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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덴스인들
“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딤후 2:3-6)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위한 삶인지 아니면
이기적인 만족을 채우는 삶인지 분별해야 한다.
당시 교회의 상황
사도들로 인하여 진리가 땅끝까지 전파된뒤 핍박의 물결이 일어난 시기
교회가 이교중심 사상으로 가득차게 됨
안식일이 일요일로 바뀌기 시작함
교회안에 들어온 타협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마침내 그들의 표준을 낮추는 데 동의하였으며
그리스도교와 이교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우상 숭배자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改宗)하고 교회에 입교하였다고 공언했으나 여전히 우상 숭배를 버리지 않고
그 예배의 대상을 예수님의 형상과 마리아와 모든 성도들의 형상으로 바꾸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들어온 우상 숭배의 누룩은 계속적으로 해로운 일을 하였다.
불건전한 교리와 미신적 의식(儀式)과 우상 숭배적인 허식이
그리스도교의 신조와 예배에 혼합되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우상 숭배자들과 타협한 결과로
그리스도 교회 안에 우상 숭배의 그릇된 사상과 좋지 못한 풍습이 수입되었고,
교회는 타락하여 순결과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기만에 넘어가지 않고, 진리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오직 그분만을 경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쟁투, 43)
종교 암흑시대가 이르러 옴
““불법의 비밀”은 처음에는 조금씩 조금씩 비밀리에 그리고 조용히,
그리고 나중에는 세력이 커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자
더욱 공공연하게 그의 기만적이요, 참람된 일을 진척시켰다.
이교의 관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그리스도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양보와 순응주의적 정신은 교회가 이교 아래서 견뎌낸 맹렬한 박해로 말미암아
한동안 방지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박해가 그치고 그리스도교가 왕궁 안으로 들어가게 되자,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의 겸손한 단순성을 버리고
이교의 제사장이나 방백(方伯)들의 교만과 허식(虛飾)을 따르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사람의 이론과 유전으로 대체시켰다.
4세기 초엽에 있었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의 이름뿐인 개종은
큰 기쁨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실상은 세상이 의(義)의 형식의 탈을 쓰고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타락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이교가 정복당한 듯하였으나 실상은 승리자가 되었다.
이교의 정신이 온 교회를 지배하였다. 이교의 교리, 의식, 미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의 예배와 신앙에 혼합되었다.”(쟁투, 49-50)
“ “법왕교의 대낮은 바로 세상의 한밤중이었다.””(쟁투, 60)
왈덴스인이란?
베렝가리아파,페트롭루시아파,헨리파,아놀드파,왈덴스파,알비젠스파,레온파,롤라드파,
카타리파등 천주교도들은 이 파들을 왈덴스파로 알고 있었다.
이들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지키기 위해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안식일을 지키며, 법왕교와의 대립에서 진리만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왈덴스인들이 거주했던곳은?
이탈리아의 북서부,프랑스의 남동부,스페인의 북부에
높이 솟아있는 알프스 산맥에 왈덴스인들이 살고 있었다.
“첩첩이 싸인 산악들의 높은 성채들은
여러 세기를 통하여 박해를 받고 압박을 받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왈덴스인들은 거기서 은신처를 얻었다.
이 곳에서 중세기의 암흑을 뚫고 진리의 횃불이 계속하여 타올랐다.
이 곳에서 천여 년 동안 진리의 증인들은 옛적부터 물려받은 믿음을 지켜왔다.”
(쟁투, 65-66)
왈덴스인들의 지도자 비질란 티우스
비질란 티우스(왈덴스인들의 지도자)는
AD 364~408년의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부에 거하던 왈덴스인들의 지도자였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시골생활을 함(로마 교회에 대항하여 싸웠던 사람)
그의 시대에 이르러 원시 교회에 스며들어온
이교 관습에 대한 저항이 점점 커져서 마침내 혁명적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 결과로 한 때 성도들에게 전해졌던 믿음을 유지하고자 갈망하는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서부에 살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조직체를 이루었다.
