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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내성지 → 골배마실성지 → 은이성지 → 곤지암 숙소
17.6Km 5.2Km 24Km
13. 골배마실 성지
골배마실 성지는 보통 때는 문이 잠겨 있어
자물쇠 비밀번호를 알아야 성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순례책자에는 은이- 골배마실로 되어있어 은이성지에서 순례도장을 받으면 된다.
따로 골배마실을 가지 않아도 되지만 김대건 신부가 어릴 때 살던 집터이기에
찾아보자고 아내가 말해서 은이성지에서 자물쇠 비밀번호를 받고찾아갔다.
성지는 양지파인CC에 접해 있었다.
골프장 길을 따라 산 쪽으로 들어가면
마지막 주차장이 있고 길 아래로 개천이 흐른다.
‘골배마실 성지 2km’ 란 표지석이 있다.
여기에 주차를 하고 조금 올라가니 바로 성지 입구다.
성지는 규모가 크지 않아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골배마실은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무덤이 있는 미리내에서 산길로 30리,
찻길로 80리 거리에 위치한 골배마실에서
그 옛날 김대건 신부는 그의 나이 15세 때
신학생 후보를 찾아 헤매던 모방 신부에 의해
장래 조선 교회를 이끌 목자의 재목으로 선택된다.
그리고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몸과 마음을 준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것은 1821년 8월 21일,
지금의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인 솔뫼에서
그는 증조부 김진후, 조부 김택현,
부친 김제준, 모친 고(高) 우르술라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김 신부의 집안에 신앙이 스며든 것은 그의 증조부 김진후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에 전념한다.
하지만 1791년 진산 사건으로 그는 옥에 갇히고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유배를 가기도 한다.
1805년 다시 붙잡힌 그는 결국 10년의 옥고 끝에 순교한다.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모방 신부로부터 성세와 견진 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한다.
그 역시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돼
그 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그로부터 7년 후 김대건 신부가 탄생하고
재복이라는 아명으로 7살까지 솔뫼에서 성장한다.
그러다가 김진후의 둘째 아들이자 김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이
가세가 기울고 더 이상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워지자 가족들을 이끌고
바로 이곳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를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을 떠나야 했던
이들의 피난길은 설움과 눈물로 가득 찼지만
이는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김대건 소년은 7세~15세까지 골배마실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곧 조선 땅에 오실 목자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교리를 배워 익히며,
조선교회의 미래를 위해 한 몸을 봉헌하고자 하는 포부를 키우고,
세례성사와 첫영성체를 준비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임자’이신 하느님께 향한 열정을 불사르던 곳이
바로 이곳 골배마실 성지이다.
1836년 봄, 15세 김대건 소년은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 ‘모방 신부’로부터 ‘안드레아’라는 본명으로
산 너머 있는 ‘은이공소’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이곳은 사제가 되어오신 김대건 신부가 어머니와 첫 상봉한 장소이며,
미리내로 향하신 신부님의 유해가 어머니 ‘고(高) 우르술라’께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린 곳이기도 하다.
골배마실 성지는 김대건 신부와 가족들이 20여 년을 살아왔던,
김대건 신부의 일생에서 삶의 체취가 가장 진하게 묻어있는 땅이다.
‘은이성지’와 중국의 ‘금가향 성당’이
‘김대건 성화(聖花)’가 활짝 꽃피게 한 곳이라면,
‘골배마실 성지’는 김대건 성화의 꽃 몽우리를 맺히게 해 준 땅이다.
미리내 성지는 꽃씨가 다시 새싹이 트도록 꽃씨를 품어준 습기 있는 땅이다.
또한, 이곳은 19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신 김대건 신부의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이 관헌에게 체포된 곳이기도 하다.
마카오로 유학을 간 신학생 김대건은 아편 전쟁 때에는 마닐라로 피했다가
또다시 중국 땅 요동에서 공부하고 한때는 한만(韓滿) 국경을 전전하다가
서울로 돌아온 것이 9년 만인 1845년이다.
그는 겨우 5개월을 머문 후 상해로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된다.
10월 해로를 택해 국내에 잠입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어려서 자라던 골배마실을 찾아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감격의 재회를 한다.
