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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1:38
시작은 죽음이었는데 끝은 생명입니다. 이 서사의 반전에는 죽음의 세력에 맞서 생명을 깨우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조근 조근 말씀하시던 예수님의 음성이 높아졌습니다. 흑암의 세상에서 빛을 불러 내셨던 첫 장조의 순간처럼 그 음성에 어떻게 음답해야 할까? 공주야! 죽을병에 걸렸다가 기적처럼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심지어 사망선고를 받은 후 살아난 사람도 있다. 그 가족이 느꼈을 기쁨은 상상 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을 유예한 것일 뿐 제거한 것이 아니다.
It started with death, but it ended with life. In the twist of the narrative, there is the voice of Jesus who awakens life against the forces of death. The voice of Jesus, who was whispering, became louder. How should we grumble about the voice like in the first major moment that brought out light in the dark world? Princess! I often hear that she survived from a death disease like a miracle. Some people even survived after being declared dead. It is hard to imagine the joy that the family would have felt. But it was only a postponement of sorrow, not remo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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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죽음을 제거한 사건이 아니라 연기한 사건이다. 죽은 나사로를 겹겹이 둘러싼 절망적인 현실을 보라. 무덤은 돌로 막혀 있고 시신이된 지 나흘이 지났다. 벌써 시신에는 부패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마르다의 심정을 헤아려보라. 절망말고는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죽음은 그저 죽음일 뿐이다.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리고 과거로 돌릴 뿐이다. 여기서 어떤 이변을 기대할 수 없다. 예수님은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살려 일으킨다.
It is not an incident that eliminates death, but an event that has been postponed. Look at the desperate reality surrounding the dead screw thread. The tomb is blocked with stones and it has been four days since it became a body. The body already begins to smell decomposed. Try to imagine how Marda feels to describe the situation as it is. You cannot expect anything but despair. Death is just death. It just turns everything into nothing and goes back to the past. No extraordinary event can be expected here. Jesus raises the screw in the tomb 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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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신다. 예수가 하신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뜻이다. 예수의 감사 기도가 그것을 보여준다. 예수는 결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기적을 행하셨다. 더욱이 이것은 서막에 불과하다. 이것은 부활이 아니라 소생이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의 부활을 알리고, 또 마지막 날에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부활이 가능한 약속임을 보여준 사건이다.
It shows the glory of God. It means that it is not what Jesus said, but what God did. Jesus' prayer of thanksgiving shows it. Jesus never showed off his power and performed this miracle for God's glory from beginning to end. Moreover, this is only the prelude. This is because it is not a resurrection, but a resuscitation. This is an event that announced the resurrection of Jesus and showed that the resurrection of all those who believed in him on the last day was a possible prom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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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로하러 온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나사로를 소생시킨 일을 경험하고 예수를 믿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떤 의도인지 모르지만 그 사실을 바리새인들에게 알려주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분명 이 예수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고 전했을 것이다. 유대교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은 메시아가 마지막 날에 의인들에게 행하실 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주의 영이 자유롭게 역사하지 못하게 막는 내 안의 장애물은 무엇인가? 나사로를 살아남의 의미가 무엇인가? 내 기도는 영광을 구하는 기도인가?
Many people who come to the comfort of Mary and Marda experience that Jesus resurrected Nasarro and begin to believe in him. However, some people tell the Pharisees that they do not know what the intention is. They must have expected and conveyed a positive response to this Jesus.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in Judaism is because it was expected to be something the Messiah would do to the righteous on the last day. What is the inner obstacle that prevents the Spirit of the Lord from freely recording? What is the meaning of surviving Nasarro? Is my prayer a prayer for 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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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명령(38-40)
a.돌로 막혀있는 무덤:38
b.돌을 옮겨놓으라는 예수님의 명령:39-40
예수님의 살리심(41-44)
a.예수님의 기도:41-42
b.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심:43-44
예수님의 살리심에 대한 반응들(45-46)
a.긍정적인 반응:45
b.부정적인 반응: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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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예수께서(38a)
다시 속으로(38b)
통분히 여기시며(38c)
무덤에 가시니(38d)
무덤이 굴이라(38e)
돌로 막았거늘(38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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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가라사대(39a)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39b)
그 죽은 자의 누이(39c)
마르다가 가로되(39d)
주여 죽은지가(39e)
나흘이 되었으매(39f)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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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가라사대(40a)
내 말이(40b)
네가 믿으면(40c)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40d)
하지 아니하였느냐(40e)
하신대(4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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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옮겨 놓으니(41a)
예수께서 눈을 들어(41b)
우러러 보시고(41c)
가라사대 아버지여(41d)
내 말을 들으신 것을(41e)
감사하나이다(41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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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내 말을(42a)
들으시는 줄을(42b)
내가 알았나이다(42c)
그러나 이 말씀(42d)
하는 것은(42e)
둘러선 무리를(42f)
위함이니(42g)
곧 아버지께서(42h)
나를 보내신 것을(42i)
저희로 믿게 하려(42k)
함이나이다(42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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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하시고(43a)
큰 소리로 나사로야(43b)
나오라 부르시니(4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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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44a)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44b)
나오는데(44c)
그 얼굴은(44d)
수건에 싸였더라(44e)
예수께서 가라사대(44f)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44g)
하시니라(44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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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에게 와서(45a)
예수의 하신 일을 본(45b)
많은 유대인이(45c)
저를 믿었으나(45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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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 어떤 자는(46a)
바리새인들에게 가서(46b)
예수의 하신 일을(46c)
고하니라(4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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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준 절망적인 현실_
Desperate reality from death
죽음을 이기고 소생한 나사로_
With NASA who overcame death and revived,
나사로의 소생에 대한 반응_
Reaction to NASA's resusci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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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아버지가 우시는 이율 알 턱이 없는 철없는 아들을 용서 하옵소서. 이 땅에 아버지들과 실직 가장들의 비애를 주께서 신원하여 주옵소서. 동시에 울고 싶어질 때 바로의 종노릇도 끊게 하시고 울 주님과 연합하므로 새롭게 살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연민 가운데 찾아오시어 우리 가족들의 애환을 터치하신 울 주님을 찬양합니다.