오직 성경에 기초된 진리만을 갈구하며 교회에 스며들어오고 있던 신기한 미신적 행위들을 배척하던 사람들은 성경에 근거한 비질란티우스의 명쾌한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
진리를 위한 투쟁
“법왕교가 장기간에 걸쳐서 최상권을 잡고 있는 동안
이 세상은 암흑으로 덮여 있었지마는, 진리의 빛은 아주 소멸되지 아니하였다.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증인들,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의 중보자이심을 확실히 믿고,
성경을 인생의 유일한 지침으로 삼고,
참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는 증인들이 있었다.
세상이 그들에게 얼마만큼의 은혜를 입었는지에 대하여
후세의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이단자로 낙인이 찍히고, 그들의 동기는 비난을 받고, 그들의 품성은 중상을 받고, 그들의 저서들은 압수당하고 오전(誤傳)되고 삭제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굳게 서서 오는 세대를 위한 신성한 유업으로써
그들의 순결한 믿음을 대대로 물려가며 간직하였다.”(쟁투, 61)
“로마의 관할 밖에 있는 나라들에는
여러 세기 동안 법왕교의 부패에 전혀 감염되지 아니한 그리스도인 단체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교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러한 오류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표준으로 생각하고
성경에 있는 진리의 대부분을 고수해 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믿고 십계명 중의 넷째 계명의 안식일을 지켰다.
이러한 믿음과 생활을 유지해 온 교회들이
중앙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아르메니아 족속들 사이에도 있었다.
법왕권의 침입을 저항한 자들 중에서 “왈덴스”(Waldenses)인들이 최선봉에 섰다.
그들은 법왕의 지위가 확립되어 있는 바로 그 나라에 살면서도
그 허위와 부패를 꿋꿋이 저항하였다. 수세기 동안에 피에몽(Piedmonte)의 교회들은
독립을 유지해 왔으나 마침내 로마가 그들에게 복종을 강요할 때가 다가왔다.
로마의 압제에 대하여 무력한 저항을 해본 후에 마침내
그 여러 교회의 지도자들은 거의 온 세계가 존중하는 듯한
법왕의 최상권을 마지못해 인정하였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법왕과 주교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그들의 믿음의 순결을 그대로 보존하고자 결심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서로 갈라졌다.
여전히 과거의 믿음을 굳게 지키는 사람들 중의 어떤 이들은 이제 고향인 알프스를 뒤에 두고 외국으로 가서 진리의 깃발을 꽂게 되었으며, 어떤 이들은 깊은 산골짜기나 험준한 산 속으로 피해 가서 거기서 자유로이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왈덴스” 교도들이 몇 세기 동안 가르쳐 온 신앙은
로마로부터 나온 허위의 교리와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들의 종교적 신조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그리스도인의 참 제도에 기초되었다.
세상과 차단된 궁벽한 곳에서 날마다 양떼를 치며 포도원을 가꾸는 매일의 고역에 시달리고 있는 비천한 그 농부들은 배교한 교회의 교리와 이설(異設)에 반대되는 진리를 자기들 스스로가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믿음은 새롭게 받은 믿음이 아니었다.
그들의 종교적 신조는 그들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들은 사도 교회의 신앙 곧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 3)로써 만족하였다. 세계의 대도시에 거만하게 자리잡고 있는 교권 교회가 아닌 이 “광야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나누어 주라고 당신의 백성에게 맡기신 진리의 보화(寶貨)를 잘 간수하고 있던 그리스도의 참 교회였다.”(쟁투, 63-64)
현저한 차이를 가진 왈덴스인
엘리야도, 침례요한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른 삶을 보여주었듯이
왈덴스인들도 타락한 교회들과 다른 삶을 보여 주었다.
