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1월 30일 토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제1독서 : 로마 10,9-18
복 음 : 마태 4,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성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며,
베드로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가장 먼저 받은 제자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함께 부르심을 받았다고,
요한 복음서에서는 베드로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뒤를 따랐다고 소개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따라 하루를 함께 보내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형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가장 먼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복음을 전한 사도입니다.(요한 1,41 참조)
안드레아 사도가 보인 행적의 특징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경우도 그렇고,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 때에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이끌었으며(6,8-9 참조),
예루살렘 입성 뒤 몇몇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뵙기를 바라자
그 말씀을 예수님께 전하였습니다.(12,20-22 참조)
이처럼 안드레아는 예수님과 사람들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주님을 가장 먼저 알아보았지만, 주님을 차지하려거나,
적어도 가장 먼저 부름 받은 지위를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었으며,
자기 사람을 만들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이끌었습니다.
교회는 안드레아 사도처럼 세상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교회 스스로가 주님보다 더 중요해져서는 안 되고,
세상에서 교회의 지위와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주님 말씀의 날카로움을 누그러뜨리거나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가 아니라,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으로 교회는 그 본연의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의 사회심리학과 교수인 코리 키스는 자기 수업인 ‘행복의 사회학’ 첫 시간에
학생들은 무엇을 가장 추구하는지 묻습니다. 대부분 행복을 이야기했습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첫 번째 과제를 줍니다.
“오늘 오후에 밖에 나가서 행복해지는 일을 해 보세요.
그리고 그 행복이 한 시간, 더 나아가 오후 내내 이어지는지 알아보세요.”
다음날 수업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과제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오후 내내 행복감을 유지한 학생이 있었을까요?
그저 기분 좋은 하루였을 뿐, 한 시간 이상 행복을 느꼈다고 말한 학생은 없었습니다.
저 역시 이 점을 떠올려 봅니다.
행복을 한 시간 이상 쭉 느끼기란 불가능했습니다.
하루 24시간 내내 행복하기만 하다면 이런 사람이 더 문제 아닐까요?
행복은 ‘나’의 전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저 가지고 있는 많은 감정 중에서 하나일 따름이었습니다.
한 가지 감정에만 쌓여 있다면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행복을 위해서 분노, 공포, 혐오, 놀람, 슬픔 등의 부정적인 감정도 있어야 했습니다.
행복을 원한다면 다른 부정적 감정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고통과 시련 없이 행복만 쏙 뽑아서 간직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그렇게 된다면 더 큰 아픔이 자기에게 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행복만 주시지 않은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 때로는 어렵고 힘든 시간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100% 행복만을 원하고 있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오늘은 베드로 사도의 동생인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그는 형과 함께 호수에서 어망을 던지고 있을 때,
예수님으로부터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는
말씀에 곧바로 그물을 던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곧바로 따랐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쁜 소식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기쁜 소식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처럼 십자가 위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이 결코 행복만 있지 않았고,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은 이렇게 고통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름이 진짜 행복이 되어 기쁜 소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따름으로 100% 행복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진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는 공관복음에 따르면,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마태 4,19)가 되리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형인 베드로와 함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특히 <마르코복음>에서는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는 장면에서 등장하며(마르 1,29-30),
예수님께서 성전 파괴를 예언 하셨을 때에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느냐며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마르 13,3-4).
<요한복음>에서는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께서 부르신 첫 번째의 제자가 되었으며(요한 1,35-40),
형인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소개하면서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요한 1,40-42).
또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는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드렸고(요한 6,8-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는
예수님을 만나 뵈러 온 그리스인들을 예수님께 소개하기도 합니다(요한 12,20-22).
초기의 동방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 사도는 '맨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프로포클레토스)으로 불립니다.
그는 흑해 주변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리스의 아카이아 지역인 ‘파트라이’에서 순교하였고,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그의 성화나 성상에는 X자형의 십자가와 함께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 스코틀랜드의 국기에 새겨진 X자는
그 나라의 수호성인인 안드레아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전에 모셔져 오다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서 그리스 정교와의 화해의 표시로
그의 순교지인 ‘파트라이’에 모셔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라고 말씀하시자,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마태 4,20).
그런데 ‘고기를 낚는 어부’와 ‘사람을 낚는 어부’는 어떻게 다를까?
그것은 ‘고기를 낚는 어부’는 살아있는 고기를 죽이기 위해 잡아들인다면,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죄로 죽은 영혼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잡아들입니다.
또 ‘고기를 낚는 어부’는 고기를 골라서 낚아 올리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고기가 좋든 나쁘든,
곧 전교 대상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낚아 올립니다.
또 ‘고기를 낚는 어부’는 자신의 그물을 치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성령의 그물을 칩니다.
