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지금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원하던 것이었나?
지금 나는 열심히는 하고 있지만은 진실로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 한 번쯤은 하면서 자각을 해 보았습니까?
오늘은 이런 주제로 글을 올릴 까 합니다.
열심히 사는 모습에 따른
내가 원하던 방향으로 차근차근 삶을 쌓고 있는가요?
영 자신이 없어 하는 것도 부인키 어려운가요?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가 마땅치 않을 분도 계실 겁니다.
게다가 ‘이거다’하고 잡을만한 대상도 확실치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목격한 장면입니다.
딸인지 모르겠지만,
젊은 여자와 같이 가던 할머니가
‘디지털시대’라고 써진 선전간판을 보면서.
“아니 저게 무슨 말이여?
디지털이 뭔 털인데
저렇게 끄게 써놓고 시대라고 하는 거여?”하고 묻는 겁니다.
그러자 젊은 여자의 황당해하던 표정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무엇을 뜻하는지 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첨단尖端이라는 수식어만 붙으면
오금이 저리는 시대풍조를 질타하는 듯 했습니다.
참으로 더 멋있고 더 좋은 게
시장에 나오면 잡지 못해 헐떡이며 콩 튀듯 팥 튀듯 합니다.
거의 무조건적이라고 할 정도로
유행을 쫓기에 급급한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제품을 구입해서 사용설명서를 펼치지만,
도통 알아먹지 못할 용어에다
온갖 복잡한 기능을 습득한다는 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렇게 말을 잘 듣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힘들고 지겨울 수도 있을
그런 과정일 텐데 잘도 참아 냅니다.
보다 나아지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화기는 왜 만들어졌는가?
굳이 발명한 사람을 찾아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일 겁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카카오 톡이나 페이스 톡이라는 것이 있어서
무료로 영상이나 화면을 보면서 대화를 합니다.
특히나 페이스 톡은 화면을 끄면 대화를 한 흔적이 사라집니다.
너무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화면에 나타나는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합니다.
비행기나 KTX는 왜 탈까?
빠른 속도를 즐긴다거나 어딘가를 가려고 하면서
걸어가는 데 따른 육체적인 부담을 덜어 주는 기능이 클 겁니다.
즉 운반수단을 이용함으로써 걸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동 거리를 연장하려는 것일 겁니다.
그러다 보니 문명의 발전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욕심과 탐욕에 숨 가쁘게 쫓겨 다니는 꼴이 되었습니다.
최신 제품에 출시를 눈독들이고,
신차 출시에 좋은 자동차를 타느냐 못 타나느냐에 따라서
개인의 행·불행을 따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간결하게 사는 연습을
많이 익혀야 할 시기가 된 것 같습니다.
너무 급하게 뒤쫓는 것 같은 생활은
결코 자신이 도구를 쓰는 주인임을 망각 할 때,
너 나 할 것 없이 쫓기에 됩니다.
신제품이 출시되면 잘 쓰다가
처음 구입할 때의 마음은 어디를 가고
“더 새로운, 더 다양함”에 안타까운 상황에 빠져
신용카드만 긁어 대는 허우적거림은
이 시대의 자화상인 듯 합니다.
그런 수많은 모습들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고려를 우선하지 않는다면,
기계적인 단계를 맴도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남들 보는 눈이 무섭다고
집안 형편에 걸맞지 자식의 혼숫감을 마련하느라
여지저기 카드 긁어서 혼수에 허덕이고
빚 갚을 생각은 엄두도 못하고 덜컹 일부터 저지른다면,
은퇴하고서도 남들에게 품위를 잃지 않겠다고
퇴직금까지 털어서 고급 집에 이사한다거나,
또는 친구들에게 폼 잡기 위해서 큰 차를 뽑고 나서
할부금을 붓느라 허리가 휘는 사람의 경우가 그러할 겁니다.
자기 삶의 진정한 고결함은 뒷전인 채,
그저 남들을 앞세우는 딱한 풍조가 만만치 않습니다.
하기사 “고결하게 살면 밥 먹여 주냐?”하면서
비아냥거리는 걸 한두 번 목격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돈이 많고 벼슬이 높을지라도,
제 생명의 근원을 잊고 산다면
개, 돼지와도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자기 생명의 근원을
결코 잊지 않는 사고방식이기에 그렇습니다.
손에 흙 한 번 묻히지 않고
도도한 자태를 짓는 것과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산골에 틀어박혀 도인道人 행세나 하면서
빳빳한 부채를 흔드는 걸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남들 평가에 의해서 휘둘리지 않지만,
독불장군처럼 잘난 척하지도 않습니다.
남들에게는 비루鄙陋하거나
궁핍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 삶의 목적을 잊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일러 고결高潔하게 산다고 이르는 것입니다.
오늘 문득 자신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잘 가는 길인지를 ············
이것이 오늘 드리는 따끈따끈한 글입니다.
행복한 시간들로 가득 차시기 바랍니다.
2024년 01월 22일 오전 05;32분에
남지읍 무상사 토굴에서 운월야인雲月野人 진각珍覺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