제임스 매킨토시
“역사의 동이 틈과 더블어서 우리는 알프스 산맥의 골짜기들에서
보(Vaud)인들이라는 옛이름으로 불리는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신약성경의 빛을 통해서 초기 시대의 순수함과 자신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화려하고도 오만한 성직제도의 악행 사이에 존재하는 현저한 차이를 보았다.”
분리된 삶
왈덴스 인들은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교황권과 분리됨
이탈리아어로 “왈덴스”라는 이름이 “골짜기들”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고 프랑스어로는 “보”라는 이름이 “골짜기의 주민들”이라는 의미가 닮겨져 있다.
11세기부터 일반적으로 왈덴스인들이라는 호칭으로 불려졌다.
잘못된 역사정보
왈덴스인들의 기원을 1175년에 모습을 드러낸 피터 왈도와 연결시키는 자들이 있으나 왈덴스인들은 그 이전의 인물들임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왈덴스 인들은 이 당시로부터 600여년 전에 비질란티우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진리를 배웠다고 볼 수 있다.
라이네리우스 삭호(A.D.1250)왈덴스인들을 로마교회의 배도시점때부터 존재했다고
기록하였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리
동방교회는 정교회라고도 하며 헬라교회라고도 한다.
서방교회는 오늘날의 천주교이며 당시 라틴교회라고도 한다.
12세기경 서방교회의 배도는 동방교회보다 훨씬 깊었다.
안식일 문제가 핵심 쟁점이었다.
동방교회는 초기부터 지켜내려오던 안식일을 준수하였고
서방교회는 일요일을 신성시 하게 되었다.
니콜라스1세가 불가리아 왕에게 편지하여 일요일에 쉬어야 한다고 하자
헬라교회에서 화가남
동방교회는 안식일에 금식을 통하여 안식일이 싫어지게 만드려 했다.
이 문제로 인하여 교회가 갈라지게 되었다.
왈덴스인들의 기록이 적음
왈덴스인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상당히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영감이 말씀과 몇몇의 다른 내용에 포함되어있는 이야기뿐이다.
“로마교가 최상권을 쥐고 있던 암흑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당한 역사는 모두 하늘에 기록되어 있지만
사람의 손으로 기록된 것은 너무도 적다.
그들을 박해한 자들의 비난 이외에는 그 사적에 대하여 기록된 것이 없다.
법왕교의 교리와 명령에 반대하는 자들의 흔적과 영향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로마교의 정책이었다.
로마교는 이단적인 것은 사람이든지 서적이든지 간에 박멸하고자 하였다.
법왕교의 교리의 권위에 대하여 의혹이나 의문을 품는 사람은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생명을 빼앗기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로마교는 또한 그들의 교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행한 잔인한 행동에 대한 모든 기록을 말살해 버리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법왕이 주최한 종교 회의들은 이러한 종류의 기사를 포함한 서적들을 다 태워 버리도록 결의하였다.
인쇄 기계가 발명되기 전에는 서적들의 수가 적었을 뿐만 아니라
그 형태도 보존하기에 극히 불편하였으므로
로마교도들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방해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쟁투, 61-62)
박해와 피난처
13세기 이전에 왈덴스인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아왔다.
재산을 빼앗기고 순교를 당하고 집과 땅을 빼앗겼다.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고 교수형,화형을 당하였다.
“첩첩이 싸인 산악들의 높은 성채들은 여러 세기를 통하여 박해를 받고 압박을 받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왈덴스인들은 거기서 은신처를 얻었다.
이 곳에서 중세기의 암흑을 뚫고 진리의 횃불이 계속하여 타올랐다.
이 곳에서 천여 년 동안 진리의 증인들은 옛적부터 물려받은 믿음을 지켜왔다.”
(쟁투, 65-66)
죄악을 폭로하면 핍박을 당하게 됨
“그리고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결정적인 태도로 로마교의 타락에 저항하였다. 오랫동안 계속된 박해로 인하여 더러는 신앙적인 타협을 하여
그 분명한 원칙을 차츰 버렸지마는, 어떤 사람들은 진리에 더욱 굳게 섰다.
