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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일 대림 제1주일
제1독서 : 예레 33,14-16
제2독서 : 1테살 3,12―4,2
복 음 : 루카 21,25-28.34-3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5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35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일상에서 기도가 사라져 버린 이유는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이 갈수록 버겁게 느껴지고 짐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전혀 바라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구 있게 되기를 빕니다.”(1테살 3,13)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사람들입니다.
그런 만일 내 삶에서 기도가 사라져 버렸고, 고해성사도 하느님과 함께하는 미사 시간도,
신앙생활의 모든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삶을 살았다면,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순간이 어떻게 느껴질까요?
우리 구원을 위한 속량이 이루어지는 희망 속에서 그분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하느님과 맺은 관계가 무너졌다면 기도하는 삶을 시작하십시오.
기도는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여전히 나를 떠나지도 포기하시지도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깨닫게 해 줍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우리 삶이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가 시작됩니다.
기도하는 삶과 함께 그분을 우리 구원자로 맞이할 수 있는
영적 힘을 키워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86년 데이비드 스노든은 75세 이상의 가톨릭 수녀 678명을 대상으로
‘노화와 알츠하이머에 관한 수녀 연구’라는 제목의 연구를 했습니다.
사후 수녀들의 뇌를 검사한 결과, 살아 있을 때
치매를 유발할 수 있었을 정도의 뇌 손상이 심한 수녀들이 있었습니다.
연구진은 이 수녀들이 삶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에 따라
치매에 걸리는지 안 걸리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그리고 무엇보다 영적으로 삶의 더 많은 면에서
활동적으로 참여했고, 노년기까지 그런 삶의 방식을 유지했던 수녀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경 생성과 신경 가소성을 자극했습니다.
이런 수녀들의 뇌는 일부 손상이 되었어도 건강한 삶의 발판이 되어 줄 수 있었습니다.
치매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열정을 가지고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연구였습니다. 그만큼 열정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열정을 멈추고 시들시들한 삶을 사는 사람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나름 이유를 가지고 있지만, 과연 자기를 망가트릴 정도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활기차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삶이 자기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충실한 삶을 당신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 모범을 따라 적극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를 망가트리는 삶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기를 완성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 날이 갑자기 들이닥치고,
죽음이 생각지도 않은 사이에 닥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심판관이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산 사람이 주님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삶을 산 사람이
과연 주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오늘부터 우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대림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주님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다시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회개와 속죄로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이 시기를 잘 보낸 사람만이 당당하게 기쁜 성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활기차게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쁜 성탄이 멀지 않았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기다림’이 활짝 피어오르는 시기입니다.
'기다림'이란 양광모 님의 시가 떠오릅니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눈부신 일인가
아침이 기다리는 태양처럼
밤이 기다리는 별처럼
그에게 한 줄기 밝은 빛이 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가슴 따뜻한 일인가
그리하여
그날을 손꼽으며 내가 그를 기다리는 건
또 얼마나 가슴 뜨거운 일인가
태양을 기다리는 아침처럼
별을 기다리는 밤처럼
그를 위해 아름다운 배경이 될 수 있다는 건
또 얼마나 맑은 눈물 같은 일인가
우리는
태어나고 기다리고 죽나니
살아서 가장 햇살 같은 날은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촛불처럼
기다리는 날이라네.
사실 모든 역사는 ‘대림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모든 시간이 대림이었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간도 역시 모두 ‘대림의 시간’입니다.
반대로도 생각해봅니다.
하느님께 있어서도 역시 어제도 오늘도 늘 ‘대림의 시간’이 아닐까요?
우리가 그리스도 오심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열절한 마음으로 망부석이 되어
오늘도 문 앞에 서서 우리가 문을 열어주기만을 내내 기다리고 계시지 않을까요?
오늘 말씀전례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재림)에 대한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말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그가 세상에 공종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예레 33,14-15)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1테살 3,13)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날에 나타날 표징들을 알려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루카 21,27)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루카 21,27)
해야 할 일을 세 가지로 말씀하시며 그 이유도 다음과 같이 밝히십니다.
