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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베르사이유 궁전부터 루브르 야간개장까지이다.
미주쪽으로 가면 사차 때문에 새벽 6시전후면 눈이 떠지는데 유럽쪽은 8시전후가 되어야 눈이 떠진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파리 서남쪽 23km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늦으면 관광객이 많아져 줄이 길어져 입장에서부터 관람이
불편한 곳이라 아침 일찍 부터 서둘러 나선다.
서울로 치자면 분당정도 만큼 떨어진 곳에 있어 그리 먼곳은 아니고 교통편도 아주 편리하다.
RER로도 갈수 있고 유레일 패스가 있으면 매표 창구에 보여주고 공짜표를 얻어서 갈수 있다는데..
도착지가 다른 기차를 타게 될수도 있는 불편함도 있고 유레일 패스도 없고 하여 매트로와 버스로 간다.
베르사이유 궁전도 까르네 두장으로도 갈수 있는 곳이다.
먼저 매트로 9호선 종점 Pont de Servers 역까지 가서 1번 출구로 나가 171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 된다.
인터넷은 정말 대단하다. 이런 상세한 정보까지 부지런을 떨면 다 있으니까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중 하나로 불리는 베르사이유 궁전..
루이 14세를 빼놓고는 또 이해되기 힘든 궁전이다.
태양왕이라고 불리운 루이 14세때 약 20년간 건축된 궁전이다.
루이 14세는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군주의 하나다. '절대주의'는 그를 떼어 놓고 생각할수
없으며 , 막강한 권력을 쥐고 흔들면서 화려한 궁정 생활의 극치를 보여주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짐은 곧 국가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볼테르가 창작해 낸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는..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 였다고 한다.
아버지 루이 13세와 안도트리슈 왕비의 아들로 1638년에 태어났는데 무려 23년 동안이나 후사를 보지 못하다가 얻은 왕자였고 아버지인 루이 13세가 죽는 바람에 여섯살의 나이로 1643년 프랑스
왕이 되었다.
77번째 생일을 나흘 남겨두고 수명을 다했으니 70년동안이나 왕위에 있었던 왕으로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여러 방면에 미친 영향이 길고도 컸던 왕이기도 하다.
루이 14세가 1643년 왕이 된후 5년 뒤에 일어난 프롱드의 난(1648년~1653년) 으로 왕실이 파리를
탈출하여 생제르망으로 피신을 하고 5년동안 지방을 전전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었기에 루이 14세는
기필코 왕권을 강화하리라 생각했고 30년 전쟁에 이은 프롱드의 난으로 넌더리가 난 민중역시 강력한 정부를 원하게 되는 이해가 맞아 떨어지는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 덕분에 중앙집권식 왕권강화가 용이 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의 장기화로 백성들의 신망을 잃어 일어난 프롱드의 난을 당해 파리에서 피신하여 지방을 전전했던 루이14세는 그 고통이 생각나 파리로 돌아오지 않고 1682년에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고 왕궁을 아예 옮긴 것이다.
이십여년간 나라를 쥐고 흔든 재상 마자랭이 1661년 죽음으로써 루이 14세는 본격적으로 군림하기
시작했고 이에 앞서 1년전 스페인 왕실의 마리 테레즈와 혼인함으로써 강력한 스페인의 지원도 얻어
중앙집권을 강화하게 된다.
플랑드르 전쟁과 네덜란드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왕권강화에 힘을 쓰고 뿐만아니라 작가와
예술가들을 후원함으로써 고전주의 예술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꽃피우게 되는 계기가 된다.
루이 14세는 상당한 미술 애호가로 당대에 활동하고 있던 미술가들의 작품을 사들이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베르사이유 궁전도 이런 와중에 건축되었고
이런 눈이 번쩍 뜨이는 궁전을 짓고 머리가 아플만큼 복잡한 궁전의 에티켓을 만들어
궁전에 출입하는 귀족들은 몸가짐을 조심하고 계속 긴장상태에 있어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긴장감과 우아하고 교양이 넘치는 에티켓을 필요로 하는 궁전 출입과 왕과의 사교에
경쟁심도 부추기는 역활을 했던것도 바로 이 궁전의 '에티켓' (Etiquette).
