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만의 초등학교 친구
내가 최초로 다녔던 화순 도곡초등학교는 금년 88회 졸업생을 배출했을 것이니 일제 강점기 1929년에 개교했을 것이다. 내가 다닐 때만 해도 6.25전쟁 직후였으니까 일제군국주의식 잔재가 남아있었는지 아침 운동장 조회 때면 엄격한 군대식 관례가 여전했다. 지독한 산골 마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멧돼지나 늑대를 흔히 볼 수 있었으니 시골 학교다운 맛은 충분했고 수업시간에 나무꾼들에게 쫓긴 멧돼지가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도망가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으니까 60여 년 전의 추억도 나는 엊그제 일처럼 삼삼하다.
20여 년 전 아직 현직에 있을 때 서울생활 하던 중 여름방학 때 자가용을 직접 운전하여 방문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대중교통으로 그것도 혼자 모교인 초등학교를 가고 있다. 그때는 내 초임지였던 해남 어란진초등학교도 약 30년만에 방문해 보았고 세월의 무상함을 감지했는데 다시 또 그만큼의 서월이 흘러 이제는 자가용마저 처분했고 대중교통으로 회기 했으니 60년도 더 지나버린 초등학교를 가고 있는 것이다. 318번 버스가 1일4회 운행한다하여 남광주역에서 내려 버스승강장에 가봤으나 흔적이 없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소태역으로 간다. 전화를 해보고 싶지만 누구에게 부담주지 않으려는 내 성격 탓이 고생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별 수 없이 다시 전화를 걸어 알아보니 백운광장으로 가라한다.
소태역에서 백운광장으로 가니 승강장 안내판에는 연락전화도 나와 있어 알아보니 광천터미널 출발 10시 318번 차가 있단다. 20분이나 남아 느긋하게 기다리는데 318-1차가 5분전에 미니마을버스가 오기에 물으니 중장터까지 간다해서 오르면서 알아보니 1일 10회 정도에 칠구 터널 지나 원동 도곡 온천지나 운주사까지 직통으로 다니니 도곡초교 까지는 30분도 안 걸린다. 등잔 밑이 어둡게 살았다. 점심간식까지 단단히 준비하고 갔는데 한 시간 가량 상담하고 나오니 바로 나오는 차가 있어 그냥 타고 광주로 오니 12시도 넘지 않아 농성역에서 점심을 때웠다.
도곡초등학교 15년 전 쯤 와 본 것도 갔지만 도시학교 못지않게 발전돼 있는 모습에 놀랐다. 학교가 너무너무 깨끗하고 마치 동화 속 꽃밭 같이 아름다웠다. 6.25전쟁직후 판잣집 교실에 10학급 500명도는 넘었을 것 같은데 8년 전 통계로 4,300명을 졸업시켰다고 교장실을 찾았다. 임ㅇㅅ교장은 교육대학교 후배였지만 후배도 10년이 넘게 되면 동문의식이 희석되고 정이 느껴지기 어렵다. 늙어갈수록 말수는 줄이고 지갑은 열라는 말이 있는데 옛 추억이 너무 그리운 나머지 내 잔소리가 좀 과하지 않았을까 반성도 되었다. 한 시간 정도로 상담 후 본 방문목적 졸업생 명단을 확보하여 나왔다.
광주로 와서 돈식이 전화를 다시 돌렸다. 홍근이 전화를 혹 아는가 물으니 지금 바쁜 일이 있으니 잠시 후 찾아서 알려 주겠다 한다. 집에 와서 다시 물어 연락전화 번호를 받았는데 016으로 나가기에 옛날 전화라 불통일거라고 여차로 일단 걸어보니 통화가 된다. 홍근이 이놈을 33년 만에 통화하게된 것이다. 내가 1988년 서울로 전출하여 이사할 때 이삿짐 센타 소개해주고 코란도 타고 나와 마지막 나를 배웅해주던 그 삼삼한 모습을 잊을 수 없어 한 5~6년 전 일까 그때도 찾다찾다 못 찾고 포기했었는데 이놈을 이리 가까이 두고도 몰랐다니 당장 만나자고 하여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책도 몇 권 증정하였다.
도곡초등학교를 왜 갔는가? 앨범을 정리하다가 초등학교 졸업사진을 발견하게 된다. 그 때는 32절정도 되는 크기로 흑백사진 한 장이 졸업사진 전부였다. 아무도 그런 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아 한 장씩 나눠주고 싶은데 사진만 달랑 주면 또 분실하기 십상일 테니 내 수필집 한권의 앞장에 사진을 삽입 출판하여 한권씩 배부하며 식사대접도 하자로 작정하고 일단 5월15일을 디데이로 잡고 12시까지 문화의 전당 만남의 광장으로 나오라 하고 10개 정도의 전화번호에 문자를 날렸는데 반 정도가 아니라고 문자 반송이 된다. 얼마나 나오든 안 나오든 열권정도 찍어서 나눠주고 점심을 대접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