에 나아가도록 피차 믿음을 격려합시다.
2)소망(23절)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주께서 약속하신 수많은 언약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삶을 살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그 소망이 자꾸 흔들립니다. 이럴 때 흔들리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틀림없이 수행하십니다.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단단히 붙잡읍시다.
소망을 격려하십시오. 주님이 좋은 일을 준비하셨음을 믿고 힘내라고 용기를 불어넣어 줍시다. 모든 일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실 것을 확실히 믿게 합시다. (롬 8: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3)사랑(24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왜 사랑에 선행이 따라옵니까? 선행은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행동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행을 사랑안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바라보는 소망, 진정한 주님의 사랑으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격려의 가장 좋은 본보기는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13장에는 가룟유다가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배반하기로 작정한 장면이 나옵니다. 주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절)고 말씀하시자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매우 우울해졌습니다. "우리 중에 누군가가 선생님을 배신하다니" 하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슬픔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주님 자신은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겠습니까?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팔리워 박해와 고통의 십자가를 짊어지셔야 합니다. 제자들도 주님도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을 삭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은 사랑으로 격려하셨습니다. 사람이 배신을 당하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현상입니다. 한번 상처를 받으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에게 상처를 받고 배신을 당하는 아픔 가운데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의 격려입니다. 14장 1절에 주님의 메시지가 계속됩니다.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인간 관계에 상처가 생기면 사람들을 믿지 못하여 불신감이 팽배해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을 격려하셨습니다. 또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제자들의 곁을 떠날 것을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를 여쭈었습니다. 제자들은 선생님이 자신들 곁을 떠나신다는 사실에 몹시 가슴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이렇게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어떤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그들은 "주님이 지금은 우리를 떠나시지만 장래에는 우리가 주님 곁에 머물겠구나"하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주님과 다시 만날 것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소망의 격려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이웃을 만날 때마다 주님의 본을 받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격려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서로 격려하십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권면했습니다. 이제 결단하십시다. 나는 격려하는 자가 되리라. 내안에 계신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은 위로자이십니다. 격려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하여 격려를 받고 또 격려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사랑하는 가족, 부부, 부모자녀 격려가 필요합니다. 교회안에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 격려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 한마디의 격려가 모든 근심과 염려, 분노를 쉬게 합니다.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이 기뻐하십니다. 성령충만하여 격려를 아끼지 않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서로 격려하여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임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