암흑과 배교의 전기간을 통하여 로마교의 최상권을 부인하고
성상(聖像) 숭배를 우상 숭배로 보고 거부하고 참 안식일을 지킨 왈덴스인들이 있었다
(부록 11 참조).
그들은 가장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그들의 믿음을 유지하였다.
비록 사보이(Savoyard) 사람들의 창에 찔리고 로마의 화형주(火刑柱)에 타죽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두려움 없이 굳게 섰다.”(쟁투, 65)
“오늘날 교회가 주의해야 할 더욱 중요한 문제가 또 하나 있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고 말하였다.
그러면 박해의 불이 거의 꺼진 듯이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 유일한 이유는 교회가 세속적 표준과 타협하여 별로 반대를 받을 일이 없는 까닭이다. 오늘날의 종교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이 생활하던 당시의 그리스도인의 신앙처럼 순결하고 거룩한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세상에서 인기가 있는 유일한 이유는 죄와 타협하는 정신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진리들이 너무도 무시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교회 내에 활력이 넘치는 경건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신앙과 능력이 되살아날 때에 박해의 정신은 다시 나타날 것이며,
핍박의 불길은 다시 타오를 것이다.”(쟁투, 48)
최초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
왈덴스인들이 산속에 살아서 무식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들은 하늘의 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왈덴스인들은 유럽의 여러 백성들 중에서 최초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부록 12 참조). 그들은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수백년 전에 벌써 자국어로 필사(筆寫)한 성경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더욱 증오와 박해의 표적이 되었다.”(쟁투, 65)
이들은 성경에 큰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라틴어와 모국어 헬라어 히브리어에도 능통하였고
이들이 가지고 있던 성경은 손으로 직접 쓴 성경이었다.
왈덴스인들의 신앙지침
1. 진리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김
“순결, 단순, 열성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 사람들의 경건한 생애에 나타났다.
그들은 진리의 원칙을 집이나 토지나 친구나 친척이나,
심지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쟁투, 66-67)
2. 율법의 명령을 신성하게 여기도록 교육받음
3. 성경 암송
“당시에는 성경의 사본이 매우 귀하였으므로
그들은 그 가운데 있는 귀중한 말씀들을 외우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구약 성경의 여러 곳을 반복하여 암송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 대한 고상한 생각은 천연계의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단순하고도 축복받은 그들의 일상 생활에 관련되어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온갖 은총과 모든 안위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믿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바라보도록 가르침을 받았다.”(쟁투, 67)
왈덴스인들의 생활 지침
현명한 자녀 교육
“부모들은 인정 있고 자애로우면서도 매우 지혜로웠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들을 지나치게 사랑함으로 그들이 방종의 나쁜 버릇을 가지지 않게끔
하였다. 그들의 앞길에는 시련과 고난, 심지어는 순교자의 죽음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환난을 견디고, 통제(統制)에 복종하고, 스스로 생각하여 행동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아주 어려서부터 그들은 책임을 지는 것과 말을 삼가는 것과 침묵의 지혜를 이해하는 것을 배웠다. 한 마디의 경솔한 말이라도 원수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그 말을 한 개인의 생명뿐만 아니라 많은 동료들의 생명 또한 위험하게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진리의 원수가 마치 이리가 먹이를 사냥하듯이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쟁투, 67)
2. 세속적 이익을 포기
3. 자급자족
“깊은 산골짜기에서도 경작할 만한 토지를 발견하면
즉시 그것을 잘 개간하였으므로 드디어 골짜기와 언덕의 사면(斜面)들은
많은 수확을 내는 농토로 변했다.
