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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화요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제1독서 : 이사 11,1-10
복 음 : 루카 10,21-24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주일학교 첫영성체 교리를 하다 보면
예비 신자 어른 교리반과 사뭇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성호경과 기도 손 하는 법, 기도문을 가르쳐 주면서 외워야 한다고 하면,
아이들은 다음날부터 기도 손을 하고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합니다.
서로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이걸 어떻게 다 외운대요? 부담돼서 세례 못 받겠네요.”라는 말부터 꺼냅니다.
첫영성체가 끝나면 아이들은 복사단이나 전례봉사를 하고 싶어 하고,
대부분 제단에서 봉사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세례받고 난 뒤 봉사를 권유하면
바빠서 못한다거나 오히려 냉담하기도 합니다.
똑같은 기도문과 하느님 말씀을 가르치는데,
아이들과 어른들이 받아들이는 모습은 많이 다릅니다. 왜 그럴까요?
복음에서 “철부지”(루카 10,21)로 옮긴 그리스 말은
‘매우 어린 아이’나 ‘유아’를 뜻합니다.
어린아이는 아직 ‘지혜’나 ‘슬기’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와 함께 있는 것을 생명처럼 여깁니다.
부모의 말을 계산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릅니다.
우리도 철부지처럼 단순하게 하느님을 따르면 어떨까요?
세상살이에서 얻는 지혜와 슬기가 하느님께 가는 발걸음을 멈추게 할 때마다,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을 먼저 선택할 용기를 내면 좋겠습니다.
하루의 일과에서 기도 시간이가장 소중한 시간이 될 때,
감추어 있던 하느님의 신비는 우리에게도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10,21)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학생 때 ‘Alter Christus’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그냥 세속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모범을 따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돈, 돈’ 하는 것이 예수님 시선일까요?
내게 잘한 사람에게만 사랑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떻게든 골탕 먹이려는 것이 예수님 시선일까요?
기도는 전혀 하지 않고 세상일에만 골몰하고 있는 것은 어떨까요?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해서 갈등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시선을 다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향해 측은하게 바라보시던 모습,
자기 적대자를 향해서도 저주보다 사랑으로 감싸안으려고 했던 모습,
나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의 시선을
나의 시선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모습으로는 세상 안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긴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우리는 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세상 안에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억울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을 이긴 예수님을 통해 우리도 주님의 뜻을 따라 살 때,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감사 기도를 바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세상 안에서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인정 속에서 자기를 돋보이려고만 노력합니다.
이들은 자기의 지혜와 슬기로움을 뽐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정작 하느님의 뜻인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는 외면했습니다.
그 결과 주님의 시선을 볼 수가 없었고, 주님을 알지 못해서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철부지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철부지들 같은 사람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즉, 세상의 관점으로 철부지 같은 사람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귀영화보다 주님 사랑을 더 강조했고 실천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이 험한 세상을 살 수 있겠어?’라면서 철부지 취급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철부지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 안에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Alter Christus)로 기쁘게 주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대림시기를 시작하면서 복음은 예수님의 기쁨과 감사를 노래합니다.
이는 우리가 대림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지내야 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기쁨과 감사를 지녀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파견한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도를 드리십니다.
이는 마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하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체 무엇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루카 20,21)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에 드리는 찬미와 감사 기도입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대림시기에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비록 그 뜻을 헤아려 알아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뜻의 선하심’에 의탁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해 드러내 주시기에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 주신다’해서,
모두가 알게 되거나 전부를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라야 알아듣고,
또한 받아들이는 만큼만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사랑하는 이라야 알아듣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23)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과 계시를 받은 복된 이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로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당신의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선하신 그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보는 눈, 들을 수 있는 귀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들어야 할 말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도 없고,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은 취향에 따라,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말을 듣게 됩니다.
같이 보거나 들어도 자기 시선으로 보고, 듣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을 낳게 마련입니다.
기왕이면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말을 꼭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의 눈과 귀가 소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들이 먼저 알아보고 듣게 된다(루카10,22)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가 이미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철부지들은 계산하지 않고 따지지 않으며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셈이 빠른 사람들은 누가 무슨 얘기를 하면 그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온갖 추측과 추정, 상상을 다 합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입니다.
그러나 철부지는 잔머리를 굴리며 셈을 할 줄 모릅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만 따로 얘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 하였다.”(루카10,23-24) 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듣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과연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또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을까요?
