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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1:28
나사로의 때 이른 죽음 앞에 마리아도 울고 마을 사람들도 울고 예수님도 비통해 우셨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랜즈를 통해 하늘이 보인다"고 말헸지만 다 하늘만 보일까. 별이 아니라 벽만 보이고 부활이 아니라 무덤만 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평탄할 때 그분은 누구이며, 죽음이라는 가장 가혹한 현실 앞에서 예수님은 누구인가? 공주야!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그분과의 관계에 따라서 그분이 삶에서 감당해주길 원하는 역할은 다를 것이다.
In the face of Nasarro's early death, Mary cried, the villagers cried, and Jesus cried heartbroken. Ham Seok heon said, "If tears are young in your eyes, you can see the sky through the land." But will everyone see only the sky? Some people see only the walls, not the stars, and the tomb, not the resurrection. What is Jesus like to us? Who is he when he is flat, and who is Jesus in the face of the harshest reality of death? Princess! Depending on your understanding of Jesus and your relationship with him, the role he wants you to play in life will be diffe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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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유대인들은 무엇을 기대했는가? 마르다는 예수를 마중하러 나간 반면 마리아는 집을 지키다가 예수의 부름을 받고 나간다. 예수가 마리아에게도 위로와 소망을 주고 싶어 부르셨다. 마리아도 예수께서 오라비가 살아 있을 때 오셔서 고쳐주지 않으신 것을 아쉬워한다.마리아 역시 예수의 치유 능력을 의심치 않았지만, 그가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은 모르고 있다. 하지만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알아야 한다.
What did Mary and the Jews expect? Martha went out to meet Jesus, while Mary was guarding the house and was called out by him. Jesus also called Mary to give comfort and hope. Mary also regrets that Jesus did not come and fix Orabi when he was alive. Maria also did not doubt Jesus' healing ability, but she does not know that he is God the Creator who can save the dead. But you will soon k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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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까지 알아야 우리가 목숨을 내놓고 예수를 믿을 수 있고, 죽음 앞에서 믿음을 지킬 수 있다. 예수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비통해하신다. 마리아의 눈물과 그를 위로 하기 위해 찾아온 자들의 슬픔에 공감하며 같이 우신다. 잠시 후에 나사로를 살리시겠지만, 죽음이 가져온 이 절망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별은 쓰리라고 잔인하다. 죽음이 주는 절망과 그 서늘함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생명과 부활이 주는 소망을 사모하고 그 환희에 감격하겠는가.
If we know that, we can give up our lives and trust Jesus and keep our faith in the face of death. Jesus is heartbroken in the face of Nasarro's death. He cries with sympathy for the tears of Mary and the sorrow of those who came to comfort him. Although you will save Nasarro after a while, this despair brought by death is a stark reality. Separation is cruel for three. If you don't know the despair and coolness of death, how can you long for the hope of life and resurrection and be thrilled with the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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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그 무서운 폭력성에 몸서리치라. 예수님의 눈물을 보고 유대인들은 그가 나사로를 사랑 하셨음을 알아본다. 그들 중 아무도 나사로의 소생을 기대한 이는 없다. 그의 소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일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일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곧 그들도 지금 이 순간의 예수, 치유 능력을 향해 더 큰 기대를 걸게 될 것이다. 그 예수가 높이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지금의 아쉬움이 감탄으로 바뀔 것이다. 절망 가득한 세상에서 예수님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가?
Shudder at the terrifying violence of death. Seeing Jesus' tears, the Jews recognize that he loved Nasarro. None of them expected Nasarro to be revived. We do not expect God to be honored through his resuscitation. But we do not expect God to be honored. But soon they will also have higher expectations for Jesus and his healing ability in this moment. He will participate in the glory of God that Jesus raises. The current regret will turn into admiration. What role do you expect from Jesus in a world full of desp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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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가?
난 누구를 위해 울 것 인가?
죽음의 현실 앞에 우리는 예수께 어떤 역할을 기대해야 하는가?
What is the meaning of Jesus' tears?
Who am I going to cry for?
What role should we expect from Jesus in the face of the reality of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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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를 부르시는 예수님(28-31)
a.예수님이 마리아를 부르심:28-29
b.예수께 나아가는 마리아:30-31
마리아의 눈물(32-33)
a.예수님께 하소연 하는 마리아:32
b.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33
예수님의 눈물(34-37)
a.우시는 예수님:34-35
b.예수님의 눈물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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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하고(28a)
돌아가서(28b)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28c)
불러 말하되(28d)
선생님이 오셔서(28e)
너를 부르신다 하니(298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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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29a)
급히 일어나(29b)
예수께 나아가매(2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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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아직(30a)
마을로 들어오지(30b)
아니하시고(30c)
마르다의 맞던 곳에(30d)
그저 계시더라(30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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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함께(31a)
집에 있어 위로하던(31b)
유대인들은(3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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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급히 일어나(31d)
나가는 것을 보고(31e)
곡하러 무덤에(31f)
가는 줄로 생각하고(31g)
따라가더니(31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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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가(32a)
예수 계신 곳에(32b)
와서 보이고(32c)
그 발 앞에(32d)
엎드리어 가로되(3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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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여기(32f)
계셨더라면(32g)
내 오라비가(32h)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i)
하더라(32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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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33a)
그의 우는 것과(33b)
또 함께 온(33c)
유대인들의(33d)
우는 것을 보시고(33e)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33f)
민망히 여기사(33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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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사대 그를(34a)
어디 두었느냐(34b)
가로되 주여(34c)
와서 보옵소서. 하니(3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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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35a)
눈물을 흘리시더라(35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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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36a)
유대인들이 말하되(36b)
보라 그를 어떻게(36c)
사랑하였는가 하며(3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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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37a)
소경의 눈을 뜨게 한(37b)
이 사람이(37c)
그 사람은(37d)
죽지 않게 할 수(37e)
없었더냐 하더라(3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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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의 아쉬움_The sadness of being skinny.
