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 9 (2)
운전사가 물었다. 젊은이는 그 말에 눈을 감았다. "일년 뒤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내게 전화를 주시오. 그때까지 전화번호는 바뀌지 않을 테니까‥‥‥‥ 하며 안주머니에서 회사의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주었다. 미카엘 신부가 운전사에게 물었다. "종교를 갖고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감싸고 있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의 원천은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종교로 끌어들여 제멋대로 해석하려 하죠. 무슨 법칙을 만들고 의식을 정해서 사람들에게 의식을 강요하죠. 의식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사람은 인간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사람이 소속된 어떤 종교 단체가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죄송합니다. 운전수인 주제에 뜻 모르는 소리를 해서‥‥‥‥
탁현총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좀 쉬겠다면서 다리를 길게 뻗었다. 내가 물었다. 물론 내 물음은 미카엘 신부의 후일담이었다. "미카엘 신부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강원도로 갔죠. 거기엔 언젠가 말씀드렸던 친구가'경영하는 기도원이 있었죠. 그 기도원에서 미카엘 신부는 수용된 환자들을 돌보고 있죠." "강원도 어디인가?" "만나 보시려고요?" "만나보고 싶은데‥‥‥‥ "강원도 홍천군 모곡면 모곡리 칠봉산 아래 성모 신심 기도원입니다." 나는 그 주소를 적었다. 탁현총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만나보고 싶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탁현총은 그의 연꽃 그림에 읽힌 요즘 보기 드문 기적 같은 이야기 때문에 점차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매스컴을 탔기(?) 때문이다. 물론 화단에서 그의 실력을 인정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화단에서는 여전히 그의 이름 석자를 모르고 있었고, 몇 몇 화가들은 탁현총을 사기꾼이라고까지 비난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전문 상식이 없는 일반인들은 그의 그림 가치와 함께 그를 높이 평가하는 데 인색치 않았다. 그의 그림값 역시 높이 받고 있었다. 한편, 친구인 김진석은 그 무렵 1천여 매 가까운 소설의 원고를 탈고하고 나를 찾아왔는데, 그동안 자신의 책을 출판해 줄 출판사를 찾기 위해 애를 쓴 흔적이 엿보였다. "출판사를 선정 했나?" 그는 피식 웃었다. 아마 여러 군데의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한 모양이었다. 돈 들여서 팔리지 않는 책을 출판할 출판사가 없다는 걸 잘 아는 김진석은, 나름대로 이번 작품만은 문학성에 비중을 크게 두었다. 김진석의 작품 역시 출판사에서 혐오하는 내용의 하나였다. 그 즈음 출판계는 '사람 시장'이란 책이 한창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었다. 직장이나 집에서 가볍게 읽고 자신의 욕구를 주인공에게 충족시키려는 대사(代謝) 심리에서 그 책은 무척 많이 팔렸다. 무협지를 현대물로 옮겨 놓은 작품이었다. 정의감이 강한 주인공이 사회악을 퇴치시켜 정의 사회를 이루어 간다는 내 용인데, 이런류의 소설은 이미 대만이나 홍콩에서 한물 간 소설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소설이 잘 읽히고 있었다. 이 이유는 독재 정권 아래서 위축된 민중들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허무맹랑한 주인공을 영웅시하는 데 대해 큰 호감을 가졌던 것이다.
"내 소설에는 섹스가 들어 있지 않다는 거야. 섹스가 적당히 들어 있고 미스터리와 유머가 있어야지 책이 팔린다는 거지" "고리타분하단 말이지?" "그래. 그러나 내 책 속에는 인간의 영혼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 '사람 시장' 그 책, 유준성이란 친구가 중국 소설을 표절한 거야." "표절이라니?" "중국 이야기를 한국 현실에 맞게 쓴 것이지. 왜 '수호지'나 '삼국지'에 등장하는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을 내세워, 사회 부조리를 저지르는 악당들을 무술을 써 퇴치시키는 이야기야," 하면서 김진석은 자신이 언젠가 읽은 '대풍(大風)'이란 책 이야기를 꺼냈다. '대풍'이란 일종의 무협지였다. 주인공은 온갖 무술을 익힌 고단자로서, 용모가 미남이고 체구가 단단하며 머리가 영리하다. 난세(亂世)에는 이런 인물이 필요하다는 걸 작가는 잘 알고 있어서 이를 소설의 전면에 내세웠다. 영웅이 없는 속물들만 존재하는 시대에 이런 영웅의 등장은 호기심을 자아내게 한다. 마약과 세금 비리, 폭력, 인신 매매 자들이 날뛰는 어지러운 시대에 이를 척결하는 정부의 관리들도 한패거리가 되어 국민들을 괴롭힌다. 힘이 약한 국민들은 그저 방관만 하고 피해를 당할 뿐 이다. 이때 등장한 주인공은 잘 훈련한 무술의 힘과 머리로써 이들을 각개 격파한다. 그리고 그를 사모하는 여성과 해피 엔딩 한다. 이 책이 잘 팔리자 출판사에서는 다시 주인공을 이웃 나라인 일본에 침투시켜 그 곳의 악들과 대결케 한다. 그 곳의 야쿠자들 세력을 굴복시키고 마약 사범을 소탕한다. 여기에 적당히 섹스를 가미시켜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김진석이 다소 흥분한 듯,
