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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준론
우리의 삶이 타인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역사를 보면 세상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곳인지 깨닫게 된다. 때로 역사의 흐름을 바꾼 중대한 사건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접촉이나 별생각 없이 무심코 내린 결정 때문에 일어났다. 그것이 경이로운 결과를 낳기도 하고, 비극을 불러오기도 한다. 작가 팀 어번은 말했다. “만일 당신이 시간여행을 해서 태어나기 전의 세상으로 간다면 그 어떤 행동도 섣불리 하지 못할 것이다. 아주 사소한 행동 하나도 미래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곱씹을수록 맞는 말이다. 수필가 최병준은 그의 수필에서 볼 수 있듯이, 경험을 토대로 깨달음의 길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다. 송명화 수필을 좋아하고 그녀의 수필을 교본으로 삼아 필사를 할 정도로 최병준은 본격수필에 진심인 분이다. 하나의 제재로 스토리를 전개하면서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줌은 물론 인생에 대한 비전과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적잖은 감동의 물결을 일으킨다. 노후의 안락한 삶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된 최병준의 요양병원 방문기를 들어보자.
경험만큼 강한 설득력을 가진 것은 없다. 우리는 직접 경험, 간접 경험, 의미적 경험 등을 통하여 지식을 쌓을 수 있고 타인의 일정을 상상하며 공감능력을 키울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를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지 무엇을 원할지, 어느 정도까지 기꺼이 감수할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 경험적 수필이 다른 수필보다 더 재미있게 읽히는 요인은 뭘까?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최병준 선생은 다방면에 박식한 식견을 가진 지성적인 교양인이라는 점이고, 둘째 이유는 그의 글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진실의 글이기 때문이고, 셋째는 인간적이고 서정적이라는 데 있다. 설명적인 글이 아니라 진실을 나름의 독특한 시각으로 참신하게 풀어내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글이 예민한 감각과 신경에 호소하면서도 결국에 가서는 이성과 정서를 끌어들여서 독자를 흐뭇한 감동으로 이끄는 것은 수필을 쓰면서 닦은 탁월한 서술적 기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문학정신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동안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능한 삶의 버전은 무한한 수로 존재하며 우리는 그 중 하나인 ‘지금의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는 무척 흥미로운 생각거리인 동시에 다음의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삶뿐만 아니라 ‘상상 가능한 모든’ 삶의 버전에서 변함없이 참인 것은 무엇일까? 그 보편적인 진실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운이나 우연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의 수필에 나타난 격조 높은 미학은 자연의 섭리 앞에 무력한 인간의 욕망을 겸허한 깨달음으로 극복하려는 겸허하고 낮은 자세로 진리를 조용히 보여주려는 데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그는 노년에 접어들어, 우리의 삶이 타인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 성숙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의 수필에 나타난 미학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 깨달음의 발견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이 수필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그 모두에게 변함없이 참인 것은 무엇일까를 묻고 있어 가치롭다.
Ⅱ.
수필가 최병준은 가장 먼저 이 세상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곳인지 한 친구의 갑작스런 병고를 통해 살펴보려 한다. 가장 끔찍했던 친구의 병문안 이야기가 던지는 메시지는 ‘삶의 주체는 건강’이라는 제목에 잘 드러나 있다. 알다시피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형편없다. 하지만 이것은 중요하고 미묘한 차이를 놓친 말이다. 사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꽤 뛰어나다. 다만 뜻밖의 일을 예측하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을 좌우하곤 한다. 언제나 가장 큰 리스크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리스크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므로 아무도 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 리스크가 현실이 되었을 때 피해가 엄청나기 마련이다. 예상치 못한 리스크로 크나큰 대가를 치른 한 남자의 이야기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가슴 아픈 이야기는 그만큼 감동의 폭도 크다.