첫째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루카 21,28)
둘째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루카 21,34-35)
셋째는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이는 다시 말하면,
첫째는 속량이 가까이 왔기에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오시는 분을 향해 희망을 가지라는 말씀이요,
둘째는 그날은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니,
스스로 조심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라는 말씀이요,
셋째는 그날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일”(로마 13,14) 입니다.
방황하고 있던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의 삶으로 이끌었던 이 구절은 이렇습니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 13,13-14)
그렇습니다.
'주 그리스도를 입고' 살아야, 스스로 조심할 수 있고,
어둠에 속거나 빠지는 일을 막아 주고,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입는 일’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는 일’은 그리스도의 현존 앞에 머무는 일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곧 ‘기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 앞에 깨어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기도하라' 하심은 자신의 약함과 무능력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주님의 능력과 선물을 믿으며, 주님께 소망하고 의탁하라는 말씀이요,
'깨어 기도하라' 하심은 그분을 맞아들이기 위해 준비하여 마음을 경계하고,
그분을 향하여 있으라는 말씀이요,
'늘 깨어 기도하라' 하심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의 동행에 함께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기도하는 것’이 ‘깨어 있음의 표시’가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현존에 깨어 있으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현전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깨어 있음'이란 ‘이미 오신’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일이요,
동시에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깨어 있어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 안에서 ‘깨어 있을 수 있고’, 기도 안에서 ‘깨어 있을 수 있는 힘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도는 이미 주님 앞에 서 있는 일이고,
그렇게 주님 앞에서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이 길러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보다 먼저 우리 안에서 깨어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기다리시며 깨어 기도하고 계시는 바로 그분을 만나는 일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요, 경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는 이 안에서는 그분 현존의 기쁨이 차오를 것입니다.
그러니 ‘기쁨’이 곧 깨어 있음의 표지가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주님!
제 마음이 물러지지 않게 하소서.
흔들리더라도 당신을 벗어나지 않고,
넘어지더라도 당신을 붙들고 있게 하소서.
안일과 편리로 무뎌지지 않고,
근심에서 벗어나 당신 사랑에 열렬하며,
늘 깨어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너 어디 있느냐?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혼자 두지 않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임금이십니다.”
대림 시기는 하느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간이며
그분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대림(Avvento)이라는 말은 라틴어 아드벤투스(Adventus)에서 유래했으며
‘현존’, ‘도착’, ‘오심’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오심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까요?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마음의 힘을 북돋아 주시어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테살3,13).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히브12,14-15). 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 하느님의 숨을 받은 사람이요,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해서 거룩한 사람으로 축성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거룩함을 잘 지키고 보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6).
우리는 깨어 기도 함으로써 늘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의 현존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보라, 그날이 온다. …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한 약속을 이루어 주겠다”(예레33,14).고 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잊어버리거나 저버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시고 꼭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1테살4,1)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일상 안에서 철저히 준비하면 종말이 오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준비된 사람에게는 종말이 영원한 상급이 주어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이 나타나고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고
…사람들은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루카21,2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루카21,27)라고 했듯이
두려움과 공포 중에도 준비된 사람은 영광의 모습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는 사람은 어떻게 주님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기도하면, 불필요한 많은 일들로 산만해 지거나 불평 불만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맞이하는 마음, 주님의 사랑과 용서, 그분의 말씀, 그분의 식탁에 다가가고
기도할 공간을 찾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의 요청에 앞서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림시기 동안 우리의 나태함을 떨쳐버리고 잠에서 깨어나도록 합시다!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가? 나는 깨어 있는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가?
나는 일상적인 상황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사에 정신이 팔려있는가?
오늘 그분의 오심을 깨닫지 못한다면, 마지막 때에 그분께서 다시 오시더라도
우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깨어 있으십시오!
주님께서 오시길 기다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길 기다리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거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 기다리도록 합시다.