귀국 후 첫 사목지를 은이 마을로 정한 김 신부는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한다.
하지만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모친 역시 귀국 후 잠시 얼굴을 대했을 뿐,
김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만인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장렬한 순교로 일생을 마감한다.
1814년 김진후로부터 시작돼 김대건 신부까지 30여 년 동안
김씨 일가는 4대가 순교의 월계관을 쓰는 신앙의 명가가 된 것이다.
지금 골배마실은 그 흔적이 없다.
다만 김 신부가 살던 집터만이 골프장(양지 컨트리 클럽) 한쪽에 보존돼
그의 석상과 제대, 초가집과 어머니 고씨의 모습을 새긴
부조(浮彫)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김대건이 어릴 적 손길이 닿았다는 늙은 고욤나무 한 그루가
다른 나무들 사이에 무심하게 서 있을 뿐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14. 은이성지
은이 공소 터는 한국 교회사 안에서 솔뫼나 미리내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그 이상 가는 귀중한 사적지이다.
하지만 이처럼 중요한 사적지인 은이 공소터가 교회의 무관심 속에
이쑤시개 공장과 잡초만이 무성한 텃밭으로 한동안 변해있었다.
그러던 중 1996년 은이 공소터 530여 평을 매입하고
야외제대와 김대건 신부 성인상을 세우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은이 마을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였던 성 김대건 신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간직한 곳이다.
김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은이 마을은
그가 모방 나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마카오로 파견된 곳이다.
또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가 바로 은이 공소로서
"용인 천주교회사"(오기선 신부 감수, 조성희 지음)는 이에 대해
"은이 공소는 조선 교회 사상 최초의 본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이곳에서 김 신부는
조선 땅에서는 처음으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고,
바로 이곳이 체포되기 직전 공식적으로 최후의 미사를 드렸던 곳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성인으로 추앙받는 김대건 신부가
성소의 씨앗을 뿌렸던 곳이자 그 열매가 가장 먼저 풍성하게 열렸던 곳이
바로 은이 마을, 은이 공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은이 공소와 관련된 또 한 명의 성인은 바로 모방 나 신부이다.
그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5년 조선입국을 목전에 두고 병사하자
그 뒤를 이어 부주교로서 조선 교구를 맡게 됐다.
당시 몽고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이미 모든 사목 권한을 위임받은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준비했던 길을 따라 조선 입국을 서둘러
국경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나고 1836년 초 마침내 조선 땅을 밟음으로써
파리 외방 전교회원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가 된다.
부활절을 서울에서 지낸 모방 신부는 본격적인 사목 활동에 나서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의 교우촌을 방문하고 2백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때 그의 사목 활동의 중심지가 바로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용공에 위치한 은이 공소였다.
모방 신부는 1837년에 이르러서
샤스탕 신부를 맞아들여 함께 사목 활동을 함으로써
조선 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 범 주교가 그 해 말 입국할 때
이미 조선 교구의 교세가 두 배 이상으로 성장하는 등 큰 성과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모방 신부는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앵베르 범 주교, 샤스탕 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홍주(洪州) 근처에서 스스로 잡힌 몸이 됨으로써
결국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된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다른 여러 사적지 및 성지들과 마찬가지로
은이 공소 터는 그 땅에 서리서리 얽혀 있는
선조들의 뜨거운 신앙을 기릴 수 있도록
후손들의 정성 어린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은이 공소의 교회사적 중요성을 인식한 양지 성당은
성지 개발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아 시작된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 추진’ 운동에 이어
2002년에는 은이 성지 주변 5200여 평을 매입하였고,
2003년에는 사제관과 성당, 숙소 건물을 포함한 1200여 평을 매입하면서
그해 9월 성지 전담신부 발령으로 본격적인 은이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8일)]
◆ 한국인 첫사제 김대건 신부와 은이 성지
조선의 교우들은 항상 예고 없이 닥친 박해로
어렵게 모셔들였던 성직자를 번번이 잃게 되어
쓰라린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에 이미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길에 올랐던
본방인(한국인) 사제를 맞이했던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리라.
이제 한국인 사제로는 처음 서품되어 귀국 길에 오른 김대건 신부는
고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강경 부근의 황산포(나바위)에
무사히 상륙하여 사목 활동에 임하게 된다.
