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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진 신앙의 기초
요한복음 14장 1-12절
설교자: 안 규 식 목사
인사말
사순절 두 번째 주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고 그분과 동행하는 은총이 여러분들에게 가득하시길 빕니다. 기독교를 설명하는 많은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겠지만 저는 기독교를 시간의 종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독교는 일 년을 여러 절기들로 구분하여 지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억하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부활절까지의 시간을 보내는 사순절과 같은 절기들이 그러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교회가 정한 시간을 따라 그 시간에 들어야 할 여러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이야기, 예수님의 이야기, 그리고 예수의 길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 안에 우리 자신을 두고 그 시간의 흐름 속에 나를 맞추어 살아갑니다. 그렇게 우리는 기독교가 들려주는 커다란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도록 변화됩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 중 제자들과 이별하시기전에 이들을 위로하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기초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근심하는 제자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마치시고 이 세상을 떠나심을 알리는 말씀, 도마와 빌립의 질문 그리고 예수님의 대답으로 이루어진 본문입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서들과는 달리 내용과 표현이 독특합니다. 내용이 매우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깊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처럼 어린이들도 쉽게 외우고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있으면서도, 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는 말씀처럼 경험하지 않고서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씀들도 많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 본문 말씀 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바로 이 말씀, 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구절을 읽으며 무슨 의미일까 고민했습니다.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근심하게 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근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건 무슨 말씀일까? 궁금했습니다.
우선 본문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오늘 본문 이전에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할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의 이별을 서서히 준비하십다. 제자들과 함께 저녁을 잡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다음으로 자신이 그들 중 한 명에게 배반을 당하실 것을 알리십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가 그 자리를 떠나고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베드로가 자신을 배신하실 것을 알리십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늘 본문 1절처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말씀이 향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앞으로 예수님 없이 살아가야 할 사람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도망치거나 배신할 사람들, 그리고 다시 회복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세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전부라 할 예수님과 이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성공은 자신들의 성공으로, 예수님의 실패는 자신들의 실패로 이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근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믿었던 가장 중요한 삶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겪어야 할 일은 ‘근심’이었습니다. 사실 신앙인들 아니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실존적인 일이 바로 근심입니다. 근심은 작게는 걱정이기도 하고 크게는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 때문에 근심하는 것일까요? 근심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 존재가 가진 유한성이라는 한계 때문에 주어지는 존재론적 근심과 염려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내가 원치 않는 일들이 생길까봐 근심하고, 반대로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근심합니다. 사실 우리가 근심하는 많은 일들이 이 두 가지 부류에 해당됩니다. 원치 않는 일들이 생기는 것 그리고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그런데 이런 근심에는 근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믿고 신뢰하는 대상 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신뢰하는 대상이란 변하지 않는 것이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근심과 두려움의 근원에는 내가 신뢰하는 것이 놓여 있습니다. 돈을 잃을까 염려하는 사람은 돈이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하기에 이것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그 돈이 나를 안전하게 지키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들이 내게서 떠나 스스로 외로워질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오는 위로와 인정이 내 존재의 굳건한 이유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그곳에는 내가 의지하고 신뢰하는 대상이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거나 흔들리면 우리는 근심과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뢰하는 것이 흔들릴 때, 우리가 믿는 대상이 무엇이었는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근심과 두려움은 그것이 결국 허상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근심합니다. 경기는 언제나 어렵고, 기후위기는 인류 전체의 생존을 서서히 위협해오고 있으며, 국가와 사회 그리고 공동체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은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믿었던 사람은 나의 기대를 져버리고, 건강했던 몸은 점점 약해져 갑니다. 이런 일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바라지 않는 일들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하고, 내가 바라는 것이 일어나지 않을까봐 근심합니다. 안타까운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이러한 근심과 염려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대상은 계속해서 흔들릴 것이고, 우리는 계속해서 이 세상에 있는 무엇인가를 믿고 의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사라지면 어느새 새로운 신뢰의 대상을 찾아 방황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을 사랑하고 신뢰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흔들리면 근심하고 염려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것의 허망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유한한 우리에게 주어진 반복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들 심지어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우리들의 삶의 결론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근심에 머물러 사는 것이 끝이라면 그것은 신앙의 길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앙을 기대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 역시 본질적으로 같은 일을 경험합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신뢰하는 대상 ‘예수’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떠난다는 말씀을 들으니 겁이 났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근심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남겨진 시간들이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했던 것일까요? 만약 신뢰했다면 왜 이들은 예수님이 떠난다는 말씀을 듣고 근심했을까요? 어쩌면 이들은 예수를 믿었다기보다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 예수가 아닌 예수에게서 오는 그 무엇으로부터 안정을 찾았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제자들은 예수님 그분 자신보다 예수님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내가 이해하는대로 움직이는 예수, 내 눈에 보이는대로 옆에 붙잡아두고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예수. 이런 예수는 예배와 신앙의 대상으로서 예수가 아니라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좋은 것을 주기에 소유하고픈 대상으로서의 예수에 불과합니다.
