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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53
5월7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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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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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l4d_F-EP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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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참 사랑이 지닌 몇 가지 특징>
그간 살아오면서 꽤 큰 접촉사고 몇 건을 경험했었는데, 가만히 따져보니 하나같이 교통안전법규를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빨간 신호등 앞에서는 무조건 서있어야 되는데, ‘슬금슬금 작전’으로 진행하다가 한건, 신호등 없는 교차로에서는 무조건 서행해야 되는데, 그대로 돌격하다가 한건, 아무리 급하다 해도 불법 유턴은 절대 하지 말아야 되는데, 미사 시간 늦었다는 핑계로 ‘에라 모르겠다’하며 핸들을 틀다가 한건...
차량 제때 제때 정비 잘하고, 과속하지 말고, 신호 준수 잘하고, 다시 말해서 교통 법규만 잘 지키면 절대로 사고 날 이유가 없습니다. 교통사고로 인해 크게 다치는 부상자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사망자가 얼마나 많은지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결국 오래 오래 제명대로 사는 길은 ‘교통 계명’을 잘 지키는 일이군요.
신앙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오래 오래 잘 사는 비결은 오직 한 가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신앙 계명’을 잘 지키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이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수많은 율법 조항과 모든 계명을 종합하고 요약한 것이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랑의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보통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범한 사랑, 통속적인 사랑과는 많이 다른 사랑, 참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지니는데, 그 첫 번째가 ‘무차별성’입니다.
비가 내릴 때 착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역에만 비가 내리고, 악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참사랑의 원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든 선인이든,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전과자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인간 존재 그 자체로 그분 사랑의 대상입니다.
참사랑의 두 번째 특징은 ‘무상성’입니다. 그저 열심히 사랑할 뿐이지 그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참사랑이 지닌 특징은 사랑에 빠진 나머지 자신을 잊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참사랑의 특징은 상대방을 자유롭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참사랑은 그 사랑이 깊어 가면 갈수록 강압하지 않고 통제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를 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베푸셨던 사랑의 장면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그려가며 묵상해봤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자기중심적, 본능적 사랑과는 철저하게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정말이지 차별 없는 사랑,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철저하게도 이타적인 사랑, 상대를 한없이 성장시키고 해방시켜주는 성숙한 사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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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키 작은 사람도 거인의 어깨에 올라 앉으면 거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성덕(聖德)이란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성(聖) 도미니코 사비오(1842~1857)는 우리에게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첫영성체 때 한 결심을 한번 보십시오. 기가 막힙니다.
“앞으로 나의 친구는 예수님과 성모님이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죄를 짓지 않겠다.”
1854년 도미니코 사비오를 처음 만난 돈보스코 역시 깜짝 놀랐습니다. 나중에 이런 증언을 남겼습니다.
“나는 그의 영혼 안에서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심을 느꼈다. 하느님의 은총이 이미 이 어린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돈보스코가 한 ‘우리 모두 성인(聖人)이 되자.’는 주제의 강론을 듣고 난 도미니코 사비오는 며칠 후 돈보스코를 찾아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돈보스코! 제 안에 갈망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성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간 저는 성인이 되는 것이 그렇게 쉽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기쁘게 지내면서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정말로 성인이 되고 싶습니다.”
도미니코 사비오의 결심을 듣고 난 돈보스코는 크게 기뻐하면서 그가 계속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었습니다.
“도미니코 사비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간절히 원하시는 바는 그리 복잡하지 않단다. 일상의 작은 규칙들을 잘 지키는 것, 그리고 항상 기쁘게 지내는 것이란다. 그리고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공부와 기도에 충실하고 친구들과 잘 놀고 어울리는 것, 그게 전부란다. 그리고 너는 아직 어리니 나이에 맞지 않는 힘든 보속은 피하고, 기도도 너무 길지 않게 하면 좋겠다. 주님께서 네게 바라시는 보속은 순명이란다. 앞으로 너는 내말을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된단다.”
돈보스코의 제안이 살짝 마음에 들지 않았던 도미니코 사비오는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돈보스코! 제가 다른 보속을 하도록 해주세요.”
“좋아! 누군가 너를 모욕하면 그것을 인내하며 받아들이고, 추위·더위·바람·비·피곤함 그리고 건강 때문에 겪게 되는 모든 불편함을 잘 참는 보속을 허락한다.”
“그것밖에 없어요?”
“그럼 네 친구들을 주님께 데려가도록 노력해 보아라.”
돈보스코의 호주머니 속 손수건 같았던 도미니코 사비오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 돈보스코의 지도를 단 한치 오차도 없이 자신의 구체적인 생활 안에서 이행했습니다. 그결과 그는 오라토리오 안에서 가장 모범적인 청소년으로 빛을 발했습니다. 그의 모범을 따라 수많은 개구장이들 역시 성덕의 길로 올라갔습니다.