가슴 아픈 이야기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최병준이 경주 농장에서 자연과 벗하며 오랫동안 많은 경험과 시련을 거친 후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해서 훌륭한 작가로 거듭나겠다는 야심을 놓지 않는 한 그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최병준이 선택과 집중을 통해 이렇게 수필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감수성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고난의 시간 속에서 치열한 독서와 사색, 그리고 지적인 자기점검을 통해서 폭넓은 교양을 쌓고 삶의 진리를 발견하려는 직관에 가까운 통찰력을 기른 덕분이었을 것이다. 글을 잘 쓸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기꺼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자세가 오늘의 수필가 최병준을 있게 했다고 믿는다. 그의 수필이 지닌 매력 가운데 하나는 따뜻한 인간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게 묻혀있는 작은 즐거움과 생의 진실을 새롭게 발견하여 미학적으로 느끼고 깨닫게 하는 것이다.
고속도로 차들은 앞서야 직성이 풀리는 듯 뒤따름을 거부하며 무서운 속도로 질주한다. 나에게 나대며 설치지 말고 바보같이 살라 한 친구가 요양병원에 있어 병문안을 가고 있다. 술이 과하긴 했다만. 밥 잘 먹고 골프 치며 멀쩡했다. 요양병원 갈 나이는 더욱 아니다.
그 친구가 점심같이 하자고 부르는 전화엔 하던 일을 멈추고 갔다. 아파트에서 혼밥 하는 것 알고, 농막에서 책보다 라면이 지겨운 나로선 반갑기만 했다. 한동안 전화가 없었고 몇 차례 전화했으나 통화되지 않았으며 결국 대구 요양병원에 있었다. 이래저래 수소문 끝에 가족들만 사용하는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 통화하고는 득달같이 가고 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라 하는 것을 알면서 소홀했고 야무진 결심도 고작 며칠 못가 매듭 풀리며 젊은 날엔 과신했고 나이 들면 당연한 듯 안일한 건강관리 이였다.
이곳에 좋은 시설의 요양병원 많은데 굳이 먼 곳, 그것도 폰까지 차단은 병든 제 아버지 요양병원 격리한 생각에 암울한 걸음이다. 언젠가 아들이 운영 잘되고 있는 모텔을 리모델링하여 요양병원으로 개원하려 하자 허락하지 않았고 최근 택지 개발되어 부동산 매각한 큰돈 가진 것을 알고 있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나의 비약된 과민함이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며 한의사인 아들이 아침 문안 전화를 받지 않아 발견되어 119로 대학병원에 간 것을 문병하며 알게 되었다.
훌륭한 스토리는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흔들어 역사를 바꾸어놓는다. 훌륭한 스토리에는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힘이 있다. 마크 트웨인이 현대의 가장 탁월한 스토리텔러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원고를 수정할 때면 아내와 아이들에게 읽어주곤 했다 어떤 단락을 읽었는데 그들이 지루해하면 그 단락을 삭제했다. 그들의 눈이 초롱초롱해지거나 몸을 앞으로 더 기울이거나 미간을 찌뿌려지면, 트웨인은 그 부분을 늘리고 한층 더 세심하게 보완해 완성했다. 때로는 하나의 훌륭한 스토리 안에서도 빛나는 구절이나 문장이 거의 모든 일을 한다. 사람들은 책이 아니라 문장을 기억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최병준은 가끔 점심을 먹자고 하던 친구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대구 한 요양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을 가는 이야기로 수필을 썼다.
마크 트웨인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자신의 책을 전부 읽었다는 말을 들은 그날 오후, 호텔 짐꾼에게도 같은 말을 듣고는 자신이 성공한 작가가 되었음을 실감했다고 한다. 트웨인은 말했다. “뛰어난 문학 작품이 와인이라면 내 작품은 물이다. 물은 모든 사람이 마신다.”고 썼다. 수필가 최병준은 계층이나 지역에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보편적 감정들을 건드려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것은 마법과도 같은 스토리의 힘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의 메시지에 집중시키는 것은 대단히 유용하고 값진 기술이다. 뛰어난 스토리는 더는 나아질 수 없을 것 같은 무언가가 숨겨진 수많은 기회를 끌어낸다. 모든 수필이 무조건 새롭고 독창적인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책을 쓰기도 전에 좌절을 맛볼 것이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만드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 최병준의 서사는 치밀하다.