대림은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 곁을 지나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여정입니다”(2022,11).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왜 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모든 것이 주님의 마음에 쏙 들도록 노력하는 대림절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마음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내가 바뀌면 세상이 아름답고, 모든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내가 바뀌지 않은 채 남이 바뀌기를 바라면 설사 남이 바뀌어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변할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가 바뀌기를 바란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음의 문은 꼭꼭 닫아 둔 채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기 전에
“내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사연을 안고 있으며
어렵고 힘든 일이 많지만, 내색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고달프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기도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때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힘든 게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일반 사람들과 다른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에 주님께서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부끄러워 숨었을 때 “너 어디 있느냐?”(창세3,9) 찾아 나서시며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신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시며 자신의 마음을 보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하고자 모세를 선택하시고(탈출3장)
낮에는 구름 기둥 속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비추어 주셨습니다 (탈출13,22).
그분은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5)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요한8,10).
물으시며 용서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와 여건 안에서도 주님은 함께 하시면서 물으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 지금은 실망과 좌절에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기에 앞서 우리보다 먼저 애타게 기다리며
“너 어디 있느냐?” 물으십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비행기를 타면서 가끔 웃지 못할 일이 생기곤 합니다.
포트워스 신부님과 하와이엘 갈 때입니다. 전날 확인했을 때는 터미널 A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그럴 줄 알고 터미널 A로 갔습니다. 게이트는 39번이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께 전화했습니다. 게이트 39번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도 39번에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신부님이 없었습니다.
다시 전화해서 어디에 있냐고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터미널 D에 있었습니다.
게이트는 같은 39번이지만 터미널이 달랐습니다. 알아보니 아침에 터미널이 변경되었습니다.
저는 터미널 D를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다행히 터미널 D로 가는 기차가 있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과 전화 통화를 해서 다행히 비행기를 탈 수 있었지만,
제가 아는 주교님은 게이트가 바뀐 걸 모르고 있다가 비행기를 놓치고, 다음날 비행기를 탔습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를 내셨기에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내 영혼이 평안하지 않나이다.”
깨어 있어야 하는 데는 주교님도, 사제도, 수도자도, 평신도도 예외가 없습니다.
같은 지구지만 우리는 ‘시차’가 있습니다.
서울은 이곳 달라스보다 15시간 먼저 하루가 시작됩니다.
뉴욕은 이곳 달라스보다 1시간 먼저 하루가 시작됩니다.
교회의 시간은 세상의 시간보다 1달 정도 먼저 시작됩니다.
교회의 시간은 태양을 중심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준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12월 25일이고,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기 위해서 4주간의 대림 시기를 정하였습니다.
오늘은 12월 1일이고, 대림 제1주일입니다.
교회는 대림 제1주일을 새로운 한 해의 시작으로 정했습니다.
세상 사람보다 1달 먼저 새해를 시작했으니
더 감사하며, 더 기뻐하며, 더 나누며 살면 좋겠습니다.
저는 2025년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사목 지침을 정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사목 지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2025년 본당 사목 지침
1. 사랑과 배려를 바탕으로 한 신앙생활,
사랑과 배려가 공존하는 공동체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모든 구성원은 서로를 존중하고 도우며, 상호 간의 관심과 배려를 나눕니다.
소그룹 모임, 친목 모임, 그룹 공동 활동 등을 통해
교회 구성원들의 상호작용과 유대감을 증진하며, 공동체 의식을 강화합니다.
2. 다양한 교육 및 활동,
교회는 다양한 연령층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교육 및 활동 프로그램을 제공합니다.
이를 통해 각 개인의 영적 성장과 친교를 나누며,
공동체 내에서의 상호 지원과 협력을 도모합니다.
구역모임, 성경 공부, 기도 모임, 성가대 활동, 봉사활동 등을 통해
교회 구성원들은 서로를 도우며 신앙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세대 모임을 활성화 하도록 합니다.
소그룹과 단체에 가입해서 봉사할 수 있도록 합니다.