안타깝게도 도미니코 사비오는 1857년 3월 9일, 15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1954년 6월 12일 비오 12세 교황님께서는 그를 성인품에 올렸습니다.(클라우디오 루소, 돈보스코가 만난 아이들, 돈보스코미디어 참조)
“키 작은 사람도 거인의 어깨에 올라 앉으면 거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어리고 병약했던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앉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 덕분에 그는 돈보스코와 함께 역사에 길이 남을 찬란한 별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의 어깨 위로 올라 앉을 것인가? 깊이 고민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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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7zx7RFDM6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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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회복? 관계는 ‘뜻’에 의해 저절로 맺어진다>
오늘도 역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말씀의 연장선상입니다. 우리가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예수님께 붙어있어야 하는 이유는 성령을 수액처럼 받아야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라고 하셨고, 결국 계명을 따름이 머물 곳을 결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장소는 그 장소가 요구하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품 안, 즉 하느님 나라에 머물려면 그분이 요구하시는 계명, 곧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이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국 ‘뜻’, ‘계명’은 자신이 머물 곳을 선택하게 되고 그 머무는 곳에서 받는 양식, 즉 특혜를 입을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이것에서 더 나아가 ‘친구’가 생기게 만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친구의 친구는 친구입니다. 저도 신학교에 늦게 들어갔지만, 일찍 들어간 친구 신부가 있었기에 그 동기들이 선배들이지만 또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결국, 친구를 사귀게 만드는 것은 모든 하느님 자녀의 친구인 그리스도와 친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강의 부탁을 받았는데 제목이 ‘관계회복’과 관련되는 것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가 불행한 까닭이 나와 관계가 잘 안 되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과 관계가 안 되는 이들, 예를 들면 유다 지도자들이나 가리옷 유다와 같은 이들과 끝까지 관계회복을 하기 위해 노력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당신이 싫다고 끝까지 고집부린다면 그분은 놓아주십니다.
꼭 나와 관계가 잘 유지되지 않는다고 그 사람과 관계회복을 위해 에너지를 소진할 필요는 없습니다. 관계는 내 의지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성으로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모기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한다고 좋은 관계가 맺어질까요? 행복을 위해 모기가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기 전까지는 잠시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영화 ‘어벤저스’는 12년간 23편의 작업을 통해 방대한 스케일의 스토리와 세계관을 정립했습니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속편이 나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어벤저스의 핵심 히어로는 ‘아이언맨’입니다. 그리고 어벤저스가 물리쳐야 했던 최대의 적은 타노스였습니다. 타노스는 지나치게 많은 생명체로 우주가 가득 차버려 우주 존망이 위험해졌기 때문에 인피니티 스톤을 모아 우주 생명체의 절반을 죽게 만드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성공합니다. 어벤저스 팀도 절반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아이언맨의 희생으로 타노스가 죽고, 죽었던 모든 생명체가 다시 살아납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라는 당신 팀을 꾸리시고 당신이 사탄의 우두머리를 처치하시기 위해 목숨을 바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흥행하는 모든 영화의 기반은 성경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에 따른 결과가 안 들어간 영화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어벤저스 팀의 공공의 적이 없을 때는 어떨까요? 가장 큰 적은 적이 아닌 것처럼 그들에게 다가와 그들을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어벤저스 : 시빌워’는 같은 팀끼리 싸우는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공공의 적이 명확하지 않을 때 팀원이 친구가 아닌 적으로 바뀌어 같은 팀끼리 싸움과 분열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어디에서는 발생하는 일입니다.
우리를 친구로 만들어주는 것은 친구가 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아닙니다. 공공의 적이고 공공의 목표입니다. 이것이 오직 사랑만이 그리스도의 친구가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친구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영화 ‘오블리비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계인에게 복제된 인간임을 모르고 지구인을 공격하고 있었던 주인공 잭 하퍼는 결국 자신이 적을 위해 일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적이었던 이들이 친구가 되고 친구였던 이들이 적이 됩니다. 이전 아내가 진짜 아내가 되고 지금의 아내는 이제 자신을 죽이려 합니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목적에 따라 친구도 원수가 되고 원수도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굳이 사이가 안 좋아진 사람과 친해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같은 본성끼리 모이는 것입니다. 모기는 모기끼리, 원숭이는 원숭이끼리, 사람은 사람끼리, 하느님 자녀는 하느님 자녀끼리 모이게 되고 친구가 됩니다.