친구는 초등 동기로 중학교 진학 못 하고 어린 나이 생활전선에 들어 자수성가한 재력가다. 시의원 출마를 권유받은 지역 인사로 비록 학교의 배움은 없었으나 어릴 때 조부에게 배웠던 한학을 학습했고 많은 서적을 탐독했다. 사업의 길에 수레를 끌고 만나는 장사꾼이나 기업인, 법조인등 다양한 인연은 깨달음과 서책이고 스승이었으며, 격동에 넘어지고 부딪침은 배움의 담금질이 되었다. 시 의원 출마의 부단한 권유를 몸에 맞지 않은 옷이라며 거절하였던 대범함은 그가 겪어온 처신과 행동들의 느낌이라 하여도 된다.
크게 잃고 버릴 줄 아는 사람이 크게 얻을 수 있다. 사업의 길에 큰 손실을 겪으며 욕심에 앞서 믿음과 신용을 중시했다. 구매와 납품에 크고 작은 위기와 고난도 당했으나 다행히 행운이 따라주었다고 한 그는 이익에 집착하지 않고 의를 따랐으며 멀리 내다보는 안목의 결과로 보아도 된다. 대체로 고생하며 자수성가한 사람은 재산을 움켜잡고 인색하기 마련이지만 이 친구는 폭넓은 대인관계와 가진 돈을 제대로 쓸 줄 안다. 초등 동기 모임의 큰 행사에 스스럼없이 부담해 왔고 쓰러진 사람을 보면 가던 길을 멈추고 뛰어가 구했던 친구라 봉사단체 회장도 했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타인과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면 좋은 인생을 누릴 수 없다고 한 그로서는 날아가는 저 까마귀 내 술 먹고 가라 하듯 찾고 찾는 지인들과 술자리가 잦았다.
최병준의 수필은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일상적인 삶을 그린 그의 수필에 나타난 감정적인 면에 매력을 느낀 독자들은 최병준의 이야기 속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옛날 옛적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로 시작되는 전래동화가 그토록 좋았던 이유는 따뜻한 방바닥에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옛이야기를 듣는 듯한 ‘친밀감’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마당에 멍석이나 평상을 펴놓고 이웃집 아저씨의 귀신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포에 떨면서도 신기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야기책만 있으면 평자는 금방 외로움을 잊었다. 지금 여기 말고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생각에, 책 한 권만 펼치면 완전히 다른 세계로 빠져들 수 있다는 생각에, 매번 가슴이 떨리곤 했다. 그렇게 ‘이야기’는 오늘의 고통을 잊게 만드는 ‘망각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타인과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면 좋은 인생을 누릴 수 없다’고 했다는 친구 이야기 속으로 마음의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오늘의 삶을 다시 바라볼 용기가 샘솟게 될 것 같다.
수필가 최병준의 수필 <삶의 주체는 건강>은 ‘이야기의 힘’을 보여준다. 수필가이자 전직 공무원 출신인 최병준의 초등학교 친구는 ‘날아가는 저 까마귀 내 술 먹고 가라 하듯 찾고 찾는 지인들과 술자리가 잦았다.’고 한 대목에서 뇌졸중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다. 대인관계도 잘하고 가진 돈 제대로 쓸 줄 아는 친구였다. 초등 동기 모임의 큰 행사에 스스럼없이 찬조금을 부담해왔고 쓰러진 사람을 보면 가던 길 멈추고 뛰어가 구했던 친구라 봉사단체 회장도 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타인과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면 좋은 인생을 누릴 수 없다는 지론을 가진 분으로 알려져 있다. 이야기 속에서 친구는 사람들을 구한 모든 이의 영웅이다. 사람들은 ‘허구’를 완전히 제거한 ‘객관적 사실’만을 알고 싶어한다. 작가의 눈에 비친 요양병원 친구는 호인이었고, ‘자수성가한 재력가였다. 그런 그가 왜 요양병원에 둘억 있는가. 문제는 ‘술’이었던 것이다.