바로 그 에티켓의 유래가 바로 이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부터 유래된 것이다.
하이힐의 유래 또한,,
집에 화장실이 없어 오물을 창밖으로 버리게 되면 길거리가 지저분해 그걸 밟지 않기 위해 하이힐이 발전되었다는 설...이 있어서 인지 베르사이유 궁전안에 이런 하이힐을 만들어 전시를,,,,색다르다.
또한 루이 14세의 키가 실제로 작아서 그것을 극복하는 차원으로 하이힐을 신으면서부터 라는 설도,,,,하여간 설은 설일뿐..
평민의 집과 마찬가지로 여기 베르사이유 궁전에도 건물내에는 화장실이 없으니 왕과 왕비는 휴대용
변기를 상용한다 쳐도 궁정인들과 또 매일밤 연회에 참석하여 먹고 마시고 토하고(배가 불러 더 먹기 위해) 또 먹고 마시기를 했던 대신들과 귀부인들은 일을 보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 깜깜한 숲속에
멀리 있는 화장실까지 가기가 귀찮았으니까 도중에 불일을 보니 그 냄새가 궁전에까지 퍼지는지라 말뚝에다가 "도중에서 볼일을 보지 마시오"라고 적은데서 그걸 지키면 에티켓을 아는 사람이라고 보았단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보며, 당시 사람들은 국왕에 대한 존경심과 프랑스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고 그 배후에는 왕권을 강화하고 유지하려는 강한 집념마저 엿보이는 건축물이라 할수 있겠다.
70년간 왕위에 있었고 화려한 베르사이유 궁전에서의 생활로 더할나위 없이 행복했을것 같은 왕이
루이 14세지만 실제로는 마지막 몇 년을 지병의 고통뿐 아니라 암살의 공포까지 느끼며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이런 루이 14세가 남긴 것은..
베르사이유 궁전 뿐만 아니라 루이 14세 양식이라고 불리는 미술사적 흔적, 융성했던 고전주의 문학과 초기 자본주의의 실마리와 더불어 루이 14세 시대에 프랑스 라는 국가의 틀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으니 동전도 양면이 있듯이 사람도 유명한 사람이든 평범한 사람이든 장점과 단점이 있고 잘한 일과 못한일이 있는 법 아니겠는가.
프랑스에서 루이 14세에 대한 평가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런 멋진 베르사이유 궁전을 300백년이 넘어서도 관광할수 있게 만들어준 루이 14세..
타국민인 내게는 ??? ............
그냥 베르사이유 궁전이나 관람할란다.
아래 그림이 베르사이유 궁전에 있다. 제묵은 다비드가 그린"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 다비드가 이 작업을 위해 70여명의 실존 인물들을 하나하나 데생했으며, 그들의 의상까지 일일이 스케치 했고 실제로 이 대관식에 참석까지 한후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 그림은 루브르 박물관에도 있는데 어느 것이 진품인고??????????????????????
베르사이유 궁전은..
원래 루이 13세가 지은 사냥용 별장이었으나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대정원을 착공하고 건물을 증축, 개축하여 1680년대 전체 길이가 680m에 이르는 대 궁전을 이루었다.
이때 정원쪽에 있던 주랑을 '거울의 방'이라는 호화로운 회랑으로 만들고 궁전 중앙에 있던 방이 '루이 14세의 방'인데
거울을 방은 길이 73m 에 너비 10.5m 높이 13m 인 회랑으로 거울이 17개의 아케이드를 천장 부근까지 메우고 천장은 프레스코화로 장식을 했는데 당시 거울의 제작은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산업이었는데 베네치아의 기술자들을 대거 영입, 그 비법을 전수 받아서 프랑스인의 힘으로 찬란하게 장식을 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이 거울의 방..