사람이 모기와 친구가 되려고 하는 것은 집착일 뿐입니다. 어느 날 모기가 사람처럼 된다면 나와 친구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하느님 자녀는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 하기만 한다면 어느새 주위에 그리스도의 친구들이 모여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과 함께 세상의 악과 싸워나가면 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결국 그것을 반대하는 것들과 싸움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5,19)
세상의 악의 세력과 싸워 영혼을 구해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친구들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우두머리를 제거하기 위해 희생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성령으로 우리 각자에게 당신의 일을 이어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이 싸움을 같이하고 있다면 교회는 분열되지 않고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친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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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12-17 :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이것이 당신의 계명이라고 하신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이라고 하였다. 악마는 믿지만(야고 2,19 참조)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믿음과 희망이 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다른 모든 계명도 지키게 될 것이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모든 계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계명은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과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1티모 1,5)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고 원칙을 말씀하셨다. 이 원칙에 따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라는 말씀은 바로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더 서로를 위하여 죽어야 하겠는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주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해서 뿐 아니라, 당신의 원수들을 위해서도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6)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로마 5,10)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친구들이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러니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라고 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그분과의 친교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친구만이 친교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가 되는 것도, 원수가 되는 것도 모두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종에서 친구가 되게 해 주셨고 마지막으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그러기에 우리는 단계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에 우리의 삶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그분과 아름다운 친교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15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율법 때문에 종이 되었지만, 당신의 말씀으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하셨는데, 이제 제자들은 ‘하느님의 친구’가 되었다. 이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따랐던 ‘말씀’이며, 그가 “하느님의 벗”(야고 2,23)으로 불렸던 것이다. 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지혜가 사랑에 도달하면,그 지혜는 우리를 하느님의 친구로, 종이 아니라 자녀로 만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16ㄱ절) 이 말씀은 우리가 가서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은총을 받도록 정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기꺼이 나아가 우리의 행실로 열매를 맺도록 가르치셨던 것이다. 우리는 선하게 되도록 사악했던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과의 친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이런 친교가 그 이유이다. 우리가 당신을 따르기 때문에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름으로써 우리가 영광스러워졌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삶이다. 우리의 행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의 열매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확실히 남아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가지가 온 세상에 뻗어 나가게 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나아가야 한다. 어떤 것을 행하고자 할 때는 이미 마음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 열매로 잘 모르고 헤매는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열매를 맺는 이가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때에 지극히 바람직한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사랑은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이다.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그분께서 우리를 지명하셨다. 그것은 가지가 나무와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우리가 그분과 떨어져서는 맺을 수 없는 열매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 두 사랑의 계명이 우리의 열매이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하였다.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새 계명을 지키는 우리가 되도록 은총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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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주교회의 사무국장)]
신앙에도 나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10대와 30대, 70대가 이해하는 사랑이 각각 다르듯이, 신앙의 나이 또한 사랑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태어나고, 걷고, 자라고, 집을 떠나 독립하고, 우리가 이렇게 하루하루 성장하듯이 우리의 신앙도 사랑을 얻고, 이해하며, 사랑의 기준에 따라 매 순간 ‘예.’ 또는 ‘아니요.’라고 응답하면서 성장해 나갑니다. 어떤 때는 예수님의 친구로 살다가, 어떤 때는 예수님의 종으로, 또 어떤 때는 예수님의 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분의 친구로 살지 않아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 주시며,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 참조)에서는 누가 나의 이웃 곧 친구인지 또는 친구가 아닌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이라는 개념이 이스라엘 땅에 사는 사람으로 한정되어 이해되던 당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랑을 알고, 사랑을 느끼며, 사랑을 실천하는 많은 이를 ‘이웃’ 곧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이지 않고 구체적입니다. 이 구체성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대한 응답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과 가장 먼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를 가르는 기준이 필요성이나 다른 현세적 이유는 아닙니까? 우리는 사랑을 통하여 모두 가까운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의심과 망상, 두려움과 원망 속에 있지 말고 진실되게 사랑을 실천하며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사람이 타고난 사명이며 그리스도인에게는 소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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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2-13)
이 말씀은, 요한복음 13장에 있는 ‘새 계명’을 다시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계명’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하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알게 될 것이다.”는 “알게 하여라.”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너희의 사랑 실천을 보고 너희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라.”입니다. ‘사랑 실천’은 신앙인의 ‘신원 증명’과 같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사랑 없는 신앙인은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사람, 즉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1코린 13,2) 이것은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사랑 없는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없는 집단, 즉 사이비 교회입니다.
1)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이 말씀을 ‘사랑의 방식’을 강조한 말씀으로 생각하면, 이 말씀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라는 계명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을 “나는 너희를 나 자신처럼 사랑한다. 그러니 너희도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이웃은 곧 나 자신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웃은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을, “내가 너희에게 준 사랑처럼”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이 말씀은 13절의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랑을 서로 나누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준 사랑과 똑같은 사랑을 너희도 서로 나누어라.”) 사랑은 전부를 주는 것입니다. 만일에 자기가 먼저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은 음식을 굶주리는 이웃에게 준다면, 그것은 선행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사랑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은 함께 먹거나 함께 굶는 사랑입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라자로에게 가끔씩 빵 부스러기를 던져 주었습니다.(루카 16,21) 아마도 그는 자기가 자선 실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의 행동은 사랑으로도 선행으로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3)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 말씀은 “너희들끼리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교회 문을 닫아걸고 신앙인들끼리만 사랑을 나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교회는 폐쇄되어 있는 이기적인 집단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공동체입니다. 사랑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확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사랑하면서도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6-48) 자기들끼리만 사랑을 나누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 즉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13절의 ‘친구들’이라는 말은, ‘친한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4)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말씀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마라.”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랑 실천을 할 때에는 “이만큼 하면 충분하다.”라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면서 멈추지 말고 차고 넘치도록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강도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했고, 그것을 해 주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겠지.”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강도당한 사람에게 무엇이 더 필요한지를 생각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이 그의 사랑을 잘 나타냅니다.(루카 10,35)> 여기서 ‘목숨’은 실제 목숨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자신의 모든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이 말은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에 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랑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랑에 다 해당됩니다.
