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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 동명 | 추모 |
출생지 | 탁리국 | 부여국 |
어머니 | 여자 시종 | 유화부인 |
임신과정 | 달걀 같은 기운을 받음 | 햇빛을 받고 알을 낳음 |
시기한 사람 | 탁리국왕 | 부여의 왕자들 |
세운 나라 | 부여국 | 고구려국 |
분명 조금씩 다르지만 같은 점이 더 많다. 짐승의 보호를 받아 성장한 것이나,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길렀으며, 자라와 물고기의 도움을 받아 강을 건너 도망쳤다는 점이 같다.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가 너무나 유사하다는 것은 두 이야기가 어떠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고구려에서 건국 시조인 추모왕을 신성한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 부여의 영웅인 동명왕의 이야기를 빌려온 것이다. 고구려가 부여를 압도하기 시작한 이후에 고구려는 부여의 영웅 이야기를 고구려 영웅이야기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대략 3∼4세기에 이와 같은 추모왕의 건국 이야기가 만들어져서 《광개토태왕릉비문》에 기록되어 졌고, 이후 주변국 등에도 전해져서 동명성왕은 추모왕이라는 혼돈이 생긴 것이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만이 오래 전승된다. 먼저 멸망한 동명왕의 부여 건국 이야기는 잊혀지고, 대신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이야기만이 우리에게 더 많이 전해진 것이다.
tip 추모왕의 기록
옛적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 《광개토태왕릉비문》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요, 휘는 주몽(혹은 추모, 상해라고도 쓴다)이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구려는 동명에게서 시작되었다. 동명은 본래 북이 탁리왕의 아들이다.
동명은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 《양서》 고구려전
[사진 : 이규보의 동명왕편 책, 또는 광개토태왕 비문 첫머리 글.]
tip 고구려 건국신화 읽기
고려시대 유학자 이규보는 《동명왕편》을 지어 후세에 고구려 건국신화를 전했다.
“천신의 하늘인 해모수가 지상에 내려와 하백의 딸인 유화와 만나 사랑에 빠졌다가 떠나고, 홀로 남은 유화가 동부여 금와왕의 보살핌을 받아 살면서 혼자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해모수의 아들인 추모가 태어났다.
추모는 부여에서 활을 잘 쏘는 인물이란 뜻의 주몽으로도 불렸는데, 금와왕의 아들인 대소태자의 질시를 받아 부여에서 살기 어려웠다. 추모는 자라와 물고기의 등을 밝고 강을 건너 부여를 탈출하여 홀본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 추모는 이웃한 비류국과 싸움에서 사슴을 이용해 홍수를 일으켜 승리하였고, 왕위에 싫증을 느끼자 용을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렸다.“
고구려 건국신화의 의의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신과 인간이 어우러진 이야기다. 실제로 고구려 사람들은 추모왕을 한 인간이 아니라, 매년 동맹축제에서 섬기는 고등한 신으로 받아들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건국신화를 당당히 《광개토태왕릉비문》에도 기록해두었다. 그렇다면 고구려 사람들은 추모왕의 신화적인 이야기를 그대로 믿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추모왕이 천신의 아들, 일월의 아들, 물의 신의 외손자라는 것은 종교적 믿음으로 받아들여졌다.
고구려가 건국된 기원전 37년에는 아직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외래 종교가 들어오지 않았다. 이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가장 호소력이 짙은 이야기는 저 높은 하늘의 자식이 직접 세상에 내려와서 나라를 세웠으니 그 나라는 크게 번영하리라는 것이다. 고조선, 부여, 백제, 신라, 가야, 동예 등에서도 모두 하늘 신을 숭배했고, 해신, 달신 등을 믿었다. 따라서 천신의 자손이 왕이 되었다고 한다면, 누구나 그 왕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시대였다.
