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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봉과 율림, 아름다운 부부
지난 6월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두고 사봉(思峰)이 세상을 떠났다. 믿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었다. 사봉은 동생의 남편인 내 매제(妹弟)의 호(號)이다. 동생이 나보다 두 살 아래이고 사봉은 동생과 동갑이니 이제 겨우 고희를 넘긴 나이였다. 나이가 들면서 죽음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이번 사봉의 죽음은 너무도 타격이 컸다. 사봉과 동생은 대학 동창이었다. 같은 과 같은 학년이었다. 나랑은 과(科)는 달랐지만 같은 대학교를 다녔으니 사봉은 내 대학 후배이기도 했다.
참 오래 전 일이지만 아직도 사봉을 처음 만났던 날이 기억에 남아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동생이 어느 날 부모님께 사귀고 있는 남자가 인사를 드리러 오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동생의 말에 집안 식구 모두가 놀랐다. 착하고 순진한 줄로만 알았던 딸이 남자 친구가 있다는 말에 부모님도 우리 오빠들(내 위로 형이 한 분 계시다)도 놀랐다. 그 남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동생은 같은 과 동기동창이고 졸업과 동시에 ROTC 장교로 군대에 갔다가 다음 달에 제대한다고 차분히 말했다.
딸이 남자 친구가 있다는 말에 어머니는 기대 반 걱정 반에 들뜨셔서 빨리 만나고 싶어 하셨지만 아버님 생각은 달랐다. 오빠들이 있고 또 대학 선배이니 오빠 중의 하나가 먼저 만나보고 다시 의논하자고 말씀하셨다. 그때만 해도 아버님의 말씀은 곧 법이었다. “너희 둘이 의논해서 해라,’하고 아버님은 자리를 뜨셨고 형은 내게 임무를 떠맡겼다. 형의 대학후배이기도 하지만 형은 상대(商大) 출신이라 문리대(文理大) 출신의 성격 파악이 쉽지 않으니 내가 만나보는 것이 좋다고 나를 떠밀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처음으로 사봉을 만났다. 46년 전일이다.
며칠 뒤 그와 내가 만났다. 우린 둘 다 군복 차림이었다. 그는 카키색 군복의 육군 장교였고 나는 하늘색 군복의 공군 장교였다. 둘 다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장소는 문리대 앞 학림다방이었다.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는 내가 자리에 앉자 “저는 학교 다닐 때 형이 여기 있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인사는 안 드렸지만요,”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와 내가 최소한 2년 동안 같은 캠퍼스에 있었고 강의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학림다방에서 보낸 나이니 여자 친구의 오빠인 나를 일부러라도 보러 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왜 오늘 장소를 학림다방으로 정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렇게 말문을 여는 그에게 나는 친근감을 느꼈고 우린 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주로 지난 학창 시절 이야기를 많이 했고 또 둘 다 군 복무 중이라 군대 이야기도 많이 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나는 내 임무가 생각나서 그의 집안에 대해 몇 가지를 물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이었다. 착하고 사랑 많은 부모님이시지만 경제적으론 여유가 없기에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지금도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부모님을 돕는다고 했다.
그때 70년대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가난은 거의 필수과목과도 같은 것이었다. 극히 소수의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가난하였다. 그리고 특히 그와 내가 다녔던 대학의 학생들은 대부분이 가난하였다. 우리 집도 결코 여유 있는 집안은 아니어서 나도 대학 다니는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의 집안은 우리 집보다도 한결 더 어려운 집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숨김없이 집안 이야기를 하면서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저희 집안도 또 저 자신도 자랑할 것이 없지만 그래도 하나를 내세운다면 가진 게 없다는 거에요. 가진 게 없으니 앞으로 많이 가질 수 있잖아요? 전도가 유망하지요.” 어느 순간 그가 농담처럼 그러나 똑바로 나를 보며 한 말이었다. 혹시라도 그의 가난이 감점 사유가 될까 걱정되어 한 말이겠지만 나는 그 말이 가슴에 남았다.