3. 순교 정신과 사회봉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본보기로서 지역사회에 봉사합니다.
교회 구성원들은 이웃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고,
지역사회와 함께 손을 잡아 봉사하는 문화를 정착시킵니다.
지역사회나 어려운 이웃을 위한 지원 활동, 재난 구호 봉사, 장애인 센터 방문 등을 통해
교회는 순교 정신과 사랑의 행동을 실천합니다.
4. 미사와 기도의 중요성 강조, 미사와 기도는 교회 생활의 핵심입니다.
교회 구성원들은 꾸준한 미사 참례와 개인적인 기도 생활을 통해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며, 영적인 성장을 이룹니다.
온라인 미사, 주일 미사, 평일 미사에 참례하면서
교회 구성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를 통해 영적으로 충전됩니다.
5. 본당 설립 50주년 준비 위원회 발족,
2027년은 본당 설립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 50년을 돌아보며 다가오는 50년을 준비할 수 있도록 준비 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이런 사목 지침을 통해 달라스 성 김대건 성당은 소공동체의 활성화를 도모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나누며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교회로 거듭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시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와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된다.
대림이란 인류가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하여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그리스도께서 정의와 평화를 주시는 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준비하고 바라고 희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셨던”(요한 1,14)
그 역사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하여 그분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통하여
그분이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그분은 이제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이 대림을 살아야 하고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예레미야서는 인류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다윗의 정통 왕손(싹)”(예레 33,15)으로
메마른 땅에서 생존의 희망인 생명의 싹이시다.
오직 하느님만이 이 메시아를 일으켜 주실 수 있고,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바로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적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사명, 정의와 평화를 이룰
사명, 정신적 육체적 모든 악을 치유해야 할 사명은 우리가 느끼듯이 성취되어야 한다.
그래서 대림이란 신앙인의 본질적 차원인 동시에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도 기다림의 자세를 알려주고자 한다.
이 기다림은 성탄을 넘어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 대한 것이다.
오늘의 말씀은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담화의 내용이다.
복음에서는 여러 가지 징조들을 들어 신앙인들의 준비된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다(25-26절).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27절)
이때 세상은 새로워져, 낡은 세상은 가고, 악과 죽음의 세력은 더는 그 영광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28절).
이러한 새로운 세상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지만,
인간의 거룩한 삶과 깨어 기다림으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34-36절) 말씀하신다.
세상 걱정에 휩싸인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나의 인간적인 것에 매여
하느님께로 가기보다 죽음의 길로 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날은 어느 때 올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때는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는 아름다운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났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영광스러운 만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깨어 있는 삶을 언제나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하신다(36절).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는 삶이나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계속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대림의 삶인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을 통하여 계속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분이시며,
이제 우리의 매일의 삶을 통하여 잘 준비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 준비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쓸데없는 마지막 날에 관한 생각과 두려움 때문에 이 순간을 잃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가장 중요한 것까지 잃을 수도 있다.
주님께서 오심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사는 현재 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안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체험할 수 있는 삶이 계속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노력한다면
우리가 시간 안에 살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며 사는 것이다.
나의 이 순간의 삶은 바로 하느님 앞에 영원한 가치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이 세상을 새로운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참된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이러한 선물도 인간의 협력이 없으면 주어지지 않는다.
그분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 역시 하느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생활이어야 한다.
현재의 이 삶은 구원을 체험하는 장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의 삶에서 사랑의 삶을 노력해야 한다.
이 사랑의 삶이 곧 깨어 있는 삶이며, 깨어 있을 때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줄 수 있는 삶이 될 것이며,
이러한 삶이 사랑의 완성인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것이다.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21,28)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다림으로 깨어 준비해야 하는 대림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대림 시기의 핵심 주제는 기다림입니다. 사실 우리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을 마침 하는 순간까지 기다림의 나날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세상의 어둠 가운데서도 희망으로 기다리는 존재들입니다.