혹 마음은 콩밭에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만을 보고 예수님의 육성만 들었다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제자들도 자리다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확인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에는 분주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데는 인색합니다.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감실을 찾고 주님을 모실 수 있는 미사참례는 소홀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 속에 있습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볼 것을 보지 않는데, 눈이 좋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귀가 밝으면 뭐 합니까?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는데… 제발 주님께 집중합시다.
요즘 세상의 현실을 보십시오.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는데 여전히 자기주장만 하고
자기가 최고라고 고집을 피우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이들이 제발 백성을 위한다는 소리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만이라도 하느님 앞에 철부지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성령의 도움을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도종환은 ‘접시꽃 당신’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입니다.
저는 본당에 있을 때 도종환 시인을 초청해서 ‘대림 특강’을 부탁했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담쟁이, 접시꽃 당신, 흔들리며 피는 꽃’과 같이
그의 시를 통해서 신앙을 전하였습니다.
담쟁이는 느리지만 꾸준히 자라며,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목표를 이뤄냅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도 큰 시련과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는 끈기와 희망을 상징합니다.
접시꽃 당신은 암 투병 중인 아내에 대한 사랑과 애틋함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시집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며 도종환 시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은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피어나는
인간의 의지를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으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전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복권이 당첨되는 기쁨처럼 드러나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세상의 구원과 상관없는 개인의 구원만을 드러내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복권이 당첨되는 것도 아니었고, 개인의 구원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칼로 가슴을 찔리듯 한 아픔을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아름다운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날이 오면 사막에 샘이 넘쳐흐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어린아이가 사자와 늑대를 몰고 다닐 거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중풍 병자가 걷고, 눈먼 이는 눈을 뜨고,
듣지 못하는 이는 듣게 될 거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고통도, 눈물도, 슬픔도 사라질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날은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시간과 공간과 상관없는 새로운 세상이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피는 접시꽃이 없듯이,
타는 듯한 목마름을 견디지 않고 담을 올라가는 담쟁이가 없듯이
그날은 정의와 평화를 위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은 주님의 영,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그날은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날은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 속에서 다가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희생 속에서 다가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다는 겸손 속에서 다가온다고 하셨습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안회는 가난하였지만 언제나 깨달음의 경지에 있었다고 합니다.
공자는 그런 안회를 두고서 ‘가난하지만, 도를 즐길 줄 안다.’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재물이 많아도,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능력이 출중하여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욕심 때문에 더 많이 채우려고 합니다.
사람들 속에서 ‘안빈낙도, 하느님의 나라, 희망의 나라’를 찾은 시인이 있습니다.
오늘은 박노해 시인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있다. 사랑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돌아보면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제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길을 찾는 지혜를 주셨고, 기다릴 수 있는 인내를 주셨습니다.
외로울 때면 친구가 되어 주셨고, 기쁨을 함께 나눌 이웃을 주셨습니다.
생각하니 정말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저에게 희망이 되어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 길이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합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여러분이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여러분이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 우주에서 지구는 먼지보다 작습니다.
먼지보다 작은 지구에서 사람은 또 먼지보다 작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 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모으려고 하듯이 나도 이 사람들을 모으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 되게 해 주소서.’
이사야 예언자도 바로 그 사람 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바로 구원자시고,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치신다.
조욱현 토마 신부
제자들의 전도사업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신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과 업적들을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하였다.
자신의 교만과 오만에 빠져 주님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분을 배척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아드님만이 서로를 알고 계시며,
또한 예수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택하신 제자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바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적을 보기 때문에 복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룩되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7) 하신다.
하느님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스승님은 제자들을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철부지들이란 어린이들로서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따르며 실천하기 때문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그들이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얕은 지식으로 신앙을 논하며, 거부하며, 신앙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믿음에 관해 이야기도 못 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태양 앞에 등불을 켜 놓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 등불을 가지고 그냥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결국은 그 빛을 거부하는 결과를 만들고 만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밝고 경쾌하고 평화로운 기운이 퍼집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루카 10,21).
이 말씀에 머무르는데 예수님의 기쁨이 전해지는지
입꼬리가 올라가며 마음에 흥이 일어납니다.
문맥으로 보면, 파견하셨던 일흔두 제자가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기뻐하며 성과를 아뢰자,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깨닫는 데 있어서 아직 많이 미숙하고 부족한 제자들입니다.
오죽하면 "철부지"(루카 10,21)라 표현하셨겠습니까!
하지만 그만큼 주님께 철저히 의탁하는 순수한 믿음의 소유자가 철부지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23).
성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기쁨에 차,
성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일치를 이루는 이때는
신적 희열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드러난 신비적 순간입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채 그분의 기쁨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세상이 기대하는 영웅적 메시아가 아닌, 근본마저 모호한 떠돌이 가난뱅이 설교가에게서
하느님의 현존을 관상하는 은총을 받았으니까요.