5)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표현 때문에,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놓는 사랑’만 인정하시고 다른 사랑은 인정하지 않으시거나 낮춰 보신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한다면 모든 사랑은 똑같이 ‘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의 작은 실천도, 순교처럼 목숨을 바치는 큰일도, 모두 다 위대하고 큰 사랑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사랑을 멈추면 안 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이웃에게서 오는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그 사랑을 다시 모든 사람에게 나눔으로써 살아가는 힘을 얻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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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톨릭평화신문의 지면 중에 ‘사유하는 커피’를 좋아합니다. 지난 4월 11일에는 색과 본성이라는 주제로 ‘보라색과 흰색’의 의미를 전해 주었습니다. 보라색을 뜻하는 퍼플(Purple)은 조개를 칭하는 라틴어 퍼퓨라(Purpura)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보라색 옷을 만들려면 많은 조개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보라색 옷은 귀족들이 입는 옷이 되었다고 합니다. “레이즈드 투 더 퍼플(Raised to the Purple)은 추기경이 되다.”라는 관용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보라색은 신앙심을 표현하는 색이라고 합니다. 사랑을 의미하는 빨강과 신뢰를 나타내는 파랑이 합쳐진 색이 보라색이기 때문입니다. 보라색이 사순절과 연결되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왕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보라색 눈물(purple tears)'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죽음에서 극적인 반전을 이끌어내는 부활을 흰색이 상징하는 사연은 무엇일까요? 흰색 상복은 단지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밝은 색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인도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흰색을 숭배했고, 북방 기마 민족들은 흰색 말을 신의 축복이라 여겼습니다. 우리는 백의민족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빛(흰색)이 어둠(검은색)을 달래며 세상의 모든 색이 만들어진다고 직관했습니다. 레오나르드다빈치는 흰색을 ‘비어 있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빛을 품고 있는 ‘근원’이라고 보았습니다. 교회는 이런 인식에서 성모님의 의상을 흰색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 탄생과 부활에 제의 색이 흰색인 것은 ‘하늘엔 영광이 가득하고 땅에는 환희가 넘치는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을 의미합니다.
어릴 때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파란마음 하얀마음’입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힌 속에서 파아란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힌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저는 파란색을 좋아했습니다. 하늘이 파랗고, 바다도 파랗고, 파란 색은 싱그러웠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도 하느님의 뜻인 것 같습니다. 색이 드러나면 색을 다르게 보지 않고, 색으로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피부의 색으로 차별하는 세상을 살았고, 지금도 그런 세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던 것을 모르는 것처럼 세상을 떠나는 것도 모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어진 현실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색을 가졌어도, 우리의 마음을 몰라도, 우리가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몰라도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의 계명은 공동체를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이 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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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구약 성경에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종’의 모습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하느님의 종으로 여기고, 그분의 말씀에 순명하며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신약의 세례자 요한도, 가브리엘의 잉태 예고 앞에서 성모님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모든 종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성부의 뜻에 순명하시며 자신을 바치시는 희생을 통해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과 구원은 우리를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인도합니다. 더 이상 우리는 종의 비천한 모습이 아니라 친구로 예수님 곁에 머물게 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 살과 피로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려 주신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그분의 친구가 되는 영광을 거저 얻은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그래서일까요? 가끔은 우리가 뽑혔다는 사실이 두렵고 싫어서 예수님을 외면하고, 그분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싶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부르시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큰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지만, 우리는 힘겹게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걸으시는 예수님 곁에 잠시도 머물러 드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참된 믿음은 사랑할 용기에서 자라납니다. 소유를 위한 이기적인 욕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가치 있게 인정해 주고,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용기 말입니다. 예수님 같은 사랑을 우리도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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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 가운데에는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막상 자신은 사랑을 등진 삶을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사랑을 실천하시고, 우리에게도 실행하도록 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비록 온갖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우리 신앙인의 삶은 기쁨으로 넘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종이란 신분은 살아 있는 도구에 불과하였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일을 시키면서도, 그 일의 목적이나 결과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지요. 그저 명령과 복종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대해 주시며, 당신의 계획과 목적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동료로 받아 주신 것이지요.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택하셨듯이,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부르신 목적은, 우리가 이 땅에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당신 도구로 쓰시기 위함이지요. 이러한 신앙인의 사명에 대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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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신기현 시몬 신부님]
옛날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동물 사냥을 잘하는 사냥꾼이 한 명 살았습니다. 그는 하루에 사냥을 나가면 많은 짐승을 잡아서 그 짐승들을 장에 내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사냥꾼은 산으로 올라갔는데 그 날 따라 산에 안개가 잔뜩 끼고, 멀리 볼 수 없는 상황이어서 사냥이 별로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산으로 계속 올라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정오가 되기까지 한 마리의 동물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 두고 집으로 갈까 하다가 물이 흐르는 폭포수 밑에서 점심이나 먹고 내려가려고 했던 사냥꾼은 멀리 폭포수 있는 곳에 웬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소리를 죽이고 물체를 바라보았습니다. 틀림없이 움직이는 동물이었습니다. 멀리 있고, 안개 때문에 사슴인지, 곰인지, 늑대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동물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총을 짐승에게 겨냥하여 조심스럽게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정확하게 명중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동물은 쓰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총을 쏘았습니다. 역시 그 동물은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이상한 나머지 사냥꾼은 폭포수 가까이로 다가갔습니다. 가까이 다가간 사냥꾼은 기절하듯 놀랐습니다. 거기엔 어미 곰이 커다란 바위를 들고 있었고, 그 밑에 아기 곰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어미 곰의 이마와 가슴에선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가까이 다가가니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아기 곰들이 쉽게 잡을 수 있도록 바위를 든 순간 총을 맞았으나 아기 곰들이 죽을 것을 염려한 어미 곰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바위를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미 곰은 아기 곰들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는 모습으로 보호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 돌아 가시 전 못내 사랑하시던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밤을 지세우시며 제자들에게 고별사를 발표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 계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첫째가는 중요한 유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삶 속에서 따뜻하고 그윽한 눈길로 그들을 부르셨고, 공생활 중에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하는 사랑의 공동체의 모습을 그들에게 확연하게 드러내셨고, 그들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자기를 완전히 내어주는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더 나아가 죄 많은 인간들을 완전히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상의 희생제사를 통해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세상 안에서 드러났으며, 이것을 제자 공동체가 구현하도록 당부하고 계십니다.