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나는 다시 그의 말을 곱씹었다. ‘가진 게 없으니 앞으로 많이 가질 수 있다.’ 청년다운 말이라 생각되었다. 빔(虛)의 참 뜻을 벌써 아는 친구라는 생각도 들었다. 부모에게 받은 것을 제 것인 양 으스대는 철부지가 아니고 비었기에 오히려 자기는 전도가 유망한 사람이라고 비유한 그의 깊음이 마음에 들었다. ‘찰흙으로 그릇을 만들 때도 빈 공간이 있어야 그릇으로서 쓰임새가 있다(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고 한 노자(老子)의 말이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날 저녁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아버님께서 물으셨다. “어떠냐?” 나는 한마디로 답해 드렸다. “80점은 됩니다.” 80점이 꽤나 후한 점수였는지 아버님이 “그러냐?” 하시며 말끝을 올리셔 짐짓 까닭을 물으셨다. “장래가 있어 보여서요.” 나는 다시 간단히 답해 드렸다. 잠깐 내 얼굴을 바라보시던 아버님이 동생에게 눈길을 돌리시며 “그럼 됐다. 언제 한번 데려오거라,”하고 말씀하셨고 순간 동생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어느 가을날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가 1976년이었으니 이제까지 4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다. 동생의 남편이었지만 형제만큼 가까이 지냈기에 가끔 내가 그에게 “자네는 내 덕분에 좋은 색시 만난 줄 알게,”하고 농담을 하면 그는 “형 덕분에 율림이 좋은 남편을 만났지요,”하면서 맞받아쳐 한 바탕씩 웃곤 했다.
율림(栗林)은 여동생의 호이다. 사봉과 율림은 그렇게 만나서 오랜 세월 아름다운 부부로 잘살아왔다. 풍족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아들딸 낳고 부모님 잘 모시며 정답게 살아왔다. ‘가진 게 없기에 많이 가질 수 있다’고 한 사봉은 말 그대로 빈 그릇을 천천히 가득 채워가면서 평생을 살았다. 하지만 그가 채워간 것은 물질이 아니었다. 다른 재주는 많았지만 그에겐 물질을 모으는 재능은 없었다. 제대하면서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몇 년 만에 나왔고 사업을 한다고 회사를 차렸지만 역시 몇 년 만에 접었다.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동생이 집안 경제를 책임졌고 사봉은 집안 살림을 떠맡으며 학창 시절부터 하고 싶었던 공부에 전념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기에 제도권 학업이 아닌 독학이었다. 동생을 걱정하는 오빠의 마음이 앞서 때로는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나 하는 의구심이 든 적도 있었고 그럴 때마다 사봉에게 못마땅한 눈길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타고 있는 이루지 못한 꿈을 향한 열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여자로서 집안 경제를 책임지며 시부모를 공양하고 애들을 키워야 하는 율림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율림은 한 번도 남편에 대해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하는 오빠들에게 “저는 사봉을 믿어요,”라고 말하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어느 날 문득 사봉이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리곤 불쑥 책 한 권을 내밀었다. “형, 이거 제가 번역한 책에요,”하고 그가 내미는 책은 우선 묵직하고 두툼했다.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라는 제목의 책은 무려 800쪽이 넘는 대작이었다. 책이 무슨 내용인지도 몰랐지만 나는 우선 그 부피에 질려 “아니 이 두꺼운 책을 언제 번역했나?’ 하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어가 전공이 아닌 국문과 출신이 그 두꺼운 책을 번역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힘은 들었지만 재미있었어요. 보람도 있었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는 그 분야의 베스트 셀러와 스테디 셀러가 되었을뿐더러 사봉은 자신이 번역한 책의 내용만큼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였다. 스스로를 늦깎이 컴퓨터 전문가로 불렀듯 언제 그렇게 컴퓨터 공부를 했는지 IT 전문가가 되어 전문 CEO로 활약하는가 하면 자기 계발 역서의 역자로 NLP(Neuro-Linguistic Programming 신경 언어 프로그래밍) 마스터 코치가 되어 큰 기업들에서 초빙되어 강연을 하고 나중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그러는 그의 최종 학력은 학사였다. “어떻게 학사가 대학에서 강의를 하나, 석박사들 앞에서 강연도 하고?”하고 내가 물으면 그는 그냥 웃을 따름이었다.