희망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그 기다림의 목적이 분명하고 명확하기에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은 이미 오셨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기다림이고,
사랑으로 기다리는 존재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기다림도 있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 역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이 돌아서기를 하염없이 기다리시고 또 기다려주시는 분이십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간절히 기다리는 법입니다.
제 어머니 살아 계실 때 그분은 제가 사랑하는 것보다 저를 더 사랑했기에 늘 저를 기다렸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을 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기다리십니다.
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서의 주제와 예언자들이 외쳤던 외침은
한결같이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느님께로 돌아오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마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18,2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
곧 세상의 심판관이신 당신이 다시 오실 날을 예고하시면서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21,28)하고 선언하십니다.
바로 이 말씀에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설렘과 기쁨과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속량이란 몸값을 지불하고, 노예나 포로에게 자유를 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누군가 신분상 구속받는 경우가 생길 때
가족 또는 친척 가운데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를 속박에서 해방시킬 의무가 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그러한 처지에 있을 때 하느님께 그 의무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의 관점에서 속량은 온갖 형태로 당신 백성을 구속하거나 억압하는 모든 상황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속량이라는 말은 구원 또는 해방이라는 말로 대치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바로 그러한 속량이 가까웠다고 선포하십니다.
당신이 다시 오시는 날, 완전하고 최종적인 속량이 실현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약속된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희망과 용기와 힘을 줍니다.
구원에 대한 말씀보다 더 반갑고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복음이란 바로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저 인간을 사랑하시어 구원해 주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하지만 현세적인 행복과 물질적인 재화에 몰두하고 만족하려는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고리타분하고 비생산적인 소리로만 들릴 것입니다.
때로는 신앙인들도 영원한 생명이나 천상 복락 등에 대한 말씀보다는
세속적인 관심사를 충족시켜 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구원 불감증’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들에게 당신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속량의 날인 동시에 준엄한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냉혹함에 대하여 오늘 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예고하십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21,26)
하지만 구원을 희망하며 충실하게 신앙을 지켜온 사람들은
그날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게”(21,28) 될 겁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늘 깨어 기도하여라.”(21,36)라고 가르치십니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깨닫는 점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남이 해주어야만 하는 일도 있습니다.
신앙의 측면에서 후자를 구원이라고 한다면, 전자는 구원을 위한 우리의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라는 표현이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선택 결정권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구원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 나아가지 않을 건지,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할 것인지 준비하지 않을 건지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세상은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게 우리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갈팡질팡 혹은 우왕좌왕하면서 살아가기에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4,1)라고 당부하고 권고합니다.
물론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은 늘 자기 나름대로 핑계나 논리로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여하튼 이러한 사고방식의 신앙생활에 젖어 있는 이들을
신앙인이 아닌 종교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종교인이 아닌 참 신앙인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시되는 참 신앙인의 첫 번째 생활방식은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우리의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는 것”(21,34참조)입니다.
일상의 근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살다 보면 늘 해야 하는 일과 크고 작은 근심과 걱정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런 근심과 걱정이 깊어지면
때로는 체념으로, 때로는 자포자기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상의 걱정이 내세 영원의 행복을 위협해서는 아니 될 겁니다.
두 번째 생활방식은 “늘 깨어 기도하는 것”(21,36참조)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기도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도 없이 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일이 아니라 종교인의 일일 뿐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기 위한 기도,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한 기도가 삶의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일상의 근심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아빠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의 아들 앞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께서 제시해 주시는
참 신앙인의 생활방식을 삶에서 실천하는 일입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25,8-9)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다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왕좌왕할 인생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이제는 한눈팔 것이 아니라, 정해주고 알려준 그 길을 따라 충실히 걸으면 됩니다.
또다시 감금 상태에 놓인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의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욕망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둘째, 사람들은 싫어함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셋째, 사람들은 망상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넷째,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대림 시기는 주님께서 오실 때,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우리의 방탕이 오신 주님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만취가 주님이 오신 것조차 모르게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근심 걱정이 오신 주님께 눈길조차 주지 않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눈길을 주님 오시는 쪽으로 돌리고,
깨어 기도하면서 올바른 길을 걷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며 대림 시기를 시작합시다.