비록 당신은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떠나셨지만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 공동체는 당신께서 보여주신 사랑 실천의 방법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고, 그 공동체의 모습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주님께서 전해주신 계시의 핵심을 알아듣도록 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계명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통제하는 중심적이고도 핵심적인 계명인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존재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에 힘입어 제자들은 그들의 공동체를 사랑의 공동체로 가꾸어 나갔고, 그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하였듯이 우리 역시 우리가 몸담고 있는 본당 공동체에서 나만, 내 가족만이 아닌 모든이와 함께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해 나아갈 때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하느님과 나, 나와 너, 그리고 나와 자연 모든 만물과 함께 하는 관계성 속에서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새로운 계명을 충실히 이행해 나아간다면 새로운 우리 자신들로 거듭 태어나게 될 것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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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그 방법과 조건을 가르쳐주십니다. 또한 그 사랑을 해야 할 이유도 밝혀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랑해야 할 그 방법과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곧 “사랑하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나아가 “서로 사랑하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고 하십니다.
이는 무엇보다 먼저, 당신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음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온전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사랑, 다름 아닌 당신이 보여주신 이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보여주신 바로 그 사랑인, “가장 큰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그렇다면, 친구란 누구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친구의 조건을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예수님 편에서의 친구 되게 하는 조건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편에서의 친구 되게 하는 조건입니다.
예수님 편에서는 주인이 하는 일, 곧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종이 아니라 벗이 된다고 하십니다.
곧 같은 한 아버지를 아는 것이 친구가 되는 조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실천하는 것이 친구 되는 조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실제로 서로 사랑을 실천할 때라야 친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벗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오늘 <복음>에서는 사랑의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들어주시게 하려는 것이다.”(15,16)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을 주신 이유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까닭에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사랑하는 까닭에 우리를 벗으로 선택하시고, 사랑하는 까닭에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권능을 힘입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얻어주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결국에는 목숨을 내놓으시고 죽으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바로 그 “가장 큰 사랑”을 하셨습니다. 곧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그 명령을 실천하여 우리도 당신의 벗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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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당신의 벗, 당신 것으로 뽑으셨습니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사랑, 당신의 자애와 호의를 입히셨습니다.
당신 진리를 가르치시고, 당신을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소유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양식을 먹이셨습니다.
저는 끝없이 빗나가지만, 당신은 끝없이 충실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사랑의 소명을 살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으로 세상을 축복하게 하소서.
저의 전 존재, 전 생애가 당신의 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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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7)
<예수님의 친구가 되자!>
'서로 사랑하라'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곧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니 '하고 안 하고'의 선택권이 우리에게 없고,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계명이고, 이 명령(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심성 때문입니다. 곧 나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고 싶고,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들에게만 잘해 주고 싶은 마음, 그들하고만 서로 사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랑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도 아니고, 구원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끼리끼리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은, 원수와 나를 박해하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사랑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예수님께서 나를 뽑아 사제로 세우신 이유, 예수님께서 우리를 뽑아 하느님의 자녀로 세우신 이유는, 지금 여기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죽지 않고 함께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15,14)
그러니 예수님을 어려워 하는 사람은, 또한 예수님의 직무대리자인 신부님을 어려워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 곧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를 친구로 불러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면서, 오늘도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하는,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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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
요한 15,12-17 (나는 참포도나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벗>
서로 아니
벗입니다
서로 따르니
벗입니다
서로 이끄니
벗입니다
서로 위하니
벗입니다
서로 깃드니
벗입니다
서로 품으니
벗입니다
서로 사랑하니
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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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아치 드 베커 박사는 2016년에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베키 박사는 45명을 대상으로 컴퓨터 게임을 하게 했는데, 모니터에 나타나는 여러 개의 바위 중 하나를 골라 뒤집었을 때 뱀이 나오면 약간의 전기충격을 받게 했습니다. 게임의 수준을 3단계로 조정했습니다. 첫째는 뱀이 없는 바위를 고를 수밖에 없어 전기충격을 전혀 받지 않습니다. 둘째는 무조건 뱀이 있는 바위를 골라서 100%의 전기충격을 받습니다. 마지막 단계는 언제 뱀이 나올지 모르는 불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입니다.