소유의 대상이 가진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생각과 예측 안에 들어와야 하는 것이고, 내가 직접 만지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예배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소유와 착취의 대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도마와 빌립을 보면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도마는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확실하게 이해해야 믿는 사람이었고, 빌립은 8절을 보면 확실하게 경험해야 만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눈에 보여야, 자신의 생각으로 이해가 가야 신뢰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해할 수 있고, 눈으로 보이는 확실한 예수를 소유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소유이고 통제입니다. 확실성은 믿음 이후에 오는 것이지 믿음 이전에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불확실함 속에서 나의 생각과 욕망을 비우는 것이지, 소유하고 조종함으로써 나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해할 수 없어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이라야 예배하고 찬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이란 이런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 두 가지 길이 놓여있습니다. 하나는 소유함에서 오는 근심과 염려,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바람과 생각을 비우는 신앙과 믿음의 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그 신앙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본문을 통해 우리 신앙의 기초인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신앙의 길(1): 하나님과의 교제
첫 번째입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의 기초는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근심하지 마라.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나를 믿어라. 내가 너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근심스런 상황에 처해있음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이들의 근심이 전부가 아님 또한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야 하는 상황은 잠시 동안 이들에게 근심스런 상황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제자들을 위한 어떤 자리 곧 이들에게 주어질 어떤 가능성을 예비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근심스런 일이 생기지만 동시에 그 근심이 오히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인격적으로 깨닫는 계기가 되는 경험을 합니다. 다른 말로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라 할 수 있습니다. 교제란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그에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가 긍정적으로 바뀌어 그 관계가 더욱 두터워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제자들을 떠나 다시 만날 수 없지만, 예수님은 이 계기를 통해 제자들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 깊어지고 이들이 가진 신앙이 더 두터워질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거처를 예비하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바로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
근심과 두려움은 그 동안 우리가 신뢰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낼 것입니다. 그것들이 결국에는 사라져 버릴 것, 허망한 것임을 알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가신 신앙의 기초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근심은 깨어진 우리 삶과 이 세계가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균열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균열과 깨어짐에서 이 세계 너머로 우리를 향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의 빛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 질주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발적이든 아니면 떠밀려 그렇게 되었든 우리에게는 우리를 멈춰서게 할 그리고 진정한 생명의 삶을 깨닫게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일그러진 우리들의 삶이 가진 균열이 근심과 두려움이고 이 균열 사이로 하나님은 그 은총의 빛을 비춥니다. 그 것은 때론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의 빛으로, 때론 나를 문제시하고 뒤흔들어 멈추게 하는 경고의 빛으로, 때론 내가 알게 모르게 지나쳐 버렸던 소중한 것들을 다시 깨닫게 하는 진리의 빛으로 나를 비출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하나님과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든, 무엇을 걱정하고 근심하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 깊이 할 것이고 이로써 우리 인생과 삶을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세워나갈 은총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신앙의 기초입니다. 이 기초 위에서 우리는 근심하나 거기서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을 견고하게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신앙의 길(2): 사랑과 섬김의 삶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두 번째 기초는 바로 사랑과 섬김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셨고, 예수님이 어디로 가는지를 묻는 도마의 질문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의 질문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고,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신 것을 왜 믿지 않는냐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 영원한 생명의 삶은 예수님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마치 기독교인이 아니면 길도 진리도 생명도 없다는 배타적인 의미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우선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하나임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길을 믿고 따르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길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예수님의 삶이 무엇인지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이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시면서 보여주신 몇 가지 일들이 그분의 모든 삶을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생각합니다. 그것은 앞서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일 바로 낮아짐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입니다. 이러한 섬김과 사랑의 삶이 우리가 가진 신앙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섬김과 사랑의 삶을 생각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군가를 섬겨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나의 삶이 다른 누군가의 섬김과 사랑으로 세워져나가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섬김의 삶을 살아갈 제자들의 발을 자신이 먼저 씻어 주심으로써 제자들이 누군가를 섬기기 전에 이미 누군가의 섬김을 받고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4-15절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누군가의 사랑의 수고와 섬김을 통해서 세워지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우리 생명과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과 존재로부터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아무 대가 없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고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사랑과 섬김을 받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온전히 섬길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누군가를 섬긴다해도 그것은 거래 내지 대가지불을 요구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내가 값없이 받았기에 값없이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섬김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신앙의 기초 위에 서서 삶을 선물로 받음을 감사하며 그 사랑으로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흔들리는 삶, 견고한 기초
이제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결코 영원하지 않고 견고하지도 않다는 것을. 이런 세상 위에서 세워진 우리 삶 역시 늘 흔들리고 불안하다는 것을.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의 기초는 흔들리고 불안한 삶 속에서 우리가 견고하게 붙잡을만한 두 가지 사실이 있음을 알려드렸습니다. 우리의 삶은 근심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근심과 염려로 갈라진 우리 삶의 균열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깊은 교제를 위한 은총의 빛을 비추어 줄 것입니다. 무엇보다 서로 사랑하고 섬기십시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우리가 사랑받은 자이며 섬김받은 자임을 기억하십시오. 이로써 흔들리지 않은 은총의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섬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비록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근심하지 아니할 수 없으나 그 근심과 염려마저 주님의 은총을 드러내는 일이 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우리가 가진 신앙의 기초 위에 우리 삶을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세워나가게 하시며, 먼저 사랑받은 자로, 먼저 섬김을 받은 자로 이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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