곧 자신의 방식으로 그물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가라는 데로 가고, 그물을 던지라는 쪽으로 던지며,
그분이 명령하는 방식으로 그물을 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해타산의 머뭇거림이 전혀 없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온전한 응답이 요구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먼저, 안드레아 사도가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밤을 묵어가며 양성을 받았듯이,
그분과 함께 머물며 ‘그분 안에서 양성을 받는 제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
주님!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그물이 아니라 성령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위험하더라도,
깊은 곳, 당신이 원하신 곳에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먹이로가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한 사랑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모두를 거두어 들이게 하소서. 아멘.
따름으로써 얻게 되리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사도의 모범적 삶을 잘 살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다른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꺼이 따름으로써 큰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따르려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마침내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지향은 어떤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인 의지로 따름으로써 끝까지 가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단지 순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행동의 변화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하지 말고 "곧바로" 버리고 떠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주저한다면 그것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시 응답할 수 있는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도전할 때 새 일을 만날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순명과 실행을 통해서 주님의 섭리와 안배를 깨닫게 됩니다.
나의 힘을 빼는 것이 믿음이고, 그리하면 주님의 권능을 제대로 만나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은
‘나를 믿어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셨습니다.
믿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름으로 확고하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따를 수 있는 믿음을 지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내가 선택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나를 뽑아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시몬 베드로와 형제지간입니다.
특별히 요한과 길을 걷다가 예수님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 하며
형에게 말하고 예수님께 자기의 형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소개하였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한6,8-9)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간 사람도 안드레아입니다.
그는 혼자만 메시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쇄신과 회개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체험을 전해야 합니다.
마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주님을 따름으로써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듯이,
믿음이 약한 이들이 우리를 보고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먼저 우리의 믿음을 다져야 하겠습니다.
큰 나무는 잘 부러지지 않고
큰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으며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인답니다.
예수님께서 크신 분이셨듯이 우리가 큰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모범과 표양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과 줄다리기를 하지 말고 곧바로 따릅시다.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할 수 있기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동창 신부와 공항엘 가는 길이었습니다.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려고 트렁크 문을 열었는데 안 열렸습니다.
열쇠로 트렁크 문을 열어 보려 해도 안 열렸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원인을 알았습니다.
자동차의 기어가 주행 상태에서는 트렁크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자동차의 기어를 주차로 해야만 트렁크는 열렸습니다.
자동차의 안전을 위해서 주행 중에는 트렁크가 열리지 않도록 해 놓았습니다.
은행의 계좌도 그렇습니다. 본인이 입금했어도 비밀번호를 모르면 찾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가야 할 하느님 나라도 그럴 겁니다.
나의 경험, 나의 능력, 나의 직책, 나의 외모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 얼마나 희생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오늘은 11월 30일입니다. 교회의 전례력으로는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묵상하며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착하고 성실한 너희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걸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걸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함께 해 주었다.
너희 중에 가장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은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베드로 사도의 동생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름이 ‘반석’이라면 안드레아 사도의 이름은 ‘남자다움, 용기’입니다.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들 또한 용기를 가지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면 좋겠습니다.
안드레아 축일을 지내면서 제가 아는 안드레아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 분은 평신도로서 복음화 학교를 통해 많은 사람을
신앙의 뜨거움으로 인도하였던 정 치우 안드레아 선생님입니다.
저는 1991년에 복음화 학교와 인연을 맺었으니 33년이 되었습니다.
2002년에서 2005년 그리고 2011년에서 2018년까지
10년 동안 담당 신부로 함께 하였습니다.
복음화 학교는 1단계부터 5단계의 과정이 있습니다.
매월 기도회 미사와 후원회 미사가 있습니다.
단계를 마치면 피정과 미사가 있습니다.
저는 미사에 함께 하였고, 성지순례를 같이 다녀왔습니다.
복음화 학교의 각 단계는 모두 평신도 강사들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졸업생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사람은 강사로서의 교육을 다시 받습니다.
자신이 들었던 복음의 기쁨을 학생들에게 전하는 강사가 됩니다.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강사들은 세상을 향해 던졌던 그물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됩니다.
평생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정 치우 안드레아 선생님께
주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한 분은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입니다.
저는 2002년부터 2005년 그리고 2013년부터 2018년까지 8년 동안
교구청에 근무하면서 추기경님을 모셨습니다.
안드레아 추기경님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드리면서
제가 곁에서 본 추기경님의 모습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추기경님은 소탈하십니다. 격식과 절차를 굳이 따지지 않으십니다.
마치 동네에 사시는 인자하신 어르신 같습니다.
소탈하신 만큼 함께 있는 신부들에게도 많은 걸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사제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고, 지지해 주십니다.
추기경님은 조금 느리신 것 같지만 꾸준히 일을 하십니다.