친구의 지병이 악화되자 최병준은 친구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친구의 전화번호를 찾아내고 친구가 머물고 있는 장소로 찾아간다. 알고 보니 ‘중병’으로 쓰러졌고, 혼수상태로 오랜 시간을 살았지만, ‘재산을 나눌 줄 아는 좋은 사람’으로서의 친구는 산송장 같은 모습으로 제대로 걸을 수도 없다. 만약 친구가 인색한 삶을 살아왔다면 찾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 잘 살아왔기에 찾는 사람이 많아서 그 아들이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차단할 정도였다고 한다. 작가는 친구의 삶을 실패로 가득한 고통스런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지는 않는다. 비록 수족을 움직일 수도 없이 요양병원에 갇혀있지만, 그래도 병원에 오기 전까지 멋지게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그렇다. 이야기는 바로 ‘기억’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삶이 타인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술꾼은 길 가다 넘어져도 술 탓이라 하듯 술병인가 했더니, 중병으로 쓰러졌고 골든타임 놓치며 수개월간 혼수상태에 있었다. 많은 전화와 문병객은 아들이 전화기를 잘라버린 요인이 되었을 만도 하다. 건물전세 수입 한 달 천만이나 된다며 질펀하게 자랑하고 인색함이 좁쌀인 친구가 죽자 그놈 돈 아까워 어떻게 죽었나 하며 문상도 가지 않는 대인관계의 인간성을 볼 수 있음이다.
정주영회장이 저승가다 먼저 간 이병철회장님 황천길에 반갑게 기다렸다며 오천원만 빌려주라 하자. ‘형님! 수조억원의 그 많은 돈 땡전 한 푼 못 가져왔음매‘ 하자 ‘자네도 별수 없건만’ 그 친구 우스갯소리엔 가져갈 수 없는 돈 쓰자고 만든 것이라며 돈은 쓰는 만큼 들어오며 덤으로 많은 것이 뒤따른다고 한 그는 댐도 수문을 열어야 새로운 물이 흘러들어 녹조도 없고 물고기와 수초가 잘 자라듯 내 마음을 내놓아야 정이 흐름을 말함이다.
매사에 긍정적이며 활달한 친구가 휠체어에 앉은 몰골은 비쩍 마른 산송장이고 검은빛 저승 문턱 아래 쪼그리고 있는 초라한 늙은이다. 수개월이나 혼수상태에 있었고 수술 후 합병증으로 요양시설을 갖춘 종합병원에 입원 치료와 재활하고 있었다. 살아있음이 다행이라고 한 나의 위로는 오히려 그의 마음을 헤집었다. ’이런 모습 보여 미안하다’ 그때 깨어나지 않고 가서야 했다며 살아 있음을 부정하였다. 홀연히 떠나지 못한 자신의 한탄이다. 소변 주머니까지 차고 걷지도 못하며 살아 있음이 곤고한 친구의 진솔함을 느낀 내 마음의 눈에 애잔함이 흘렀다. 물건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나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 잃음을 아는 그는 병고의 구차한 생을 거부하며 박수칠 때 떠나지 못한 안타까움 이었을 것이다.
체력이 허약하면 마음마저 내려앉고 흔들리기 마련. 병원에서 멀지 않은 두류공원에 데리고 왔다. 비록 공원 벤치에 앉았다만, 공원의 푸르고 싱그러운 수목들이 가슴에 들어왔으며 두리번거리는 그의 눈은 나무에 물이 오르듯 생기가 조금씩 돋았다. 장기간 병원 생활의 암울함과 놓아버린 마음을 전환하자고 굳이 업어가며 차 태워 오길 잘했는가 싶다.