우리의 속량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아멘.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겨울의 문턱에서 우리는 待臨 시기를 맞이합니다.
오늘은 그 첫 주일입니다. 교회 전례 주년의 새 週期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낮의 길이도 많이 짧아졌습니다.
대자연도 푸른 생명의 빛을 잃어가면서 죽음의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전례의 週年이 끝날 때와 새 주년을 시작할 때,
우리는 삶의 종말을 생각하고 삶의 의미를 마음에 새깁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며 발생시킨 이야기입니다.
해와 달과 별 등, 천체가 흔들리고,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며,
기절할 것이라고 복음은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신다고 말합니다.
그런 표현들은 모두 우약성서가 전하는 유대교 묵시문학이 이미 사용한 것들입니다.
(하깨 2,6; 요엘 4,16; 집회 16,18; 다니 7,13-14 참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서의 묵시문학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묵시문학이 이야기한 세상의 종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친숙한 그 문서가 사용한 표현들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친숙한 그 문서가 사용한 표현들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창조와 세상의 종말에 대한 구약과 신약성서의 이야기들은
인류 역사의 起源과 終末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
또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를 알려주는 이야기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들은 그 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가 하느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또 세상에 대해 그들이 믿었던 바를 이야기로 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의 복음으로 초기 신앙인들이 우리에게 알리는 것은
우리 삶의 최종적 가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것이라도 말한 다음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일에 얽매이지 말고, 머리를 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안에 영접하여 그분의 일을 실천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이어서 그들은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도 말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은 사람들이 모두 열심히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인생의 보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는’일과 ‘세상 걱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한 사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일을 보도록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 자유는 ‘먹고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은 偏見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은 높으신 분, 우리가 가진 것을
당신께 바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편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당신의 뜻과 계명을 지키도록 원하시는 절대자라는 편견입니다.
그것은 높은 사람들이 지배하던 옛날 인간 사회의 관행에서 얻은 편견입니다.
예수님의 삶 안에 보이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사람을 억누르고,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빼앗아서 당신의 영광을 찾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그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킨 사실을 해마다 크게 기념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것을 원하신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미움받고 십자가에서 그 최후를 맞이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강요하는 대로 율법과 성전 의례에 맹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은 율법과 성전 의례에 얽매여 종과 같이 비굴하게 사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우리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보고, 그것을 영접하여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소외시킨 이들과 어울렸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병자와 장애인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고쳐 주면서
하느님이 그런 불행으로 사람을 벌하시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고치고 살리는 것이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부모는 憐憫, 곧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자녀들을 대하고 그들과 함께 있어 행복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버리거나 자녀의 잘못에 보복하지 않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에 대해 자기들과 달리 말하는 예수님을 그냥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제거하였습니다. 惡貨가 良貨를 구축하는 우리의 세상입니다.
연민 혹은 불쌍히 여김은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억제합니다.
연민은 강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실천하면, 우리가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목숨까지 바치면서 알려주신 그 불쌍히 여김을 우리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한 해가 또 지나가고 있습니다.
열두 장이었던 달력이 이제 마지막 한 장만 남아서 우리의 아쉬움을 대변합니다.
우리의 삶이 불쌍히 여김과는 거리가 멀었었고,
예수님 혹은 하느님이라는 이름마저 우리가 더 많이 갖고,
더 잘 살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말씀과 같이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겨서’ 산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연민이 마음 안에 살아있고,
그것이 우리의 몸짓으로 나타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인이 누리는 참다운 자유로 보여야 합니다.
땅에 굴러다니는 낙엽을 밟으면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만 마음을 빼앗겨 살다가
낙엽으로 지는 우리의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대림절은 하느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 자리 잡으시도록 비는 계절입니다.
세월도 가고, 우리도 갑니다.
하느님의 연민이 우리 마음 안에 자리 잡고,
그것 우리의 몸짓으로 나타난 그만큼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