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2월 2일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이사 2,1-5
복 음 : 마태 8,5-11
5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6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이사 2,3)
제1독서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집으로 몰려오는 이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복음 말씀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어떻게 들을 때
기적과 은총을 체험하게 되는지 알려줍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함’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예수님을 감탄시켰고, 그에게 필요한 은총이 주어졌습니다.
‘들음+믿음=기적’.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적의 공식’, ‘은총의 공식’입니다.
수학 문제를 풀어보셨나요? 수학 공식은 그대로 대입하면 답을 얻게 해 줍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적의 공식을
오늘 하루의 삶에 그대로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잃어버렸던 신앙의 기쁨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린 하루,
그분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며 감탄하시는 하루가 될 것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가격은 얼마나 할까요?
정답은… 가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격은 시장에 나와야 붙는 것인데, ‘모나리자’는 갖고만 있어도
전 세계 관광객이 찾아와서 돈을 척척 내주니 시장에 내놓을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의 작품이면 얼마냐고 묻는다면, 많은 경매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못해도 1조 원 이상이 될 것입니다.”
이 모나리자가 처음부터 이런 가치를 가졌을까요?
물론 이 그림에서 미묘한 미소가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입을 보면 웃고 있는데, 눈만 보면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사실 1503~1506년 무렵에 그려진 이 모나리자에
사람들은 처음에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초상화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가 확 오른 것은 1911년 8월 22일이었습니다.
바로 이날 루브르 박물관에 있던 모나리자를 도난당한 것입니다.
이 도난 사건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고,
이때부터 ‘모나리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 되었습니다.
잊었던 가치가 도난이라는 시련을 통해 세상에 드러난 것입니다.
이 부분을 떠올리면서 주님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평안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고,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때 주님의 가치가 세상에 드러났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어렵고 힘든 고통과 시련의 시간 속에서
그동안 잊었던 주님의 가치가 드러났었음을 묵상 안에서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을 떠올려 보십시오.
당시 잘 나가던 로마의 백인대장이었습니다.
그의 위세는 대단했고, 두려운 것이 하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이 백인대장의 위치에 있었다면,
평상시에 하던 대로 예수님께 명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예수님 앞에 자기를 끊임없이 낮춥니다.
지금도 백인대장의 이 고백에 담긴 그 마음을 영성체 하기 전에 우리도 바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자기 종을 고쳐 달라고 허리를 굽히는 모습,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겸손에서
우리 역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습니다.
자기 낮춤과 겸손의 삶을 통해서만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묻혀서 잊고 있었던 주님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하늘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대림의 첫 월요일을 맞이했습니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합니다.
곧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을 묵상하며, 동시에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 곧 ‘성탄’은 그저 때가 되면 찾아오는 일이거나
또는 단지 어떤 재미나고 멋진 일에 대한 기억이 아닙니다.
또한 ‘다시 오심’, 곧 재림 역시
그저 때가 되면 찾아오는 놀랍고 떨린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 다 모두 거룩하고 신비로운 변형이 분명히 일어나는
‘구원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날을 위해서는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처럼 믿음과 희망을 품고
‘구원의 만남’을 위해서 찾아 나서는 ‘대림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을 만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만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그분이 먼저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시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분은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탄생시키고 변형시키는 분은 바로 그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으로 누워있는 종은 백인대장의 ‘집’에 있습니다.
그 ‘집’은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자격이 없는 이방인의 지붕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당혹스런 일을 벌이십니다.
지금까지는 당신을 찾아오거나 당신께 데려온 병자들을 고치셨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먼저 발 벗고 나서십니다.
그의 종을 치유해 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집’,
곧 주님을 모실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 이방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나서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마태 8,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오심’으로 이미 ‘인류의 집’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마치 자캐오에게 “오늘은 내가 너희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하시며,
모든 이들이 매국노의 ‘집’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침 뱉고 피해 가던 그 ‘집’으로 들어오셨듯이 말입니다.
오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고쳐주셨습니다.
새롭게 탄생시키시고 변형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모실 자격이 없는
저희 ‘마음의 집’에 들어오시겠다고 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그러니 오늘 제 마음이 기뻐 설렙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시어 제 마음에 ‘당신의 집’을 지으신 까닭입니다.
제 안에 당신 몸과 피로 하늘나라의 잔칫상을 차려주신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1)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당신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만을 제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은 머리 위에 계시되 속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유를 주시니,
당신께 온전히 속한 자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믿음으로 주님을 부릅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오래전의 일입니다.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한국 성체대회가 거행되던 날,
하늘은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이었고 태양은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파견 강복이 있기 직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뭐 나타났어요?” 그 말씀으로 자극을 받아
참가자 모두가 환호하며 하늘을 바라보았고 저도 태양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성체 모양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런 현상에 부정적인 저였지만 저도 모르게 성호경을 그으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때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예수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으셨지만,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13,58).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셨지만,
그 말씀의 능력은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힘을 내느냐 못 내느냐는
그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도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행하면 능력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는 것은 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믿고 행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을
유다인이 아닌 한 이방인 백인대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 활동을 많이 하고 본당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
성직자나 수도자도 믿음을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은 많을지 모르나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믿음에는 소홀할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11,1. 6).