신화는 신화의 주인공 자신이 아니라, 그의 주변사람들과 후손들이 만드는 것이다. 고구려의 건국자인 추모왕을 신의 아들답게 동물들을 자유롭게 부리며, 비를 뿌리는 등 자연현상을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신의 아들로 치켜세워준 것은 그의 후손들이었다. 신화는 옛 사람들의 이야기 전달 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논리적인 문장으로 엮어진 글보다는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신화가 더욱 호소력을 가진 시대에 고구려 건국신화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나라를 신이 선택한 나라, 신의 아들이 세운 나라, 그래서 천하 사방에서 가장 신성한 땅이라고 믿었다. 천신의 아들이 세운 나라에 산다는 자부심은 당당한 고구려인을 만들었다. 고구려 건국신화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서, 고구려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다. 귀신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는 공자와 같은 유학자나 색안경을 끼고 타민족을 보는 중국인의 눈으로 보거나, 서양의 합리적인 시각으로 고구려를 보기 보다는 먼저 고구려인의 관점에서 건국신화 속에 담겨진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규보의 말처럼 그것은 귀신의 헛된 이야기가 아니라, 고구려인이 섬긴 신이 활약하는 성스러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건국신화는 고구려 사람들의 생각을 열어볼 수 있는 귀중한 이야기인 것이다.
고구려의 시작
고구려 첫 수도인 오녀산성은 도적떼의 소굴처럼 산 정상에 있었다. 외적의 침입을 걱정해 만든 수도이지, 결코 대국의 수도는 아니었다. 힘이 약했기 때문에 그곳에 수도를 정했던 것이다. 《삼국지》에는 고구려가 인구 3만호라고 기록한 반면, 고구려와 대항하고 있던 부여는 인구가 8만호라고 했다. 또 부여는 고구려와 달리 넓고 평평한 땅과 넓은 호수, 곡식을 키우기 좋은 환경을 갖고 있다고 했다.
고구려는 부여에서 갈라진 나라다. 처음 나라를 추모왕(주몽)이 나라를 세우려고 할 때, 이미 넓고 비옥한 땅은 힘센 나라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할 수 없이 압록강 중류의 산간 지대에 나라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산으로 둘러싼 작은 골짜기들이 널리 있었고, 그 중 넓은 분지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소국들이 흩어져 있었다. 추모왕은 이곳에 아주 작은 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말갈의 침략, 이웃한 비류국과의 경쟁 등 건국 초기부터 주변 나라들과 크고 작은 다툼에 시달리기도 해야 했다.
[오녀산성 사진]
고구려가 발전한 이유
그럼에도 고구려가 다른 나라들을 제치고 성장을 거듭해서 대제국을 이루고 705년의 긴 생명력을 이어간 것은 고구려만의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비록 나쁜 환경에서 시작하였지만, 포기하기 보다는 자기 발전을 위한 노력을 하나하나 실행에 옮겼다. 주변의 나라들과 경쟁해서 앞서기 시작했고, 강대국 한나라, 부여를 상대로 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들을 천손 즉 하늘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자신과 국가의 생존을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고 힘을 기르는데 노력을 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발전을 위해 열린 자세를 취했다. 진대법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철제 농기구와 소 등을 활용한 농법을 보급해 농업을 발전시켰다. 또 기술자를 우대해 광업과 공업을 발전시켰고, 도로와 다리 등을 잘 만들어 상업을 발전시켰다. 전쟁에 대비해 전사들을 우대하여 활을 잘 쏘는 사람은 ‘주몽’이라 부르며 대접을 해주었다. 농부였던 을파소, 바보라 놀림당한 온달 등 능력 있는 자를 등용하는데도 개방적이었다. 또한 외국인, 주변의 유목민이나 삼림족도 적극적으로 껴안았다. 또 여성의 능력도 적극 발휘하도록 남녀의 구분은 있으되, 여자에 대한 차별은 적었다.
고구려에게 늘 행운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도가 2차례 함락되는 시련도 겪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위기를 자기 변화의 기회로 삼았다. 고구려는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 큰 발전을 이루었다.
고구려는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은 도전을 받고 이를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였다. 고구려는 작은 소국에서 변신을 거듭해 대제국을 만들어 냈다. 고구려의 변신의 소중한 경험은 우리가 고구려를 배워야할 필요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