고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 활동 지역은
은이를 중심으로 용인, 이천, 안성 지역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은이는 박해 시대 숨어살던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이룩된 교우촌이고,
은이(隱里)라는 말 그대로 ‘숨겨진 동네’, 또는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김대건 신부는 은이를 중심으로
경기 이천, 용인, 안성지방을 두루 다니며 사목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바로 이 은이성지는 이미 유학길에 오르기 전, 1836년 나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 성사와 첫 영성체, 그리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처음으로 조선 교회 안에 자발적으로 시작된
성소자 양성의 결실을 맺은 곳이 ‘은이성지’이다.
이렇게 은이는 김대건 신부에게 있어 첫 사목 지역이었고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상 본방인 사제가 사목한 최초의 본당이었다.
이시기에 김대건 신부는 경기지방의 은석골, 텃골, 사리틔,
검은정이, 먹뱅이(묵리), 한덕골, 미리내, 한터, 삼막골, 고초골,
용바위, 모래실, 단내 등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베풀고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당시에 행하신 김대건 신부의 사목 활동 모습은
1866년(병인박해)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 가문에
정 레오 신부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집안 어른들께서는
김 신부님께 성사(고해성사)받던 이야기를 하시곤 했는데
김 신부님은 항상 밤으로만 다니셨다 한다.
미사 짐도 없이 단내(丹川)에서 10리가 채 못 되는
동산 밑동네(東川里)에서 오시어
고해성사만 주시고 바로 떠나셨다 한다.
김 신부님과 복사가 깊은 밤중에 대문밖에 오시어
‘정생원! 정생원!’ 하며 증조부 바오로를 찾으시는 소리에
식구들은 모두 잠을 깨었으나
누가 무슨 일로 찾는지 두려워 주저하게 된다.
복사가 작은 목소리로
‘김 신부님께서 성사 주러 오셨으니 주저하지 말고 빨리 나오시오’
하는 말에 깜짝 놀라 일어나 증조부 바오로께서는
이웃이 알까 쉬쉬하며 반가이 신부님을 방으로 뫼시고
곧 성사 받을 준비를 하는데 그 준비는 간단하였다.
벽에 깨끗한 종이를 한 장 붙이고
그 위에 십자가상을 정성되이 모셔 건다.
김 신부님께서는 10여명의 고해자들에게 성사를 주시고
다시 배마실(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양지성당 소재지)로 가시어
거기서 성사를 주시고 ‘은이’로 가시면 날이 샌다고 하신다.”
이 증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험한 산길을 밤으로만 다니면서
사목 활동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6개월간의 사목 활동을 하시던 중
고(高) 페레올 주교의 명령이 새롭게 주어진다.
그 명은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선교사들과의 연락,
또 곧이어 조선에 입국해야 할 매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부제의 입국로를 알아보기 위한 임무였다.
따라서 김대건 신부는 또다시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이별이 모든 교우들이 예상했듯이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
1846년 4월 13일 김대건 신부는
은이 공소에서 교우들과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후
조선 교회의 숙원 사업인 성직자 영입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길을 떠나게 된다.
은이를 떠나시기 전에 김대건 신부는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험난한 때에 우리는 천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 할 용맹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구합시다.
지금 우리의 주위에는 검은 마귀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의 삶을 모르는 위급한 처지에 처해 있는 우리들입니다.
내 마음과 몸을 온전히 천주님의 안배하심에 맡기고
주 성모님께 기구하기를 잊지 맙시다.
다행히 우리가 살아 있게 된다면
또 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 즐거운 재회(再會)를 합시다.
끝으로 내 홀로 남으신 불쌍한 어머님을
여러 교우 분들이 잘 돌보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이 말씀을 은이 공소와 용인 지방 교우들에게
유언(遺言)으로 남기시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셨다.
교우들은 떠나시는 신부님의 모습을 은이성지에서 1Km 정도 떨어진
‘중담’ 모퉁이까지 나와 눈물로 전송했다.