거울의 방은,,,,,,궁정의식을 치르거나 외국특사를 맞을때 사용되었으며 화려한 내부장식을 한 '전쟁의 방'과 ' '평화의 방'으로 이어진다.
1783년 미국독립혁명후의 조약, 1871년 독일제국의 선언,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평화조약체결이 거울의 방에서 행해지는 국제적 행사무대가 된곳이기도 하다.
먼저 매표소 옆으로 들어가면 궁전 구경을 할수 있게 되어있고 궁전 뒤에는 십자모양의 운하가 있고 100ha 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프랑스식 정원의 결작인 정원이 있다.
아래 사진은 궁전 구경을 하고 궁전 뒤로 나가면 왼쪽에 이런 호수를 낀 멋진 정원이 있고 더 넓은 정원은 궁전 정면쪽으로 쭉 이어져 어마어마 하게 넓은 크기의 정원이 있다.
운하 끝에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보고 사진을 찍으니 이런 모습이다.
정원 군데 군데에는 이런 분수도 있고 ..
정원 쪽에서 바라본 베르사이유 궁전의 모습은 이렇다.
워낙 넓어서 자전거를 타고 한시간을 넘게 외곽을 돌아보았다.
한시간에 6유로 정도 하는 자전거를 8유로 냈으니 빠르게 달린 자전거 속도로도 이 정원을 외곽으로 운하까지 도는데 한시간이 넘게 걸려서야 돌았던것 같다.
자전거에 내려서는
이탈리아식 이궁인 그랑트리아농, 프티트리아농 , 마리 앙트와네트 마을 이 세곳을 돌아본다.
궁전 뒷편에 정원만 있는 줄 알고 넓은 정원을 거닐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돌아와버린 사람들이
한국와서 이 세곳을 알지 못해 구경 못하고 와서 이쉽다며 쓴 후기를 본적이 있다. ㅎㅎㅎ
정원이 워낙 넓은 데다가 사전조사가 없으면 못보고 올수도 있는거지 뭐..
그랑트리아농은 위에서도 언급한 루이 14세와 연관이 있는..
그러니까 절대 군주였고 12명의 자녀를 둘만큼 많은 염문을 뿌렸겠지만 40대에 들어서면서 부터 치아가 거의 다빠지고 잇몸병으로 그리고 치질에 통풍까지 있어 앉으나 서나 고통속에서 살다보니 나이들어 가면서 마음에 위안을 주는 여자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좋은 관계(?)로 지낸 멩트농 부인과
바로 이 그랑 트리아농에 머무르며 시간을 보냈단다.
이 곳도 따로 입장을 하여 구경을 할수 가 있고 건물 뒤로도 멋진 정원이 있다.
그리고 마리 앙트와네트 마을.
마리 앙트와네트,,
화려한 생활의 극치속에 사치스러운 여자, 악녀, 등등으로 알려진 프랑스 혁명으로 비운의 여인으로 역사에 남은 이 여인은 사실 프랑스 혁명때 혁명군에 의해 사실과 다른 소문이 사실이길 믿고 싶었던 이야기들이라 할수 있고( 사실 유럽 최대명문 가문중의 하나인 합스부르크 가의 공주 였으니 어려서 부터 호화로운 생활을 하여 서민들의 물정은 몰랐을 것도 같지만,,,어째든)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는 사실 한해 예산의 3%를 왕가에서 쓸 수 있도록 배정이 되었지만 실제로 그 들이 왕가를 위해 쓴 돈은 그것의 10분의 1 수준 이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마리 앙트와네트는 오스트리아에서 시집을 와서 프랑스 귀족 부인들의 텃새에 많이 시달렸었나 보다.
오스트리아 촌에서 온,,,뭐 그런,, 왕따에 가까운,,
해서 많이 외로워 했었고 그런 이유 때문에 오스트리아 농가와 비슷하게 집을 지어서 놓고 이곳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 했었다고 한다.