"이 책 쓴 친구 내가 잘 아는 놈이야. 일종의 글 사기꾼이지. 틀림없이 '대풍'이란 책을 베꼈을 거야. 상황 설정이 거의 똑같거든. 다르다면 중국과 한국의 지명만 다를 뿐이야. 왜 있지 않나? 중국이란 나라는 원래 광대하고 인물이 많기로 유명하지. 그래서 난리가 일년에 몇 번씩 일어나지. 이것을 그들은 대란이라고 한다네. 대란 때는 반드시 영웅호걸이 등장하지. 혁명을 그들은 대란이라고 한다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각의 난, 신해혁명, 홍수전의 난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난리가 벌어지지, 이때 등장하는 영웅호걸이 무척 많다네. 한국에서는 기껏해야 무신의 난이나 만적의 난, 이괄의 난, 정권 노린 난리에 불과하지만 그 친구들은 그게 아니거든. 거기에 재미를 섞어서 소설로 쓴 것이 한 트럭이 훨씬 넘는다네. 그것 가운데의 하나를 소재로 뽑아 무식한 독자들에게 읽히게 하면 그 책이 그만큼 인기를 끌 거야. 또 요즘 세상이 어수선하지 않은가? 난세에는 이런 유의 책들이 잘 팔린다는 걸 작가나 출판사는 알고 있었던 거야." 하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얼마 전 대만에 갔을 때 어느 헌책방에서 봤지. 나는 처음 그 책의 내용에 재미가 있어서 번역을 할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에서 버젓이 책이 돼 팔리고 있었던 거야. 번안이라고 해야 할 책이 작가의 이름이 인쇄돼 팔리고 있었던 거지. 바로 유준성이란 친구지." "그 친구 돈 좀 벌었지?" 내가 묻자, "좀이 아니야. 엄청나게 벌었네. 그러나 양심을 속여서까지 돈을 벌면 뭣하겠나? 작가의 생명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양심과 자존심 아닌가?"
김진석은 내게 자신의 원고를 보여 주었다. 원고지에 쓴 것을 타이핑해서 읽기에 수윌 했다. 그 내용은 내가 예측한 대로였는데, 출판사 쪽에 보이기 위해서 간단히 그 줄거리를 요악한 것이었다.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어떤 젊은이를 만났다. 그 젊은이는 자신을 일컬어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고 했는데, 그 자리에서 화백(書伯)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으로 보아 조금 당돌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순박한 생김새와 초롱초롱히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우수를 머금은 것 같은 눈매에서 친밀감을 느꼈다. 첫눈에 그는 요즘 같은 약아빠진 젊은이들이 많은 가운데 순박한 영혼을 갖고 있는 사람이란 걸 느껴 한번쯤 사귀어 봐도 좋은 사람으로 여겼다. 나는 그와 몇 번 마주한 술자리에서 그의 심상치 않은 과거에 큰 기대가 생겼다. 흔히 사람의 과거란 적당히 고생 하고, 또 부모를 일찍이 여의었다든가, 고학을 해서 공부를 했다든가 하는 그 나이 또래의 이야긴데 반해 그의 이야기는 흥미를 끌기에 넉넉했다. 조실부모한 그는 어떤 절의 보살에게 맡겨져 소년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가 절에 맡겨진 이유는, 어떤 관상쟁이가 명을 길게 하기 위해서는 보살 할머니에게 가야 수명대로 산다는 말 때문이다. 그는 보살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의지하며 절의 잡일을 맡아 보기도 하고 불경을 읽으면서 자랐다. 그는 절의 벽에 그려진 탱화를 보면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남들이 보기에 그 재주가 뛰어나 장차 화가가 되리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그 말에 힘을 얻어 나름대로 그림 공부를 열심히 했다. 종이가 없으면 땅바닥에도 그리고, 남이 쓰다 만 찢어진 노트에도 그리고, 수없이 많 은 그림을 그렸다.
그가 그리는 대상은 눈으로 보이는 모든 대상이었다. 또 보이지 않는, 말로만 들은 먼 나라의 풍경까지도 그렸다. 그러나 그의 그림의. 주제가 된 것은 생명이었다. 움직이는 모든 것에 대해 애정을 갖고 열심히 그렀다. 메뚜기, 참새, 두견새, 들판, 하늘, 찾아와 공양을 하는 시주꾼들 등등‥‥‥
그러나 항상 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그 주제의 빈약함에 불만을 가졌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어머니처럼 여기던 보살 할머니가 죽기 며칠 전 연꽃을 보고 싶다면서 지난밤의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을철에 연꽃이 피어 있다는 보살의 꿈이 믿어지지 않았으나, 보살 할머니의 소원을 이뤄 주겠다는 일념으로 등에 업은 채 논길을 따라 걸었다.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