그동안 교회 내에서 잊혀져 왔던 은이성지의 개발은 1992년 6월부터 시작된
서울대교구 주평국 신부의 ‘도보성지 순례’를 계기로 알려지고,
1996년 5월 은이 공소터 530여 평을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야외제대와 김대건 신부 성인상을 세우고
성상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아 시작된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 추진’ 운동도 시작되고,
2002년에는 은이성지 주변 5200여 평 매입과 이어 2003년 사제관과 성당,
숙소 건물을 포함한 1200여 평을 매입하면서 그해 9월 성지 전담신부 발령으로
본격적인 은이성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출처 : 은이성지 홈페이지]
■ 순교자
◆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1821∼1846)
김대건은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보고 1836년 나 베드로(모방) 신부는
그를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그는 6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1845년 8월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서울과 용인 지방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846년 음력 4월 주교의 명에 따라,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해도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김 신부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서울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취조 중 김 신부의 넓은 식견과 당당한 태도에 대관들은
그를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고 생각하였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의 처형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과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생애>
1821년 8월 21일 : 출생
1836년 4월 : ‘은이 공소’에서 모방(Maubant)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뒤 신학생으로 발탁
1836년 12월 2일 : 동료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순명과 복종 서약 후 마카오로 출발
1837년 6월 7일 :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
1841년 11월 : 철학과정 이수, 신학과정 입문
1844년 12월 : 최양업과 함께 삭발례부터 부제 서품까지 받음
1845년 1월 1일 : 조선교회 밀사와 상봉하여 조선에 귀국
1845년 3월 : 서울에서 신학생 2명을 지도함
1845년 4월 30일 : 선교사 영입 위해 제물포 출발
1845년 8월 17일 : 상해 연안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
1845년 11월~1846년 4월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사목 활동
1846년 4월 13일 : 은이 공소에서 미사 후 입국로 개척을 위해 서울로 출발
1846년 6월 5일 : 인천 앞바다 순위도에서 체포됨
1846년 9월16일 :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
1857년 9월 23일 : 가경자로 선포됨
1925년 7월 5일 : 시복됨
1949년 11월 15일 : 모든 한국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결정됨
1984년 5월 6일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에서 시성됨
◆ 성 한이형 라우렌시오(1799∼1846)
충청도 덕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한이형 라우렌시오는
14세 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21세 때 결혼하고 나서 경기도 양지의 은이 마을로 이사했고,
원래 정직하고 헌신적인 성격에다 뛰어난 덕행과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인해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46년 7월 말 한이형은 포졸들이 은이 마을을 습격하리라는 소문을 듣고
가족들을 피신시킨 후 혼자 집을 지키다가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포졸들의 심한 매를 맞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압송될 때 이미 상처투성이의 몸이어서 포졸들은 한이형을 말에 태워 가려 했으나
그는 거절하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산을 올랐던 예수를 본받기 위해
백리가 넘는 길을 맨발로 끌려갔다.
이렇게 압송된 한이형은 포청에서도 심한 형벌을 받았으나 이겨내고,
드디어 9월 20일 마지막으로 곤장 70도를 맞은 후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4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2000년 대 초반 서울에 살 때 5년간 같은 성당에 다니고
같은 아파트에 살던 대자가 곤지암으로 이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지순례를 일찍 마치고 5시 경 음식점에서 이른 저녁을 먹으며 대화했다.
자매님 건강관리를 위해 서울 아파트는 딸들에게 살도록 하고
부부가 내려와 텃밭을 가꾸며 살고 있는 것이다.
딸들과는 서울에서, 곤지암에서 자주 만난다고 한다.
그 동안 궁금했던 이야기, 신앙이야기 등 할 말이 너무 많아
음식점에서 대자집으로 이동하여 계속 대화를 했다.
대자가 키운 하늘마, 돼지감자 등을 받았다.
제주 텃밭에 하늘마를 재배할 예정이다.
마가 공중에 열리는 특이한 작물이 '하늘마' 다.
대자와 연락이 끊겼었는데 새로운 연락처를 교환하고 자주 소식전하기로 했다.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하였지만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서울을 떠나 여주 10년, 제주 8년 생활을 했으니
거의 20년 만에 대자 부부와의 만남이 감회가 새롭고 기뻤다.
성지순례의 은총이라 생각한다.
첫댓글
믿음이란 안에
삶의 일지들을 보노라면
참 대단하십니다
늘 건안 하십시오
세잎 클로버 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