산행을 하실 때도 천천히 오르시지만 한 번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느린 거북이가 빠른 토끼를 앞설 수 있었던 것은 꾸준함 때문이었듯이,
한국교회의 어르신이 되신 것도 추기경님의 꾸준함 때문인 것 같습니다.
추기경님은 기록의 달인이십니다.
저는 잊고 있었던 일들도 추기경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십니다.
저와 면담하셨을 때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적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앞선다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잘 알고 계십니다.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께서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를 지내면서
‘나는 누구인가?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 주셨고, 나는 어떻게 응답하였는가?
지금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를 묵상한다면
11월의 마지막을 피정하는 기분으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즉시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다.
조욱현 토마 신부
안드레아는 남성적이라는 뜻으로 친절하고 항상 준비되어 있고
열린 마음을 가진, 열심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아 사도는
자신의 사도직을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폈다고 전하고 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는 소위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라는
X형으로 된 십자가 위에서 Patrasso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안드레아 사도의 유해를
동방 교회에 되돌려 주었고, 후에 Patrasso로 옮겼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고 계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그분을 따랐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19절).
이 말씀을 따라 어부들은 하늘의 아버지를 얻기 위해 세상의 아버지를 떠났다.
세속적인 낚시에서 거룩한 낚시로 바뀌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물고기를 낚듯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깊은 오류의 바다에서 사람들을 낚도록 부르셨다.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세상,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이
하느님 말씀의 그물로 사람을 잡도록 사도로 삼으셨다.
사도들은 즉시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주님의 제자로서 살면서 결국은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하고
자신 있게 말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의 복음 선포는
은총 체험을 통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한창 일하던 중이었지만, 미루거나 꾸물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20.22절)
하느님의 뜻 앞에는 한 치도 망설임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모습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어떻게 응답을 드리며 살고 있는지,
듣기는 하면서도 실천을 올바로 하면서 그분을 따르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각과 고정관념을 모두 버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생활을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고
주님 앞에 나의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할 것이다.
좀 더 우리의 삶의 자세를 하느님 안에
이어가게 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기심, 교만 그리고 집착을 피하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응답을 드리며 실천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사도 베드로의 동생이며 형과 함께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였던 안드레아는
본디 형보다 먼저 영적 세계에 관한 관심과 열정이 더 강했나 봅니다.
그러기에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지만,
스승이신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눈여겨보신 다음,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1,36)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1,38)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에 이미 안드레아가 무엇을 찾고 있는 사람이며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함께 머문 다음, 안드레아는 이내 자기 형 베드로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하며 형을 예수님께 이끌었던 분이십니다.(요1,40~42참조)
이는 안드레아 사도는 심성적으로 온건하고 신중한 분으로 예수님께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요6,9)라고 어린아이를 인도하고,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요12,22)라는 그리스 사람들을 예수님께 이끌어 주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앉아 계시는 예수님께 다른 사도들과 함께
“그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마르13,4)라고 물으심으로
사람들이 재난을 준비하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신 분이십니다.
이처럼 안드레아 사도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추종하고 동행하시면서
많은 사람을 예수님께 이끌어 준 사도이자 선교사였습니다.
사도 안드레아는 자신의 이름처럼 ‘사내다움, 용기’ 넘친 분이셨지만
늘 무리의 중심적인 존재라기보다 협력자와 조력자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신 사도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먼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어부인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4,19)하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첫 제자 그룹인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역시 부르십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제자이자 사도들의 또 다른 칭호와 역할이
바로 사람 낚는 어부들이라고 호칭하게 된 배경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부르신 첫 제자 그룹인 네 명의 사도들은
이후 사도단의 중심과 핵심적인 인물들이었으며,
이는 곧 사도단의 안정성과 견고성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됨의 기본은 바로 이들처럼
“곧바로 배와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4,20.22)라는
표현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
제자란 무릇 모든 것을 버리고(=포기), 가족과 안정을 떠나야만(=이탈) 따를 수 있음을
복음의 첫 제자들을 부르신 순간에 벌써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는 말씀은
네 명의 사도들이 본디 어부였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면서
쉽게 자신들이 장차 되어야 하고 살아야 할 소명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것으로 봅니다.
결국 예수의 제자이자 사도들인 그들은 예수님처럼 묶임과 눈 멈,
그리고 억눌림에서 해방시키고 눈 뜨게 하며 자유롭게 하는
구원 운동(루4,18참조)에 동참함으로써
세상의 많은 사람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는 사람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다 명확하게 하는 복음의 비유가 바로 그물의 비유(마태13,47~50)인데,
사도들은 바로 하늘나라의 일꾼으로서
그물을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이는 사람이며,
그물이 가득 차면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버리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사도 안드레아는 자신의 부르심을 통해 갈릴래아의 어부로서 삶을 마치지 않고,
더 넓은 세상으로 파견되어 나가 하늘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영혼들을 예수님께 인도한 사람 낚는 어부로서 자신의 성소와 소명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10,9.10)라고 말한 바를,
안드레아 사도는 이미 자기 발과 삶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어쩌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10,15)라는 표현은
그러기에 오늘 교회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사도 안드레아를 두고 하신 말씀처럼 들려옵니다.