믿음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기도로 마칩니다.
“오 하느님,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선포하신,
아드님의 일생을 통하여 제게 불어넣어 주신 그 믿음으로
오 하느님! 당신을 애타게 부르나이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현대사회를 이끌어가는 ‘축’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군인도 있습니다.
법과 제도를 만드는 입법부도 있습니다.
법과 정의를 판단하는 사법부도 있습니다.
법과 제도를 실행하는 행정부도 있습니다.
세금을 내고 권리와 책임을 다하는 국민이 있습니다.
저는 현대사회를 이끌어가는 ‘축’은 ‘신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은행에 계좌를 열고, 돈을 맡길 수 있는 건 은행이 안전하다는 신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 걱정 없이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건
식당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신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찰에게 총을 맡길 수 있는 건
경찰이 그 총으로 우리를 보호할 수 있다는 신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용이 잘 지켜지는 사회는 국가의 경쟁력이 높은 건강한 사회입니다.
신용이 무너지는 사회는 부정과 부패가 넘쳐나는 병든 사회입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국가를 세우고,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신용’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인류의 문명과 문화를 이끌어 왔던 철학의 근본이 이성이라면,
인류의 도덕과 윤리를 이끌어왔던 종교의 근본은 ‘믿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는 크게 4가지를 선포하였습니다.
첫째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과 역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둘째는 지금 겪는 고난과 유배는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를 징벌의 도구로 사용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셋째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한다면, 다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유배에서 돌아오게 할 거라고 선포했습니다.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이스라엘 백성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는데,
이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넷째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메시아, 구세주가 올 거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렇게 구약의 문을 닫고, 신약의 문을 연 예언자가 있으니 ‘세례자 요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대림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어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깨어 있음의 첫 번째 조건은 ‘믿음’의 눈을 뜨는 겁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본 예수님은 그저 눈으로 보았던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메시아’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던 고향 사람들에게는 표징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능력, 업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물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리 믿음이 없느냐!’
우리가 믿음을 가진다면, 고통의 바다에서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병자를 고쳐주지 못하고,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와 같은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강한 사람은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로마의 군인일지라도, 죄를 지었을지라도 칭찬하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고쳐주셨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마르타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죽었던 라자로를 살려 주셨습니다.
오늘 백인대장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믿음의 눈을 크게 뜨고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조욱현 토마 신부
백인대장은 예수께 자기 종을 위하여 도움을 청한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6절)
예수께서는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7절) 하신다.
종을 치유해 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신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알게 된다.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절)
그의 믿음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 일보다 더 큰 믿음이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종이 일어나리라는 확신했다.
백인대장은 겸손한 자세로, 그리스도를 자기 집뿐 아니라
마음에도 모실 자격이 있는 자임을 보여준다.
그분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런 큰 믿음과 겸손을 보여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그의 집에만 들어가시고 마음에는 들어가지 못하셨다면 기쁨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요 주님으로 알고 찾아온 것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권한을 받은 분으로 여기고 찾아왔다.
백인대장은 예수께 “말씀만 해 주십시오.”(8절) 했고,
이 말은 하느님께만 어울리는 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니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그분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감탄하시며 그를 칭찬하신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선물을 베풀어주신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10절)
예수님께서 육으로는 이민족이지만 믿음의 가족인 백인대장을 칭찬하셨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11절)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을 거절한 백성들은 쫓겨나고
그리스도인들은 동서에서 몰려와 복된 잔칫상에 앉게 된다.
주님의 감동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
나는 뭇 백성들 높이 땅위에 가장 높노라.”(시편46,11)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사람이 겸손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겸손이 지혜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랑, 겸손한 믿음, 겸손한 지혜입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어머니입니다.
베네딕도 규칙도 <7장 겸손에 대하여>라는 항목에서
겸손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덕인지 설파하고 있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멈춤에 대한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인간은 격하게 행동했을 때가 아니라 잠시 멈췄을 때, 오히려 길을 찾아낸다.”<다산>
“멈출 것을 안 다음에야 정해지고, 정해진 후에야 마음이 고요해지며
그 후에야 편안해지고, 그 후에야 생각하며, 그 후에야 얻을 수 있다.”<대학>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움직이고, 계속 말하는 것,
현대인의 영적 질병이라는 토마스 머튼의 통찰도 생각납니다.
이 또한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을, 평화의 결핍을 반영합니다.