제1독서는 메시아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노래합니다.
이사이의 아들 다윗이 이스라엘의 번영을 이끌었듯이,
새로운 다윗이라 할 수 있는 메시아를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햇순"(이사11,1)의 이미지로 연결 짓고 있습니다.
오실 메시아 위에는
"지혜, 슬기, 경륜, 용맹, 지식, 경외"라는 주님의 영이 머무릅니다(이사 11,2 참조).
그리고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이사 11,3)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 안의 예수님처럼 말이죠.
그가 이룰 정의와 공정, 신의와 평화의 세상은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따사롭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대목을 읽는 것만으로도 영혼에 온기가 돌고 마음이 활짝 펴질 정도지요.
누구도 누구를 해치거나 긴장시키지 않습니다. 억압도 폭력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천적이라 일컫는 존재들이
함께 뛰놀고 장난치고 뒹굴며 창조의 본성인 사랑을 회복합니다.
그날에는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 11,9).
주님을 알면 평화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툼, 경쟁, 폭력, 억압에 무능해집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체험하고 사랑하며 그분을 닮아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주님을 아는 이는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뒤쳐 질 수도 있겠네요.
세상은 "철부지"를 그다지 환영하지 않으니까요.
메시아가 오시어 구원된 세상은 결국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성공 논리가 아닌 십자가 논리가 주도하는 나라,
모두가 하느님을 닮아가느라 앞다투어 사랑하고 희생하는 나라,
그래서 약육강식의 위계가 자취를 감춘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초라한 마굿간, 구유 안에 누운 한 아기에게서 봅니다.
저 높고 화려하고 견고한 성 안에서가 아니라 가난과 약함의 현장 한가운데서 발견합니다.
이렇듯 가장 연약한 모습에서 메시아를 알아보는 눈은 행복합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보려고 했지만 보지 못한"(루카 10,24)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분은 우리 각자의 존재 속 가장 약한 부분에 오십니다.
우리 공동체 안의 가장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오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능하고 버림받은 모습으로 오십니다.
이 철부지들이 가슴 쭉 펴고 활짝 웃으며 당당히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때가
메시아의 시대이고 구원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성탄 전까지는 보통 저희 피정 센터가 살짝 비수기여서 조금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림 시기가 시작되다 보니, 특강 성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태안에서 남도 이쪽으로, 서울로, 서울에서 반대쪽 남도 쪽으로...
폐차장으로 갈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저를 아직도 불러주시니
크게 감사하며 다니고 있지만, 몸이 옛날 같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이도 다녔으니
이제 하산이나 은거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갈등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의 복음 선포자로
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리셨던 바오로 사도,
주치의로부터 몸 상태가 더 이상 기워입을 수 없는
낡은 코트 같다는 진단을 받고 나서도
죽기 살기로 뛰어다니셨던 돈보스코를 생각하면 가만있을 수가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도 큰 격려와 자극이 됩니다.
“후손들에게 신앙을 전수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은퇴는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도도 결코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당신이 만나고 체험한 그 좋으신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
교통편이라고는 목선밖에 없던 그 옛날
인도는 물론이고 말레이시아, 파푸아 뉴기니아 근처 몰루카 제도,
필리핀 근처 모로타이, 그리고 일본까지 건너오셨습니다.
그의 전도 여행길은 바오로 사도의 전도 여행길 못지않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먼 거리를 여행하셨습니다.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넘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의 숫자는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동행한 페르난데스 수사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일본 선교 여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혹독한 추위, 눈보라, 예측할 수 없는 일본인들의 태도가 아무리 극심해도
하비에르 신부님의 굳은 결심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배를 타고 이동할 때면 해적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산길을 걷다가 거친 눈보라와 살을 에는 칼바람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발은 퉁퉁 부어올랐고, 더 이상 걷지 못해 쓰러지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르고 만나지 못한 채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 그리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일분일초도 아끼지 않고 복음 선포에 매진했습니다.
인도에서 일본에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은총을 선물로 주고 난 그는
그것도 모자라 또 다른 미지의 땅인 중국으로 건너가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중국 코앞 산첸섬에서 4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의 원인은 과도한 복음 선포로 인한 열병이요 과로사였습니다.
“만일 제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저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인도까지라도.”
“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이 광대한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저와 함께 복음을 전할 뜻이 있는 분이 있다면,
결단코 저는 그분들의 노예가 되어 섬길 것을 약속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