사도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했던 안드레아 사도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혼자 구원받지 않고 구원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많은 영혼을 예수님께 인도하신 분이십니다.
맨 처음 부르심을 받은 사도답게 안드레아 사도는
흑해 주변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리스의 아카이아 지방의 파트라이에서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연유에서 안드레아 사도의 성화나 성상에는
X자형의 십자가와 함께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면은 스코틀랜드 국기에 새겨진 X자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 안드레아를 상징하는 것이라 합니다.
성인의 유해는 본디 베드로 대성전에 모셔져 오다가,
1964년에 교종 바오로 6세께서 그리스 정교회와의 화해의 표시로
성인의 순교지인 파트라이에 지금은 모셔져 오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안드레아 축일을 맞아 축일을 맞는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님, 오늘은 교회 전례력으로 가해가 끝나는 마지막 날입니다.
금년 저희 모두에게 베풀어 주신 당신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새해에도 많은 은총과 사랑을 저희에게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저 마지막 날만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저희에게 오시는 당신을 맞이하면서
당신 앞에 깨어 설 수 있도록 저희를
당신 말씀으로 흔들어 깨워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시작 Α요, 모든 것의 마침 Ω 이시니, 영광 받으시옵소서. 아멘.”
***
오늘로써 전례력으로 한해가 끝나고 내일부터 새해가 시작되며 대림 시기를 맞습니다.
어제를 보내고 새로운 내일을 맞아들이면서
오래전에 어느 수녀가 보낸 「기도」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면서
<떠나보냄>과 <새로 맞이함>의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소유가 아닌 빈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받아서 채워지는 가슴보다 주어서 비워지는 가슴이 되게 하소서.
지금까지 해왔던 내 사랑에 티끌이 있었다면 용서하시고
앞으로 맑게 흐르는 강물이 되게 하소서.
위선보다 진실을 위해 지혜로운 진실 주시고 넓은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쓰러지는 육체로 살지라도 악 앞에 강해지는 내가 되게 하소서.
크신 님이여, 그리 살게 하소서.
철저한 고독으로 살지라도 사랑 앞에 낮아지고 깨어져도
겸허한 내가 되게 하소서.』 (작자미상)
구도자요 인도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드레아 사도는 형 베드로와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공관복음이건 요한복음이건 안드레아를 소개할 때
늘 ‘시몬(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라고 소개합니다.
저라면 나로서가 아니라 늘 누구의 동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짜증이 나게 하고 화가 나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이 늘 같이 있고 또 공동체의 대표로 있으니
같이 날 뛰거나 두드러지지 않으려고 곧 잠자코 있으려
무던히도 애써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만 보면 안드레아는 형의 피해자입니다.
실제로 안드레아는 나서지 않았고 잠자코 있던 제자였습니다만
그렇다고 토라져 있거나 뒷짐만 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주님을 제일 먼저 따른 이는
베드로가 아니라 안드레아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안드레아는 원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서
세례자 요한과 함께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고 기다리던 무리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도 같은 무리 중 하나였는지 모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했을 때
주님을 따라간 제자는 베드로가 아니라 안드레아였고
그래서 안드레아가 베드로를 주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의 안드레아는 먼저 구도자였고 다음으로 인도자였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찾는 구도자였고
메시아께 사람을 인도하는 인도자였으며,
우리 공동체로 말하면 앞에 나서는 회장이 아니라
뒤에서 사람들을 공동체로 끌어들이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신으로 자기를 자리매김하는 사람이
제가 보기에는 정말 내공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내공이란 어떤 것이고 무슨 뜻입니까?
내공이란 한자어로 內工이니 내적 장인이라는 뜻이고,
풀어 말하면 자기 내면을 갈고 닦아 내적으로 실력을 갖춘 대단한 경지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자기 안의 실력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음을 포함하니,
대단한 겸손을 뜻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안드레아는 자기도 주님을 따라 행복한 사람이고,
남도 주님께 인도하여 남도 행복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도 그렇게 주님께 인도하였고,
그리스인들이 주님을 찾아왔을 때도 주님께 인도했으며,
특히 오천 명 먹이는 빵의 기적 때 오병이어를 가진 아이도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이런 안드레아가 내공이 부족하고 겸손에서는 거리가 먼 저를
아주 부끄럽게 하지만 그래서 제게는 귀감이 되는 사도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