검소와 엄격한 극기의 정신은 그 자녀들에게 유일한 유산으로써 교육의 일부가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애를 훈련시키려는 뜻이 무엇이라는 것과
그들의 궁핍은 모두 각자의 수고와 생각과 주의와 신앙으로만 보충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들의 생애는 실로 수고롭고 고달픈 것이었으나 그것은 건전한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훈련과 발전을 위하여 제공하신 학교로서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수고와 고난에 단련되어 있었으나 정신과 지능의 계발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능력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더욱 발달되고 개선되어야 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쟁투, 67-68)
“그들은 불굴의 노력으로, 때로는 어둡고 깊은 동굴 속에서 횃불의 희미한 불빛 아래 한절 두절, 또 한장 두장 성경을 베끼어 나아갔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업은 진행되었고, 하나님의 계시된 뜻은 순금과 같이 빛났다.
시련을 견디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얼마만큼이나 밝고 분명하고 능력있게 되었는지 실제로 그 사업에 참가한 사람 이외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천사들은 이처럼 충성된 일꾼들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쟁투, 69)
초기 왈덴스인들 (기독교회사 참고)
클라우드
9세기의 이탈리아의 빛, 토리노의 주교였다.
그 때 그는 교황권의 이교신앙과 타락을 목격하고 교권에 대항하였다.
또한 그는 우상숭배를 강력히 반대하였으며 창조주를 증거하였다.
또한 화채설을 반대하였고 이러한 것들을 대중들 앞에서 제시하였다.
2. 왈덴스인들을 도운 베렌가리우스
진리로 인해 핍박을 당하는 왈덴스인들을 위해 대한한 사람중에
프랑스의 베렌가리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베렌가리우스는 화채설,십계명 폐지,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를 무시하는 것, 안식일 폐지등을 탄핵했다. 법왕교를 비난하였다.
3. 피터 데브루이즈
20년에 걸쳐 프랑스 남부지역을 각성시키는 일을 하였다.
그는 성경과 초기 기독교 신앙을 돌아가도록 하였다.
또한 동방 교회와 같이 넷째 계명을 강조하였다.
품성변화의 기별도 있었다.
피터 데브루이즈는 대적들에게 쫓기다가 체포되어 1124년에 화형을 당하였다.
4. 헨리
교황이 십자군 전쟁으로 유럽의 인력을 낭비할 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
그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해 여행하였고 기도하고 설교하였다.
교황 인노센트 2세가 1134년에 이탈리아 피사에서 개최한 종교회의에서
헨리를 이단으로 선언하고 정죄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을 받거나 믿는 모든 사람들이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선엉하였다.
5. 아놀드
로마교회의 잘못된 정치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사람이다.
아놀드는 종교개혁자들이 하지 못한 일까지 하였다. 그는 정교연합 정책을 비난하였다. 교황권에 의해 침묵하라는 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망다니면서 진리를 전파하였다. 아놀드는 유아세례, 화채설등 교황권의 잘못된 교리를 설교로 반박하였다.
로마에 갑자기 교황이 달아나자 아놀드는 로마로 갔다.
사람들의 환영을 받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켰다.
그러자 교황은 황제와 연합하여 아놀드를 대적하였고 아놀드를 지지하던 자들이
모두 자신들을 숨기자 아놀드는 로마밖으로 쫓겨났고
황제의 군에 체포되어 화형되었고 재는 티베르강에 뿌려졌다.
홀로 용감하게 교황권과 싸웠던 그는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6. 피터 왈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왈덴스인들의 지도자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왈덴스인들은 피터왈도가 태어나기 수세기 전부터 있었다.
피터 왈도는 왈덴스인 이었으며 프랑스 리용의 출신으로 1160년경부터
그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부유하였기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건을 나누어주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교황권이 죄의 사람이며 짐승이라고 주장하였다.
왈덴스인들을 토벅하기 위해 십자군의 파견
“왈덴스인 선교사들이 사단의 왕국을 공격하고 있었으므로 암흑의 세력도 일어나서 크게 경성하게 되었다. 죄악의 왕자는 진리를 진척시키려는 모든 활동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의 대리자들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법왕교의 지도자들은 이런 검소한 행상인들의 활동이 그들의 사업에 위험의 전조가 되는 것을 깨달았다. 진리의 빛이 아무런 장애 없이 비추어지도록 허용된다면 그것이 백성들을 에워싸고 있는 오류의 짙은 구름을 헤쳐 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만 이끌게 할 것이므로 마침내 로마교의 최상권은 무너질 것이었다.