스트레스 지수가 가장 높은 집단은 어디일까요? 100% 전기충격을 받는 집단이 아니라, 충격을 예측할 수 없는 집단이 훨씬 더 높게 나왔습니다. 전기충격보다 더 두려운 것은 바로 불확실성이었습니다. 나쁜 연인과 헤어지지 못하는 것, 형편없는 직장인데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더 나쁜 연인을 만날 수도 있다는 불확실성, 직장이 아예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겠다는 불확실성이 지금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이런 불확실성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커다란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때 더 큰 힘이 있는 곳에 의지해야 합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어렸을 때 무조건 부모님께 의지함으로 힘을 얻었던 것처럼, 무조건 주님께 의지함으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부모님을 굳게 믿었고 부모님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사랑을 갖고 있을 때 진정으로 주님께 의지할 수 있으며 그분 안에서 힘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어떤 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을 행하면서 그를 닮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랑을 실천할 것을 그러면서 당신을 닮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면서 닮아가게 될 때, ‘종’의 관계가 아닌 ‘친구’의 관계가 됩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지만, 친구는 친구의 일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것을 우리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불확실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이로 인해 스트레스는 점점 쌓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중심을 잡아주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과 친구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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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긍정>
긍정적 삶이 자신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결과를 맞이하면 크게 실망하면서 “나는 안 돼.”라며 바로 부정적인 모습으로 변합니다.
잘 살려면, 부자가 되려면, 좋은 직장에 취업하려면…. 그 밖의 많은 경우에 긍정적인 생각은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결과에 대한 긍정성을 갖는 것은 조금 곤란해집니다. 이 결과에 대한 긍정은 실망을 가져올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긍정은 과정과 태도에 대한 긍정입니다. 결과물이 아닌 한 방울씩 떨어지며 스며드는 과정이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나의 긍정은 어떤 모습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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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증거되어야 하고, 기회는 많지만 실제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말하지만, 자신을 죽이는 희생의 사랑보다는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유를 주지 못하고 일방적이며, 상대를 속박할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랑을 이유로 붙잡고 집착하며 기대를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상처를 주고받으며 후회합니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 안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2-13).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데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심한 모욕과 침 뱉음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 고 선언하시며 당신 친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벗으로 삼으시고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사실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모두를 바쳤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미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 마지막 남은 것을 주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모두를 내놓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할 기회는 끊임없이 주어지지만 지금 놓치면 그 기회는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다음에 오는 기회는 또 다른 기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나의 일방적인 방식으로 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너무 많은 사랑을 요구하여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고, 아무런 구속이나 강요가 없이 자유를 주는 사랑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이는 날로 기뻐하고 자유롭도다. 사랑은 짐을 모르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기에…”(성녀 젤뚜르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자유를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사랑할 수 있게 하려고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유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게 사랑의 노예가 되는 데 있습니다. ” ... 사랑은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잘 꾸며놓은 연극, 그저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번 해 본 빈말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피에르신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나를 뽑아 세우셨으니 내가 예수님께 맞춰야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뽑으신 분에게 맞게 나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자유를 주는 사랑, 고통을 감당하는 사랑에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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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과 우정(友情)의 여정-
관상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관상입니다. 코로나 사태는 바로 삶의 관상적 차원을, 사랑을 회복하라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멈추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라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 잡지 46호에서 읽은 코로나 시대의 메시지 셋에 대한 상징적 해석도 재미있었습니다. ‘마스크 쓰기:침묵하라!, 거리두기:고독하라!, 손씻기:회개하라!’ 바로 삶의 깊이에서 예수님과 우정의 여정을 새롭게 시작하라는 사랑의 메시지, 고독과 침묵, 회개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입니다. 좋은 손님은 빈손으로 와도 반가워 무엇이든 주고 싶습니다. 얼마전 빈손으로 방문해 미안해 하는 분에게 ‘형제님 자체가 참 좋은 선물’이라며 격려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예수님과 좋은 사랑과 신뢰 관계의 우정을 지닌 이들이라면 예수님께서도 빈손으로 와도 반가워할 것이며 오히려 큰 상급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 갈 때 우리가 갖고 갈 것은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우정관계 하나뿐일 것입니다. 진정 행복하고 자유롭고 지혜로운 내적부자는 예수님과 사랑과 신뢰의 우정 관계를 날로 깊이하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수요일 일반 알현 시간에 교황님께서 주신 ‘관상기도; 사랑의 길 안내자’란 내용도 참 평이하면서도 깊고 아름다웠습니다. 약간 길다싶지만 많은 부분 인용합니다.
