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 丙 戊 癸 乾
辰 午 午 巳
71 61 51 41 31 21 11 0,8
庚 辛 壬 癸 甲 乙 丙 丁
戌 亥 子 丑 寅 卯 辰 巳
임철초 본인의 사주 자평(自評)
"매우 더운 한여름에 태어났다. 巳火는 남방의 불이니 癸水는 이미 절지에 임해 무력하다. 한잔의 물로써 짚 수레에 붙은 불을 어찌 끌 수 있겠는가?...... 時干에 있는 壬水를 도와줘야 할 癸水가 도리어 불길을 보탬으로써 偏官을 힘들게 하고 있다. 더욱이 양인이 날뛰니 巳中의 庚金이 어찌 水를 생조하겠는가?
壬水가 비록 辰土에 통근을 했다고는 하지만 한마디로 金의 도움도 없는 상황에서 운까지 40여 년을 木火 운으로 달리고 있는 형상이라 비겁만 날뛰고 있으니 위로 부친의 뜻을 받들기 불가능했다. 부친은 상당하셨으나 자식이 변변치 못하였으니 어찌하랴? 모아놓았던 논밭과 업을 지키지 못했고, 육친들이 모두 그림의 떡이었다.
반평생 동안 뭔가 해보려고 애썼지만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卯 운이 되면서 壬水가 절지에 해당하니 겁재들이 더욱 날뛰어 골육에게 큰 변고가 있었고, 이후로도 가세가 급속히 기울어 재산을 탕진하게 되었다(하략)."
- 대충 이러합니다.
* 1773년생으로 간주하여 대운수를 계산했습니다.
화세가 강한 사주이므로 조후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壬癸水가 조후 용신이 될듯합니다.
임철초 선생이 쓴 글의 취지를 살펴보면, 水를 용신으로 보았고 金을 희신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壬子, 辛亥 대운에 왜 발달하지 못했을까요?
"반평생 동안 뭔가 해보려고 애썼지만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卯운 이후로도 가세가 급속히 기울어 재산을 탕진하게 되었다."라는 해설이 있는데, 결국 壬子, 辛亥 대운에서도 전혀 발하지 못했다는 얘기로 보입니다.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뭐 '쇠자충왕 왕신발(임철초 신발이 아주 컸다는 소리가 아님)'이 되어서 그렇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壬子가 쇠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壬子 대운에 대한 해설을 정작 본인이 적지 않았는데, 이점이 무척 아쉽습니다.
임철초 선생을 '억부론을 실증한 분'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만, 선생이 혹 40대 癸丑 대운에 사망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운까지 40여 년을 木火 운으로 달리고 있는 형상이라...."라는 문장을 보니
적천수천미를 40대에 집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당시에는 임자 대운을 아직 겪지 않았을 시기였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