향심기도, 비움 기도, 명상 기도를 통한 멈춤의 영적 훈련도 참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멈춤의 훈련이자 겸손과 경청의 훈련도 됩니다.
교황님의 어제 대림1주일 삼종기도 후 강론 중 주요 내용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깨어 있어라, 그리고 네 시선을 하늘(Heaven)로 향하라.”
“평화의 추구는 모든 이들의 책임이다.”
이런 이가 멈출 줄 아는 겸손한 사람, 평화의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 중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이 빛납니다.
주님을 감동케 한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입니다.
믿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는 이방인의 믿음입니다.
백인대장과 주님과의 문답에서
그의 겸손한 면모와 사랑이, 그의 참 좋은 인성이 잘 드러납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 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백인대장의 멈추고 주님을 찾는 겸손한 지혜가,
종에 대한 겸손한 배려와 연민의 사랑이, 주님을 믿는 겸손한 믿음이 빛납니다.
마지막 백인대장의 고백은 미사 중 성체를 모실 때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바로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을 상기하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겸손의 절정을 보여주는 미사 성찬 전례 중 다음 영성체 시 문답이 참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이어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동, 감탄하시며 언급하시는 내용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세상 어디서나 겸손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하늘나라임을 깨우쳐 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겸손한 믿음이 하늘 얼마나 구원에 결정적인지 거듭 강조하는 주님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이라는 기득권이 참으로 무용함을 봅니다.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에 “가거라,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 치유의 응답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의 만민 구원의 꿈과 이상을 보여줍니다.
이런 꿈과 이상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믿음의 사람은 배움의 사람이자 평화의 사람입니다.
제1독서 서두와 마지막 말씀이 그대로
겸손한 믿음과 평화를 추구하는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주님의 산, 하느님의 집으로 가서 주님의 길을, 가르침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길, 평화의 공부요 그대로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가톨릭 신자들의 평생교육에 미사보다 더 좋은 공부도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자에게는, 진리와 영으로 예배하는 자에게는,
바로 그 삶의 자리가 주님이 계신 주님의 산, 주님의 집입니다.
이사야서의 하느님의 평화의 꿈이 참 아름답습니다.
진정 주님을 닮은 겸손한 믿음의 사람들은 평화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꿈은 평화의 꿈입니다.
주님이 바라시는바, 유일한 소원은 이런 평화의 실현입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겸손한 믿음의 사람으로,
주님 평화의 일꾼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는 이들이 바로 겸손한 믿음과 평화의 사람들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아멘.
待臨의 구체적인 방법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우리 모두는 이제 막 시작한 대림시기에로 초대를 받았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성탄과 인자의 재림’,
이 두 가지 사건을 한꺼번에 묵상하는 기간이라고 했다.
이 초대는 그래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4주간의 준비를 통해 이미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금 나의 “주님”으로 알아 모시는 구유에로의 초대이다.
즉, 나를 위한 하느님의 성탄 파티에 초대받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자의 영광스러운 재림과 그분께서 주최하는 공심판에로의 초대이다.
이것도 말하자면, 나와 온 세상이 인자의 재림과 심판 파티에 초대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탄과 재림의 초대에 응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이 세상에 오시는 주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준비하고 기도하는 것”(마태 24,22; 마르 13,37; 루카 21,36)이다.
이 세상에 오시는 주님은 이미 사람이 되어 오셨던 주님이시며,
세상의 완성을 위해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주님이시며,
또한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 앞에서 깨어 기도한다면 대림의 초대에 잘 응답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루 24시간 잠도 없이 깨어 기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내 삶의 한가운데 현존시키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그런 이 방법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시간을 내어 기도하기도 하고, 미사 참례도 하며, 내 할 일도 하고,
하기 싫고 시키는 일을 해야 하기도 하며, 멍하니 있기도 하고,
걱정하며, 다투고, 화내고, 싸우며, 기뻐하고, 아파하며, 슬퍼하면서
하루의 마지막에 가서는 반성하면서, 아니면 지쳐서 생각 없이 잠자리에 든다.
이 모든 일 가운데 하느님을 현존시킨다는 것, 이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우리 삶의 한가운데 현존시킨다는 것’은
방법상 그 출발점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백인대장이 중풍병을 앓고 있는 하인을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8절)하고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아무도 주님의 현존을 내 안에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
그럼으로 불구하고 우리는 미사성제에서
주님의 거룩한 몸을 받아 모시기 전에 백인대장과 같은 말로 고백한다.
“주님, 제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주님의 한 말씀으로 내가 깨끗하여질 수 있다는 믿음,
그럼으로써 감히 주님을 모실 수 있겠다는 믿음이 바로 그 방법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깡그리 모아
하느님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 사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이다.
이 방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오늘 복음이 입증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적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와 있다는 표징이며,
우리가 또한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의 땅에서 숨 쉬며 살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