220여년이 흘렀어도 농가로 지어 놓은 집들이 아직은 무너지지 않고 서 있다.
당시의 오스트리아 마을과 아주 흡사하게 마을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일단 벨사이유 궁전 구경을 한후 파리 시내로 돌아 온다.
첫댓글 가보고 싶네요 ㅎ
가보고 싶어 하는 순간 언젠가 가게 될겁니다. 여행의 시작은 바로 그 가보고 싶다에서 출발하는 것이니까요. 저도 오래전 잘 아는 분이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자전거를 탔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게 너무 낭만적이고 나도 언젠가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거든요. 결국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면 그게 꿈이 되는 것이고 결국 꿈을 꾸면 이루어 지더라구요.
왕실과 귀족에게 반기들고 혁명으로 뒤엎었지만 오늘날 그들이 남긴 유산을 보기위해 세계 곳곳의 수많은 사람들이 프랑스를 찾아오고 또 동경하기도 하니, 현대의 프랑스인들은 조상을 잘 못 만났다고 할까요, 잘 만났다고 할까요? ㅎㅎ.. ^^ 프랑스인들에게 한 번 물어봐야겠습니다. ㅋㅋㅋ ^^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은 루브르와 베르사이유의 두 작품 모두 진품입니다. 루브르의 것이 먼저, 베르사이유의 것이 나중에 그린 그림이래요. ^^
자전거를 타고 베르사이유 정원을 누비는 것, 너무 좋죠? 저도 그곳에 가시는 분들께 강추하곤 한답니다. ^^
프랑스 사람들은 조상을 잘만난거죠..ㅎㅎㅎ . 같은 그림이 두곳에 다 있어서 잠시 혼선이 왔었네요. 둘중하나는 모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한국와서 찾아보니 다비드가 두개를 그렸다고 하더군요.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은 자전거 없이는 돌아볼수 없는 넓이라서 정원을 둘러볼 요량이라면 한시간 정도는 자전거로 돌아보는게 기분도 상쾌해지고 아쉬우나마 구경다운 구경을 할수 있지 도보로는 절대 불가능 하겠더라구요.
궁전 뒤에 있는 세군데도 꼭 들러 보라고 하심이,,,,,,,ㅎㅎㅎ
저도 지난여행때 베르사이유궁전은 갔엇습니다. 그런데 주어진시간이 작아서 정원은 구경못햇습니다.
건물안에서 정원을 내려다 보고 온것이 모두입니다.
크기가 엄청나다는것은 들엇는데 자전거를 타고도 한시간이 넘게 걸린다니...정말로 엄청난크기이군요.
베르사이유궁전입구 철문에 금박으로 입힌게 특이하더군요.
에티켓유래에대해서 잘 들엇습니다. 나폴레옹다관식그림은 저도 루브르박물관에서도 보앗는데,,두곳도 정품이군요. 새로운사실을 알앗습니다.
그리고 비극의여인 마리앙투아네트는 얼마나 그녀의 고향 오스트리아가 사무치게 그리웟으면....
궁전안에 고향시골집을 만들엇을까요? 생각할수록 그녀가 가엾습니다.
정원을 돌았다기 보다는 그랑트리아농. 쁘띠 트리아농 왕비의 마을 앞을 지나 담을따라 운하를 한바퀴 바른 속도로 돌아오는데 그정도 걸리더군요.
엄청 넓은건 사실이더라구요.
여행기 잘 보고 있습니다. 파리 민박집에서 여행객에게 들은 얘긴데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은 둘 다 진품이라고 하네요. 그때 당시에는 똑같은 그림을 여러점 그리기도 했답니다.
아 그걸 민박집에서 알게 되셨군요. 이 그림이 워낙 유명한 그림이라서 여행가기전에 그림에 대해 알고 갔는데 베르사이유 궁전에도 있는 것이 루부르 박물관에도 걸려 있길래 당시에는 하나는 모사품일거라고 생각했었답니다.