나를 더욱 경탄케 한 것은 사봉의 부지런함이었다. 꾸준하게 다방면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그는 또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저녁에 아무리 늦게 잤어도 친구들과 술자리를 같이했어도 그는 새벽 5시면 그림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 ‘사봉 생각’에 ‘사봉의 아침편지’를 썼다. 그렇게 그는 하루를 시작했다. 1999년 6월29일에 시작해서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전달되는 사봉의 아침편지를 받아보는 사람들이 지금은 거의 1만 명에 가깝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사봉의 블로그 ‘사봉 생각’ 혹은 ‘사봉의 아침 편지’에 들어가 보기 바란다. 팔로우어가 8,000명이 넘고 써놓은 여러 분야의 글이 5,000편 가깝다. 20년 넘게 끊임없이 공부하고 글을 올리는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그의 글을 읽고 삶이 바뀌었다는 독자들의 댓글도 블로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봉의 아내인 율림 또한 내 여동생이지만 칭찬을 아낄 수 없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공부한다고 집안에 눌러앉은 남편을 1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묵묵히 뒷바라지를 한 그녀를 지켜준 것은 사봉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었다. 천성이 착하고 맑은 율림은 대학을 졸업하고 선택한 교직을 천직으로 받아들이고 첫 교편을 잡은 여자고등학교에서 성실하고 꾸준히 근무하여 남자 선생들을 모두 제치고 교장이 되었다. 얼마나 착실하고 실력을 인정받았으면 사립학교 재단 측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녀가 교장까지 되었을까 생각했을 때 오빠인 나까지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율림이 정년퇴직을 하고 학교를 그만둔 뒤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유롭게 온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사봉과 율림의 노년의 삶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꿈꾸는 로망이었다. 삶은 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돈을 벌기 위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을 마련하기 위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서울 변두리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전세를 살면서도 그들은 행복했다. 책보고 글 쓰고 밥해 먹고 잠잘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그들은 만족했고 그 공간이 꼭 자기 소유일 필요가 없었다. 그 집마저 일 년에 반 가까이는 비어있었다. 둘은 틈만 나면 손잡고 여행을 떠났다. 전국 방방곡곡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훌훌 날아서 해외로 나갔다. 보고 느끼고 돌아와서 글을 썼다. 사봉과 율림의 블로그에 여행기가 넘쳐날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사봉은 계속 강의를 했고 책을 번역했고 저서도 냈다. 그 사봉의 옆에는 정년퇴직 후 모처럼 여유를 되찾은 율림이 그림자처럼 붙어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가혹했다. 오랜 참음 끝에 행복한 삶의 마무리를 하고 있는 너무도 금슬 좋은 사봉 율림 부부에게 질투가 난 것 같았다. 사봉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 작년 연말이었다. 워낙 건강했기에 조심을 안 했기 때문이었을까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을 땐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전립선암이었다. 발견했을 때엔 이미 사방에 전이되어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하지만 사봉은 포기하지 않았다. 불굴의 투지로 병마와 싸우며 그 힘든 상황에서도 노트북을 닫지 않고 글을 써나갔다. 주치의가 놀랄 정도였고 한 때는 병세가 호전되는 것 같았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지난 5월에는 집필 중이던 책을 탈고하여 교보문고에 원고를 보내 POD((Publish On Demand)로 책을 냈다. 제목은 ‘사봉의 심리여행’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이 교보 POD(Publish On Demand), 퍼플에서 선정한 주간 Best Seller 1위에 올랐다. 병상에서 이 소식을 들은 사봉이 지난 5월 15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은 읽는 이의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격려와 지원과 위로 덕분에 기적이 일어났다.
일주일 만에 교보 POD(Publish On Demand), 퍼플에서 선정한 주간 Best Seller에 올랐다.
그것도 당당하게 1위에...... 사봉은 무슨 복이 그리 많담......
내친김에 다음 책을 집필하기로 맘 먹고, 책 제목까지 정했다.
제목: "살래의 길" (노자편)
내용: 노자 도덕경을 들고 "살래의 길"을 걸어가는 현대인의 이야기.’
이 글을 쓸 때 사봉의 육신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다. 불과 한 달 반 뒤에는 세상을 떠나야 했던 그는 걷지도 못하고 제대로 앉아 있을 힘조차 없었다고 옆에서 병상을 지켰던 율림은 말한다. 그런데 그의 정신은 아직도 소년처럼 맑았고 그의 두 눈은 그 옛날 내가 처음 학림다방에서 그를 만났을 때처럼 앞을 보고 있었기에 그는 그 상황에서 다시 집필할 책 제목을 정하고 내용까지 구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일도 많고 또 충분한 능력도 갖춘 그였지만 모르는 사이에 그의 육신을 파고든 병마는 너무도 가혹했다. 여덟 달간의 투병도 율림의 간절한 병간호도 안타깝게도 그의 삶을 다시 소생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지난 6월 29일 하늘나라로 갔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 사봉에 관하여 더 알고 싶은 분은 교보문고 홈페이지에 들어가 ‘사봉의 심리여행’을 치고 그 책의 서문에 나오는 저자 소개를 읽어보시기 바란다.)