초대 교회의 신조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이 백성들이 로마교의 배도를 언제나 입증하였으므로 그들의 가장 심한 미움과 박해를 일으켰다.
특히 성경을 버리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로마교가 용납할 수 없는 범법이었다.
그리하여 로마교는 그들을 이 지상에서 쓸어 버리기로 작정하였다.
이에 산간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무서운 십자군이 파견되었다. 또한 종교 재판관들이 그들과 함께 파견되어 죄없는 아벨이 잔인한 가인 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광경이 자주자주 되풀이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비옥한 땅은 거듭거듭 황폐되었으며, 그들이 살던 집과 예배당은 자취조차 없어졌으므로 한 때 곡식이 무르익었던 밭들과 흠 없고
부지런한 백성들이 살던 곳은 거친 황무지가 되어 버렸다.
마치 굶주린 맹수가 피 맛을 보고 더욱 사나워지는 것처럼 법왕 교도들의 분노는 그들의 희생물들의 고난으로 더욱 격렬해졌다. 순결한 믿음의 증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추격당하고, 골짜기에서도 숨을 곳을 찾지 못하여 깊은 산림 속과 절벽 위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인권을 박탈당한 그 사람들의 도덕적 품성에는 아무런 책잡을 것이 없었다.
그들의 원수들까지도 그들을 온유하고 조용하고 경건한 백성들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의 큰 죄목은 법왕의 뜻대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죄의 대가로 사람이나 악마가 고안해 낼 수 있는 온갖 굴욕과 모욕과
가혹한 형벌이 그들에게 과하여졌다.”(쟁투, 76-77)
종교개혁을 이끈 사람들
종교개혁이라고 하면 루터를 떠올리기가 쉽다.
그러나 그 이면에 우리는 왈덴스인들이 어떤 위치와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은 그들에게 미친 여러 세기의 박해를 그들의 구원의 주를 영화롭게 한 인내와 성실로 견디었다.
그들은 토벌을 당하여 비인도적인 학살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귀중한 진리를 선포하기 위하여 전도자를 파견하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잡혀서 죽임을 당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의 피는 이미 뿌린 씨에 물을 주게 되어 결실을 가져다 주었다. 이와 같이 왈덴스인들은 루터가 나기 수세기 전에 하나님을 위하여 증거하였다. 여러 나라로 흩어진 그들은 위클리프 시대에 시작된 종교 개혁의 씨를
뿌렸는데, 그 운동은 루터 시대에 이르러 한층 더 깊고 넓게 자라났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계 1:9) 모든 고난을 즐거움으로 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마지막 시대까지 계속하여 진행될 것이다.”(쟁투, 78)
마지막 시대의 왈덴스인들
왈덴스인들의 삶 자체는 하나님을 위한 삶, 복음을 위한 삶이었다.
굶주린 자에게 생명의 떡을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속죄의 공과를 가르쳐 주었다.
또한 손으로 베낀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읽어주고 구름처럼 사라졌다.
그들은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엿고 어려울 때에는 자급자족을 하기도 하였다.
그들의최대의 목적은 선교였다.
마지막 시대에 과거 왈덴스인의 신앙 생활이 같은 자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시대 최선을 다하여 삶을 살아왔다.
그들의 직업도 그들의 신앙과 관계가 되었다.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왈덴스인보다도 더 열심히 더 진리를 굳게 붙잡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 마지막 진리를 수호해야 할 백성을 찾고 계신다.
시간은 짧다. 은혜의 기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진리에 가담하고 그 진리만을 위해서 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살아야 한다. 타협은 우리에게 존재해서는 안된다.
더 이상 세상의 미련을 버리고 온전히 진리를 위해 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