‘이런 모습 보여 미안하다’ 그때 깨어나지 않고 가야 했다며 살아 있음을 부정하던 친구가 홀연히 떠나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는 말을 했을 때, 작가는 애잔함을 느낀다. 친구의 한없는 무기력증과 패배주의, 친구의 자신을 향한 원망과 폐쇄성은 결국 최병준 작가조차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장벽이었다. 친구는 자신의 이런 비참한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었고, 작가는 마치 봐서는 안 될 타인의 은밀한 상처를 본 듯 마음이 쓰라리다. 결국 작가는 친구를 두류공원까지 차를 태워 구경시킨다. 친구를 생각하며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이 날은 두 분의 마음 깊숙이 숨겨진 수많은 우울의 씨앗들이 움트는 시간이다.
햇살 빛나는 오후의 날씨에는 살짝 망각할 수도 있고, 기분 좋게 웃어 넘길 수도 있는 모든 슬픔과 좌절된 욕망과 안타까운 삶의 회한이 불현듯 한꺼번에 떠오르는 시간,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간은 내면에 꼭꼭 감추어두었던 욕망의 속살이 투명하게 비치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푸른 빛처럼 숨길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우리의 욕망과, 빛처럼 멈출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우리의 슬픔을 더욱 생생하게 도드라지게 하는 시간이다. 푸르고 싱그러운 수목처럼 모든 생명의 욕망을 분출하는 ‘희망’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푸른 색의 땅에는 언제나 새로운 생명이 솟아난다. 푸른 빛은 생성과 정화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다. 어쩌면 문학 그 자체가 푸른 빛을 닮았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더욱 생생하게 드러내주는 문학의 역할 자체가 푸른 수목을 닮은 것이 아닐까.
Ⅲ.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궁금한 친구의 소재를 찾아 나선 최병준 수필가의 인간미가 감동을 준다. 친구의 인정스런 삶을 잘 알고 있던 최병준은 퇴직 공무원의 삶을 살면서도, 병실을 나서는 등 뒤로 '내 꼴 나지 말고 건강 챙겨라.' 하는 그 친구의 말을 차 속에서 되새기면서 수필 한 편을 완성하였다. 이 즈음에서 ‘깨우침은 기회고 실천은 습관의 디딤돌’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부실한 자신의 수레에 체력의 윤활유를 치며 천수를 누리라는 깨우침의 충고와 실천을 준 친구의 말년을 생각하며 새삼 건강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된다. 친구의 진정한 유산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건강이었다. 최병준은 친구의 ‘건강 챙기라는’ 충고가 없었다면 인생의 주체가 뭔지 정리하지는 않았을 듯싶다. 단지 ‘객관적 사실’만으로 친구를 바라보던 작가는 비로소 친구가 홀로 견뎌야 했던 숱한 고독과 방황의 날들을 병문안을 통해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 아름다운 우정이 꽃피는 이야기의 퍼레이드가 없었다면 병고에 시달리던 그 친구의 삶은 얼마나 외롭고, 최병준의 삶은 얼마나 시시했을까.
“하루는 저녁이 편안해야 하고 한해는 겨울이 따뜻해야 하듯 일생은 노후가 안락해야 한다. 나이 들어 병마와 치매로 요양병원에서 말년을 보냄은 없어야 한다.”는 게 최병준의 지론이다. 이 수필의 감상포인트는 어떻게 하면 안락한 노후를 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깨달음의 발견이 핵심이다. 하나의 이야기를 일관되게 밀고 나가 통일성을 유지시킨 저력은 높이 평가된다. 그가 건강한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친구의 한탄에 깊이 공감을 하며 조용히 동의하기 때문이다. ‘친구의 ‘술인심’이 친구를 요양병원으로 가게 하는 계기였다면 이제 친구의 삶은 영혼이 지닌 고유한 무늬로 거듭난다. 이 세상 어느 친구와도 바꿀 수 없는 친구의 삶, 그리고 친구를 사랑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미처 ‘사실대로’ 전해줄 수만은 없는 이 세상의 고단한 산전수전, 그 모든 우여곡절을 이야기의 선물상자에 담아 보내면, 우리의 삶은 어느새 ‘덜’ 힘들고 ‘덜’ 고독하며 마침내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최병준 수필의 가치와 보람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에 있다. 그의 탁월한 서사적 능력이 없었다면 우정을 주제로 한 그의 수필이 호소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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