칠십이 훨씬 넘는 나이가 되도록 살아오면서 부모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의 죽음을 가까이서 보아왔지만 이번 사봉의 죽음은 너무도 큰 충격으로 내게 다가왔다. 맨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이제까지 같이 지냈던 시간이 흑백 영화의 장면처럼 떠오르고 그의 목소리가 귓속 깊은 곳에서 이명(耳鳴)처럼 울렸다. 그러면서 ‘죽음’이란 단어가 추상명사에서 보통명사로 이윽고 ‘고유명사’로 내게 다가왔다. 죽음은 더 이상 타인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 되고 있었다.
더더욱 나를 못 견디게 만드는 것은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여동생이 혼자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동생은 동생이었다. 내 기억 속에는 아직도 소녀 같고 어리기만 한 내 동생이 과연 어떻게 혼자 남은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했다. 멀리 떠나있고 코로나 때문에 가볼 수도 없기에 더욱 애만 탔다. 과연 어떻게 지낼까 궁금해서 동생의 네이버 블로그 ‘율림의 행복 편지’에 수시로 들어가 보았다. 거의 매일 같이 글을 올리던 율림(yullim50)의 블로그는 불이 꺼져있었다.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렇겠지, 그렇게 사랑하던 남편을 잃었으니 글을 쓸 수 없겠지’라고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7월5일에 드디어 글이 올라왔다. 마치 동생을 보듯 너무도 반가워서 나는 단숨에 읽었다. 그리곤 엉엉 울었다. 사봉이 죽었다는 소식에도 장사를 잘 지냈다는 소식에도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았는데 율림의 글을 보곤 드디어 울었다. 글 속엔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 남편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슬픔을 속삭임으로 승화시켜 남편이 편안하게 떠날 수 있도록 했다. 사봉은 참 행복한 남자였다. 이렇게 배려 깊은 아내와 45년의 세월을 살았으니 먼저 하늘나라에 갔어도 또 지극한 믿음과 사랑으로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혼자 한참을 울고 나서 나는 나를 뒤돌아보았다. 내가 먼저 떠나면 과연 나의 아내가 나에게 이런 글을 써줄 수 있을까 생각하니 너무 부끄러웠다. 비록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이렇게 깊은 배려와 사랑을 사봉과 율림에게 배우고 싶다는 마음에서 여기 율림이 그녀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그대로 옮긴다.
깊은 배려
그를 떠나보낸 지
벌써 엿새가 지났다.
나는 전날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 3시 반까지
그의 마지막을 혼자 주욱 지켜보았다.
그와의 이별 시간은 소중한 대화의 시간이었다.
물론 그는 듣기만 했다.
그동안 아파서 고생 많았어요
고마웠어요
정말 정말 사랑해요
우리 참 멋지게 살았잖아요
잘 가요
두렵지 않지요
당신이 끝없이 알고 싶어하던 그곳에서
맘껏 자유롭게 비상하세요
늘 당신은 내 걱정을 했지요?
덜렁이라구 사고뭉치라구......
걱정 마요
잘 살게요
애들과 즐겁게 징징거리지 않고
살아갈게요.
집중 처치 실로 옮겨진 이후 다섯 시간 동안
할 말이 왜 이리 많았던지......
수다쟁이 마누라 땜에
그는 엄청 시끄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덜 외로웠을 게다.
그가 나에게 선물한 죽음의 평온함
그를 통해 체험한 죽음으로의 여정이
나를 이렇게 평안하게 하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여덟 달 동안
그는 나에게 몸 공부와 맘 공부를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나갔던 것이다.
나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깊고 아름다운 배려와 사랑이다.
감사해요 사봉 (2021.7.5 율림)
2021 추석날 석운 씀
첫댓글 석운 님 글에는 인간미가 있습니다.
읽으며 잠시 멈춰 서서
글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마법같은 힘.
매제 사랑, 동생 사랑이 글 곳곳에 있네요.
부디 동생 분이
'율림(밤 숲?)의 행복편지'에 있는 글처럼
사시길 빕니다.
한가위 명절,
송편 맛보다 더 행복한 글을 읽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참 슬프고 아름다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