죽음이 주는 비통함_The sorrow of death.
유대인들의 오해_Misunderstanding of J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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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우심의 의미는 죄의 세력에 대한 분노며 죽음에 저당 잡혀 일생을 매여 사는 우리들에 대한 민망히 여기심인 것을 깨달게 됩니다. 주님, 말씀을 사랑하고 내 가족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은 단지 고통에 공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현실에 대안인 것을 깨달게 하옵소서.
The meaning of the Lord's right heart is anger at the forces of sin, and we realize that we are ashamed of ourselves who are mortgageed by death and live our lives tied up. Lord, give me love for words and love for my family community. May Jesus realize that he does not just sympathize with pain, but is an alternative to the reality of death.
2026.3.8.sun. Clay
2.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 —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예수의 존재론
예수님의 눈물은 단순한 공감인가, 아니면 죽음 자체에 대한 신적 선언인가?
1) 요한복음 11장 28절 — ‘부르심’에서 시작되는 신학
요한복음 11:28은 사건의 전환점입니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죽음의 장면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사실은 부르심(vocation)으로 시작됩니다. 죽음은 끝처럼 보이지만, 본문은 죽음이 아니라 부르시는 음성”을 강조합니다. 신학적으로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a. 죽음은 인간의 현실 b. 부르심은 하나님의 개입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죽음은 침묵이지만, 예수는 그 침묵 속에서 이름을 부르십니다.
2) 마리아의 눈물 — 신앙의 한계
마리아의 고백은 아름답지만 제한적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이 문장은 믿음이면서 동시에 한계입니다.(예수의 치유 능력은 믿음 그러나 죽음 이후의 권능은 미지) 이것이 인간 신앙의 구조입니다. 우리는 병 고치는 예수는 믿지만, “죽음을 뒤집는 예수”는 믿기 어렵습니다. 철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존재의 한계 인식입니다. 죽음은 인간 이해의 끝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언제나 죽음 앞에서 시험됩니다. 예수의 통분은 단순한 연민이 아닙니다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여기서 “통분”은 단순한 슬픔이 아닙니다. 원어적으로는 격렬한 분노의 뉘앙스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무엇에 분노하시는가?
* 마리아의 눈물?
* 유대인들의 오해?
* 아니면 죽음 그 자체?
신학적으로 가장 깊은 해석은 이것입니다. 예수는 죽음의 폭력성에 분노하십니다. 죽음은 자연 현상이 아니라 타락 이후 인간을 억압하는 세력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듯 죽음은 인간을 “종노릇하게 하는 세력”입니다. 예수의 눈물은 연약함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전면적 선전포고*입니다.
3) 예수께서 우셨다 — 하나님의 눈물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지만 가장 깊은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시는가? 고전적 신학은 하나님을 “무감정적 존재(impassible)”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르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고통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이것은 성육신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죽음을 멀리서 해결하지 않고 가까이에서 함께 우십니다.
4) 유대인들의 반응 — 사랑으로만 해석하다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그들의 해석은 절반만 맞습니다. 예수의 눈물은 사랑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 종교의 한계입니다. ,공감은 이해하지만 초월은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가…” 그들은 여전히 기적의 예수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말하는 예수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5) 철학적 죽음 — 존재의 경계선
죽음은 단순히 생물학적 현상이 아닙니다. 철학에서 죽음은 존재의 최종 한계입니다.
* 하이데거: 죽음은 가장 고유한 가능성
* 키르케고르: 절망의 극점
* 사르트르: 무(無)와 마주함
그러나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다." 이것은 낙관이 아닙니다. 죽음을 가볍게 보는 태도도 아닙니다. 예수는 먼저 우십니다. 그 후에 살리십니다. 즉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6) 우리는 예수께 무엇을 기대하는가?
죽음의 현실 앞에 우리는 예수께 어떤 역할을 기대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은 위로를 기대합니다. 어떤 이는 문제 해결을 기대합니다. 어떤 이는 기적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1장은 말합니다. "예수는 단지 문제 해결자가 아니다. 그는 죽음 자체의 대안이다"
7) 결론 — 예수의 눈물의 의미
예수의 눈물은 세 가지입니다. 1. 공감 — 인간의 고통에 함께 우심 2. 분노 — 죽음의 세력에 대한 거룩한 격노 3. 선언 — 곧 드러날 생명의 승리의 전조 예수는 죽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미화하지도 않습니다. 죽음을 통과하여 생명을 드러내십니다. 예수의 눈물을 본 사람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무감각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무서운 폭력성에 몸서리치라.” 그래야 생명의 영광이 얼마나 찬란한지 알게 됩니다. 나는 누구를 위해 울 것인가? 평탄할 때 예수는 누구인가? 죽음 앞에서 예수는 누구인가? 평탄할 때 그는 스승입니다. 죽음 앞에서 그는 부활 그 자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