Lord, forgive the immature son whose father cries, Lee Yul. May the Lord identify the sorrows of fathers and unemployed heads of households in this land. At the same time, when you want to cry, make Baro stop being a servant and live a new life because he is united with our Lord. We praise our Lord, who visited us amid his father's compassion and touched the joys and sorrows of our family.
2026.3.9.mon.Clay
신학 비평//
1) 다시 무덤 앞으로 — 눈물 이후의 ‘행동’
요한복음 11:38은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 단락에서 예수는 우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는 움직이십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은 결정적 변화입니다. * 눈물 → 공감 * 명령 → 개입 신앙은 감정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슬퍼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행동하시는 분입니다.예수는 곧바로 기적을 행하지 않습니다. 먼저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이 명령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왜 예수는 직접 돌을 치우지 않으셨을까요? 신학적으로 이것은 협력의 구조입니다. * 생명을 주시는 분 → 하나님 * 돌을 옮기는 일 → 인간 하나님은 인간의 참여를 요구하십니다. "은혜는 인간의 행위를 배제하지 않는다."
2) 마르다의 현실주의 — 신앙과 냄새
마르다는 말합니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신앙은 이상을 말하지만 인간은 냄새를 말합니다. 이 장면은 믿음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현실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추상적 개념이 아닙니다. 냄새가 나는 현실입니다.요한복음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물질적 현실로 묘사합니다.
3)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 — 기적의 목적
예수는 기적의 목적을 명확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기적은 고통 제거가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 계시가 목적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등장합니다. a. 인간의 기대: 문제 해결 b.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 계시 신앙의 갈등은 항상 여기서 생깁니다. 우리는 삶이 좋아지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드러나길 원하십니다. 예수는 기적 전에 감사하십니다.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 기도는 기적의 방향을 분명히 합니다. 기적은 예수의 능력 과시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계시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명확합니다.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기적은 믿음을 낳기 위한 표적입니다.
4) “큰 소리로” — 창조의 음성
이 장면은 요한복음 전체와 연결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여기서 예수는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새 창조 사건입니다. 죽음은 창조의 반대입니다. 예수의 음성은 창조의 반복입니다. 신학적으로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는 단지 죽은 자를 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창조의 음성을 가진 분입니다. 나사로는 살아 나왔지만 아직 묶여 있습니다.그래서 예수는 말합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이 명령은 교회론적 의미를 가집니다. a. 생명을 주는 분 → 예수 묶인 것을 푸는 일 → 공동체 구원은 개인적 사건이지만 회복은 공동체적 과정입니다.
5) 반응의 분열 — 기적이 믿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반응은 나뉩니다. a. 어떤 사람 → 믿음 b. 어떤 사람 → 고발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사실입니다. 믿음은 증거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입니다. 같은 사건을 보고도 사람은 전혀 다르게 해석합니다.
6) 나사로 사건의 의미 — 소생 vs 부활
당신이 정확히 짚었습니다. 나사로는 부활이 아니라 소생입니다.(다시 죽을 존재/그러나 죽음이 절대가 아님을 보여줌)이 사건은 예수의 부활의 예고편입니다. 죽음이 마지막 단어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이 사건은 죽음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죽음은 더 이상 절대 권력이 아닙니다. 예수는 죽음을 없애지 않고 죽음의 주권을 무너뜨립니다. 나사로 소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의 기적은 죽음을 제거하는 사건인가, 아니면 죽음을 통과하게 하는 계시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