-“모든 인간이 우리 일상에 맛을 주는 소금과도 같은 관상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짹짹 지저귀는 새들을, 떠오르는 태양을, 예술과 음악을 관상할 수 있다. 관상한다는 것은 주로 ‘행위의 길’이 아니라 ‘존재의 길’이다. 관상은 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의존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우리 마음을 정화하고 우리의 시선을 선명하게 하며 다른 각도에서 삶의 실재를 파악하게 한다. 관상은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믿음의 응시凝視이다. 모든 것은 사랑의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그때 실재는 다른 시선으로 관상된다. 그리스도님께 대한 사랑의 관상은 적은 말마디를 요구한다. 단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은 나를 바라본다!’
응시만으로 충분하다. 우리 삶은 그 무엇도 우리를 떼어 낼 수 없는 무한하고 신뢰 가득한 사랑으로 에워싸여 있다는 확신만으로 충분하다. 예수님은 이런 ‘응시의 대가大家’로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과 사랑의 친교 안에 머무는 시간과 장소를 발견하신다. 관상은 활동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과거 어떤 영적 스승들은 유감스럽게도 관상과 활동에 대한 이원론적 사고를 지녔다.
실제 관상과 활동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복음에서 유일하고도 위대한 부르심은 사랑의 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것의 절정이자 핵심이다. 이런면에서 애덕과 관상은 동의어이다. 그들은 똑같은 것이다.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들이자 관상기도의 대가들중 한 분인 십자가의 성 요한을 가르침을 생각해 보자.
‘순수한 사랑의 작은 행위가 다른 모든 활동보다 교회에는 더 유익하다. 겸손에 의해 정화된, 우리 에고(ego)의 추정(推定;추측해서 판정함)에서 나온 것이 아닌 이런 기도로부터 나온 것은 비록 사랑의 숨겨진 침묵의 행위일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기적(miracle)이다.’”-
관상은 사랑입니다. 비상한 관상이 아닌 평범한 일상의 사랑의 관상입니다. 사랑의 관상가들에게는 삶은 온통 하느님 사랑의 기적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 사랑의 관상가가, 관상기도의 대가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분명히 각인되는 주님의 세 귀한 말마디입니다.
1.“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바로 우리 사랑의 잣대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나를,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형제들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무사한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집착함이 없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말그대로 순수한 아기페 사랑입니다. 이런 결정적 모범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이십니다.
2.“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아브라함과 모세가 하느님의 친구라 불렸듯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복음입니다. 얼마나 가슴 설레게 하는 행복한 말씀인지요! 주님이자 스승이자 동시에 우리의 친구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친구가 될 때 진짜 관상가요 관상기도의 대가가 됩니다.
외로움, 그리움은 말끔히 사라지고 늘 충만한 기쁨의 행복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원한 길벗이자 도반道伴이신 예수님과 우정의 여정중인 우리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요. 우정의 여정은 그대로 관상의 여정, 사랑의 여정이 됩니다.
3.“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성소의 신비입니다. 성소는 순전히 은총의 선물입니다. 내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황송하게도 나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니 결코 우열이나 호오를 비교할 수 없는 고유의 성소입니다. 내 성소만이 아니라 형제들의 성소도 존중하고 지켜줘야 합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과 관상의 여정, 사랑의 여정, 우정의 여정, 일치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이요, 길이 남는 사랑의 열매,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대로 하늘에 쌓은 보물입니다.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관상의 일치와 더불어 우리 뜻은 그대로 하느님의 뜻이 될 것이고 우리의 친구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관상가, 사랑의 신비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무사(無私 無邪)’한 눈밝은 아가페 사랑은 그대로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오늘 예루살렘 회의에서 사도들에 의해 결정된 사항은 그대로 분별의 지혜와 사랑입니다. 잠시 언급되는 다음 대목이 감동입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 사도는 진정 예수님의 친구이며 관상의 대가임을 깨닫게 합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목숨을 내놓고 바둑을 뒀다는 왕년의 바둑 고수 조치훈이, 목숨을 내놓고 축구를 했다는 왕년의 축구 스타 박지성처럼, 예수님 사랑에 목숨을 내놓은 예수님의 친구들인 사도들이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관상의 대가 사도들의 사랑의 결정은 얼마나 정중하고 품위있고 멋진지요. 부수적인 무거운 짐들은 말끔히 정리해 주고 짐들을 단순화, 최소화하여 본질적은 필수 요소만 남깁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안티오키아 교회 공동체는 격려 말씀에 크게 기뻐하며 고무되었다 합니다. 짐을 덜어주는 지혜로운 사랑 역시 아가페 순수한 사랑이겠습니다. 문득 어제 받은 메시지가 재미있어 나눕니다.
“우리 총원장 수녀님 축일 미사 후, ‘늙을수록 아름다운 호박이 되겠다’는 말씀에 모두 감명받고 격려의 박수를 쳤습니다.”
‘늙을수록 아름다운 호박’이란 말마디에서 사랑으로 잘 익어가는 참 아름다운 관상가의 진면목을 보는 듯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주님과 우정의 여정을 축복해 주시며 날로 당신과 사랑과 신뢰의 우정을 깊게 해 주십니다. 주님의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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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친구" 이야기입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
"친구"는 서로를 알고 신뢰하며 사랑하는 관계지요. 그 관계는 종속적이지 않고 이해관계를 넘어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종이나 군중 가운데 있는 익명의 무리 정도로 치부하지 않으시지요. 제자들이(우리가) 감히 예수님의 친구라 불릴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언감생심 원할 엄두도 못 내는 걸 예수님이 먼저 제안하신 겁니다. 자격 논쟁은 잠시 제쳐두고,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하느님과 한 분이신 예수님과 피조물인 우리는 하늘과 땅 사이 이상의 어마어마한 간극을 지닌 존재지만 예수님은 이미 우리를 친구라 여기십니다. 이는 곧 그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셨다는 뜻입니다.
부모와 자식, 연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은 가장 본능적이고 육적인 질서에 기인합니다. 친구는 그들을 포함해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모든 인연들로 확장되지요.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형제'나 '이웃'이라는 말로 바꾸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 가족이나 연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과 무관해 보이는 모든 이들, 모든 피조물까지 친구요 형제,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사랑, 그들을 위해 자신을 헐어낼 수 있는 사랑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따르고 사랑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당신을 모함하고 해치는 이들을 위해서도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친구라는 표현의 영성적 정의는 달라졌지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라 부르신 이상 그렇습니다. 우리의 미약함과 불충,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분의 친구일 수 있는 건 오로지 예수님의 겸손과 관대함, 연민이 담긴 사랑 덕분입니다.
제1독서는 안티오키아에 편지로 전해진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 내용을 들려 줍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사도 15,26)
"(안티오키아 신자) 여러분의 형제인 사도들과 원로들"이 먼저 안티오키아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신원을 인정하고 보증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친구라는 증언과 다름 아닌 표현이지요.
"성령과 우리는 ... 결정하였습니다."(사도 15,28)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원로들이 숙고하고 토론하여 나온 결정은 단지 그들만의 인간적인 생각이 아니라 성령의 뜻임을 명백히 합니다. 사도들과 원로들의 이 자신감은 그들의 인간적 위상에서 나오지 않고, 공동체를 이루는 그들 자신이 곧 예수님의 몸이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존재라는 믿음에 기인합니다.
영의 인도를 받는 개개인이 모여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 안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나누고 길을 찾을 때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성령과 함께 결정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예수님의 친구이고 서로의 친구이며, 또 성령의 친구라는 뜻이지요.
친구이신 예수님께서 다정히 우리를 당신 곁자리로 부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신뢰하시고 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 주시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당신이 한 것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육적 인간적 이해 관계를 뛰어넘어 세상 모든 피조물을 친구요 형제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사랑이 시작됩니다. 당장 목숨을 내놓는 거창한 일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자신 생명만 귀하게 여기며 윤택하게 가꾸는데 골몰하지는 않게 되지요. "친구"의 사랑에서는 자기 이익이 죽고, 자기 자아가 죽으며, 자기 정욕이 죽습니다. 어쩌면 생물학적 죽음은 가장 나중 문제일지 모릅니다. 이미 그만큼 사랑하는 이는 이미 자기 목숨을 바친 것과 다름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친구이신 예수님과 함께, 성령과 함께 "친구"의 사랑으로 뛰어드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친구여서 행복하고, 여러분의 친구여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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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우리는 집에서 나그네로 살다 「새 시대의 사목」
우리가 자기 존재의 바탕에서 떨어져 나와 제 집에서 나그네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세계 문제를 해결하고자 그 문제가 내리는 곳을 애써 외면한 채 세상을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예쁜 꽃을 보고 “여기서 한가하게 뭘 하고 있는 거지? 제발 좀 부지런해질 수 없겠니?”하고 말하는 사람과 같다. 그는 “미안해요. 하지만 난 지금 아름다워지려고 여기 이렇게 있답니다.”라는 꽃의 대답을 알아듣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우리 존재being가 행위doing보다 중요하다고 하는 꽃의 지혜에 이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 생명의 바탕과 창조적으로 만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누군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줌으로써 자기 존재의 근원으로 이끄는 스승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살며 춤추며」에서
♣현대인들은 집에 사는 시간보다(잠자는 시간을 빼면) 학교나 직장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집 나간 사람이며, 가정home에 사는 것이 아니라 집house에서 사는, 가정의 생활을 상실한 이방인처럼 떠도는, 홈이 아닌 집에서마저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직장에 나가야 하는 가장과 주부는 해뜨기 전에 집을 나가 어린애들이 잠자는 시간에 집에 돌아와 어린애들과 인격적 만남이 없는 호적상의 문자적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아닌가요?
그래서 가장이 부인과 애들을 외국에 보내고 기러기 아빠로 살다가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말고 어느 나라가 그런가요. 집 나가 떠도는 이방인들이 많은 우리 삶의 본향本鄕은 어디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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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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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OQuE9XFS3M&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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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7)
아카시아
꽃향기
그윽하다.
언제나 가장
강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절실하게
만든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참된
부활이다.
사랑하기에
기쁨과
슬픔이
있다.
진심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게 된다.
사랑으로
내려오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있다.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사랑이
삶을
바꾸어놓는다.
참사랑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사랑이다.
서로
나누는 것이
사랑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다시 찾는
기쁨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복음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자녀들의
열매이다.
서로 사랑하는
거기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하느님의 육화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사람은 사랑이
되셨다.
사람의 명령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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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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